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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21:09
순애 제2권 / 제9부 슬픈 끛가마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2,012  


 제9부 슬픈 꽃가마


 1.
 아버지가 저들에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얼마 뒤, 천섭은 마침내 견디기 힘든 수월을 떠나왔다. 그는 떠나기 전 어머니와 두 동생들, 그리고 농사에 관한 모든 것을 숙부와 사촌에게 부탁해 두었다. 실성하여 드러누워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섭은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는 이제 기력마저 쇠진하여 몸을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는 물론 대소변조차도 혼자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천주와 천영의 몫으로 남겨두고 떠나자니 이것 차마 못할 짓이었다.
 천섭은 자신이 참전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만 천섭이 고통을 못이겨 잠시 수월을 따나 있자는 뜻으로 쉽게 받아들였다. 성태에게도 직접 만나지 않고 한 통의 편지로 이별을 대신하였다.
 순애가 문제였다. 불쌍한 순애는 어떡할 것인가. 그녀는 그가 전선으로 떠난 것을 알면 아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살아 돌아오는 날까지 기도로 세월을 보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성태에게도 이 점을 특별히 부탁해 두었다.

 서너 달을 살아 버티기 어려운 전쟁터였다. 만약 그 이상 살아있을 수가 있다면 그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영웅이었다. 천섭이 참여한 부대는 적의 통로로 예상되는 길목의 능선에 병력을 배치하고 그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적당한 거리에 다가서자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아군의 공격을 짐작하고 있었던지 그들은 신속하게 전투자세로 돌입했다. 쌍방간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처참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섭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참호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은 바로 서너 발자욱 앞까지 다가서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젠 죽었구나.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분대장이 천섭의 참호로 뛰어들어 왔다. 아무래도 못믿겼던 것이다.
 그가 수류탄을 집어들었다.
 "쳐다보지 말고 마구 던져!"
 아비규환의 비명 속에서도 적은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다. 천섭이 정신없이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데 뒤쪽에서 시커먼 물체가 덮쳐왔다. 적이었다. 소름끼치는 총검이 참호 안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천섭의 총검이 그보다 먼저 적병의 가슴을 향했다. 천섭은 다음 순간 하마터면 총을 놓아 버릴 뻔했다. 비명과 함께 총검에 찔린 적의 몸체가 감전이라도 된 듯 요동을 쳤던 것이다.
 천섭은 총을 굳게 움켜잡아 거세게 잡아뺐다. 숨이 끊어진 적의 몸이 참호 속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비로소 천섭의 총이 자유로워졌다. 또 다른 적이 뛰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분대장의 총알이 먼저 적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가 고함을 쳤다.
 "계속 집어던져!"
 천섭이 다시 수류탄을 참호 밖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전투는 비교적 짧게 끝났다. 적은 아군의 공격에 밀려 쉽게 되각했다. 분대장이 참호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밖을 살피고 있었다.
 날이 밝아왔다. 보고를 하고 돌아온 분대장은 이번 전투에서도 적지않은 중대원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피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했다. 분대장이 천섭을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넌 대단한 놈야."
 천섭은 기가 질려 멍청한 얼굴로 분대장을 바라보았다.
 천섭은 그날 밤 매복작전에 따라나섰다. 분대 단위의 매복이었다. 천섭이 두 번째의 전투에 참가하는 셈이었다. 분대원들은 초저녁에 잠복지에 도착하여 개인호를 파두었다. 그리고 나서 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분대장이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넌 사회에서 무얼 했냐?"
 "...... 학생이구만이라오......."
 "지원한 거야?"
 "예."
 "죽을 곳에 뭐하러 지원을 해?"
 "......."
 "다른 신병들은 겁없이 몸을 일으키고 총을 쏘아대서 일을 망치는데....... 넌 참 잘했어. 허지만 목수믄 하나다. 조심하라고."
 "고맙구만이라오."
 캄캄한 숲속의 어둠은 아무것도 보여 주질 않았다. 그럭저럭 몇 시간이 흘러갔다.
 "분대장님!"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아주 작은 소리로 분대장을 불렀다. 분대장이 그 쪽을 바라보았다.
 "나타났어요."
 분대장이 철모를 만지작거리며 전방을 살폈다. 그가 손바닥을 편 채로 팔을 뻗어 잠깐 기다리라는 시늉을 했다. 어둠 속에 적의 모습이 언뜻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거듭했다.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천섭은 참호 속에 깊숙이 몸을 숨기고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는 적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뛰기 시작하였다. 그 가슴의 심장소리는 총소리보다 오히려 커보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였다. 내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볼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와 순애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모두가 심장이 터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숲을 벗어나 능선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일개 분대 정도의 숫자는 되어보였다. 그들은 두리번거리며 매복호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필시 적의 정찰병일 것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명령상 적을 발견하면 싸워야 했다. 뒷일은 중대에서 알아서 할 것이었다. 분대장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맨 앞의 지휘자는 내가 맞춘다. 순서대로 하나씩 정조준해야 해. 절대로 호 밖으로 뛰쳐나가면 안 된다."
 천섭이 심호흡을 하며 두 번째의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적은 바로 앞에 죽음의 사자들이 자신들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드디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소대장의 총이 불을 뿜었다. 동시에 분대원들의 개인화기가 적을 향하여 한꺼번에 발사되었다. 깜짝 놀란 적들은 반 정도가 고꾸라지고 나머지는 반사적으로 엎드리거나 숲으로 몸을 숨겼다. 분대장은 사격하면서 계속 고함을 쳤다.
 "쏘아! 쏘앗!"
