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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19:53
순애 제1권 / 제6부 붉은 완장의 습격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2,151  


제6부 붉은 완장의 습격


1.
읍내에서 내촌으로 들어가는 신작로 위를 자전거 한 대가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뒤뚱거리면서 뒤를 자꾸 돌아보는 그는 내촌마을의 창근이었다.
드디어 그들이 여기까지 내려왔다. 서해안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까지의 삼백 키로에 달하는 3.8선에 일제히 포성이 울린 지 스무날도 채 안 되는 판이 아닌가. 중얼기리는 그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해방의 기쁨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요지경 속처럼 돌아가더니, 설마설마 하던 전쟁이 터져 버렸고, 그 전쟁이 기어이 여기까지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싸움만 하면 이길 줄 알았던 국군은 뜻밖에도 초전부터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렸다. 저들은 완벽한 전쟁준비를 해왔던 듯 기세좋게 밀려오고 있었다.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리를 듣고 긴가민가 했었다. 그때부터 사실은 불안했었다. 그래도 설마 했었다. 도대체 그 강하다는 미국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저들이 절대로 혼자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호언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분을 삭이지 못한 창근은 미처 피하지 못한 군청 직원이 가슴을 떨며 하던 말을 떠올렸다.
"삽시간에 무너져 뻐린겨. 삼팔선은 텡텡 비어 있었는가벼. 봇물이 터지믄 이 지경이 되지 않겄능가? 시상에, 대한민국의 수도가 삼 일만에 자빠져 뻔지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능겨......."
"우리 군대는 모다 어디서 자빠져 자기라도 혔능가라오?"
"말도 마러. 다 휴가중이었디야. 저들은 기가 막히게 준비하고 기다렸다는디...... 그러니 국군이 안 자빠지고 배기겄능가?"
"그려도 그렇지요......?"
창근은 기가 막히고 안타까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군대야 창설된 지가 언지여? 훈련을 지대로 받었겄어? 아니면 싸움을 해봤어? 밀리는 것도 당연허지. 오직 사기 하나로 몸을 던져 밀려드는 탱크와 맞선대는구만."
창근의 가슴은 공포로 인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촌에 도착한 창근은 마을 사람들에게 빙 둘러 싸였다. 그 중의 나이 든 누군가가 창근에게 물었다.
"어찌케 되는겨? 읍내 사정은 시방 어떤겨?"
창근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말을 꺼내지 못해 안절부절하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를 않았다.
"이 사람아, 얼른 야그 좀 혀봐!"
답답한 듯 그가 다그치자 창근이 비로소 입을 떼었다.
"그들이 벌씨 들어왔구만이라오.
군청에는 들러봤능가?"
"군청은 벌씨 그들이 들어섰고만이라오. 경찰서도 내무서로 쓰고 있다는디요. 다들 어디로 갔는지 쥐새끼 하나 안보이드라구요. 인민군만 따발총을 들고 두엇 서 있는디요. 겁이 나서 더는 못알아 보았구만이라오."
창근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다른 젊은이가 끼어들었다.
"성님, 그러믄 우린 워떡혀야 혀요? 여그도 금시 그들이 들어올 거 아녀요?"
"나도 잘 모르겄어. 오다가 봉게로 다른 동리는 별 반응이 없는 거 같여. 참말로 이상헌 것이 거그는 전쟁난 거 같지가 않단 말여."
그러자 아까의 나이든 사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머 별 일이 있겄는가? 가만히 앉어서 운수소관에 맽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겨."
그러나 창근의 얼굴은 거의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눈은 공포에 질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내촌사람들은 창근으로부터 비로소 이 전쟁에 대한 첫 번째의 공포를 실감하고 있었다. 창근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켕기는 거 있는 사람들은 얼른 피혀야 허는구만. 설마 죽이지야 않겄지만, 끌려가 고생 꽤나 안 하겄어? 얼른 피혀야 혀. 바닥 빨갱이들이 지 정신 차리기 전에 후딱 후딱 도망쳐야 헌당게."
더듬거리는 창근과는 달리 사람들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저 창근의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창근은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자꾸 허둥댔다. 그 고생할 것이라는 사람들 중에 그는 혹시 자신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이 전쟁에 대하여 묘한 신비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 속에는 앞으로 있게 될 기세좋았던 자들의 수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기대감도 충분히 들어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것은 활활 타오르는 남의 집 불구경과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몰랐다. 창근이 탄식을 했다.
"왜놈들헌티서 제우 벗어났능가 싶었는디 이게 먼 꼴여."
"......."
"남아 있으믄 십중 팔구 당헐 것이구먼. 정부가 절대로 포기허지는 않을 팅게. 다시 전세가 바꿔지믄 그때 돌아오능게 나을 거여."
창근은 서둘러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소 공산주의자들을 경멸했었다. 특히나 극렬한 빨갱이들을 혐오하고 저주하였으므로, 다치지 않을려면 간단한 짐을 꾸려 어디론가로 떠나야 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창근의 말을 들었으니 창근과 죽이 맞았던 몇 사람은 돌아가 그들도 짐을 꾸려 내촌을 떠날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을 떠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는 당장 내일의 들농사가 더 중요하였다. 아직도 그들에게 전쟁은 남의 일처럼 멀리에 있는 것인지 몰랐다. 이 판에 동네를 떠나버리면 올해 농사는 누가 마무리하고 거둘 것인가. 죽어도 차라리 내 논에서, 내 밭에서, 내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마음 편할는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또한 달아나기에는 이니 늦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서울 쪽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 작지는 않았다. 내촌에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 그들이 몇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대개는 모르는 척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다시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났으며, 또 떠나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쉽게 겉으로 들어내지는 않았다. 어쨌튼 낮에는 일하는 것이고, 밤에는 집에 들어가 자는 것이다. 그 외는 모두 운명에 맡겨야 한다. 그들에게는 지금 어딘가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마치 먼 나라에서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태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저녁 순애는 요란한 호르라기 소리에 깜짝 놀랐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문 밖이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로 무언가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순애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화영이 마루에 앉아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을 경옥이 근심스럽고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육리댁은 부엌에서 아침에 먹을 죽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호르라기 소리가 다가왔다.
"얼른얼른들 나오쇼. 서두르랑게요."
누군가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순애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고모부! 덕배 아저씨 아녀요?"
화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 같여. 쟤가 왜 저런디야?"
화영이 마루에서 일어나 고무신을 신더니 대문 쪽으로 나섰다. 그가 대문간에 이르기도 전에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사이로 창근네의 오랜 머슴 덕배가 시커먼 얼굴을 들이밀었다.
