ѹݵ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20:07
순애 제1권 / 제7부 슬픈 사랑의 그림자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1,929  


 제7부 슬픈 사랑의 그림자.


 1.
 아버지의 작품 『슬픈 톱니바퀴』는 이상의 세 꼭지가 지면을 통해 발표된 작품이었다. 다음부터는 원고지에 쓰여 있었다.
 명수는 누렇게 변색한 원고지 뭉치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명수가 작품을 읽는 동안 미선은 옆자리에서 등을 돌린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밀려오는 잠과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수가 작품을 읽으며 내내 흘리는 눈물을 볼 수는 없었다.
 명수는 원고를 침대맡에 놓아두고 몸을 일으켰다. 잠이 든 듯한 미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링거를 손에 받쳐들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 끝의 간이의자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무릎에는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창가에 서서 어두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눈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무지 사실 같지가 않은 슬픈 이야기였다.
 "명수야!"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이 그녀의 어깨로 올라왔다. 언제 일어났는지 미선이 다가와 있었다. 명수는 그녀의 슬리퍼 끄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명수가 들고 서 있던 링거병을 받아 들었다. 명수가 흐느끼며 돌아서서 그녀의 품에 안겼다.
 "저......."
 "왜 그러니?"
 "제가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거든요."
 미선이 거침없이 말했다.
 "난 네 고모야."
 "......."
 명수의 가슴이 녹아내렸다. 이것은 필경 꿈일 것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을 거야. 그러나 난 네 고모가 맞다."
 "전 고모가 계시다는 이야길 듣지 못했어요....... 제게는 작은 아빠 한 분밖에 계시지 않아요."
 미선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손끝에는 명수에 대한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명수는 아버지의 작품을 되새겼다. 그녀가 그 이야기 어딘가에 분명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수밖에 없지. 세상에서 오로지 몇 분만 알고 계실 테니까."
 "그분들이 누군데요?"
 "살아계신 분으로는 네 할머니와 네 외할아버지뿐이실 거야. 아니 한 분이 더 계시긴 하지. 네 할머니의 이종사촌인 이성태 할아버지가 그분이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있게 말하고 있었다. 명수가 흐느끼며 미선에게 더욱 깊이 안겼다. 의심하고 싶지가 않았다.
 "고모!"
 "그래."
 그녀의 흐느낌에 놀라 경도가 눈을 떴다. 그는 미선의 품에 안겨있는 명수의 모습을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 놀라며 그녀를 불렀다.
 "명수야!"
 미선이 대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녜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선이 한 손으로 연신 명수의 등을 토닥거렸다.
 "들어가자. 좀 춥다."
 미선은 명수를 껴안다시피한 자세로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경도가 미선의 손에서 링거병을 받아 높이 쳐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라갔다. 병실로 돌아가 침대 위에 명수를 누인 미선이 옆자리의 침대를 가리키며 경도에게 말했다.
 "불편할 테지만 여기서 눈을 좀 붙여요."
 "아닙니다. 저보다 선생님이 좀 쉬셔야죠."
 "아녜요, 난 아까 눈을 좀 붙였어요. 피곤하면 여기에 눕죠 뭐."
 그녀가 침대 밑의 보호자용 간이침대를 가리키며 말하자 명수도 경도를 향해 말했다.
 "그래요, 경도 씨. 거기 좀 누워요."
 "알았어. 좀 있다가......."
 경도가 침대 끝에 살짝 걸터앉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가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자는 사이에 좋은 일이 있었나보죠?"
 미선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가 봐요."
 "......."
 "명수도 좀 자야지? 작품은 다 읽은 거야?"
 명수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전혀 사실 같지가 않아요. 너무너무 슬퍼요. 감히 더 읽을 수가 없어요."
 "그럴 거야. 나도 그렇게 느꼈거든."
 "아빠의 작품은 정말 사실대로일까요?"
 "거의가 그럴 거야. 내가 대부분은 확인한 사실들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실에 가까워. 네 아빠는 무서운 분이셨어. 나도 처음에는 네 아빠의 의도가 무언지 몰라 애를 많이 태웠었지."
 미선의 말에 솔깃해진 명수가 다그쳐 물었다.
 "지금은 그 의도를 알고 계시나요?"
 "조금은 이해가 간다고 보아야지. 그러나 결국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을지도 몰라."