 수류탄 두어 발이 적들을 향하여 던져졌다. 적은 전혀 응사하지 못한 채 널브러졌다. 적의 저항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분대장이 사격중지를 명령했다.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호 속에서 움직이지 마라. 전방을 살펴서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쏘아버려!"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적은 불시의 매복에 걸려 한 명도 살아남지를 못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 사살되지 않은 적이 어디선가 숨어서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개는 놀라서 죽어라 줄행랑을 쳐버리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분대장이 작은 소리로 점호를 취했다. 이상이 없었다. 천섭은 두 번째의 전투에서도 살아 남은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다른 소대의 첨병 둘이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밤사이 그는 그의 참호 속에서 분명 졸았을 것이었다. 이제 흥분한 그 소대의 누군가는 오늘밤 복수의 칼을 들고 적의 첨병을 찾아 온 골짜기를 해맬 것이다.

 천섭의 부대는 후방이 무너진 인민군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그들은 그 사이에도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나는 인민군을 발견하고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밤새도록 전투가 이어질 때도 있었다. 총알도 다 떨어져버리고 던질 수류탄도 다 떨어져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총알이 있다 해도 쏠 수도 없었다. 손가락이 부어올라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과 들에는 버려진 시체로 즐비하였고, 그것이 썩어가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천섭은 차츰 살아남는다는 일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천섭의 부대는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2.
 청천강 상류부근인 운산의 북쪽이었다. 천섭은 부대원들과 함께 북을 향하여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앞서 전진한 부대는 압록강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제 머지 않아 오히려 남쪽이 북쪽을 장악하여 통일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가능성 때문에 천섭을 비롯한 부대원들은 야릇한 희열 같은 것에 들떠 있었다.
 코르세어기를 이용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우수한 화력을 거칠 것 없이 퍼부었다. 그 덕분에 병력은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북진하는 동안 벌어졌던 극렬한 전투에서 탈락한 병사들이 산 속에 흩어져 있다가 전진하는 대열 속에 속속 합류했다. 주먹밥을 구하지 못한 그들은 건빵과 물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11월의 추위가 밤새 병사들을 괴롭혔다. 갈수록 더욱 매서워지는 추위는 칠흙같은 어둠과 함께 병사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천섭의 부대가 잠시 전진을 멈추고 대오를 정돈하고 있는 참이었다.
 뜻밖에도 후퇴명령이 하달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병사들을 모아놓고 중대장이 말했다.
 "중공군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자칫하면 그들의 포위망에 걸려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 일단은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중단하고 후퇴를 한다."
 유엔군은 분명 중공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이전까지 중공군의 개입만은 없어주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측은 그들의 주요시설인 수풍수력발전소만은 건드리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토 가까이 다가서는 작전만은 피하고 있었다. 그러면 중공군은 절대로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어리석게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길은 벌써 얼어붙어 있었다. 아침에 날린 눈발이 햇빛에 녹아 흙탕길이 되더니, 어느 사이 얼어붙어 빙판길이 되었던 것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남하하는 긴 병사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비록 다급한 후퇴가 아니라 하더라도 후퇴라는 것은 분명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치고 올라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미끄러지는 차량으로 퇴로가 차단당할 것을 염려하여 부상자 수송용을 제외한 모든 차량을 행군대열의 맨 뒤에 배치하고 있었다. 차량은 일제 화물차였는데 바퀴가 여섯 개밖에 되지 않아 빙판길을 견디지 못하였다. 병사들은 가끔 중얼거렸다.
 "지엠시는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이야?"
 지엠시는 바퀴가 열 개였다. 병사들에게 서서히 새로운 공포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 공포의 대상은 언제 모습을 나타낼지 모르는 중공군이었다. 그러나 아군이 후퇴를 결정한 그 시간에 이미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벌써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압록강까지의 전진만을 계속하던 미군은 일찌감치 내려와 산 속에 숨어있던 중공군을 발견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중공군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능선을 따라 후퇴하던 천섭의 부대에 느닷없는 총탄세례가 퍼부어졌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하여 피리소리와 호르라기 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드디어 중공군이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힌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인민군의 모습은 절대로 아니었다. 누군가가 기겁을 하며 중공군이라고 소리쳤다. 천섭의 부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군들도 곳곳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혀 극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사방에서 총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쏟아졌다.
 놀란 천섭이 긴장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비옷을 입은 중공군들이 개미새끼처럼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숫자였다. 저들은 분명 아군이 소지한 탄알의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을 것만 같았다.
 질겁하여 달아나는 부대원들의 뒤를 따라 천섭도 산을 벗어나 논둑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바짝 달려들어 달아나는 아군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달리다가 총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전우가 보였다. 허지만 천섭은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만약 생명이 붙어 있다면 저들의 포로가 될 것이었다.
 저들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인민군은 국군을 사로잡으면 처참하게 살육한다고 했다. 하사관이나 장교는 더욱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당한다고 말했다. 천섭은 학도병이었으므로 군번도 계급도 없는 군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도 계급장은 이미 제대로 붙어있지가 않았다. 동족 사이에도 그러하건대 중공군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다행스럽게도 미군의 전투기가 나타나 중공군을 위협하며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의 공격이 약간 느슨해졌다. 천섭은 그 사이 논을 가로질러 건너편의 낮은 야산으로 숨어들어갔다.
 부대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작열하는 섬광들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천섭은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남쪽으로 길을 잡아야 운산읍이 나타날 것이었다.
 천섭은 일단 산의 정상 부근으로 올라서기 위해 소나무 숲속으로 발을 옮겼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고요한 숲속이 오히려 더욱 공포스러웠다.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적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잔뜩 긴장한 채로 낮은 산자락을 올라갔다. 길도 없는 숲을 헤치며 한참을 걸어 정상이라 여겨지는 곳에 올라섰다. 몸을 낮추고 남쪽을 내려다보니 반갑게도 운산읍의 불빛이 깜빡거리며 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극렬한 전투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로 들어간 듯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중공군은 계속 밀려올 것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이 산을 빠져나가 운산읍의 아군과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에 운산읍조차도 적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렇다면 어떡할 것인가. 천섭은 입술을 깨물면서 죽음을 각오했다.