"성님! 후딱 나가셔야 되는디요?. 일 난당게요. 얼른요."
덕배는 일부러 한 쪽 팔을 대문 안으로 더욱 내밀었다. 그 한쪽 팔에 색깔도 완연한 붉은 완장이 둘러져 있었다. 빨갱이! 순애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화영이 짐짓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 덕배에게 물었다.
"어디로 나오란 말여, 이 사람아? 날 좀 봐. 자네 지금 팔에 둘르고 댕기는 거, 그건 뭣인겨?"
"아따, 그런건 어째 묻는다요? 이 담에 차차 말씀드릴 것이로구만요. 지도 어쩐 영문인지 잘 모르것시라오. 어쨌당간에 시상이 확 바뀌어 버렸구만이라오. 인잔 우리덜 시상이랑게요. 살판 안 났능교. 우선 어서 다 나가시랑게요. 한 명도 집구석에 남아 있으먼 경을 칠 팅게요. 아, 모정요. 모정으로 나가시랑게요."
덕배는 은연중에 자랑 겸 협박 겸 하여 두서없이 씨울이고는, 다시 호르라기를 입에 물고 두 팔을 당당하게 휘저으며 고샅길로 사라졌다.
모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순애는 육리댁의 손을 꼬옥 붙들고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았다. 동네 안 쪽에서는 계속 호르라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고, 고함소리도 쉬지 않고 들려왔다. 순애는 그 호르라기 소리만으로도 금방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은 다급함을 느꼈다.

그녀는 모정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인민군이 와 있을 것만 같았다. 인민군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모정 근처에는 붉은 완장을 두른 몇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대개가 순애도 알만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주욱 훑어보다가 순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창만이었다.
창만이 상기된 얼굴로 붉은 완장을 두르고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순애의 가슴이 더욱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천섭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창만의 앞에는 역시 붉은 완장을 두른 처음 보는 사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저이가 인민위원이디야. 인민군들은 읍내 경찰서에 있는디 경찰서 이름도 내무서라고 바뀌었다는구만. 앞으로도 바뀌는 게 많다는 거 같여."
누군가 작은 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그야 공산주의닝께 민주주의하고는 많이 다르겄지."
순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부서져가는 나무책상이 두엇 놓여 있었고, 완장을 두른 두어 명이 무언가를 부지런히 뒤져보고 있었다.
내촌사람들은 내심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겉으로는 태연을 애써 유지했다. 가끔은 웅성거리기도 했고, 제멋대로 앉아 있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얘기들을 나누기도 하였다.
붉은 완장 중의 하나가 인민위원이라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의논을 하더니 그 인민위원이 몸을 일으키며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지는 요 아랫 동네에 살고 있는디요. 이 중엔 지를 아는 동무도 있을 거여요. 우리들언 인자부텀은 인민공화국의 인민이구만이라오. 그려서 인자는 인민공화국의 지시를 받게 될 것인디요. 담 일은 생기는 대로 요런 자리를 통혀서 말씀을 드릴랍니다.
사람들은 일체 말이 없었다. 세상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어제까지 면직원이나 동네 일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가 일손을 놓고 달아나 버렸다. 그들 중의 한둘은 다시 돌아와 이제 그들의 지시를 받아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고도 했다.
"쪼끔도 무서워헐 것은 없구만이라오. 인자부텀은 죽을 먹는 가난도 사라질 것이고, 우리 같은 인민들의 천국이 될 것이구만이라오. 맘 푹 놓으시고 평소처럼 기셔도 될겨요."
그들은 진지한 자세로 혹여 집을 비우고 달아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손 끝 하나 까딱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마음놓고 자기 집에서 평소와 같이 생활하라는 것이었다.
덕배가 화영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성님 말조심허셔야 혀요. 재수없으먼 어떤 놈이 죽을란지 암도 모르는구만이라오. 다른 동리서 자들 욕혔다가 끌려간 사람이 있나벼요. 그 사람 안 돌아왔대요."
덕배의 말을 들으며 화영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화영은 저만치 걸어가는 덕배를 다급하게 쫓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이! 덥배, 창근이는 어찌 됐는겨? 시방 동네에 있는겨? 자네 창근이한티 함부로 허믄 못 쓰는겨!"
덕배가 돌아서며 화영을 쏘아보았다.
"지가 멀 어떠케 함부로 혀요? 창근이 성님은 벌씨 날라 버렸구만이라오. 성님도 아적 멀 이해를 못허고 있는거 같여요."
화영이 안심을 하면서 다시 은근하게 물었다.
"그려, 난 잘 모르겄어. 근디 나는 괜찮컸능가? 자넨 알잖는감. 말 조께 혀 봐. 자네허고 나 사이가 어디 보통사인겨?"
"알지라오. 지는 시상에 성님밖이 없구먼요. 허지만서도 지는 잘 모르겠구만이라오. 별 일이 있겄어요? 아직 저이들도 잘 모르능 거 같여요. 체계가 아적은 덜 잡혔거던요. 먼 일이 있으먼 지가 후딱 알려드릴 거구만요. 근디, 말이 나왔응게로 드리는 말인디요, 성님 말여요. 오늘 저녁으라도 성님이 직접 저 사람을 한번 만나보셔요. 그 사람 말이요, 성님 같은 분이 사실은 시방 여그에 필요허다고 그러던디요."
"나같은 사람이 필요혀? 내 이름을 안단 말여?"
"그려요."
"어찌튼 알겄네."
집으로 돌아와 화영은 생각에 잠겼다.
저들은 인민의 해방과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내려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목적이 해방이건 아니면 통일이건, 전쟁이란 파괴와 폐허, 그리고 공포와 죽음만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 전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누구에게든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한 쪽에는 분명히 서 있어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둘이 싸우면 둘 중의 어느 한 편에 서야 하고, 셋이 싸우면 셋 중의 어느 한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만일에 자신이 함께 하던 쪽이 밀리게 되면 그는 그 사람과 함께 죽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길이겠지만, 그것조차도 잘못하면 비협조자로 몰려 보복을 받을 소지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이제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더 가치없는 것이 될 것이었다.
또 하나 전쟁이 무서운 것은 총칼을 든 사람이 하는 짓이라 모든 일이 그의 감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총칼을 든 자에게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감정적인 충동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었다.