 "아빠의 작품 속에서 제가 알아내야 하는 게 뭐죠? 결국 제가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의문은 하나도 풀리지가 않았거든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렇지만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내가 네 아빠와 함께 네 할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 말이다. 할머니께선 날 보자마자 돌아앉으셨어. 그리곤 천장만을 바라보셨지. 네 아빠는 말없이 그냥 앉아만 있었고....... 한참을 그러고 앉아계시더니 돌아앉으신 채로 힘겹게 말씀하시는 거야. '야가 처녀네 동상이네, 인자 처녀를 만났으니 나는 할 일이 끝난 거고만.......' 내가 물었었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설명을 해 주셔야 하지 않는가요?' 하고 말야......."
 말을 멈추고 미선은 명수의 볼을 쓰다듬었다.
 "할머니가 설명을 해 주셨나요?"
 "해 주셨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난 후 네 할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어. 그 뒤로 나는 꽤 여러 번을 찾아갔었어. 어쨌든 내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분이셨으니까. 게다가 나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었지.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저지른 죄가 너무도 괴로웠어. 나는 네 할머니를 자주 뵙고, 말벗을 해드리고, 위로해 드려서 그 죄의 일부라도 갚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네 부모가 세상을 하직한 뒤에도 잠을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했어. 나는 결코 그 죽음을 수긍할 수가 없었어. 내 아버지의 순간적인 죄가 가져온 결과가 네 할머니에게는 너무도 슬프고 비참했었기 때문이지. 그 뒤에 나는 네 외할아버지도 여러 번 만났었다."
 명수가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결국 고모의 아버지가 김동태라는 분이시군요?"
 "그래. 슬픈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야."
 "알겠어요. 저희 아버지는 그 분의 자식이란 말이죠?"
 "일단은 그렇지. 작품을 마저 읽거라. 그 작품 속에 네가 알고 싶어하는 일들이 담겨 있을지도 몰라. 네 아버지는 이 작품 속에 무언가를 담을려고 하다가 끝내 마무리는커녕 제대로 전개도 시켜보지 못하고 떠나신 거야."
 "작품을 읽기가 겁이 나요. 더구나 할머니의 비밀을 허락도 없이 엿보는 것 같아 더욱 힘들구요."
 "그래도 읽는 게 나을 거야. 내가 일일이 네게 설명해줄 수는 없어."
 "......."
 "그런데 말이다."
 "예?"
 "내게 이상한 일이 생겼어. 가끔 꿈속에 우리 아버지가 나타나시는 거야. 난 그 분의 얼굴도 모르는데......."
 "......."
 "오늘은 그만 자자. 그리고 네가 회복이 되면 보여줄 한 가지 더 있다."
 ".......?"
 "허지만 걱정이 앞선다. 네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네 아빠의 일에 관하여 내가 도울 수가 있는데, 이처럼 허약해서야 어디 같이 알아볼 수나 있겠냐?"
 명수가 고개를 수그렸다.
 "좀 자거라. 나머지는 다음에 읽자."
 "아녜요. 오늘밤 다 읽을 거예요. 그냥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 사이 드러누워 잠이 든 경도가 코고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명수와 미선이 서로 마주보고 오랜만에 살짝 웃었다. 미선은 경도의 침대로 다가가 그의 머리 밑에 베게를 바싹 당겨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도 간이침대에 어정쩡하게 드러누웠다.
 침대에 드러누운 명수도 잠시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직도 현기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작품을 마저 읽어야 했다.
 명수가 침대 위에 엎어져 원고지를 들추려다 말고 미선에게 물었다.
 "그런데 고모, 그 일본인 말예요. 도오다 선생이란 분은 누구일까요?"
 미선이 눈을 뜨고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글쎄다. 네 아빠의 글로 미루어만 본다면 그 사람 때문에 네 외증조부께서 돌아가신 건데....... 아빠는 그 사람이 그 외에도 네 할머니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사람으로 보았던 거 같아."
 "무슨 영향을요?"
 "나도 알 수는 없지. 나도 네 할머니에게 그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시던가요?"
 "......."
 "아무 말씀도 안 하셨군요?"
 "차차 알게 되겠지."
 "고모."
 "왜?"
 "우리 아빠 어땠어요?"
 "뭐가?"
 "여자들이 보았을 때 말예요."
 "멋진 분이셨어. 소탈하고, 똑똑하고, 여자라면 한 번쯤은 안기고 싶어하는 그런 분이셨지."
 "우리 엄마도 만나보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미선이 고개를 돌렸다.
 "1976년의 가을이었을 거야. 네 아빠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

 2.
 그날, 미선은 퇴근 후에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S대학으로 돌렸다. 오늘은 성옥이 이 학교에 초대되어 대학생들과 문학토론이 있는 날이었다. 학생들이 성옥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마련된 조촐한 모임이었다.