 천섭이 정신없이 야산을 벗어나 다시 논두렁길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날렵하게 엎드렸다. 논두렁 옆으로 바짝 엎드린 천섭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분명 가냘픈 여자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동시에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말이 들려왔다. 미군이구나. 반가운 생각도 들어 천섭은 일어나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다시 야산으로 조금 들어서서 서쪽으로 길을 잡으니 눈앞에 다 무너져가는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소리는 그 집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불 꺼진 너와집이었다. 천섭은 다시 긴장하며 엎드렸다.
 "살려주시라요!"
 여자의 공포에 질려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분명 미국말이었다. 천섭은 몸을 일으켜 발소리를 죽이며 초가집의 뒤란으로 돌아들어 갔다. 그리고는 조그만 뒷문 곁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의 손에는 언제든 발사할 수 있도록 이미 장전이 된 총이 들려 있었다.
 미군병사가 그녀에게 심한 폭행을 가하는 듯 둔탁한 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앞쪽의 방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천섭은 몸을 돌려 토담벽에 바짝 붙은 채로 마당 쪽으로 돌아나갔다.
 시커먼 얼굴의 흑인병사가 흐느끼는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녀를 마당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광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서지 못하고 거의 앉은 채로 끌려 나왔다. 그녀는 아마도 폭행을 당해서인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흑인병사는 그녀를 가볍게 끌고 좁은 마당을 지나 숲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집 안은 언제 공격받을지 몰라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흑인병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바지를 벗어 버리고는 아직도 흐느끼는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치마를 거칠게 벗겨냈다. 누런 빛깔의 속옷이 들어났다. 그것마저도 그는 순식간에 벗기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저고리를 찢을 듯이 제껴버렸다.
 천섭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중공군은 바로 뒤에서 다가서고 있는데 이 판에 여자를 탐할 수가 있다니. 천섭은 소름이 끼쳤다.
 문득 천섭의 머리에는 죽동에서의 일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순애에게 덤벼들던 붉은 완장, 이글거리는 분노가 천섭의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랐다.
 '죽일 놈!'
 천섭은 귀를 기울여 주변을 살폈다. 아직 적은 여기까지 다가서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엎드린 채로 총을 들어 흑인병사를 겨냥했다. 그러나 쏠 수는 없었다. 총소리를 듣고 몰려올 적이 두려웠다. 여자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신음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
 흑인병사는 그녀를 땅바닥에 누이고 금방 그녀 속에 들어가는 듯 거칠게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신음소리보다도 흑인병사의 야릇한 콧소리가 더욱 천섭의 귀를 자극했다.
 어쨌든 방아쇠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엎어져 있는 그인지라 조준하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여자가 총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흑인병사가 일을 끝낸 듯 몸을 일으키며 바지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겁을 한 천섭이 자신의 총구를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적이었다. 맞은 편 숲 속에서 누비옷을 걸친 중공군 두 명이 따발총을 들고 걸어나와 쓰러진 흑인병사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흑인병사를 발로 투욱 건드려 보더니 부시시 흐느끼며 일어나는 여자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러다가 저희끼리 무슨 말인가를 주고 받더니 그 중의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총을 건네받아 들고는 몇 발자욱 옮겨가 주변을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었다. 한 명은 다시 그녀를 땅바닥에 거칠게 누이고는 그녀 위로 덮쳐들어 갔다.
 여자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총소리가 들렸음에도 아직 더 이상의 중공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섭은 다부지게 총대를 쥐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저들을 사살해야만 자신이 살 수가 있었다.
 소리없이 빠져나가 노출된 논두렁을 달려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먼저 경계자세를 취한 자의 심장에 총구를 겨냥했다.
 "타앙!"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그가 맥없이 쓰러졌다. 천섭은 벌떡 일어나 총을 나머지 한 명에게로 겨냥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손들엇!"
 우리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을 터이지만 그는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그는 겨우 여자의 몸에서 일어나 바지를 추스를 여유도 없이 무릎을 꿇고는 손을 바짝 들어 올렸다.
 여자도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치마를 주워 입고 저고리를 단속했다. 천섭은 우선 넘어진 자의 손에서 총을 거두어 멀리 던져버리고는 무릎 꿇은 자에게로 성큼 다가가 그의 이마에 총을 들이댔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이 천섭을 향하여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그가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기겁을 한 여자가 몸을 뒤로 움직였다. 천섭은 잠간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열다섯도 안 되었을 법한 앳된 얼굴이었다.
 "난 가야 혀. 당신은 당신이 알아서 혀!"
 천섭은 간단하게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벗어나 논두렁으로 달려나갔다. 금방이라도 중공군의 총알이 자신의 등을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운산읍으로 보이는 불빛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달린 천섭은 운산읍에 들어선 후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또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3.
 운산읍에는 여러 대의 미군 탱크와 아군의 트럭들이 어지럽게 질주하고 있었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수많은 병사들이 줄을 지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천섭은 두리번거리며 그의 부대원들을 찾아보았다.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간혹 비치는 불빛만으로 사람을 찾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병사들의 대오를 헤치며 행렬의 앞으로 앞으로 나가던 그는, 다행스럽게도 트럭 위에 서서 병력을 지휘하는 중대장을 발견했다. 거기 소대장과 분대장, 남은 몇몇의 분대원들이 섞여 있었다.
 아직도 대부분의 분대원들이 흩어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땀과 공포에 젖은 병사들은 중공군의 수적 우위에 그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밤새 밀려드는 중공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그들이 퇴각한 후 격전장을 훑어본 병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넘어진 중공군의 숫자는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그들이 또다시 밀려오면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으리라 판단하고 미리감치 진지를 버리고 퇴각해버렸다. 중공군의 숫자는 아군의 열 배를 넘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의 꽹가리와 호루라기 소리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하여 왔다.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미군 중대병력이 그들의 포위망에 갇혀 한 명도 살아오지 못했다는 나쁜 소문이 떠돌았다.
 "구룡강을 건너라!"