화영은 자신이 내촌에 들어온 후로 누구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었던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판에 자신이 붉은 완장을 두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선 당장의 위기야 넘길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허지만 이 전쟁은 아직 어느 쪽이 이길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보다 큰 불행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소지가 너무도 많았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얼굴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가능한 한 꼭꼭 숨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식구들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는 화영을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국면을 어떻게 헤쳐가야 한단 말인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면소재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동요하지 말라는 그들의 전언인 것 같았다. 곧 이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화영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장모님, 지는 잠깐 여그를 피혀야 허겄네요. 남들헌티 원수진 일이야 없지만서도 어디 그게 지 생각만으로 되는 일인가라오? 그려서 참 어려운 일이긴 허지만 지는 순애 엄니가 있는 죽동으로 갔음 좋겄는디요. 어디 마땅한 디가 있어야지요. 거그는 읍내허고는 많이 떨어진디고 숨을 곳도 많잖어요? 거그라도 감 쬐끔 머물러 있을수가 있을란지 모르겄네요. 그 뒤는 운명에 맡겨야겄지요."
육리댁도 불안한지라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만 눈앞의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잠시 피해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네가 꼭 그려야 되겄능가? 자네는 별 일이 없을 것 같은디."
"별일이 문지가 아녀요. 지가 여그 있으먼 먼 일을 만나게 될란지 그걸 잘 몰러서 그런 거여요."
"그려, 여그 보담야 거그가 낫겄지. 얼른 가보게나. 순애도 데리고 가능 게 좋을 거 같여. 자네 가고나믄 여그는 인자 사내도 없잖어."
명자가 화영의 수발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육리댁은 순애를 딸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옥이 일어나 웃목의 장롱 문을 열었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옷가지 몇 점을 꺼내어 간단한 보따리를 꾸렸다. 그리고는 대청으로 나가 몇 되는 실히 될만한 보리자루를 들고 나왔다. 혹시 모른다며 담요 한 장도 둘둘 말아 보따리 옆에 가져다 놓았다. 잠시 어수선해진 사이 순애가 화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고모부, 창만이 가가 완장을 맸던디요. 수월의 천섭이헌티 연락을 혀야 허는 것 아녀요?"
그녀의 말을 듣고 화영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미 늦은 거 같여. 거그 갈 여유가 없는디......."
"고모부......."
화영이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그려......, 내가 수월에 후딱 댕겨오마."
화영이 잽싼걸음으로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식구들은 열려진 방문을 통하여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순애는 화영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순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순애는 천섭에게 제발 별일이 없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영이 돌아오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벌씨 몸을 피혔디야. 성태허고 둘이서 엊그제 동네를 빠져 나갔다는구만."
화영의 말을 듣고서야 순애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화영은 그 길로 순애를 데리고 죽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달이 없는 저녁이라 큰길로 걸어가도 별로 드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허지만 혹시 모른다 싶어 화영은 큰길을 버리고 산길과 논두렁길을 택했다.
'삐그덩.'

두어 시간을 걸어 죽동에 도착한 화영과 순애는 명자의 집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불빛은 모두 꺼져 세상은 고요했다.
이런 때 만약 개라도 짖어대면 어쩔 것인가. 순애는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화영의 팔에 매달렸다. 화영은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올라서서는 살그머니 방문을 두드렸다. 순애가 급한 마음에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로 명자를 불렀다.
"엄니! 엄니!"
두세 번 부르자, 방 안에서 영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여?"
그는 막 잠을 청하려 했던 듯했다. 부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냥불 당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잔불이 켜졌다.
"지구만이라오. 순애랑게요. 고모부님도 기시구요."
"머여?순애?"
방문이 열리며 명자가 속옷바람으로 튀어나와 순애를 껴안았다. 영도도 따라나와 손을 잡아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방 안에서는 역시 이부자리가 단정하게 펼쳐져 있었다. 화영이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염치 불구허고 왔구만이라오. 여그는 어떤지요? 쬐끔만 머물르먼 좋겄는디요."
영도가 등잔불 밑 쯤에서 봉초담배를 말며 말을 받았다.
"잘 오셨구만요. 여그는 아직 아믄 일도 없구만이라오. 난중에야 어떨지 모르지만서도. 글안해도 야 이종사촌도 와 있고만요."
영도가 턱으로 순애를 가리켰다. 순애가 움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종 사촌이란 분명 성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섭의 이야기를 묻고 싶었지만 그러나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아마 그도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아, 그러요?"
화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마 전에 서울서 피난온 사람도 몇 있다는 소문이 있는디요, 다들 모른 척허고 있구만이라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도가 웃옷을 걸치며 일어섰다.
"지가 메가시다가 굴을 하나 맹글어 놓은 게 있구만요."
"예."
"시방 한번 가셔볼랑가요? 멋허믄 낼 아침에 가도되고요."
"기왕이믄 당장 가는게 낫겄지요."
화영은 밤이 늦어 미안한데다가 다시 자신을 위해 잠자리를 준비하는 수고가 더욱 미안하여 서둘렀다. 그들이 일어서자 순애도 덩달아 일어섰다. 영도가 순애에게 말했다.
"순애는 여그서 니 엄니하고 있그라. 맘 놓아도 될 거여."
영도는 화영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궁금하여 미칠 지경이었던 순애가 명자에게 물었다.
"엄니! 성태 오빠가 와 있다는 말여요?"
"그렇구만. 그리고 성태 친구 천세비도 와 있구먼."
"천섭 씨가요?"
"그려."
"뒷산의 저장굴에 숨어 있다는겨?"
"그려."
"혹시라도 사람들 눈에는 안 띌랑가?"
"누가 알어? 거그는 사람들이 안 댕기잖어?"
"허긴. 그려도 입구를 잘 막어놔야 헐 턴디......."
천섭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순애는 순애는 사뭇 감동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가 어떻게 이곳으로 올 생각을 했을까. 물론 성태를 따라 온 것이 틀림 없을 것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창만은 이제 당분간은 천섭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천섭이 이곳에 와 있다. 생각할수록 순애의 가슴은 자꾸 설레었다. 당분간은 그녀가 그의 옆에 있게 된 것이다. 그 외는 아무래도 좋았다. 순애는 천섭과의 숙명적인 인연을 예감했다. 죽는 날까지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 것이 아마도 운명일 것이었다.

2.
영도와 화영은 저녁 산보라도 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집 뒤안을 통해 산으로 올라갔다. 산이랄 것도 없는 이 얕은 산은 영도네의 소유인지라 영도네의 뒤안을 통해 오르내리는 작은 길이 나 있었다.
"쌈이 난 지 며칠 만에 한강다리를 끊어 뿌렸다는디요, 다리를 건느려던 사람들이 엄청 죽었다네요."
