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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5 08:22
순애 제2권 / 제11부 복수라는 이름의 황홀한 꽃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3,953  


 제11부 복수라는 이름의 황홀한 꽃


 1.
 다시 세월이 흘렀다. 바깥에서는 한동안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대가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이젠 누구도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유한 자들에게 인간적 권리를 철저하게 빼앗기고 짐승처럼 죽지못해 살고 있었다.
 일제는 다른 민족이었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그래서 덜 서러웠다. 그러나 해방된 땅에 자기 세력을 구축한 기득권자들은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그래서 같은 피를 나눈 자들에게 학대를 받는 일반 사람들은 더 더욱 서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질적인 가난과 공무원들의 가렴주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학생들이 일어섰다. 4.19가 터진 것이다.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그러나 그래도 험한 세상은 바뀔 줄을 몰랐다. 그 어떤 것도 물리적인 힘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사람은 세월을 먹으며 분명 늙어가기 마련이었다. 세상이야 어떻든 사람은 분명 변해 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월이라는 약을 먹어야만 사람은 비로소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사람을 끊임없이 죽음의 세계로 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세계로 다가서는 동안에도 사람은, 그만큼 충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순애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성옥과 성준을 방학 동안 내촌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성옥의 방학이 시작된 첫날, 그녀는 점심을 간단하게 먹인 후에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내촌으로 향했다. 김촌에서 내촌까지는 걸어서 두어 시간여의 거리였다. 그러나 쌍궁나루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끼리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애는 아이들을 쌍궁까지만 데려다 줄 심산이었다. 작년에도 그랬었다. 쌍궁에서 배를 타기만 하면 금방 내촌이 보였다. 거기서부터는 아이들끼리도 얼마든지 저희들의 외증조 할머니댁을 찾을 수가 있었다.
 성옥은 나룻배에 올라 저 편에서 손을 흔드는 어머니 순애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 성준은 성옥의 손을 놓지 못하고 멀어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칭얼대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그때뿐이었다. 잠시 후 외증조 할머니댁에 도착하기만 하면, 거기 머무는 동안만은 거의 모든 걸 잊을 수가 있었다.
 순애는 아이들을 실어보내고난 후에도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강 저편을 그리운 눈으로 지켜보고 서있었다. 가슴이 미어져 왔다. 아직도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녹아내렸다.
 천섭...... 그리운 천섭....... 순애는 몸을 돌려 아무도 없는 들길을 걸으면서 뼈 속 깊이에서부터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직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눈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눈물을 그녀는 이 쌍궁나루에 와서야 비로소 흘리는 것이었다.
 성옥이 성준의 손을 잡고 뜨거운 시골길을 한참 걸어 내촌에 도착하자, 육리댁이 뛸 듯이 기뻐하며 아이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반가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성옥과 성준의 뺨에 돌아가며 거친 볼을 비비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이구, 내 새끼 왔능가? 이 더운 날씨에 오니라고 고생혔지? 얼른 시암에 가서 발 씻고 말캉으로 올라가그라."
 경옥도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린 성옥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어디 흠잡을 데가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공부를 맨날 일등만 한다니, 그를 이뻐하지 않으면 그것이 비정상이었다.
 성옥은 육리댁을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 경옥도 할머니라고 불렀다. 옆 동네 수월의 명자도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 순애가 어려운 호칭보다는 당분간은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다.
 경옥은 아이들을 우물가로 데려가 웃옷을 벗긴 후에 두레박 가득 퍼올린 우물물을 그 등허리에 쏟아부어 주었다. 성옥은 이빨까지 흔들리는 차가움에 몸을 으스스 떨면서도 기분좋게 말했다.
 "할므이, 한 번만 더 혀줘요."
 그러면 경옥은 빙긋이 웃으면서 다시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옆에 나란히 엎드려 있던 성준도 질세라 말했다.
 "할므이, 나도......."
 경옥은 다시 퍼올린 두레박의 물을 아이들의 머리에 갑자기 쏟아부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불시에 온몸에 물을 뒤집어쓴 성옥과 성준은 비명을 지르며 마당으로 달아났다.
 등목을 마친 성옥과 성준을 마루에 앉히고 육리댁은 손수 물기를 닦아주었다. 웃옷을 걸친 아이들 앞에 경옥이 어느 사이 먹음직스러운 수박을 쟁반 가득 내어왔다. 이 수박은 텃밭에서 따온 것으로 우물 속에 집어넣었던 것을 건져왔기 때문에 이빨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배불리 먹어야 혀. 다 먹으먼 저그 산에 올라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오그라. 산에 가믄 아이들도 있고, 바람이 엄청 시원허단 말여. 이따가 저늑에는 수월의 삼촌헌티 가서 인사를 허고 와야 혀."
 수월의 삼촌은 성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예, 알았구만이라오."
 성옥과 성준은 먹다가 남긴 수박 한 조각씩을 들고서 바람 같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달리면서 성옥이 성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준도 성옥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성옥이 말했다.
 "가자."
 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옥의 뒤를 따라 고샅길을 뛰어나갔다. 그들은 줄곧 달음질을 쳐 벼가 한참이나 자란 논두렁길을 지나서 틈뚜럭으로 올라섰다.
 수로에는 물이 철렁철렁 넘쳐흐르고 있었다. 수로를 가로지른 다리 바로 밑까지 수면이 떠올라 손을 내리면 금방 팔꿈치까지는 물 속에 잠길 것만 같았다. 그들은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 수월로 들어섰다.
 밭일에서 돌아오던 명자도 역시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야들이 순애 새끼들 아녀? 웬일이데야? 올해는 방학이 빨랐는가벼? 어서들 오그라."
 그리고는 그들의 얼굴에 송이송이 맺혀있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쓰윽쓰윽 문질러 닦아주었다.
 "시방은 내가 쪼메 바쁘닝께 요기 메가시 나가서 놀다가 오면 좋겄는디......."
 성옥과 성준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으로 올라갔다. 성옥은 소나무 숲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아이들에게로 접근해 갔다. 아이들 중의 하나가 아는 체를 하며 물었다.
 "너 또 왔냐?"
 "응."
 "근디, 정림이는 아적 안 내려온디야?"
 그 아이의 말을 듣고서야 성옥은 자신이 정림이를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옥은 여름이 오자 이내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 기다림은 쌍궁나루를 건너 작년에 만났던 정림을 만나고 싶어하는 작은 설레임으로 더욱 커졌던 것이다.
 성옥의 어깨가 축 늘어지고 있었다. 성준이 그러는 성옥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림이는 올해도 내려올까. 제발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성옥은 성준과 함께 아이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멀거니 그들의 노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날 저녁, 모깃불을 지펴놓은 마당의 평상에 앉아 성옥은 명자가 만들어준 콩나물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입 안에서 굴러 다니는 꽁보리밥이었지만 맛은 꿀맛이었다. 언제 대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성태가 환하게 웃으며 성옥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성태는 읍내의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이라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일 년 동안 되게 컸구만. 얼굴도 더 어른스러워졌는디, 아적도 학교서 공부는 일등을 허고 있는겨?"