 중대장은 계속하여 상급부대의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소대장이 돌아와 운산읍 맨 남쪽의 사거리가 확보되어 있다고 말했다. 병력은 사거리를 향하여 바쁘게 밀려갔다. 천섭의 부대도 운산읍내를 지나 운산읍을 벗어나는 마지막 사거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분명히 아군이 지키고 있으리라던 사거리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 넘어진 탱크와 부서진 아군 트럭으로 막혀 있었다. 주검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양쪽 비탈에는 중공군들의 번쩍이는 따발총이 아군들이 사거리를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운산읍을 빠져나가지 못한 병력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퇴로가 막혀 버릴 수가 있는가.
 천섭은 공포에 질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뒤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의 추격이요, 앞으로는 한 발 앞서온 그들이 단 한 길 퇴로마저도 이미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달아나야 할 것인가. 퇴로가 막혔음을 안 순간부터 순식간에 대오는 다시 흩어지고 부대원들은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사거리를 뚫어야 한다. 방법이 없다. 대열을 정비하고 사격하며 전진해라."
 중대장의 피가 터져나올 듯한 명령이 절규처럼 들려왔다. 저들의 심장을 뚫고서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주저앉아 저들의 포로가 되는 길뿐이었다.
 부대원들은 부상자와 보급품을 실은 트럭을 중앙에 넣어두고 양쪽에서 그것을 보호하며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박격포탄이 쉴 사이 없이 적진에 떨어졌다.
 이미 앞서 한바탕 격전을 치른 탓인지 중공군의 공격은 생각했던 만큼 거세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병사들은 도리어 사기가 올라 적을 향하여 무섭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부상자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천섭은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전진하면서 기어나오는 중공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곧이어 아군과 중공군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백병전을 벌였다.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에 맞아 트럭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튀어오른 살점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섭은 업드린 채로 날뛰는 적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중공군 하나가 마악 수류탄을 던지려다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수류탄은 떼굴떼굴 구르다가 터져 버렸다. 순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가 뜨려는 천섭에게 중공군이 달려들었다.
 천섭은 재빨리 몸을 돌렸으나 그의 육중한 몸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천섭은 덤벼드는 적의 배를 향하여 발길을 날렸다. 그가 따발총을 쥔 채로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천섭은 날렵하게 일어나 그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소리가 나며 그의 머리가 부서졌다.
 천섭은 재빨리 땅에 떨어진 철모를 주워 썼다. 한동안의 치열한 백병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숫적으로 열세였던 중공군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중공군은 그 자리에서 투항하고 있었다.
 천섭은 겨우 숨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은 주검으로 가득했다. 미군들도 상당수가 전사한 듯 했다. 그 중에는 중요한 지휘관도 포함이 되어 있는 듯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천섭은 구룡강 어귀까지 물러가 도하를 준비하는 부대에 섞여 있었다. 아직도 요란한 총성이 연이어 들려오며 미군을 포함한 아군들이 운산 사거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맨 앞에 서서 돌진해오는 그들의 손에는 총이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독한 술에 취하여 몽둥이 한자루만 들고, 피리를 불고, 나발을 불고, 북을 두드리고, 꽹가리를 두드리며, 다만 밀려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것은 사람의 바다였다.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였다. 천섭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도저히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 할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천섭은 남하하는 행렬에 끼어 행군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랜만에 순애를 그려보았다. 순애의 커다란 눈과 치렁치렁한 댕기머리를 떠올렸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검은 주름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저고리 속으로 빛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떠올렸다.
 그녀를 결국엔 잊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식으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선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가슴 아프게 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가슴 한 쪽이 텅 비어갔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병사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나에게 무엇이던가. 신이여, 그대가 만약 존재한다면 나와 그녀에게 용기를 주소서. 천섭은 기도했다.


 4.
 이 밤이 새면 순애가 시집가는 날이다. 명자는 며칠 전부터 내촌에 와 머무르고 있었다. 순애는 명자와 밤새워 이야기하느라 한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잠을 자려고 드러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명자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기가 막힌 팔자가 있어 누구 팔자인가 하고 돌아보았더니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팔자더라고....... 그러나 내 팔자 사나운 것은 내것이라 견뎌라도 보겠건만, 애꿎은 딸 순애의 팔자까지 자신이 기구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명자는 못내 가슴이 아렸다.
 "순애야!"
 "응?"
 "자능겨?"
 "아녀."
 "엄니를 많이 원망혔지? 널 팽개쳐두고 가뻔져서......."
 "......."
 "쬐끔 늦었드라도 기양 지울 걸 그렸나벼....... 깨끗이 혀주는 사람도 있다는디......."
 "먼 소리데여? 뱃속의 목숨이라고 함부로 죽여도 된디여? 야가 먼 죄가 있데여? 모다 이 팔자 없는 년의 죄 아녀?"
 "그려, 그럴 수야 없겄지. 아무리 생각혀도 니년이 불쌍혀서 그런겨."
 "이까짓 년이 불쌍허긴 머가 불쌍혀? 다 팔자일턴디. 그러니라 허고 살거닝께 걱정일랑 허들 말어. 엄니."
 "그만허고 쬐끔이라도 자둬야 허겄고만."
 "다 틀렸고만."
 "천섭인 알고 있능겨?"
 "......."
 천섭....... 순애는 명자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눈물이 쏟아져 베갯머리를 적셨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총탄이 비오듯할 전쟁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고 있으리라. 차라리 총알이 가슴에 콱 박혀 죽고 싶으리라. 그러나 모진 목숨은 쉽게 죽지도 않고 용케도 총알 사이를 빠져다니며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 아니, 그는 이미 총탄에 쓰러져 이승 사람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더욱 저려왔다.
 비록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떠나는 것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천섭이 그녀 앞에 나타나 말 한마디로라도 아니면 시늉 한 번만으로라도 그녀를 붙잡아 줄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원하지 않는 편지일지언정 한 통쯤은 보내줄 법도 한데 그것조차도 그에게서는 영 없었다.