 미선은 이 행사에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그녀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문학에 관련된 생각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장소는 S대학의 입구쯤에 있는 건물 강의실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행사가 시작된 강의실로 올라갔다. 학생들이 아직도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며 행사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입구에 이르자 벌써 성옥의 전라도 사투리가 띄엄띄엄 들려오고 있었다.
 "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문학적 능력도 형편없구만이라오. 감히 이런 자리에 서고 보니 이거 뭐가 잘못되아도 한참이나 잘못 되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는 여러분께 별로 드릴 말씀이 없으닝게로 여러분들이 제게 갖고 기신 궁금증이 있으시다믄 그거나 물으시믄 고맙겄습니다."
 학생들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선도 입구의 벽에 몸을 기대고 슬며시 웃었다. 겸손은 그의 천성임이 분명하였다. 누군가가 묻고 있었다.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보면 언젠가는 참여문학 쪽으로 기울 듯한 인상이 짙습니다.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글씨요. 지야 뭐, 독자들이 읽어주먼 그게 고마운 건디요. 물론 평가는 독자들이나 평론허시는 분들이 허시겠지만서도....... 지 생각은 오늘날 참여문학의 사회와 민족에 대한 기여도는 아주 지대하다는 생각을 허고는 있구만이라오. 허지만 시방 지는 소설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정도의 그릇은 아니구만이라오. 옳은 표현인 지는 잘 모르겄지만 지는 이렇게 생각헙니다.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인간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겄습니까? 그리고 또하나 재미가 있어야 허겄지요. 지는 문학이란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다양허게 변허긴 허지만 오늘날의 문학이 현학적이거나 오로지 계몽적인 방향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크게 잘못 된 건 없다고 생각헙니다."
 아까의 질문자가 다시 묻고 있었다.
 "만일 문학이 오늘날의 척박한 현실을 외면하고 끝까지 순수만 고집한다면 어찌 될까요? 당연히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수도 있겠지요.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의무도 갖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독자를 이끌어 갈 때는 조건이 있겄지요. 작가의 정신이 독자보다 분명히 한 수 위여야 헌다는 조건 말입니다. 허지만 다 그런 건 아니잖어요? 특히 지 경우는 명백헐 거구만요."
 이번에는 미처 웃음을 지우지 못한 다른 학생이 묻고 있었다. 발언 속에 웃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선생님!"
 성옥이 황급히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지는 선생님이 아니구만이라오. 여러분허고 동년배구만요 아까부터 자꼬 선상님 선상님 허시는디 너무 황송허구만이라오."
 까르르 하고 또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 무어라 불러 드려야 할까요?"
 "적당히 생각 되는대로 불러 줘요."
 질문자가 잠깐 난처해 하며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시다면 저는 선배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선생님보다야 훨씬 좋구만이라오."
 "좋습니다. 선배님! 선배님께서는 아까 말씀하신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문학이 이 땅과 이 땅의 백성을 위하여 적어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라도 말입니다."
 성옥이 잠시 머뭇거렸다.
 "글씨요. 이 자리가 참말로 어려운 자리네요. 지는 단순히 소설을 쓴 것인디......."
 "소설을 쓸 때에는 소설을 써야만 하는 남다른 의식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게 말여요. 솔직히 말씀드리먼 없었구만이라오. 지는 단지 쓰고 싶다는 것 외에는 충분히 생각을 못 혀봤다는 말씀여요. 어쩌면 말여요. 지는 지가 말하고 싶어했던 야그를 글로 표현한 것뿐인지도 모르겠구만요. 어렵게 생각헌 적은 없었응게로요."
 미선은 벽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은 젊은 대학생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문학은 말씀대로 인간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는 점은 이해를 하겠습니다. 허지만 인간의 문제라는 게 말입니다. 어떤 방법이 보다 더 그 문제에 확실하게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냐 하는 점은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제 소견으로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현실문제나 사실적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은 보편화된 상식에 속하는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순수라는 껍데기로 위장을 하여 도식화된 문학작품을 양산하는 작가들이 이 땅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합리화일 수도 있고, 탄압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옳으신 말씀이긴 혀요. 허지만 우선은 말여요. 문학이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말씀허시믄, 지가 지 생각을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구만이라오. 정의 자체에 대하여 좀더 너그러워지셨으먼 싶구만요."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연재를 시작하신 {슬픈 톱니바퀴}라는 작품에 관하여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 말씀허시지요."
 미선은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아직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갈등을 벌이며 계단을 한발한발 내려서다가 문득 탄성을 질렀다. 계단을 힘들게 올라오는 어디서 본 듯한 임산부의 애띤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분명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정림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색이 좋지 않은데다가 배까지 불러 있었으므로 그녀가 정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정림도 무의식 중에 얼굴을 들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과 마주치며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미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혹시....."