"예."
 성옥이 자랑스럽게 대답하며 숟갈을 든 채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인사허는 법도 많이 달라졌구먼."
 성옥이 계속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아져서 성태에게 물었다.
 "삼춘!"
 "머땀시요? 조카님!"
 "서울 사는 정림이 말여요....... 안 내려왔는가벼요?"
 성태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옥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요놈이, 깜냥에 머스마라고? 가는 방학이 조메 늦어서 이삼일 지나야 올겨. 왜? 보고 싶냐?"
 성옥은 얼굴을 붉히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성옥은 성준과 함께 하루종일 내촌과 수월을 오가며 지냈다. 어딜 가든 반가운 손님 대접이 식지 않았고, 어디에서든 배불리 먹은 뒤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낮잠을 자도 좋았다. 정림이 내려온다는 이삼일이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성옥은 틈만 나면 수월의 동네 입구로 나가 멀리 읍내로 뚫려있는 신작로를 지켜보았다.
 성옥이 동네 입구의 미루나무 그늘 아래 깨끗이 쓸어낸 땅바닥에 드러누워 요란한 매미소리를 듣고 있는데 성준이 성옥을 흔들며 말했다.
 "성아, 먼 차가 들어와."
 성옥이 몸을 일으켜 신작로를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까 흙먼지를 가볍게 일으키며 승용차 한 대가 수월을 향해 느리게 굴러오고 있었다.
 성옥은 다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정림이라면 제 아빠 엄마하고 함께 걸어서 들어올 것이었다. 금새 동네에 들어선 승용차는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 성준이 다시 성옥을 흔들었다.
 "성아, 일어나봐."
 정림이네 가족이었다. 성옥이 소스라치며 일어나 앉았다.
 정림의 어머니 영채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정림이 뒤를 이어 모습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천섭 아저씨가 내리더니 차의 문을 닫아 걸고 있었다. 성옥은 반가워 정림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녀는 아직 성옥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성옥이 서 있는 앞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성옥은 정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잠깐 눈이 마주친 듯 했는데도 모르는 척 지나가고 말았다. 성옥의 가슴에 섭섭함이 가득 고여갔다. 성옥은 마을 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정림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의 손을 끌어당겨 뒤를 돌아보도록 하며 말했다.
 "아빠! 저 애말예요. 작년에 왔던 아이예요."
 천섭이 성옥과 성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잠시 머뭇거리던 천섭이 몸을 돌려 곧 골목 안으로 사라지자, 정림도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도 성옥은 다행이라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이튿날 성옥은 정림의 방문을 받고 가슴이 뛰었다.
 "우리 아빠가 너한테 선물할 게 있으시대....... 가자."
 성옥이 정림의 뒤를 따라 나서자 어느 사이 성준이 성옥의 뒤를 따라왔다. 정림이 앞장 서서 걸으며 성옥에게 물었다.
 "넌 공부를 참 잘한다면서?"
 기분이 좋아진 성옥이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은 방학이 조금 늦었거든. 너희는 일찍도 했다."
 정림이네는 마을의 동쪽 끝에 있었다. 성태 삼촌네는 마을의 서쪽 끝에 있었으니 동네의 한 가운데를 질러가야 정림이네에 닿을 수가 있었다.
 김촌의 성옥이네와는 달리 이 동네는 비록 항상 열려는 있었지만 거의가 함석으로 된 대문이 달려 있었다. 몇 개의 대문을 지나 정림이네 집으로 들어서니 이미 마루에는 성태와 천섭이 술상을 놓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섭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성옥을 쳐다보며 말했다.
 "많이 자랐구나. 일 년 사이에....... 어머님은 평안하시냐?"
 "예."
 대답과 동시에 성옥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성옥은 어머니의 당부가 떠올랐다. '천섭 아저씨가 널 부르먼 절대로 바보처럼 굴어선 안 되는겨. 넌 사내닝께 사내답게 당당혀야 허는겨.'
 "가까이 오너라."
 성옥이 가능한 한 가슴을 펴고 그에게로 다가섰다. 천섭이 성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 앉아있던 성태 삼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네 엄니가 고상을 너머 혀서 큰일이구만......."
 천섭은 몸을 돌려 마루 한켠에 준비해 두었던 선물꾸러미를 잡아당겨 성옥에게 내밀었다.
 "별거는 아니구, 서울애들이 많이 먹는 사탕이다. 동생하고 나누어 먹거라."
 성옥은 선물 꾸러미를 받아 들고는 다시 머리를 수그렸다.
 "감사합니다."
 천섭이 정림을 향해 말했다.
 "정림아, 너보다는 한 살이 많잖니? 오빠뻘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림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아빠."
 정림이 성옥에게 눈짓을 한 뒤에 밖으로 나섰다.


 2.
 벌써 방학의 절반쯤이 지나가 버렸다. 성옥은 그동안 거의 매일 수월에서 정림과 함께 지냈다. 오늘은 내촌의 경옥 할머니가 수월로 와 성준을 데려갔다. 증조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준을 내촌으로 보낸 성옥은 갑자기 심심해졌다. 성옥은 천천히 일어나 고샅으로 나섰다. 발길은 어느 사이 정림이네를 향하고 있었다.
 정림이네 집에 도착한 성옥은 슬그머니 대문을 젖히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정림이네의 뒷간 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뒷간 벽을 타고 몇 걸음 더 걸어야 정림이네의 마루와 안방문이 보였다. 성옥이 계속 안으로 걸어들어가 마루에 이르자 방문이 비긋이 열리며 정림의 어머니 영채가 얼굴을 내밀었다.
 "정림이허고 놀라고 왔는디요......."
 영채가 부드러운 얼굴로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사랑방에 정림이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성옥이 사랑방으로 다가가 정림의 곁에 앉았다.
 "정림아!"
 그녀가 가만히 눈을 떴다.

 성옥은 정림과 함께 동네의 아이들을 따라 쌍궁나루로 나갔다. 거기에서 다시 강을 따라 신평천의 하구로 한없이 걸어나갔다. 드넓은 벌판 길을 지나 논두렁길이 서서히 개흙 길로 바뀌면 여기저기 게떼들이 마치 우수수 가을에 뒹굴어 다니는 낙엽 소리를 내면서 일시에 사라졌다가 아이들이 지나가면 다시 나타나곤 했다.
 드디어 바닷바람 소리와 함께 바닷새들의 끼룩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다가왔다. 성옥은 아이들과 함께 탄성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면 바다는 더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놈들아, 이 겁 없는 놈들아, 내가 바로 바다이다'.