영도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글씨요 지도 듣긴 들었는디요, 소름이 끼치는구만이라오."
"높은 디 있는 놈들은 모다 대구나 부산 아니믄 일본같은 디로 도망가 뿌렸다는디, 우리 같은 불쌍헌 사람들만 남어서 이 고생이구만이라오."
영도는 앞으로 화영이 거처하게 될 저장굴의 형편이 못내 미안하여 은근히 하는 말이었다.
"사람도 최소한의 여건이 주어져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거 아녀요? 만일에 사람한티 짐승이나 동물과 같은 여건이 주어지믄 사람도 대부분은 짐승이나 동물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게 되겄지요. 따지고보믄 우리는 벌씨 일본인들헌티 사랍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고도 또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법을 터득혀 왔는지도 모르는구만요."
그러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갑자기 난리가 터져서 동물적 생활로 돌아간다 하여도 그것이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산으로 들어서서 몇 걸음 비탈을 올라서면 곧 바로 평지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숱하게 지나다녀 신작로처럼 되어버린 황톳길이 나타났다. 산을 끼고 돌면서 제대로 나 있는 신작로가 있기는 했으나, 동네사람들은 굳이 이 산을 가로질러서 들로 나갔다. 조금이라도 덜 걷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건너 이미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해 버린 두어 개의 무덤과 작은 소나무숲을 지나자 산자락의 끝에 다 부서져가는 폐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까지는 지 조카가 살았는디요, 지금은 없구만이라오."
영도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들이 폐가의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다시 산쪽의 뒤안으로 돌아들자 높이가 사람 둘 정도의 키는 족히 될법한 잘려진 산자락이 앞을 막았다. 화영은 이 집 자체가 산자락을 허물어내고 지었음을 알 것 같았다.
"여그서 살어도 먹고는 살 것인디. 굳이 서울 가서 돈 벌겄다고 떠나버렸구만요. 서울 가믄 참말로 돈은 버는 것인지, 원......"
산자락 밑에는 폐가의 담벼락까지 꽉 메운 짚단이 쌓여 있었다. 영도가 그 짚단을 들추어내자 몇 조각 이어붙인 판자로 막아 놓은 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영도가 먼저 허리를 굽혀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화영이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로 영도를 확인하며 따라들어갔다. 영도가 굴 안쪽에서 다시 판자를 세워 굴의 입구를 대충 차단했다.
이어서 칙, 하고 성냥불을 켜자, 굴 안이 밝아졌다. 영도는 그 성냥불을 이미 준비되어 있는 등잔에 옮겨 붙였다. 그리고는 굴 안의 어둠 속을 향하여 말했다.
"놀라지 말어. 날쎄, 새 손님이 오셨구만. 나와서 인사들이나 혀."
굴 안쪽 불빛의 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호롱불을 든 영도의 뒤를 따라 화영이 굴 안쪽으로 들어섰다. 굴은 상당히 길어서 십여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중간쯤부터는 새로이 굴을 다듬은 듯 아직도 작은 흙덩어리가 굴러다녔다.
굴의 여기저기에는 무언가가 담겨진 가마니와 빈 자루들이 넘어져 있었다. 굴 안쪽 어둠 속에는 두 젊은이가 두터운 옷을 입은 채로 멍석 위에 누워있다가 일어섰다.
"순애 고모부시구만......."
성태가 내촌에 자주 들르던 시점에는 화영이 내촌에 없었기 때문에 서로는 아직 낯이 설었다. 성태가 황송해 하면서 말을 받았다.
"예, 알고 있구만이라오. 자주 찾아뵙지도 못허고 이런 디서 뵙게 되어 죄송혀요. 이 친구는 즈이 동네 친군디요. 이름은 천섭이구만요. 이 친구도 내촌에 지랑 자주 들러서요, 이모님은 잘 아시는구만요. 솜리서 시방도 지랑 함께 공부를 허고 있구만이라오."
솜리는 이리를 이르는 말이었다. 성태의 말이 끝나자 화영이 천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구먼......."
"예, 그때는 참말로 죄송허구만이라오."
"내가 오늘 자네 집엘 댕겨왔네."
"예?"
"순애가 부탁혀서 자네를 볼라고 갔던겨. 내촌의 창만이란 놈이 완장을 맸거들랑. 자네가 위험헐 것 같여서......."
"고맙구만이라오."
"몸을 피혔으니 다행이네 그려."
이 친구가 바로 순애를 가끔씩 불러내는 사고뭉치구나 하고 생각하니, 화영은 인생이란 역시 묘한 인연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영은 다시 내촌의 창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그는 저들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빨갱이로 몰려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그의 형 창구는 벌써 돌아왔을 것이었다. 그들 형제는 당연히 저들에게 협조하며 바꿔진 세상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고, 그러면 천섭은 만약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죽은 목숨일 터였다. 결국 어디든 피해 있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젊은이들이 집에 남아 있어 좋을 일은 없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손에 끌려나가 우리 편과 싸우다가 우리편의 총알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영도가 화영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머, 이런 말씀 귀 담어 들으실 건 없심니다만, 안심허시라고 혀서 말씀드리는 거구만요. 명석이 처냄이 사람을 안 보내왔는가요?. 혹시 우리가 피난을 가버리거나 헐까봐서요. 그간 북쪽에 있었나 봅디다."
"아, 그랬구먼이라오."
화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조금은 더 안심이 되었다.
"상황을 봐 갖고요, 괜찮다 싶으먼 밤에는 집으서 주무실 수 있도록 헐거구만이라오.
화영은 영도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문득 먼저 떠난 처남 덕호가 떠올랐다. 덕호는 그의 처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셈인데, 자신은 덕호의 그처남 때문에 어쩌면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3.
순애는 천섭의 얼굴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장굴은 아무 때나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죽동에도 붉은 완장들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절대로 그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순애는 점차 이종인 성태보다도 천섭을 더 염려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며칠 후부터 순애는 이들에게 가끔 밥과 물을 날라다 주기로 했다. 굴 안은 시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밖과 안의 온도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굴 안은 몸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했다. 그 대신 한겨울의 굴 안은 오히려 따뜻하므로 온도의 변화에 민감한 농산물을 보관하기엔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이 굴은 영도네가 오래 전 저장고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만 파들어갈 생각이었으나 일을 하다보니 꽤 깊숙하게 파들어 갔던 것이다. 영도네 가족은 한 여름의 땀띠를 여기서 모조리 없애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그 안에서 지낸다거나 밤새 여기서 잠을 자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못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정이 지나면 가끔은 영도네로 들어왔다. 낮 동안에도 이들은 드문드문 밖으로 나가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도 할 겸 산보라도 해야만 했다.