 그녀의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눈가에 가득 늘어버린 기미가 미선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미선은 황급히 내려가 정림의 힘겨운 어깨를 부축해 계단 위로 올라섰다. 정림이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니! 못 알아볼 뻔했어요?"
 "나도 그랬어."
 "성옥 씨 잘하고 있어요?"
 미선이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래, 아주 잘 하고 있어."
 "난 불안했어. 그 촌티가 폴폴 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하고 말예요."
 "걱정도 팔자네. 성옥 씨가 어디가 그렇게 맹해 보였어?"
 "그런 건 아니고......."
 미선은 강의실 입구에 놓여 있는 빈 나무의자에 그녀를 앉혔다. 방금까지 누군가 앉아 있던 의자였는데 정림을 위하여 비워준 것이었다.
 미선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조화야? 몇 달 된 거야?"
 "얼마 안 남았어요, 언니. 힘들어 죽겠어요."
 정림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다. 미선이 약간 흐트러진 정림의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져 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미선의 손에 묻어났다.
 "언니!"
 정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성옥 씨를 좀 단단히 붙들어 줘요. 흔들리나 봐요."
 "흔들리다니?"
 "잘은 모르겠어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선이 정림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정림이 물었다.
 "오래 걸릴까요?"
 "글세,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는데......."
 "그럼 다시 내려가요. 성옥 씨하고는 저 아래 다방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내가 괜시리 올라와 본 거예요. 내려가서 언니한테 하고싶은 이야기도 있고."
 "그래, 그럼 일어서지."
 미선이 정림의 팔을 끼며 부축했다.
 "괜찮아요 언니, 걸을 수는 있어요."

 다방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차를 주문한 후에 편안하게 마주 앉았다. 정림의 얼굴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들며 미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하였다. 미선은 속으로 보통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인데? 말해 봐......."
 "언니!"
 "그래."
 정림의 눈에서 급기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내렸다. 미선이 손수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울지 말고 이야기 좀 해봐."
 "우리 지금 함께 살고 있어요......."
 "성옥 씨하고?"
 "응."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
 "그런데 우리 아빠가 기를 쓰고 찾으시나 봐요. 포기를 안 하세요."
 "왜? 아버님이 끝내 허락을 안 하신 거야?"
 "당신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안 된대요."
 "집을 나온 지는 얼마나 됐어?"
 "꽤 됐어. 배가 불러오니까. 집에는 있을 수가 없잖아요."
 미선의 코끝도 찡해져 왔다. 그들은 식구들로부터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지 그래. 집에 들어가야 편안하게 애를 낳을 수가 있잖아? 아버님은 차후에 설득을 시켜야지."
 "그럴 수가 없어요. 언니는 잘 몰라."
 "무얼?"
 "우리 아빠 지금도 몸이 불편해요, 만약 네 이런 꼴을 보면 아마 금방 숨이 넘어가실 거야. 절대로 용납하실 분이 아니셔."
 "설마......."
 "설마가 아니예요. 아빠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데 목숨을 거셨어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모르겠어요. 성옥 씨 어머님하고 우리 아빠하고의 옛날 관계를 우리는 잘 모르거든요. 도무지 더는 말씀을 안 해주신단 말예요. 허지만 우리 아빠하고는 달리 성옥 씨 어머님께서는 우리를 용남하셨거든요. 그렇다면 두 분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
 정림은 윤 교수가 자신들 때문에 쓰러지신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아버님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신 걸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기다려보지 그래."
 "언니, 미안해. 오늘은 내가 이상해졌어요. 언니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쏟아지니 이상한 거잖아요? 이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언니를 한 번은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 잘된 일이네. 나도 이상하게 여기에 오고 싶었거든."
 정림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피식 하고 웃었다.
 미선은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정림이네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부잣집이었다. 미선은 윤 교수가 일찍이 시골의 땅을 팔아 서울의 부동산에 투자해 두는 지혜를 발휘한 결과로 오늘날 부의 행운을 부여잡았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그런 집에 태어난 행운을 갖고 있던 정림을 미선은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행길은 차마 눈뜨고는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뜨거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모든 것을 버린단 말인가. 문득 미선은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녀 자신도 정림처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을까. 자신이 있었다.
 미선이 몸을 일으켜 정림의 얼굴에 젖은 눈물 자욱을 닦아 주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면 무얼 먹고 사는 거야?"
 "사는 게 뭐야? 언니, 굶는 날이 더 많아요."