 바다는 마치 거대한 전설 속의 고래처럼 무서운 거품을 뱉어내며 신평천 하구로 밀려들었다. 뜨거운 태양열을 온몸에 가득 받으면서 성옥은 가슴을 활짝 열고 설레는 가슴으로 자못 두렵기조차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강 하구의 갯벌 너머로 수평선이 무겁게 대지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바닷물이 접근하지 않는 갯벌로 내려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키 큰 형들은 거기에서 뻘게를 잡고 작은 아이들은 계집아이들과 함께 소쿠리에 가득 나무재를 뜯었다. 성옥은 가끔 두려움을 억누르고 키 큰 형들처럼 게구멍에 길게 팔을 들이밀어 넣어보기도 했다.
 처음엔 너무 겁이 나서 게가 숨어들어간 구멍만을 넌지시 바라보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성옥도 용감하게 팔뚝을 게구멍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숨어있는 게 등판을 잡아야지 늦으면 손가락이 물리고 성옥은 '아야, 아야.' 하는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게에 물려 손가락이 잘릴 듯한 아픔을 견디며 팔을 거두면 그 끝에 끝까지 손가락을 놓지 않는 게가 끌려나왔다. 정림은 용감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이 시골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는 듯했고, 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갯벌에도 무척 놀라는 듯 보였다.
 성옥이 한참 게구멍을 뒤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돌아보니 정림이었다.
 "나 죽는가봐, 좀 잡아줘."
 갯벌 속에 박힌 조개를 캐다가 정림이 뻘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손을 쓸 수도 없는 성옥이 먼저 달려가고, 키 큰 형들은 아버지 같은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네 심으로 나와야 혀!"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져서 정림이 큰소리로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키 큰 형들은 주변의 뻘들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적당히 개흙을 파낸 후에 누군가가 정림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힘있게 끌어 올렸다. 그 안간힘에 정림이 서서히 움직이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성옥은 무심코 정림의 몸뚱아리를 바라보았다. 정림의 몸은 시커먼 개흙으로 온통 칠해져 있었으나, 분명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다.
 치마와 팬티가 뻘 속에 붙들려 몸을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성옥의 눈 앞에서 정림의 사타구니가 스르르 올라섰다. 성옥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림이 울면서 돌아선 뒤에야 성옥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태양이 갑작스런 구름으로 가리고 따가운 햇빛이 그 위세를 거두어 세상에 그늘 빛이 젖어들면 서서히 아이들의 벗어부친 몸에도 한기가 스미게 되고, 그러면 아이들는 그런 대로 개선장군처럼 게 꾸러미와 나무재를 가득 안고 수월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정녕 노래 소리도 자랑스러운 행복한 전사들이었다.
 아직도 어른들은 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아무리 열심히 놀아도 해는 항상 중천의 그 근방이었다. 도무지 저녁은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미루나무 그늘로 몰려가 들녘을 거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하나둘 땅바닥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했다.
 성옥이 한참 자다가 눈을 뜨니 황소만한 개 한 마리가 자신의 볼을 핥고 있었다. 정림이네의 누렁이였다. 천섭 아저씨의 말을 빌리면, 이 누렁이는 제 엄마의 이름도 누렁이라 했고, 제 놈의 이름도 누렁이라 했다. 성옥은 아마 이 놈의 할머니도 누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어느 사이 일어나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고 정림만이 아직도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성옥은 정림의 얼굴에 누렁이의 코를 돌려놓았다. 그러자 정림이 잠결에도 소리를 쳤다.
 "누렁이 저리 안 갈래?"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보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누렁이 때문에 결국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성옥은 정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림이는 꽤 이뻤다. 서울에서 자라 하얗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은 수월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 검게 타들어가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면 흠집 하나 없이 동글동글한 얼굴이었으며, 말랑말랑하여 부드럽기 짝이 없는 살결이었다. 또래로서는 키까지 한참이나 큰지라 제 아버지의 충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성옥이 알기를 마치 무슨 자기의 동생뻘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성옥은 정림의 그러한 행동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힘으로만 하드래도 성옥은 정림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정림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성옥은 며칠 전 정림과의 힘겨루기에서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챘던 것이다.
 성옥은 그가 정림을 힘껏 밀어내어 게임을 끝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에, 발이 땅바닥에 들어 붙은 것처럼 끄떡 않던 정림의 힘을 새롭게 느꼈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적어도 일년 전만 하드래도 그애에게서 그런 힘을 느끼진 않았었다. 성옥은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었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분명 빨리 자라는 면이 있었다.
 성옥과 정림은 거의 매일 함께 굴러다니며 소꿉장난을 했다. 정림은 언제나 주머니 안에 누룽지나 삶은 고구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성옥을 위한 것이었다. 천섭과 영채가 며칠 뒤에 다시 내려와 정림을 데려가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어른들이 들로 나서자 정림은 부리나케 놀러왔다. 그녀는 담장 밖에서 조심스럽게 서성이더니, 집안에 어른들이 없음을 알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마루의 성옥이 곁에 걸터앉았다.
 "우리 소꿉놀이할까?"
 정림이 먼저 제안을 했다.
 "응, 그려."
 "오늘은 말야, 병원 놀이를 하자."
 정림이 조금은 수줍게 말했다.
 "병원 놀이는 어찌케 허는디?"
 성옥이 다시 물었다.
 "네가 의사를 하고, 난 환자를 하는 거지. 그리고 이 다음에는 내가 의사를 하고 너는 환자를 하면 되는 거야."
 "좋지 머."
 성옥과 정림은 할머니댁 장독대를 지나 감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는 토담 밑으로 걸어갔다. 그 곳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벌써 대여섯 번을 그들은 여기에서 놀았었다. 흙으로 빚은 온갖 살림도구들이 여기저기 구색을 갖추어 놓여 있었다.
 그들이 이 토담 위로 머리를 내밀기만 하면 동네의 고샅길 뿐만이 아니라 들녘도 한눈에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들에 있었다. 마을 안은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공동의 상태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소꿉놀이를 시작하면 당연히 성옥은 아빠이고 정림은 엄마였다.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정림은 이상하리 만치 성옥에게 편안하였다. 그녀는 엄마의 역할이 그런 것 아니냐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성옥은 사실 아빠의 역할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어흠 거리며 그녀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맛있게 먹으면 그 뿐이었고, 가끔 아빠처럼 '그렁 게 아닌디.' 호통을 쳐주면 그것으로 백점짜리 아빠 역할인 걸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워디가 아프디야?"
 의사인 성옥이 먼저 정중하게 물었다.
 "배가 지독허게 아프구만이라오."
 정림이 대답했다.
 "아, 그렇구만요? 청진길 대고 진찰을 해보아야겄는디 여기 좀 누우실랑가요?"
 토담 아래 땅바닥에 정림이 조용히 드러누웠다. 감나무 이파리가 흔들거리면서 정림의 얼굴을 가려주고 있었다. 성옥은 먼저 정림의 가슴에 그의 귀를 갖다 대었다. 정림의 도톰한 갈비뼈가 한쪽 뺨에 느껴졌다. 더욱 바짝 귀를 들이대자 정림의 심장이 콩콩거리며 확실하게 뛰고 있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이 콩콩 소리가 콩코콩이거나 코옹코옹으로 뛰어야 할 것만 같았다.