순애는 이 낯익은 저장굴이 집보다도 사실은 더 편안하였다. 그녀가 처음 예고도 없이 굴 안으로 들어서자 성태와 천섭은 깜짝 놀랐다. 아직 화영이 순애가 죽동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순애는 준비해온 밥그릇을 바닥의 멍석 위에 내려놓았다. 천섭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순애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성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이 여그는 웬일여?"
굴 안쪽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화영이 대신 대답했다.
"나허고 함께 왔구만. 자네들 보고싶다고 안달을 혀서......."
순애가 얼굴을 붉히며 화영에게 쏘아 부쳤다.
"고모부는? 지가 언지 보고 싶다고 혔어라오?"
화영이 껄껄걸 웃으며 말했다.
"니 얼굴에 모다 쓰여 있더라. 내가 그걸 모르겄냐?"
화영이 몸을 일으켜 굴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성태가 은근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는 천섭이 그렇게도 좋은가벼."
순애가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그러나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먼 소린지 통 모르겄네. 귀신 씯나락 까먹능 소리 그만 허지 그려. 어여 밥이나 먹으시지......."
그러면서도 순애는 숟가락을 천섭에게 먼저 챙겨 주었다. 성태는 그 모양도 어이가 없어 순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섭이 그런 성태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어여 먹기나 허자. 순애 씨 얼굴에 머라도 묻어 있냐?"
"갈수록 태산이로구만. 나 참 기가 막혀서."
순애가 굴밖으로 나가 화영을 찾았다.
"고모부 진지 드셔요."
빈 토담집의 부엌문이 덜컥 열리며 화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려. 넌 먹었냐?"
"예, 아예 먹고 왔구만이라오."

순애는 조용하고 시원한 굴 안에서 천섭과 마주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혹 두 사람을 위하여 성태는 밖으로 나가 주었다. 그때쯤 화영은 주로 영도네의 외양간이 딸린 구석방에서 쉬고 있었다.
굴 안에 모처럼 둘만이 남겨지자 순애는 몇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다시 한 번 굴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처음 이 굴을 찾았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순애는 그 때의 생각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천섭이 물었다.
"머땀시 혼자 웃는 겨? 미친 사람처럼......."
"옛날이 생각나서 그렁겨. 오래된 일이여."
천섭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물었다.
"여그서 먼 일이 있었능가?"
"아녀....... 먼 일은......."
"먼 일이 있었는가만?"
"아녀. 해방이 되기 전이었구만. 응선 오빠허고 여그를 처음 들어 왔었는디. 그때 내가 먼 생각을 혔었어."
"먼 생각인디? 야그 좀 혀봐."
"별걸 다 묻네."
순애가 툭 쏘아부치자 천섭은 더욱 궁금해졌다.
"야그 안 할겨?"
천섭이 달려들며 순애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엄니야! 왜 이러는겨?"
순애가 순간적으로 몸을 움크렸으나 천섭은 손을 거두지 않고 계속 간지럼을 태웠다. 순애가 몸을 사리며 까르르 웃었다.
"가만 있어 봐. 호호..... 허면 될 거 아녀?"
천섭이 일단 손을 거두었다.
"혀봐."
"암 것도 아닌디 궁금혀서 그러네."
천섭이 재빨리 순애의 무릎에 드러누우며 순애를 올려다보았다.
"얼른 혀봐."
순애의 가슴이 뭉클하고 움직였다. 온몸의 피가 기분좋게 돌고 있었다.
"내가 첨 여그 들어왔을 때였어. 난 이런 생각을 혔구만. 여그는 아주 어랜 옛날에 말여. 어떤 신선과 선녀가 살었던 굴이었던겨. 그들은 세상의 눈을 피혀서 여그 와갖고 뜨겁게 사랑을 나누다가, 바로 여그서 같은 날 함께 하늘나라로 간 거란 말여......."
천섭이 달콤한 눈빛을 하고 듣고 있었다.
"그 신선과 선녀가 자꾸 보여......."
"참말로?"
"그려. 참말여."
"신선과 선녀가 이 굴 속에서 살었단 말여?"
"애초에는 사람이었겄지. 무지무지허게 서로를 사랑하든 한 만자와 여자.. 근디 시상이 그 두 사람의 사랑을 허락허질 않었던겨. 그려서 그 둘은 여그로 굴을 파고 숨어 들어와서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고 살다가 난중에 신선과 선녀가 되었다는 거여."
천섭이 감탄한 듯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기가 맥히게 멋들어진 생각이구먼. 그게 몽땅 순애 생각이란 말여?"
천섭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천섭의 손은 어느 사이 자연스럽게 순애의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믿을라믄 믿고, 말라믄 마시지라오."
천섭이 갑자기 순애의 목을 휘어감아 끌어당겼다.
"우리가 그 신선과 선녀 아닌가벼. 난 순애를 사랑헌단 말여."
순애의 입술이 천섭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증말?"
"그러믄? 증말이지, 증말이고 말고."
"그렇다믄 너무 슬프지 않어?"
"슬프긴."
천섭의 입술이 자꾸만 올라왔다.
"들키면 어쩔려고 이려?"
순애가 재빨리 천섭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성태를 몰라? 금방은 안 올겨."
천섭이 몸을 일으키며 순애를 껴안았다. 순애는 두 눈을 내리감은 채로 천섭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만 있어도, 그리고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어도 기쁨으로 넘쳤다. 이렇게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이 전쟁이 끝없이 계속되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이노므 전쟁은 얼만큼이나 갈랑가?"
천섭이 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때가 되먼 끝나겄지."
건성으로 묻는 천섭의 말에 순애가 한숨처럼 간단하게 내뱉았다. 천섭의 손은 순애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순애의 손은 마치 주인 앞에서의 하인처럼 천섭의 손에 복종했다. 그럴 때마다 천섭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말여, 순애 씨를 시상으서 젤로 행복한 여자로 맹글어 줄 것이구만
절대로 후회허는 일이 없도록 혀줄 것이구만."
"....."
순애는 천섭의 품에 안겨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파란 호수가 가득 담겨 있는 눈 속에 오로지 그녀 자신 하나만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못견디게 기뻤다. 순애는 그 호수 속에서 한가로운 물새처럼 노니는 자신이 행복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이 순간만은 적어도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여자일 것만 같았다.
"천섭 씨!"
"응?"