 정림의 눈에서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미선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홀몸도 아니질 않는가. 미선은 괜시리 성옥이 얄미워졌다.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그가 너무 쉽사리 저질러 버린 것만 같아 속에서 부아가 끓어 올랐다.
 "성옥 씨가 아르바이트를 좀 하고. 얼마 전까지는 내가 약국에 취직을  했었어요. 원고료래야 별것도 아니구......."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정림은 윤 교수가 차려준 멋진 약국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집을 나오면서 그 약국은 자연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
 "걱정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살아갈 자신은 있어요. 하지만 아빠 문제만은 어떡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아빠를 만나야 할 거 아냐?"
 "그러겠지요. 그렇지만 그날이 언제가 될 지 아득하기만 해요......."
 "그러게 아이는 왜 .... 좀 조심하지......."
 "방법이 없잖아요 ? 언니, 우린 서로 사랑해. 적어도 나는 성옥 씨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미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든 반대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방법으로는 역시 아이를 갖는 것이 가장 빨랐다. 그러면 그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이를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림은 이런 행동은 부모를 향한 저돌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정림은 그녀 자신도 흔들릴 때가 있었던 것이다.
 윤 교수는 아직 그녀가 아이를 갖은 사실은 모른다고 했다. 윤 교수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정림은 울먹이며 말했다.
 "난 아빠가 무서워요. 예전엔 그렇지 않았거든요."
 "힘을 내. "
 "고마워, 언니."
 정림은 볼록한 배가 불편했던지 간간이 몸을 추스르곤 했다.
 "누님이 여그는 웬일이데여?"
 성옥의 굵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미선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정림과는 대조적으로 밝은 얼굴이었다. 미선은 그러는 그가 딱하다 싶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성옥은 성큼성큼 다가와 정림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들이란......."
 "머땀시 또 시비시래여?"
 "동생께서는 기분이 퍽도 좋으시겠네요. 내일 모레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나올지, 아니면 양귀비 같은 딸이 나올지, 가슴이 퍽도 두근거리시겠어....... 사람 상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으니."
 듣고 있던 정림이 미선을 말렸다.
 "언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옥 씨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잘못이야 없겠지. 도둑질을 해서 탈이지."
 성옥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려. 나야 머, 누님 말대로 도둑놈이여. 남의 귀헌 딸을 훔쳐다가 이 고생을 시키고 있으닝께 난 사람도 아니구만."
 "정신 좀 차리시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아이는 둘째 치더라도 정림 씨가 견디질 못하지 않겠어?"
 그가 말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자리에 합석한 후부터 정림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웃으며 성옥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있었다.
 미선이 다시 물었다.
 "어쩔려고 그래요? 윤 교수님이 찾고 계시다면서. 정림 씨를 저 상태로 놓아두면 안 되잖아?"
 "......."
 얼마 후, 미선은 성옥으로부터 정림이 딸을 출산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누님, 나도 오늘부텀은 아빠구먼....... 정림 씨가 딸을 낳았어요."
 "축하해."
 미선은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다. 정림에게는 병원비를 댈 사람도 수발할 사람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미선의 이야기가 끝나자 명수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 아이가 바로 저군요."
 "그래......."
 "맞아요. 전 가을에 태어났어요."
 "초겨울쯤이었어. 꽤 쌀쌀했지."
 "아빠가 자꾸 그려져요. 검고 작은 얼굴....... 짙은 눈썹, 그리고 넓은 이마......."
 미선이 웃으며 물었다.
 "엄마는?"
 "엄마두요. 우리 엄마는 아주 예뻤을 거예요. 그렇죠?"
 "그럼, 대단한 미인이었어. 난 비교조차도 안 되었거든."
 명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모도 참 예뻐요."
 "그러니?"
 "예."
 "고맙다."
 깊은 밤의 고요가 두 사람을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명수는 다시금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신은 자신에게서 비록 부모를 앗아가긴 했지만, 오늘 그녀에게 고모라는 대단한 선물을 보내 주었지 않는가.
 "명수야."
 "예."
 "그만 자자."
 미선의 말소리가 끝내 사라지고 있었다. 명수는 몸을 조금 일으켜 미선의 잠든 얼굴을 쳐다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명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원고지를 펼쳤다. 퇴색한 원고지에는 가끔 알아볼 수가 없는 글자도 더러 섞여 있었다. 여러 차례의 퇴고가 있었던 듯 난잡한 원고지도 있어 물이 흐르듯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명수는 수정한 글자 한자 한자까지도 정성스럽게 찾아 읽어 내려갔다. 글자 한자 한자마다에 아버지의 혼이 배여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활자화된 작품보다 이 육필 원고가 한결 더 그녀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