 "잘 모르겄는디?"
 "배가 아프니까 배를 보아야지요."
 정림이 누운 채로 자신의 치마 끝을 살짝 만지작거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 응."
 성옥은 주저하지 않고 그 애의 부드러운 치마를 들추고 그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가녀린 다리를 거슬러 올라간 성옥의 눈이 정림의 무릎을 지나 약간 어둠에 가려진 사타구니에 도달했다. 두 다리로 뻗어 내려간 허벅지가 그늘 속에서도 마치 기름기를 바른 듯 윤이 났다. 성옥이 문득 물었다.
 "정림아, 니 챙피허지 않어?"
 "괜찮아."
 정림은 치마 저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치마끈을 조금 가슴 위쪽으로 당겨주었다. 땀냄새가 가득 배인 정림의 누런 팬티가 눈앞에 다가섰다. 치마끈과 팬티의 고무줄 끈이 잔뜩 조여댄 자국이 꼬불꼬불 그녀의 배꼽 부분을 두어 겹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성옥은 그녀의 치마끈을 그녀의 가슴께쯤으로 더욱 밀어 올렸다.
 그리고 성옥은 정림의 아랫배 여기저기를 쓰다듬다가, 한번은 오른쪽 귀를 한번은 왼쪽 귀를 교대로 다시 그녀의 배 위에 대어 보았다. 불규칙적인 쪼르륵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정림의 뱃속에 무언가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뱃속에서 먼 소리가 나능 거 같여."
 "그래요? 어디가 아픈지 확실하게 알아보셔요."
 "글씨요, 뱃속에서 회충이 기어댕기는 것도 같은디요."
 정림이 쿠욱 하고 웃었다.
 성옥은 정림의 무감각한 배꼽을 건드렸다. 배꼽 속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거기가 아니예요."
 정림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성옥의 손이 엉거주춤하다가 다시 그녀의 허리와 배를 정말 의사처럼 여기저기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거기가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더 이상은 그녀의 치마끈이 바짝 조르고 있었다. 아래로 눈을 돌린 성옥은 주저하지 않고 두 손으로 그녀의 팬티 끈을 붙들었다. 탄탄한 고무줄 끈이 조금은 아프게 손끝에 묻어왔다. 그녀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주었다.
 햇볕에 그을린 정림의 두 허벅지가 미동도 하지 않고 쭉 뻗어 있었다. 성옥은 정림의 팬티를 서서히 벗겨 내렸다. 그러는 동안 성옥의 머리는 잠시 정림의 치마 속으로부터 벗어나왔다. 성옥은 벗겨진 그녀의 팬티를 그녀의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감은 정림의 얼굴이 조금 불그레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편안하게 감은 채로 두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올려 놓고 있었다. 어느 사이 그 애의 손에 들려진 팬티가 돌돌 구겨져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정림은 모든 것을 의사의 손에 맡긴 듯 태연했다. 성옥이 정림의 사타구니에 다시 머리를 집어넣었다.
 성옥은 정림의 얼굴 색이 왜 순간 불그레해졌는지를, 그리고 왜 그녀가 두 눈을 꼬옥 감고서 말없이 하는 데로 그냥 두고 있는지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옥은 오직 정림이 왜 자신하고는 신체적으로 다른지 그것이 조금 신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바라보고 싶어졌다.
 성옥은 다시 그의 머리를 정림의 치마 속으로 들이밀고 진찰하기 시작했다. 팬티가 벗겨진 정림의 치마 속에는 아직 영글지 않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이 조용하고 순결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옥은 거기에 가만히 손을 대어보았다.
 "여깅가요?"
 성옥의 손이 닿아있는 그곳이 잠시 움찔거렸다. 뿐 정림은 다시 대답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속삭임도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성옥은 그것을 눈이 빠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상한 황홀감에 사로잡혀 여러 차례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인잔 낫을 거구만요. 인잔 안 아플 것이구만요. 내 손은 약손이랑게요."
 성옥은 문득 그곳에 뽀뽀를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뽀뽀해도 돼능겨?"
 "아냐, 의사는 뽀뽀하는 게 아녀."
 "알았구만요."
 성옥은 쉽사리 머리를 빼고 싶지가 않았다.
 "니, 일로 오줌 누는겨?"
 성옥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갈라진 곳을 살며시 파고들면서 물었다.
 "그럼."
 정림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성옥이 좀더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두 다리를 조금 벌려주었다. 성옥은 그의 한쪽 귀를 그녀의 그곳에 바짝 대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쪽 귀를 돌려 대 보았다. 그러자 세상의 고요가 한꺼번에 밀려와 성옥을 엄습하였다. 성옥은 정림의 그곳에 얼굴을 묻고는 잠시 잠이 들어버렸다.
 정림의 뒤척거림으로 눈을 뜬 성옥은 그녀의 그 묘한,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바라보는 그곳을 야릇한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 미끈한 그곳은 그녀의 갸름한 얼굴보다도, 그녀의 아직은 밋밋한 가슴보다도, 그녀의 때가 절은 배꼽보다도 분명 더 신기했다.
 더 오랫동안 그대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성옥을 사로잡았지만, 성옥은 의사로서의 역할을 마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찰이 끝나자 성옥은 그의 머리를 그녀의 치마 속으로부터 거두어 들였다.
 일어서려는 그녀를 다시 눕히고 성옥은 그녀의 손으로부터 팬티를 넘겨받아 천천히 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치마를 발 밑으로 내려 주었다. 정림은 부시시 마치 잠에서 아직 덜 깬 눈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약간 멋쩍은 듯이 피식 하고 웃었다.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말어야겠네."
 성옥이 어리둥절하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냥…….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응?"
 "그려."
 정림은 성옥의 대답을 들은 후에 살짝 허리를 굽혀 성옥의 이마에 그녀의 입을 갖다 대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슬렁 하고 불어와 그녀의 치마를 다시 뒤집어 놓았다. 그녀의 누런 팬티가 다시 성옥의 눈에 들어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3.
 이튿날에도 성옥은 정림과 소꿉놀이를 했다. 그러나 다시 그녀의 치마 속을 볼 수는 없었다. 성옥은 소꿉놀이가 시작되기 전 의사가 되고싶다고 정림에게 졸랐다. 그러나 정림은 쿠욱 하고 한 번 웃기만 할 뿐 언제나 성옥에게 아빠 역할만을 주었다.
 "너 무얼 알고 그러는 거야?" 하는 눈빛으로 정림은 성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옥의 얼굴이 정림의 얼굴보다 더 붉어졌다.
 성옥은 정림의 손을 꼬옥 잡고 명자 할머니네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살강 위에 놓여진 부엌칼을 집어들었다. 부엌을 나와 텃밭으로 나갔다. 텃밭에는 마악 익어가는 단수수가 간혹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성옥이 그 중의 가장 나은 것을 골라 잡았다.
 "이게 맛있겄지?"