"우리...... 애들이 클 때는 이런 전쟁은 없었으먼 좋겄어."
순애는 우리 애들이라고 말할 때에 자신의 가슴이 부끄러움으로 물드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부끄러움도 곧 사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려야겄지."
천섭이 순애의 어깨를 힘있게 끌어당겼다. 순애의 가녀린 어깨가 오늘은 더욱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힘들겄지?"
"머가?"
"천섭 씨 아버님 말여요? 나같은 며느릴 용납허시겄어요? 시상에 널려뿌린 게...... 많고 많은 부잣집 처년디."
천섭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밖에서 성태의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리며 굴의 문짝이 열리고 있었다. 순애가 재빨리 천섭의 품에서 벗어났다. 곧 성태의 커다란 그림자와 함께 눈부신 햇빛이 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성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월서 사람이 왔었구만......."
"누군디?"
"......."
성태가 대꾸를 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자 천섭이 다시 물었다.
"누가 왔다 갔냐고?"
"알면 멋혀?"
천섭이 답답하여 다시 물었다.
"뭐라든?"
"별 다른 말은 없었구만, 하여튼간에 집엔 별 일이 없는 거 같여. 안부만 묻고 갔구만."
"우리집 얘긴 없디여? 창만이 아새끼가 가만 있지 않을 건디, 울 아버진 시방 어디 기신지 모르겄네."
"응. 그렇더구만. 창만이 놈아가 월촌에 다녀가긴 혔디야."
천섭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었다. 천섭은 내내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질 급한 창만은 언제부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않았는가.
아버지는 천섭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몸을 피해 버렸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천섭도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나머지 식구들은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별일은 없을 것이구만......."
천섭보다 더 어두운 얼굴을 한 성태가 천섭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말하자 천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자는 동네로 들어가봐도 괜찮을 것도 같은디......."
죽동에는 전쟁의 냄새가 별로 풍기지 않았다. 인민군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완장들도 별로 신바람이 나지 않는지 마지못해 움직이는 듯했다. 바깥은 피 튀기는 전쟁이라 하는데 오히려 죽동의 분위기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늘에는 쌕쌕이들의 굉음이 천지를 뒤엎고 있었다. 뒷산에 올라 서해바다 쪽을 바라보노라면 북쪽 이리의 어디쯤에 맹렬한 폭격이라도 있는 것인지, 희미한 폭음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이 판에 사람들의 마음이 결코 정상적일 수는 없었다. 다만 겉으로만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최대한으로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순애는 천섭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굴을 벗어났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산을 내려가다가 순간적으로 아!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산으로 올라오는 동네 초입길에 붉은 완장을 맨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한가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순애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그 자리에 돌비석처럼 서고 말았다. 혹시나 그가 굴 속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았다면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산비탈길을 천천히 올라오다가 순애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순애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그는 순애 앞에 이르러 털거덕거리는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순애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동무! 시방 먼 괴물을 쳐다보고 있는가라오? 머땀시 그러코롬 떨고 있는겨?"
"......."
"이름이 뭐랑가요? 우리 통성명이나 허십시다. 지는 제내 사는 김동태구만요."
순애는 겨우 대답을 했다.
"오...... 순애......인디요."
순애가 그래도 오들오들 떨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라 그는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다.
"무지무지하게 이뻐번지네요! 시집은 가셨능기라오?"
그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순애의 얼굴을 몇 번이나 의미있게 쳐다보더니 다시 손을 흔들며 동네 안쪽으로 내려갔다. 그의 자전거가 털털거리며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은 듯이 서 있었다.
순애는 한참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발을 떼어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은 쉬지 않고 뛰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 붉은 완장의 치켜진 눈은 결코 예삿눈이 아니었다. 순애는 스멀스멀 온몸에 돋아나는 닭살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5.
저녁 밥상을 물린 후에 사람들은 박생원 집으로 모여들었다. 박생원네 집이 마당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붉은 완장들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참 동안 저들의 로동신문을 거창한 소리로 읽어 주었다. 그것이 끝나자 노래를 준비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생소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렀고, '항쟁가'를 불렀다. '적기가'도 불렀다. '아침이여, 빛나라. 아름다운 이 강산.'으로 시작되는 저들의 국가도 불렀다.
그동안 배워왔던 가사나 곡조와는 판이하게 다른 노래들이었다. 박생원 네에 나오지 않은 몇 집에서도 이 노래가 궁금한 아이들만은 좀이 쑤신 듯 하나씩 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더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 부르는 것이 신통해 보이지 않았던지, 책임자인 듯한 자가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순애는 그가 뒷산에서 만났던 김동태임을 단번에 알아 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천천히 휘둘러 보고 있었다. 그가 순애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곧 알게 되었다. 그가 순애를 찾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거그 거, 순애동무라 했능겨? 조메 나와보실랑가요? 아주 잘 부를 것 같은디, 같이 좀 해보시겄소?"
순애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주변의 눈들이 일시에 순애에게로 쏠렸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죽동 사람들은 그녀를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어느 명령이라 거절할 것인가. 지금은 저들의 분부를 절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저들이 슬픈 이 땅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저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었다.
순애는 사과처럼 붉어져 달아오른 얼굴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치렁치렁한 주름치마가 성숙한 처녀의 냄새를 잔뜩 풍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순애는 그들이 시키는대로 그들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별로 어려운 노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부르기는 쉬운 노래였다.
한동안의 노래학습이 끝나자 사람들은 꺼져가는 모깃불 사이로 흩어져갔다. 엉거주춤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순애를 향해 김동태가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덜커덩거리는 자전거의 핸들이 잡혀 있었다.
"순애 동무, 욕보셨구만이라오. 지가 모셔다 드리지요......."
그가 자전거의 뒷자리에 올라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순애는 수줍어하며 황급히 거절했다.
"아니구만이라오. 기양 걸어가도 되는구만이라오."
"그려요. 그러믄 함께 걸어서라도 가실랑가요 잉?"
그가 눈을 찡긋 하며 자전거를 끌고 앞장을 섰다. 순애는 마지못해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지는 순애 동무가 이 동네에 사는 줄 알았고만이라오."
그는 벌써 누군가에게 순애에 대하여 물은 것이 분명하였다.
"예, 지는 집이 내촌이구만이라오."
"야그는 들었구만이라오."
"......."
"할머님허고 사신다믄서요?"
"고모도 함께 사는구만요."
"예......."
순애가 집 앞에 이르러 발을 멈추자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낼 또 보십시다요."
"......."