 그러나 천섭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지겠는가. 순애는 그녀 자신보다도 그의 가슴이 더 쓰라리고 아프리라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그도 사랑하는 여자를 순식간에 빼앗겨버린 불쌍한 남자였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거듭하여 빼앗겨 버린 것이니 나중에 알게 될 그의 심정이야 또한 오죽하랴. 만약에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밤 천섭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며 가슴을 태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천섭.......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 온몸으로 사랑하고 싶었던 남자였다. 하나뿐인 그녀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남자였다. 그의 품에 안겨서 한평생을 보내다가 그의 품에 안겨서 눈감고 싶었던 그런 남자였다.
 그 사람을 이렇게 떠나야 하다니....... 사랑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부터 그 속에 날카로운 비수로 무장된 이별을 마침내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음보다 두 곱이나 세 곱이나 더 아픈 그 끔찍한 이별과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적도 안 자능겨?"
 "엄니나 자 둬요....... 괜히 천섭 씨 야그는 꺼내갖고......."
 명자의 거칠게 주름잡힌 손이 넘어와 순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어머니의 손이었다.

 어느 집의 수탉이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밝아오는 또 하루의 기쁨을 예고하듯 수탉의 울음은 우렁차고 밝았다. 하지만 순애는 그 소리조차도 악령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처럼 두렵고 산란하게 들렸다.
 드디어 온 동네의 닭들이 따라서 울어대기 시작하고 서서히 날은 밝아 왔다. 순애는 경옥이 정성껏 차려온 밥상에도 숟가락이 영 가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올라온 쌀밥이었다.
 밥상을 따라들어온 육리댁이 맞은편에 앉더니 순애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힘없이 숟가락을 받아드는 순애에게 명자도 은근하게 타일렀다.
 "그려도 먹어야 되는 거여. 시악씨가 잠도 못 자고 밥까정 안 먹으먼 얼굴이 초라혀서 남들이 모다 욕허는겨."
 순애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억지로 몇 숟갈의 밥을 입안에 떠 넣었다. 새색시 얼굴이 초췌해서야 쓰겠는가. 오늘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이뻐 보여야 할 날이었다. 그것은 곧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맞이하는 한 남자에 대한 최소한의 정성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방문을 통하여 마당의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자욱 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려 왔다. 마당에 차일을 준비하는 듯 막대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영은 깔아놓은 멍석 위를 대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멍석을 긁어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너털웃음이 연신 터져나왔다.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순애에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자꾸만 낯설어지고 비위에 거슬렸다.
 오늘이 정말 내가 시집가는 날일까. 한 남자에게 비로소 모든 것을 맡기고 운명처럼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일생을 보내야 하는, 정말 내가 시집가는 날일까. 그는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그 사람을 천섭의 십분지 일만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순애는 눈을 감아버렸다. 도무지 자신도 서지 않았고, 죄를 짓는다는 생각만 커져갔다.
 들러리가 신부의 준비를 서둘렀다. 들러리를 따라 들어온 젊은 여자가 멀뚱히 앉아 있는 순애의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바르고 하더니,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갖추어 입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위에 다시 원삼을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댕기를 한 그녀의 머리에 칠보로 장식된 족두리를 씌웠다.
 순애는 줄곧 희희낙락하는 그녀들의 천진한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자는 웃목에서 순애의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를 부지런히 거들던 경옥이 보다 못해 순애에게 윽박질렀다.
 "이것아, 좀 웃어봐. 먼 놈의 청승이냐? 니가 시방 어디 팔려가기라도 허는 거여?"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던지 경옥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순애는 고모에게 약간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자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며 앉은걸음으로 경옥이 닫고 나간 문쪽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해가 중천인디 초행은 언지 이른디여?"
 "올 때가 되믄 오겄지요. 머땀시 그러코롬 기다려요? 못 오먼 또 못 오는 거 아녀요? 애닳지 말어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순애는 문득 김촌을 떠나 초행에 나선 신랑이 쌍궁나루를 건너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아니 초행 행렬은 아마 쌍궁나루를 건너지 않을지도 몰랐다. 김촌에서 동쪽으로 빠져나가 신작로를 타다가 다시 내촌으로 꺾어드는, 좀 멀긴 하지만 안전한 길을 택할지도 몰랐다.
 그는 도대체 어떤 뱃심이길래 남의 자식까지 안고서라도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는 건지, 순애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초혼에 실패를 하였다손 치더라도 그는 엄연한 이 땅의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처지는 여자인 자신과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왔는가벼."
 명자가 등뒤의 순애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방문 앞에 앉아 중얼거렸다. 바깥이 부쩍 소란해졌다. 신랑 일행이 도착하여 고샅으로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따각거리는 여린 말발굽소리와 함께 조랑말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함 들어와요-!"
 누군가가 목청을 길게 뽑으며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워따매 기가 막히게 잘생겨 버렸구만."
 잇따라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그들은 이런 날 언제나 덕담처럼 그렇게 감탄하기 마련이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애도 생전 보지 못한 신랑의 얼굴이 궁금해지기는 하였다.
 순애는 문득 천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울어대듯이, 절대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기백번 맹세를 해놓고도 기어이 천섭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사랑이란 놈은 결코 마음대로 되어지는 손쉬운 놈이 아니었다. 누가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해서 그의 뜻대로 주물러지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순애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빨리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신부다운 정간한 마음으로 이제부터라도 이 남자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어지지가 않았다.
 걸핏하면 떠오르는 천섭의 얼굴에 순애의 가슴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순애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귀신처럼 아무데서나 떠도는 천섭의 그림자를 애써 지우면서, 그녀는 방문 가까이의 명자에게로 다가 앉았다.