 정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말했다.
 "아직까지는 좀 비릴 것도 같은데......."
 성옥은 상관 않고 한 손으로 단수수의 밑동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 들려진 부엌칼로 단수수의 밑동을 내리쳤다.
 "조심해."
 정림이 겁을 먹으며 소리쳤다. 몇 번을 거듭 내리친 뒤에야 단수수가 옆으로 자빠졌다. 성옥이 자빠진 단수수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아직 밑동이 다 잘린 것이 아니었다. 정림도 도와주었다. 힘겹게 뿌리로부터 잘라낸 단수수를 들고 성옥은 감나무 밑으로 갔다. 우선 잎파리를 모두 떼어내고 나서 부엌칼로 마디마다 험집을 만들었다. 그 일이 끝나고 단수수를 모로 들고는 무릎 위에 세차게 내리치자, 토독 하는 소리와 함께 단수수 마디가 잘려졌다.
 여남은 개의 마디가 잘려질 때마다 정림은 그것을 넘겨받아 치마에 받았다. 이 작업이 다 끝나고 성옥은 그 단수수 마디를 다시 넘겨 받아 껍질을 벗겼다. 껍질이 벗겨진 단수수를 정림의 입에 먼저 한 입 물려주었다. 성옥도 따라 단수수를 깨물었다. 단물이 시원하게 목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들은 맛있는 단수수를 신나게 씹고 있었다. 씹고 난 후 뱉어낸 단수수 찌꺼기에 벌써 개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머나!"
 갑자기 정림이 비명을 질렀다. 성옥이 놀라서 정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림이 마악 씹어서 이미 삼켜버린 단수수의 나머지 한쪽에 벌레 함 마리가 잘려진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림이 배를 움켜쥐고 욱욱거렸다. 그러나 목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색이 된 정림이 벌러덩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나 인제 죽는가봐."
 성옥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림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징그러운 벌레의 반 쪽을 이미 씹어서 목 안으로 삼켜버리고 만 것이었다. 성옥은 말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정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자세로 잠자듯 누워 있었다. 그녀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분명 두려운 것인데도 웬일인지 두렵지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성옥은 그녀의 옆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성옥은 정림이 먹다 남긴 단수수를 집어들고는 눈을 딱 감고는 입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정림의 옆에 드러누웠다. 자신도 죽고 싶어졌다. 아니 자신도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림은 그가 잘라준 단수수를 먹다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만간 정림이 죽을 때에 자신도 따라서 죽어야 할 것이었다. 성옥은 정림의 옆에 조용히 드러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정림은 이미 일어나서 나머지의 단수수를 맛있게 씹고 있었다. 눈을 뜨는 성옥을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나 안 죽었잖어?"
 성옥이 말했다.
 "나도 먹었는디......."
 벌레를 먹었는 데도 죽지 않다니....... 정림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4.
 삼용이 일용의 집을 나와 새 집에 살림을 꾸린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는 널직한 텃밭이 딸린 새 집을 얻기 위해 일용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일용은 삼용이 이 집을 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논을 몇 마지기 더 가져가길 원했다. 집이야 잠깐 동안 남의 집에 세를 들어 살면 어떠냐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용은 뒤곁으로 개금나무가 대여섯 그루 늘어서 있고, 텃밭 넘어 토담 곁에 십여 미터는 족히 될 기다란 미루나무가 서 있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집채의 동쪽 처마로는 두어 발쯤 떨어진 토담에 걸쳐 쓸만한 헛간도 얼마든지 낼 수 있었는데,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려 있는 집이었다.
 삼용은 순애의 고된 시집살이가 영 마음에 걸렸었다.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손위 동서의 고집스러운 횡포는 순애를 한 시도 편하게 버려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밥 짓고, 빨래하고, 집안 청소하고, 밭일을 하고, 논일을 나가는 정신 없는 하루하루가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그런 순애를 삼용은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도무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곳이 없는 순애의 끝없는 침묵과 인내는 결국 삼용으로 하여금 일용의 집을 나서게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새출발이었다. 삼용과 순애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의욕으로 가득차 있었다. 삼용은 우선 농사철이 다가서기 전에 돼지우리와 닭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닭장은 저그 옆집의 흙벽으다 이어서 지으먼 되겄는디......."
 그러면서 그는 순애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마당 동편의 옆집 헛간벽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순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지라오."
 "돼지막은 저그 거름장 옆으다 지으먼 안 되까?"
 그의 눈이 마당 끝의 썩어들어 가기 시작하는 거름더미를 향했다. 토담이 주욱 늘어선 마당 끝에는 한 그루의 작은 미루나무가 토담에 바짝 붙어 파릇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거기에서 토담을 따라 몇 발짝 뒤에는 길다란 미루나무가 그 웅장한 키를 자랑하고 서 있었다.
 "맘대로 혀요. 거름장을 안으로 쪼메 뎅기고 거그다가는 확독이 놓였으먼 좋겄는디......."
 삼용은 순애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밥 짓기 위해 쌀을 갈아씻는 정결한 모습을 떠올렸다.
 "가을 농사가 끝나먼 칙간도 새로 지어야겄어....... 또망이 애들헌티도 위험천만인 거 같고, 잿간도 너무 적단 말여."
 삼용이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삽자루를 손에 들고 뒤란으로 돌아들어가자 순애도 그 뒤를 따라갔다. 삼용은 부실해 보였던 장독대를 다듬을 생각이었다.
 장독대 옆으로는 안방의 뒷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작은 꽃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꽃밭을 안방의 뒷문 쪽에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한여름 더위에 지쳐 뒷문을 열면 거기 화사한 꽃들이 항상 반갑게 마주보며 그 끝없는 향기를 달콤하게 선물하곤 했다.
 동서인 주촌댁은 아예 넓은 마당의 남쪽 토담을 따라 길다란 꽃밭을 만들고 거기에 온갖 화초들을 심었었다. 삼용은 꽃밭을 무척 아끼는 나이든 형수의 마음에서 늘 알 수 없는 의혹을 느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풍겨나는 매서운 분위기와도 우선은 전혀 맞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꽃밭을 가꾸고, 거기에서 자라는 꽃을 보며 살다보면, 당연히 좀더 부드러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을씨년스럽게 넘어져 있는 장독대의 받침용 돌멩이들을 가지런하게 정돈해 놓고는, 사이사이에 삽질한 흙을 채워넣었다. 아직 다 준비가 되지 못한 여나문 개의 빈 항아리들이 듬성듬성 올려져 있었다. 순애는 부엌으로 가더니 한 바가지 가득 물을 퍼와 빈 항아리들의 겉을 대충 씻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삽질에 여념이 없는 삼용에게 말했다.
 "시간이 되믄 내촌에 쪼메 댕겨와요."
 "......."
 삼용이 삽질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할므이가 메주랑...... 멀 쪼메 주실 건디......."
 "간장 띄울라고?"
 "것도 그렇고요."