순애는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다가 그가 어둠 속으로 저만큼 사라지자 그의 잘 보이지 않는 뒤통수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순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갑자기 천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빼꼼히 열려진 대문 사이로 이 모양을 지켜보던 영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뭘 허는 겨?"
순애가 화들짝 놀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영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조심혀야 되는구먼."
"알았구만이라오."
순애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찬장 아래의 독 뚜껑을 열고 냉수 한 사발을 떠마셨다. 그러나 가슴은 더 이상 시원해지지가 않았다.
마당에서 가마니를 정리하던 영도가 말했다.
"미국 비향기들이 이리 역전을 쑥밭이로 맹글었디야. 만경강의 목천포 다리도 뿌셔져 뿌렸다는디."
순애가 부엌을 나서며 물었다.
"그러믄 여그도 언진가는 폭격허는 거 아녀요?"
영도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그다가 폭탄을 터뜨려서 멋헌다냐? 인민군이 죽는다냐?"
"그러믄 목천포 다리는 머땀시 뿟었대요?"
"그야 거그가 중요헌 보급로가 됭게로 그려서 뿟었겄지. 인민군 부대는 잡기가 힘들어. 그들은 낮에는 안 움직인단 말여. 밤에만 이동을 허닝께 보일 리가 없능겨. 말 들으닝께 그들은 군 보급품도 밤에만 수송헌디야. 바쁜 사람들 동원해 갖고 소달구지를 밤새도록 몰게 헌다는구만......."
순애는 영도의 말을 들으면서도 줄곧 천섭을 생각하고 있었다.

4.
비가 마치 터진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애는 다 찢어진 지우산을 바치고 뒷산의 저장굴을 찾아갔다. 간간이 세찬 바람이 돌풍을 일으키며 순애에게 금방이라도 날려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지우산은 몇 번이나 뒤집어져 부서질려다가 간신히 돌아와 제 모습을 유지했다.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들은 마치 총알처럼 달려와 길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파이는 흙들이 사방으로 난무하다가 넘치는 흙탕물에 휘쓸려 도랑으로 빠져나갔다.
영도가 말했었다.
'별일은 없을 것 같으니 느 고모부를 집으로 모시그라. 저장굴은 습기로 축축헐 것잉게 나이든 사람이 오래 머물먼 혹 병이 생길지 몰러.'
순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안에 있다가 만약 누군가가 들이닥친다면 잠시 벽장에 올라가 피해 있으면 되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었다.
그녀는 한손으로는 지우산을 힘들게 받쳐들고 한손으로는 빗물에 젖은 치마자락을 추스리면서 산비탈을 올라갔다. 비탈임에도 불구하고 발 밑은 쏟아져내리는 빗물로 철렁거리며, 물이 가득차 미끄러운 코고무신이 자꾸 벗겨졌다. 바람에 날리는 빗물이 우산 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순애가 아무 생각 없이 두번째의 무덤을 돌아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별안간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무덤 뒤쯤이었을 것이다. 시커먼 물체였다. 아니 건장한 남자였다.
"엄니야!"
순애는 기겁을 하며 우산을 팽개치고 뒤로 넘어져 버렸다. 뒤로 넘어진 그녀에게로 그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는 넘어진 순애의 붙잡아 일으키려 허리를 구부렸다. 공포에 질린 순애가 연거푸 비명을 질렀다. 잠시 엉거주춤하던 그가 순애의 어깨를 붙잡았다. 기겁을 한 순애가 앉은 채로 뒷걸음을 치며 그의 손을 후려쳐 어깨에서 떼어냈다.
잠시 서 있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가왔다. 숨이 넘어갈 지경인 순애는 다가선 그의 가슴을 세차게 밀쳐내고는 무덤을 돌아 엉금엉금 기다시피 달아났다. 빗줄기가 쉬지않고 쏟아져서 순애의 기다란 머리칼과 온몸을 적셔댔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온 바람이 간혹 그녀의 젖은 옷섶을 심하게 건드려 맨살이 드러났다.
순애는 뒤로 물러서면서 언뜻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재빨리 닦아내고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잔뜩 젖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눈까지 가렸으나 그 무표정한 얼굴은 분명 붉은 완장 김동태였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면서 순애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머땀시 이런디야요?"
순애는 계속 엉덩이로 뒷걸음을 쳤다. 기회를 보아 잽싸게 일어나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잔뜩 젖은 치마자락이 두 다리에 철썩거리며 달라붙어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들어주지를 않았다.
그가 이번에는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는 순애에게로 달려들었다. 순애는 다시 일어나려다가 역시 제 치마폭에 걸려 다시 땅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순애 동무! 나 김동태구만요."
그러나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다. 순애가 엉겹결에 대답했다.
"아는구만요. 근디 머땀시 이러는 거여요."
"놀라지 말고 앉어 봐요."
순애가 더 이상 뛰질 못하고 질겁을 하며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저고리의 옷고름을 부여잡자 그는 젖은 얼굴 가득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순애 동무! 어딜 갔다 오능 겨? 이 비가 쏟아지는디, 먼가 숭기는 거 있는 거 아녀?"
순애는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금방이라도 자지러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애는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아찔했다. 순애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묻지 않을 겅게로 우리 야그나 조메 하자고."
순애의 머리 속에 천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영과 성태의 얼굴도 떠올랐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절망적인 자책감에 순애는 온몸을 떨었다.
"먼 소리데요? 지가 숭기긴 멀 숭겨요?"
순애는 겁을 먹은 중에도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그가 정말 보았다면 이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끝까지 잡아떼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그가 무섭게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러믄, 나가 모조리 요절을 내버릴 것이구만. 나가 여그서 한두 번 기다린 줄 알어? 시방."
순애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 버렸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렁게로, 나가 눈 딱 감어 뻔지먼 먼 일이 없을 거 아녀. 나허고 야그 좀 허자고."
그가 순애에게로 다시 몇 발짝 다가서자 순애는 그대로 엉덩이를 땅바닥에 끌며 계속 뒤로 물러섰다. 그가 잽싸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 사이로 팔을 집어 넣어 끌어 안았다. 그녀는 그의 팔을 떼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이미 힘이 어디로 빠져 나갔는지 도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젖은 풀섶으로 끌고 갔다. 순애는 최대한으로 버둥거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그와 몸이 더욱 밀착되어 갔다.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그의 가슴에 강하게 부딪쳐 심한 통증을 불러왔다.
순애의 몸과 얼굴은 이미 빗물과 황토흙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김동태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빗물에 젖어 표정조차도 알아보기가 힘이 들었다. 번갯불이 사방에서 난무했다.