 명자가 손끝으로 살짝 문장지에 구멍을 내어 주고는 순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구멍 쪽으로 밀어주었다. 육리댁이 뒷문으로 들어오다가 그 꼴을 보고는 혀를 찼다. 들러리를 맡은 아낙도 기가 차다는 듯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당 가운데의 멍석 위에는 다시 깨끗한 돗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는 아마도 초례상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마루 쪽으로 짧은 병풍이 둘러처져 있어 그것이 방문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순애는 마당의 전부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병풍 너머로 열려 있는 대문이 보이고, 토담 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동네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 중에는 하얀 한복을 차려 입은 영도와 응선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병풍의 끝부분쯤에 짙은 남색 관복에 사모를 쓰고 서대를 한 보통 키의 신랑이 목이 긴 검정색 목화를 신고 서 있었다. 이제 곧 시작될 전안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벌써부터 누군가가 나무 기러기를 들고 신랑이 어서 빨리 초례청에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랑의 얼굴은 아직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농촌 사람답게 새까맣게 그을린 작은 얼굴이었다.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가 그런대로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아......!"
 다음 순간 순애는 깜짝 놀라 방문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다가앉았다. 아무리 보아도 신랑의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다. 가끔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는 한쪽 다리를 분명하게 절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니, 고모가 저런 야그는 안 혔는디......."
 명자도 순애와 동시에 절름거리는 신랑의 다리를 보았다.
 "글씨다. 쪼메 다쳤다드만......."
 "엄니! 저 사람...... 증말 절름발이는 아니겄지?"
 "아닐 겨......."
 뒷전에서 육리댁이 끼어들었다.
 "아, 전쟁터서 총 맞었디야. 아적은 다 안 나았다는디, 뼈에는 이상이 없대는구만 그려. 다 나아간디야."
 순애는 다시 아랫목으로 물러앉았다. 이제 들러리들이 일어설 차례였다.


 5.
 순애는 전혀 생소한 낯선 남자와 한방에 앉아 있었다. 생전 얼굴을 본 적도 없었고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남자와 인생을 함께 하기 위한 그 첫밤을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땅의 처녀들을 가장 황홀하게 만들고 몸이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은 역시 혼례식이 끝난 초야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비한 세계의 입구라도 되는 듯이 처녀들의 가슴을 마냥 설레게 하고 들뜨게 한다. 그녀들은 그 시간을 위하여 소중한 스무여 해를 아름답게 가꾸고 장식한다. 더욱 아름답고 더욱 건강하고 더욱 싱싱하게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다듬고 매만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은 초야에 이르러 일시에 꽃으로 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삼용은 이미 몇 잔의 술을 들이킨지라 얼굴에 발그레한 취기가 올라 있었다. 아랫목에는 이미 명자가 깔아놓은 이부자리가 화사하고 긴 벼개와 함께 펼쳐져 있었다.
 삼용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순애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옆에는 호롱불이 등잔대 위에 놓여 고즈넉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간단한 술상이 놓여 있었다. 그가 일어나 웃목에 둘러처져 있던 병풍을 당겨 지게문 쪽으로 가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요 잉?"
 혀가 완전히 꼬부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취기가 완연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순애는 가슴이 떨려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삼용이 멋적었던지 그도 한동안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실은 삼용도 순애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삼용은 들떠 있었다. 순애는 그가 처음 만났던 두지마을의 신부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기품있는 신부였다. 신부가 남의 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정적인 흠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얼만큼은 쉬운 상대로 여겼던 자신의 경박함을 곧 후회했다. 그럴수록 그의 입이나 몸은 자꾸 굳어만 갔다. 삼용이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불 끄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봤으먼 좋겄는디요? 그냥 끌까요?"
 순애가 마지못해 얼굴을 반쯤 들어주었다. 그녀의 얼굴을 황홀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삼용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서 족두리를 벗겨냈다. 그리고는 차마 더 이상 손대기가 무엇하여 먼저 자신의 사모와 관대를 벗으며 말했다.
 "참말로 떨리는구만이라오."
 그는 벗은 사모와 관대를 윗목에 밀어놓고 뒤이어 순애에게로 다가앉았다. 다소곳이 앉아서 처분만 기다리는 순애의 원삼을 간단하게 벗겨냈다.
 "인자는 되었구만이라오. 불을 끌까요?"
 삼용이 자꾸 불을 끄자고 말했다. 순애가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자 삼용이 입을 내밀어 등잔불을 껐다. 부끄러운 빛은 일시에 사라지고 황홀한 어둠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호롱불이 꺼지자 순애는 가슴이 두근거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삼용이 순애의 앞으로 좀더 다가서며 순애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긴 농사철을 보내고 겨울 동안의 휴식으로 순애의 손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의 손에 잡힌 따뜻한 순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삼용의 손이 대담하게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져서 정확하게 그녀의 겉저고리 옷고름을 찾아 쥐고는 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순애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들어 비장한 표정으로 삼용을 바라보았다.
 "지가...... 할 말이 쪼메 있구만요......."
 "먼 디요......?"
 그녀의 옷고름을 풀어내려던 손을 잠시 멈추며 삼용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당찼기 때문에 그는 내심 조금 놀라고 있었다. 순애가 아직도 그의 손에 쥐어 있는 옷고름을 살짝 붙잡아 댕겨 여몄다.
 "지 애기 말인디요....... 분명하게 말씀을 혀주셨으먼 혀서요......."
 삼용이 옷고름에서 손을 떼고는 조금 물러나 앉았다. 순애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약조는 된 거지만서도요...... 서방님 아이로...... 맘 편하게 받아주실랑가요?"
 삼용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걱정허지 말어요. 사람의 앞일이란 잘 모르기는 헌 일이지만요, 지는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구만이라오. 그 아이는 지 아이랑게요."
 "취중에 허시는 말씀은 아니시겄죠?"
 "그럼요. 지가 취혔남요?"
 "그 맹서를 혀주셔야 혀요."
 말을 마친 순애가 점점 흔들리며 잦아들어갔다, 삼용은 팔을 뻗어 순애의 어깨를 살며시 감쌌다.
 "맹서혀요. 열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맹서혀요."
 "고맙구만이라오. 함부로 입 놀린 거......, 용서혀 주셔요......."
 순애가 고개를 수그렸다. 삼용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으리라 미루어 짐작을 했다. 삼용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끌어당기자 그녀는 쉽게 삼용의 가슴으로 무너져왔다.