 "고모가 힘들 거 아녀......? 고생혀서 장만헌 것들일턴디......."
 "그란허믄 당장 밥상에 올릴 만헌 게 없구만요."
 "거그보다 차라리 죽동이 낫지 않을랑가......."
 삼용이 비록 가끔씩 내촌의 처갓집에 들르기는 하였어도, 이런 일에는 내촌의 처고모보다는 그래도 재가한 죽동의 장모가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등가요......."
 삼용은 힘없이 대답하는 순애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장독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빈 항아리들이 마치도 정에 인색한 형수의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사하는 날 형수는 그랬다.
 "밑반찬은 들고 가기 무거울팅게, 가끔씩 댕기먼서 퍼가도록 혀."
 그녀는 쉬운 일처럼 이야기하였으나, 순애가 일부러 큰집에 들를 일은 없었다. 아마도 순애는 어쩔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집에 발을 쉽사리 들여놓지 않을 것이었다.
 삼용과 순애가 장독대를 사이에 두고 쪼그려 앉아 한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마당을 지나 불안한 걸음으로 뒤란을 향해 돌아들어 오고 있었다.
 "막둥이 있는겨?"
 회암댁이었다. 삼용은 부리나케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지금쯤 큰형댁의 방안에 누워 있어야 할 어머니가 여기에는 웬일일까 싶었다.
 회암댁은 무릎관절의 불편으로 인해 되도록 걷는 것을 삼가고 있는 처지였다. 모습을 드러낸 회암댁의 머리에는 작은 항아리가 올려져 있었다. 삼용이 어이가 없어 하며 회암댁의 머리에서 항아리를 끌어내렸다. 항아리와 함께 짚으로 만든 또아리가 그녀의 머리에서 발밑으로 떨어졌다. 순애가 기가 차서 말했다.
 "엄니! 참말로 환장혔구만요."
 삼용이 딱한 얼굴로 회암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제대로 주저앉을 수조차 없었다. 순애가 회암댁을 부축하여 뒷문의 문턱에 앉혔다.
 삼용이 방으로 들어가 회암댁을 방으로 끌어들였다. 어렵게 방으로 들어간 회암댁을 방바닥에 앉히고 순애는 재빨리 그녀의 무릎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느 성수는 시방 바쁘고만....... 일이 어찌나 많이 늘어 뻔졌는지 몰러....... 느가 나가 뻔지닝께 더욱 그러능거 같여....... 내가 먼 염치로 드러누워 구경만 허겄냐? 지가 들고 가겄다는 걸 내가 역부러 이고 온겨....... 당분간은 먹을 수 있을겨......."
 삼용은 코끝이 찡해왔다.
 "난중에 저 사람이 가서 들고 올 것인디, 엄니가 이 먼 난리래여? 참말로 죽고 싶어 환장헌겨요?"
 "느 성이 쌀가마는 들여 논겨?"
 "그러믄요. 먼 걱정이 그러코롬 많데여....... 참말로 미치겄네."
 "난 후딱 가야 혀. 가서 방바닥이라도 훔쳐야지......."
 회암댁이 불편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삼용과 순애는 그녀를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어서 가겨. 집이 가믄 누워서 쉬어야 허는디......."
 "그려야지."
 삼용과 순애는 어려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회암댁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5.
 다시 여름이 왔다. 성옥은 지금 아홉 살의 발가숭이었다. 아홉 살의 발가숭이인 성옥은 완벽한 깜둥이었다. 아니 성옥이만이 아니라 아이들 모두는 아프리카 토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깜둥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은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그리고 또다시 여름이 올 때까지도, 아이들의 피부를 하얀 색으로 돌려놓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을 정도로 강렬하였다.
 아이들은 늘상 체크 무늬의 싸구려 개성베로 만든 팬티 하나만을 걸치고 반 알몸으로 한여름을 보냈다. 계집아이들은 거기에 볼품 없는 치마 하나만을 걸쳤을 뿐이고, 사내아이들은 물론 딱이 입을 만한 러닝 셔츠도 구하기 힘이 들었다. 있다 해도 수십 수백 번씩 빨아입은 것이어서, 이미 흙물이 들을 대로 들어있었다. 닳고 헤진 여기저기를 다른 옷감을 대어 기웠기 때문에 사실은 누더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고무신은 거추장스러워 벗어놓기 일쑤였다. 맨발이라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마을길은 어디나 곱게 다듬어져 있었다. 간혹 깨어진 유리 조각이나 사금파리 조각이 뒹굴어다니면, 그것은 어김없이 어른들의 손에 의하여 말끔히 치워졌다. 들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어른들조차도 십중 팔구 맨발이었다.
 토담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의 흙빛은 더욱 고왔다. 다만 사방에 말라비틀어진 채로 버려져 있는 개나 닭의 배설물만 조심하면 그뿐이었다.
 고무신은 신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발바닥에 땀이 배이면 고무신은 영락없이 듣기 싫은 소리로 찌걱거리며 미끈거리기 마련이었다. 조금만 뛰어도 여지없이 벗겨지면서 발톱이나 발가락을 다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성옥은 정말 고무신을 신어야 할 때가 되면 한결같이 두세 개의 지푸라기를 모아 발등을 꼬옥 붙들어매곤 했다. 순애는 걱정을 했다.
 "얘야, 차라리 벗어 갖고 들고 다니믄 좋겄다."
 고무신은 발바닥에 땀이 차 있을 때에 자주 찢어졌으니까. 삼용은 일 년에 딱 두 번, 설과 추석에만 새 고무신을 사다 주었다. 그래서 찢어진 고무신도 실 바늘을 이용하여 여러 번 기워 신는 것이 예사였다.
 성옥은 제비 똥이 가득 떨어져 어디 디딜 데도 없는 마루를 지나, 무시로 열려져 닭들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안방으로 들어섰다. 벌써 성준은 닭똥을 피하여 뒷문 가에 큰 대자로 벌렁 드러누워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흙묻은 발바닥을 씻지도 않은 채 한잠 자다가, 깨어나면 또다시 그 발로 고샅으로 뛰어나갈 성준이었다.

 삼용은 성옥과 성준을 시원한 마루에 앉혀놓고 이발기구를 챙겼다. 그가 장농 설합의 깊숙한 곳에서 먼지에 잔뜩 찌들어 있는 이발기계를 꺼내자, 그것을 바라보던 성준이 먼저 울음을 먼저 터뜨렸다. 삼용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쳐!"
 순간 성준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곧 성옥의 훌쩍거림이 시작되었다. 삼용이 갑자기 성옥의 따귀에 불이 번쩍할 정도의 강한 귀쌈을 날렸다. 성옥은 두려움에 떨며 어쩔 수 없이 훌쩍거림을 멈추어야 했다.
 "쬐끔만 참으먼 되는겨. 움직거리믄 더 아플거닝께 알아서 혀."