"우르르 쾅!"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가 순애를 끌고가 풀섶에 누이자 순애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거세게 그의 가슴팍을 발로 내지르고 일어섰다.
그러자 불시에 발길질을 당한 그가 분노하여 이를 악물더니 손바닥으로 무자비하게 순애의 얼굴을 가격했다.
"어이구메!"
순애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그녀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빗물과 함께 흘러 내렸다. 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왜 지랄이야? 가만 있으믄 처맞지도 않을 거구, 암도 모를 거 아녀? 여그는 우리덜 둘밖이 없단 말여. 나도 이러고 싶지 않어. 난 순애 씨를 참말로 좋아헌단 말여."
순애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애원하는 얼굴로 말했다.
"지발 이러지 말어요."
그가 다시 한 번 세차게 순애의 뺨을 후려갈겼다.
"헉!"
순애의 다급한 비명소리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 몇 발작도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녘으로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바람소리만 절박한 순애의 귓가에 야속하게 밀려왔다.
그는 드디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지 그녀의 머리칼을 거세게 휘어잡았다. 머리칼이 모조리 빠져나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악! 살려줘요."
순애는 걷잡을 수 없는 통증으로 의식이 가물거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두 팔을 붙잡았다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애원했다. 그러나 이미 짐승으로 변해 버린 그가 그녀를 놓아줄 리는 없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순애의 머리통을 거세게 가격하자, 순애는 이번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순애의 머리칼을 휘어잡은 그의 손이 넘어진 순애의 가슴으로 옮겨져 그녀의 저고리를 헤치기 시작했다. 순애는 무의식 중에도 그의 손을 옹골지게 쥐었다. 그의 손바닥이 거칠게 순애의 손을 뿌리치고는 순애의 뺨을 다시 세차게 후려갈겼다.
순애는 이제 고통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천섭의 맑은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은 벌써 그녀의 가슴을 마음대로 헤짚고 있었다. 그녀의 젖무덤은 차갑고 거친 그의 손에 완전히 굴복당해 버린 것이었다.
순애는 눈을 꼬옥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젖꼭지를 만지는가 싶더니 그가 얼굴을 그녀의 가슴께로 옮겨 왔다. 그의 한 손은 아직도 땅바닥에 닿아있는 순애의 머리칼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의 뺨이 순애의 헤쳐진 가슴을 거칠게 부벼댔다. 그리고 곧장 그의 입술은 순애의 젖무덤과 젖꼭지를 사정없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지발 이러지 말어요."
순애는 비몽사몽간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그녀에게 반항할 기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그의 손이 거침없이 순애의 치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깊은 맨살을 거칠게 주물러댔다.
"아! 지발, 이러지 말어요."
그는 한 손을 순애의 치마 속에 넣어둔 채로 그의 젖은 입술을 그녀의 젖가슴에서 떼어 이번에는 순애의 입술로 덮쳐 왔다. 순애의 앙다문 입술을 열어 보려고 그가 무진 애를 썼다. 순애의 머리칼을 붙잡고 있던 손이 순애의 머리를 받친 그대로 쭈욱 뻗어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벌렸다.
그의 손가락이 드디어 순애의 입술을 열고 그녀의 하얀 이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계속하여 그녀의 굳게 다물어진 이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가 아래 위로 벌어지면서 그의 입술이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순애는 그의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어 버렸다.
"악! 이년이."
김동태는 깜짝 놀라 순애의 입술에서 얼굴을 떼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다가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자 벌떡 일어나서는 순애를 무자비하게 발로 짓밟았다. 그녀의 얼굴로 가슴으로 배로 허벅지로 무수한 그의 발길질이 떨어졌다. 순애는 끝내 고통과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도오다 선생의 얼굴이 순애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말없이 다가와 순애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분노에 가득 차서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일본도가 들려 있었다. 순애는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검을 들어 금방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아악!"

차가운 빗물이 순애의 얼굴에 줄기차게 떨어졌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마치 징소리처럼 들려왔다. 언듯 정신이 드는 순애를 누군가가 꼭 끌어안았다.
"아악!"
연거푸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싼 순애가 다시 자지러졌다. 그녀를 끌어안은 그는 한 손으로 헤쳐진 순애의 저고리를 대충 바로잡아 주면서 떨어져나간 옷고름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순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큰소리로 순애를 불렀다.
"순애! 나구만, 천섭이여!"
잠시 실눈을 뜨는가 싶던 순애는 그러나 그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흠뻑 젖어 있는 천섭의 분노한 눈에 빗물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순애의 양볼에 얼굴을 대고 비명을 지르듯 울음을 터뜨렸다.
천섭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요란한 빗속에 순애를 안은 채로 그냥 흐느끼며 앉아 있었다. 그는 순애의 저고리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몸에 착 달라붙어 잘 움직이지 않는 찢어진 저고리를 천천히 매만져 제대로 고쳐볼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순애의 볼록한 젖가슴이 달라붙은 저고리 밑으로 솟아올랐다.
쉴 사이 없이 번쩍거리는 번갯불 사이로 그녀의 젖은 허리와 배꼽이 부끄러움도 없이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섭은 그녀를 강렬하게 끌어 안았다. 다시 그녀의 얼굴에 뺨을 부비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천섭은 순애의 찢어지고 흙탕물 투성이인 치마자락을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걸쳐있는 검은 치마자락 사이로 허벅지의 하얗고 소중하기 짝이 없던 살결이 드러나 있었다. 저 눈부시게 순결한 살결을....... 천섭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천섭은 눈을 돌려 쏟아지는 빗속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늦게 순애는 영도네 집에 업혀 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건넌방에서는 영도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있었다. 화영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을 어쩐대요?"
"......."
"지가 순애년을 맥없이 데려왔구만이라오."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인 영도가 다시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다 지 팔자겄지요."
화영이 웃목에 놓여 있던 통나무 재떨이를 영도 앞에 밀어 주었다. 영도가 거기에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난중에 봐야 알 것지만 지발 별일이 읎어야 헐턴디요......."
"암요. 별일이 없어야지요."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닌 거 같고......."
안방에서는 명자가 순애의 몸을 닦아 주고는 마른 옷을 입혀 주며 연방 훌쩍이고 있었다.
"시상으나! 이노무 일을 워쩐디야! 어린 것이 먼 죄가 있다고 팔자가 이렇디야....... 시상으나, 어이구 시상으나. 불쌍헌 것."
성태와 천섭은 마루에 앉아 방 안에서 들려오는 영도와 화영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명자가 간간이 울먹이며 뱉어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