 기대어오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삼용은 문득 자신의 너무 자신있는 대답에 불안해졌다. 이미 몇 번이나 스스로 다짐을 했건만 과연 이 아이를 정말로 자신의 아이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일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여도 누구의 핏줄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자신이 정말 아버지다운 사랑을 줄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삼용은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자신을 비웃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자신을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떻든 몸이 망쳐진 여자였고 순결을 잃어버린 여자였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보다도 자기 자신의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 더 커서 이겨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삼용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삼용은 자신의 어린 날을 되짚어 보았다.

 삼용의 아버지는 삼용을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읍내 장터에서 지나치게 마신 술은 그를 돌아오는 밤길에 길바닥에서 잠들게 하였고, 이튿날 그는 싸늘하게 얼어붙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용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큰형 일용이 집안의 어른이 되었다. 둘째형 이용도 어리기는 삼용이나 매 한가지였다.
 삼용이 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일용의 두 아이도 두 살터울 아래로 삼용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큰아이는 딸이었고, 그 아래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우는 조카 정두와는 달리 삼용은 서당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정두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동안 삼용은 머슴처럼 뼈빠지게 일을 해야 했다. 지게를 걸머지고 논두렁에 나가 무성한 풀들에 낫질을 하면서, 삼용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무던히도 원망하곤 했다.
 저녁에 삼용은 어떻게든 정두를 붙들고 그가 오늘 서당에서 배워온 글공부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정두는 그런 귀찮은 삼촌을 점점 피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그것이 자라 경멸로 변해갔다. 정두는 자기의 아버지 일용처럼 삼용에게 마치 머슴을 다루는 주인과 같은 행세를 하고는 했다.
 "정두야, 조메 가르쳐 주그라."
 "나 시방 피곤혀. 삼춘이 직접 가서 배우지 그려?"
 "일을 혀야 허는디, 워떠케 간다냐? 니가 쪼메 가르쳐 주그라."
 "그러믄 삼춘은 일을 혀. 공부는 내가 할 거닝게."
 "그려, 그려. 나는 일을 헐팅게 니가 쪼메만 가르쳐 주그라."
 "난 시방 피곤허당게로."
 그래도 삼용은 그런 정두를 비롯해서 여기저기서 부지런히 한자를 배워서는 틈만 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지게 작대기를 이용하여 땅바닥에 끄적거리곤 했다. 그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삼용의 배움에 대한 열망과 정성은 대단하여 동네 사람들은 가끔 일용에게 말했다.
 "삼용이 저러코롬 배우고 싶어허는디, 조메 가르쳐보지 그려."
 일용은 일언반구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이든 서당의 훈장도 이런 삼용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삼용이 서당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하면 어느 사이 일용과 주촌댁이 씩씩거리며 그를 찾아 나섰다.
 "시방이 어느 땐디...... 쓸모도 없는 글을 머땀시 쫓아댕기는 거여?"
 "......."
 "이눔아, 일을 혀야 안 굶을 거 아녀? 글을 배우먼 누가 밥 맥여 주능겨? 니가 글을 배워서 과거라도 볼 것여?"
 일용의 말마따나 지금은 먹어야 살고 먹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삼용은 북받치는 설움을 남몰래 삼키며 지게를 짊어지고 들로 나갔었다.

 삼용은 자신의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면 이 혼례조차도 과분할 지경이었다. 이제 앞으로는 열심히 열어나가면 되는 운명만 남은 것이었다.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보리죽에 소금을 뿌려먹어도 나만의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끝내 귀대하지 않아 뒤가 약간 켕기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후에 차차 풀어가면 될 것 같았다.
 "지도 아부지 없이 힘들게 살었구먼요. 지는 아부지 얼굴도 모르는구만요. 이 아이를 지처럼 고생허게 허진 않을 겨요. 염려 놓으시고 피곤헐 턴디 조메 누워요."
 삼용은 순애의 등허리를 살며시 토닥이다가 그녀의 어깨를 일으키며 다시 옷고름을 만졌다. 그가 대충 옷고름을 풀어낸 것처럼 보이자 순애는 팔을 아래로 길게 펴 그가 저고리를 그녀의 팔에서 벗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삼용은 그녀의 겉저고리를 벗겨낸 다음, 속저고리마저도 옷고름을 풀고는 벗겨냈다. 칠흙같은 어둠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삼용은 그녀의 어둠 속에 드러난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뺨으로 손을 옮겨 부드럽게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순애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콩닥거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러왔다.
 삼용은 그녀의 가슴 부분을 친친 동여맨 치마끈을 풀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매듭지어진 끝 부분이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긴장된 손으로 더듬어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치마말기로 꼭꼭 싸매진 젖가슴을 지나다녔다.
 그러는 사이 순애가 제 손으로 치마끈을 찾아 풀어 주었다. 이제 하얀 속치마가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삼용은 이번에는 그녀의 속치마끈을 용케 잘 찾아 풀어내렸다. 치마가 훌러덩 흘러내리자 순애는 고쟁이 바람으로 몸을 틀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삼용이 점잖게 옷을 벗어 웃목으로 던지고는 알몸으로 이불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오른 팔을 신부의 머리 뒤로 집어넣은 다음 그는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에 이르자 순애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알맞게 자란 탄탄한 젖무덤이 손바닥에 가득 차들어오자, 삼용은 기쁨에 넘쳐 그녀를 꼬옥 끌어당겨 안으며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 속으로 그의 혀가 천천히 탐색을 해 들어갔다. 그녀의 가지런한 이가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닫힌 문을 고스란히 열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삼용의 다리는 이미 순애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단단한 남성이 그녀의 몸에 밀착되자 순애는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꼈다. 눈물이 솟아났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하여 참아내고 있었다. 서서히 순애의 손이 그녀의 등으로 올라왔다. 삼용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들어 있는 다리에 힘을 주자 그녀가 몸을 쭈욱 뻗으며 그의 다리를 밀어냈다.