 삼용이 성옥의 머리에 먼저 이발기계를 들이댔다. 성옥은 머리털이 거의 통째로 빠져나가는 긴 고통과 만나게 될 것이었다. 몇 년씩 묵었어도 날을 갈지 않은 기계에는 애꿎은 기름만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서 성옥의 머리통은 온통 기름칠이 될 것이었다.
 기계날보다 머리털은 언제나 한참이나 강했다. 성옥은 시도때도 없이 무작정 잘도 자라는 머리털이 그야말로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학교 가는 길로 오리길을 걷긴 해야 하더라도, 면소재지에 있는 이발소집에 가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을 터이었다. 삼용은 그 몇 푼의 이발료를 절약하기 위해 어느날 장에 가서 완전 구식 이발기계를 사왔던 것이다.
 성준은 성옥이 머리를 다 깎는 동안 형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며 내내 칭얼거렸다. 형의 머리가 다 잘라지면 그 다음은 자신의 차례인 것이다. 기계에 잘려나가는 머리털이 반이었고, 그냥 뽑히는 머리털이 반이었다. 하여 이발이 다 끝나면 두 아이는 온통 황당한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곤 했다.
 손을 들어 머리통을 더듬어보면 이건 이발이 아니라 가위질이나 다름이 없었다. 엉성하게 깎아댄 머리통은 아직도 들쑥날쑥 요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성옥은 다시 삼용에게 마무리를 부탁할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어떠냐. 성옥은 자기 아버지가 새 이발기계를 사오셨다고 자랑하던 친구를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은 끝났으니 기쁨으로 생각하자. 성옥은 부리나케 일어섰다.
 삼용은 자기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발기구를 정리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성옥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성준을 끌고 둠벙으로 나갔다. 책보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깎긴 했지만, 온몸이 옷 속에 박힌 머리칼로 따가웠다.
 성옥은 누더기 셔츠를 벗어들고 몇 번이나 털어보았다. 그러나 다시 입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옷 속에 끼어든 머리털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았다. 특히나 여기저기 기워댄 틈새기에 박힌 머리털을 뽑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성옥이 성준에게 말했다.
 "물 속으다 머리를 꺼꿀로 넣고 씻는겨."
 말을 하고 나서 성옥은 그대로 둠벙 속으로 뛰어들었다.
 "성아, 나도 들어갈겨."
 성준도 물 속에 따라들어왔다. 십중팔구 성옥의 머리에는 몸에 수도 없이 자라고 있는 옴만큼이나 지저분하고 고통스러운 기계총이 자라게 될 것이었다.


 6.
 성옥은 물 속에서 덤벙거리다가 다리를 건너는 둘째사촌형 정원을 발견하였다. 정원은 큰형인 정두보다는 나이가 한참이나 아래여서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몸에 딱 붙는 바지에다 거의 다 떨어져가는 군용 워커를 다부지게 신고 있었다.
 머리에는 털실로 짠 빵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군용 허리띠를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성옥은 아직 어렸지만 동네의 형들이 대개 어떤 상황에서 저런 모습을 취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성옥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성옥은 다급하게 물 속에서 나와 성준을 물가에 앉혀놓고 정원의 뒤를 쫓아갔다. 정원은 다리를 건너 부지런히 걷더니 마을 끝의 임출곤네 대문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함을 질렀다.
 "임형근! 나와라!"
 성옥은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형근은 동네에서 제일 싸움을 잘한다는 소문난 형이었다. 정원 형은 도대체 어쩌자고 그에게 싸움을 청하는 것일까. 성옥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대문을 밀치고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선 정원은 마악 마루에서 내려오는 형근과 마주섰다.
 "니가 주먹을 좀 쓴다 이거여? 그려서 니가 우리 집 자존심을 고로코롬 짓밟어 뿌렸냐?"
 형근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며 맞받았다.
 "너 이새끼, 간댕이가 부은겨? 집이 갔다 오는 사이 정신이 햇까닥 돌아뿌렸냐?"
 정원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렁게로 시방 한판 붙어보자 이것여. 준비 다 되었냐? 내가 아까 말혔지. 집이 들렀다가 반드시 찾어 온다고."
 정원이 앞으로 주먹을 모으며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그냥 서있는 것처럼 보이던 형근의 발이 눈 깜빡할 사이에 정원의 옆구리로 파고 들었다. 성옥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눈을 감아버렸다.
 성옥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옥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발차기에 나자빠질 줄 알았던 정원 형이 오히려 형근의 얼굴을 연신 강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형근의 얼굴에 금새 싯뻘건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형근의 동생인 정근과 문근이 씨근덕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곧 싸움은 3대 1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원 형이 위급해질 게 뻔한 이치였다. 성옥은 재빨리 몸을 돌려 집을 향해 뛰었다. 빨리 아버지에게 알려야 했다. 그러나 성옥은 몇 걸음 뛰기도 전에 벌써 달려오는 셋째 형 정필을 발견하였다. 그 뒤에는 백부님과 아버지 삼용의 모습도 보였다.
 이어 임출곤네 마당에서는 서로가 뒤엉켜 걷잡을 수 없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먹과 발길질만 서로 주고받더니, 급기야 서로의 몸을 붙들고 그 넓은 마당을 사정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온 동네를 흔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이제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거나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 제대로 기운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형근의 손에 기다란 작대기가 들려졌다. 그는 그 작대기를 정원을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정확하게 등허리에 한 대를 얻어맞은 정원은 작대기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벽력 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비겁한 새끼!"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형근의 복부에 주먹을 질러 넣었다.
 "엌!"
 소리와 함께 형근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원은 그의 등짝을 두어 번 거세게 밟아대더니 몸을 돌려 정근과 문근을 향했다. 정필이 정원의 허리에서 떨어져나온 군용 혁띠를 주워 그들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기세에 밀린 정근과 문근이 뒷걸음을 치면서 마루 위로 밀려갔다.
 순간 비호같이 날아 마루로 뛰어올라선 정원의 발길이 정근의 면상을 걷어차고 있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마루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제 형을 감싸던 문근도 여지없이 정원의 다음 발길에 걷어채였다.
 형근은 정신을 잃었는지 마당에 쓰러져 있었다. 어느 사이 나타난 임출곤과 그 아내가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분노한 얼굴로 온몸을 떨고 있는 일용의 팔을 붙잡았다.
 "성님! 지발 그만혀요. 아이들 죽잖어요!"
 그러자 일용의 노기가 가득한 호통소리가 터졌다.
 "너 이놈! 느가 우리 집안을 깔보았다 이거여?"
 임출곤의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사둔 어른! 머땀시 그러셔요? 지발 즈가 잘못혔으니 용서하시지라오."
 급할 때는 모두가 사돈 어른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이 난투극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는 임출곤의 내외는 무조건 잘못했다는 소리만 연발하고 있었다.
 "무릎을 팍 꿇고 빌어야 혀! 그란허믄 죽일겨!"
 노기가 가시지 않은 일용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듣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일어난 정근과 문근이 마당에 엎어져 있던 형근을 들쳐 업고는 방안으로 숨어 버렸다.
 방안에 들어가 문고리를 닫아거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원이 차갑게 웃었다. 난투극이 끝난 마당에는 부러진 작대기와 여러 개의 막대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군데군데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임출곤 내외가 일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즈가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고만이라오. 인자 고정허셔요."
 일용이 훈계조로 말하고 있었다.
 "느가 시방도 옛날 생각을 허고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아는디, 나 아적은 안 죽었다. 느놈들이 죽어야 나도 죽어."
 임출곤이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잘못혔구만이라오."
 "느가 그 동안 이 동네 사또 행세를 몇 년이나 혔냐? 그렸으먼 적당히 반성허고 몸을 새릴 줄도 알어야지, 사람을 우습게 봐? 느놈들이 돈좀 있다고 폼을 잡어도 유분수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느놈들 논밭떼기 다 누구 거여? 누구 거여? 이 도둑놈아."
 "성님! 도대체 머땀시 그런디요? 머땀시 화가 났는가라오?"
 "느 자식놈헌티 물어봐! 머라고? 빨갱이라고? 멋도 모르는 빨갱이라고? 느가 우릴 조메 도와줬다고 인자 한꺼번에 우릴 죽일라고 그러는겨? 느놈들 땜시 혁명이 일어난겨. 느놈들을 몽땅 잡아들이능 게 바로 혁명인겨. 알기나 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삼용은 말없이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다가 대문간에 쪼그려앉아 이 모양을 지켜보고 있는 성옥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삼용은 마루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면서 마당을 지나 대문간의 성옥에게로 다가섰다.
 "인자 가자. 다 끝났구먼......."
 성옥은 삼용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면서야 겨우 전후 사정을 조금 들을 수가 있었다.
 "느 사춘형이 학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디 말이다....... 그 논두렁길이 오죽 좁냐? 그 형근이란 놈이 슬슬 걸어가믄서도 길을 종내 안 비켜주더란다. 조메 비켜달라니까? 되먹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믄서 끝까지 길을 막더니, 동네 다 와서야 비켜주먼서 병신 같은 빨갱이 새끼라고 혔디야. 어디 그게 형근이란 놈 잘못만 있겄냐? 부모란 작자들이 노상 애들 앞으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닝께 애들까지도 그러는 게지."
 "아빠, 빨갱이가 머여요?"
 "빨갱이는 공산당을 말하능겨. 이북의 김일성이를 숭배허는 자들여. 빨갱이로 찍히먼 여그서는 살 수가 없다. 맞아죽는겨."
 성옥은 그제서야 빨갱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다.


 7.
 이틀 후, 형근은 끝내 읍내의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동안 동네에서 제일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던 임출곤은 도무지 망신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웬만하면 집에서 견디도록 하고 싶었으나, 온몸을 수도 없이 얻어맞은 형근은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더 나빠져갔기 때문에 더 이상은 앉아서 보고있을 수가 없었다.
 정원도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일 터였지만 웬일인지 그는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승자로서의 기쁨이 통증을 줄여 주고 있을 것이었다.
 형근이 읍내의 병원으로 실려간 다음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면소재지의 지서에서 박주임이 삼용을 찾아왔다. 그의 뒤에는 평소 그와 절친하게 지내는 김촌의 최병수가 어김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박주임은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장삼용! 자네가 주먹 한 번 써먹었다구......?"
 "......."
 토방 끝에 쪼그려앉은 채로 삼용이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삼용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빛이 번쩍거렸다.
 "아쭈! 기분 나쁘다, 이 거여?"
 "......."
 "사람을 쳤으먼 벌을 받어야 허는디......."
 마지못해 삼용이 한마디 했다.
 "맞은 놈이 고소를 안 허는디, 머땀시 시비 거는 거여요?"
 "고소를 안 혔다 이거구만? 당신 멀 잘 모르는 거 같여. 법이란 게 그러코롬 허술헌지 아나본디, 난 쪼께 걱정이 되는구만 그려......"
 병수가 박주임의 등 뒤에서 눈을 깜짝거렸다. 가능한 한 말대꾸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였다. 삼용이 입을 다물었다. 박주임이 성큼성큼 마당을 지나와 마루에 몸을 걸쳤다. 그의 몸에서 짙은 막걸리 냄새가 풍겼다.
 "이 집은 참말로 시원하네. 살기 좋은가벼?"
 병수가 그의 옆에 걸터앉자 박주임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삼용이 외면하고 돼지우리 곁의 구정물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 바가지 가득 구정물을 퍼담아 돼지 우리 안의 돼지밥그릇에 쏟아부었다. 이미 충분히 자란 돼지가 꿀꿀거리며 반갑게 밥그릇으로 덤벼들었다.
 "어이! 어려운 걸음 혔는디, 막걸리 한 잔 안 줄겨?"
 삼용은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서버렸다. 병수가 재빨리 삼용을 향해 말했다.
 "김치에다가 막걸리 한잔만 내놔봐. 안주는 필요없당게. 금방 갈 거구만......."
 그러자 박주임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다 누구 덕인지, 아는겨, 모르는겨? 사람은 은혜를 입으먼 평생 잊지 못허는 법인디, 자네는 짐승인가......?"
 삼용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고 있었다.
 "머땀시 우리집에는 온겨요?"
 병수가 대신 대답했다.
 "아따! 승질 좀 그만 내먼 좋겄네. 자네 땜시 여그 온 거는 아니구만. 아까 낮에 붙잡은 도둑을 놓쳤디야. 수갑을 찬 채로 달아났다는디, 아무리 뒤져도 없다는구먼."
 삼용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오죽 못났으먼 잡은 도둑을 놓쳤을까?"
 박주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병수가 말했다.
 "지가 가믄 어디로 가겄어, 금시 잡힐 거구만......."
 삼용은 일단 술상은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박주임이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가 않았다. 삼용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과 함께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놈이 왜 여기를 찾아왔을까.
 "여보! 여그 술상 좀 간단히 준비혀야겄네."
 삼용은 되도록 아내가 박주임과 얼굴을 맞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숨도 쉬지 못하고 움크리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금방 간디야....... 준비 끝나믄 내가 들고갈 것이구만......."
 순애는 말없이 일어나 찬장을 열었다. 그녀는 작은 상에 김치 한 그릇과 삼용의 저녁밥상에 올려놓을 심산이었던 막걸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짚단 더미 속에서 고구마 두어 개를 꺼내 껍질을 벗겨낸 다음 잘라서 그 옆에 올려놓았다. 삼용이 기다렸다가 술상을 들고 부엌을 나서자 그의 모습을 바라본 박주임이 소리쳤다.
 "사람 대접을 요러코롬 하믄 못쓰는겨. 어디 손님이 왔는디 안주인이 얼굴도 안 비친데여?"
 삼용의 눈에서 불이 번쩍 하고 일어났다.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놈은 술김에 아내의 얼굴을 한 번 보자는 것일 터였다. 삼용의 가슴이 분노로 인해 쿵쾅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