 삼용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서 벗어나 그녀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그녀의 탄탄하게 부풀어 오른 젖무덤이 순식간에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애의 심장에서 거친 숨소리가 작은 비명처럼 새어나오며 그녀의 가슴이 몇 번 출렁이는 것같이 느껴졌다. 삼용은 그녀의 머리 뒤에서 뽑아낸 다른 손으로 그녀의 나머지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처음 일이었다. 그녀가 남자에게 스스로 그녀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어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순애는 천섭에게 이렇게 그녀를 열어 주고 싶었다. 그의 손에 의하여 옷을 벗고, 그의 손에 안겨서 이 화사한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그의 몸을 만지고 싶은 대로 더듬으며, 그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항복하듯, 굴복하듯 열어 주고 싶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그 사람 하나에게만 자신의 알몸을 뜨겁게 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아름다웠던 추억과 꿈은 결국 슬픔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아무리 비참하게 몸이 망가졌어도, 그리고 그녀가 서둘러 천섭의 곁을 떠나기 위해 이 혼례를 받아들였어도, 그녀의 마음은 변함없이 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조차도 이제는 한낱 물거품 같은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순애의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삼용은 아직도 황홀감에 사로잡혀 그녀의 몸을 격렬하게 끌어 안았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더듬다가 다시 젖가슴으로 젖무덤으로 젖꼭지로 정신없이 해매고 다녔다. 그는 그녀의 눈꼬리로 흘러내리는 더 뜨거운 눈물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6.
 순애와 삼용은 우선 살림집을 수월의 성태네 사랑채에 차렸다. 아이가 태어나는 대로 삼용의 동네인 김촌으로 옮긴다는 전제가 있은 후였다.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명숙은 순애의 보금자리를 자청하고 나섰다. 명자로서도 순애를 맡기기에 가장 듬직하고 편안한 곳은 바로 언니네 집이었다.
 내촌이나 김촌으로는 당장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혼례식을 올린 지 다섯 달도 안 되어 태어나는 아이로 인하여 감수해야할 삼용이나 순애의 문제도 두려운 것이었지만, 그보다 죄없는 어린 아이가 평생 받아야할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 두 집안 외에는 아무도 순애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일용이네는 이미 이 문제를 신부댁에 일임하여 놓고 있었다. 태어나는 아이는 반드시 삼용의 아이여야 했다.
 처음에는 죽동에 머물면서 아이를 낳을까도 생각하였으나 순애는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녀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은 죽동에서 모른 척하고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명자는 순애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자신이 데리고있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람을 받아주지 않아 한편으로는 서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순애의 아픔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월은 천섭의 동네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순애는 이곳도 막무가내로 거부하였었다. 화영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터이라 무척 떱떠름하게 여기긴 하였으나, 천섭이 지금은 전선에 나가 있는데다가, 딱 한 해 정도의 짧은 기간만 버텨 주면 되므로 순애를 설득하고 나섰었다.
 순애의 생각에도 딱이 갈만한 곳이 나서질 않았다. 다른 동네에 가서는 정 붙이고 살기가 어려운 곳이 농촌 마을이었다. 아무데나 불쑥 들어갔다가는 굶어죽기가 십상이었다. 거기에다가 일이 년만 머무르다가 떠나야 할 곳이었기 때문에, 논밭을 사둘 수 있는 입장도, 살만한 형편도 아니어서, 쉽사리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로 들어가지 않는 한 다른 동네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순애는 어쩔 수 없이 수월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수월로 거처를 옮긴 순애는 성태네 사랑채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동네에 아는 얼굴도 물론 없었고, 차츰 몸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애는 자꾸 자신이 누워있는 천섭 어머니에게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고 스스로 놀랐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천섭이 돌아오는 날까지만이라도 그녀가 천섭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도 순애는 그러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는 천섭이 부디 살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녀는 천섭을 끝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삼용은 어쨌든 당분간 성태네 농삿일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그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다행히도 술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같은 연배가 없는지라, 동네 어른들과 간혹 막걸리 한두 잔씩을 홀짝거릴 뿐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선에 나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용은 순애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갔다.
 삼용은 호롱불을 밝혀놓고 순애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그녀의 점점 더 볼록해지는 배를 어루만지기를 좋아했다. 그때마다 마치 그 아이가 분명한 자신의 아이라도 되는 듯이 그의 손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 순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들일랑가? 딸일랑가?"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을 순애는 감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순애의 가슴은 더욱더 미어졌다.
 "확실히 아들일 겨....... 그렇게 느껴진단 말여."
 순애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삼용의 손이 순애의 손을 찾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인자는 참말로 잊어버려야 혀. 자꾸만 생각허믄 머덜 것여? 내가 다 알어서 혀줄 것이고, 이 아이도, 그리고 당신도 남부럽지 않게 혀줄 것이구만."
 삼용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순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순애는 그의 고마운 배려에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순애는 자신의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 무언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다시는 타오를 수 없는 그 무엇, 다시는 어느 것도 태울 수가 없는 그 무엇이, 그녀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깊이 잠들고 있었다.
 "아들이먼 성옥이라고 부를 거구만. 장성옥, 좋지 않어? 딸이먼 성례가 좋겄어. 장성례라고 말여."
 "고맙구먼요......."
 삼용이 얼굴빛을 고치고 순애의 무릎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순애의 얼굴은 아직도 펴지질 않았다.
 "가능헌 한 얼른 잊어뻔져야 혀. 지발 그려야 아이도 탈없이 자랄 것 아녀?"
 삼용은 다정스럽게 순애를 달래고는 밖으로 나갔다. 순애는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여자란 꼭 한 남자와만 사랑을 해야되는 것일까. 그리고 결국 사랑하는 그 남자와만 평생을 살아야만 비로소 행복한 것일까. 그녀는 이제 꺼져버린 불꽃에 불과한 자신의 가슴을 가늠하여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는 불붙지 않는, 말라 비틀어진 호롱불 심지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만 감으면 나타나는 천섭의 얼굴이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