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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5 08:56
순애 제2권 / 제12부 운명적인 만남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4,011  


 12. 운명적인 만남


 1.
 1972년의 봄이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성옥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여느 농촌의 학생과 다를 것 없이 공부와 농삿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도시학생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소중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격이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루종일 입을 열지 않는 그의 과묵함으로 인하여,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성적인 성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어디에서도, 그리고 누구와 어울려서도 가능한 한 말을 최대한으로 아꼈다. 그것은 그가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에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사회에 대한 적응방식이었던 것이다.
 성옥은 술을 즐겼다. 기회가 된다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남보다 먼저 취하였고, 취하면 곧 기름진 목소리로 흘러간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가 술취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대개 동석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게 전라도의 한이라는 것인가. 참 잘도 넘어간다."
 그에게서는 늘 전라도 냄새가 났다. 그의 어지간히 바꿔진 말투에도 끝내 전라도 사투리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가끔 말하곤 했다.
 "내 조상은 경상도에서 살었구만. 그런디 나는 전라도서 나갖고 거그서 자랐단 말여. 그 넓은 황금들녘에 한번 나가봐라. 바지를 걷고, 양말을 벗고, 그 논두렁 속에 한번 들어가 봐라. 세상은 자연여. 세상은 바람이고, 들풀이고, 햇빛이고, 달빛이여. 거그를 떠나면 모다 죽는겨."
 그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학내의 대모대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생각과는 분명 동일한 생각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네들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낯이 설고 두려웠다. 그들의 혁명적인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보편적인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가 마음에 편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일종의 이해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굴종이요 도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불의와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그 자신 역시도 그 불의 속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도 운동권에 투신한 사람이 적지 않다. 성옥은 그들의 날카롭고 명료한 의식에 쉽게 매료되었다. 그들의 정신은 끝없이 열려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정신세계는 위험천만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고, 현실사회와 미래사회를 비판하고 추구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고, 불의에 굽히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끌려가 고초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태연하고 의연할 수 있는 인간적 무게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울었다. 달포 전 끌려갔다가 돌아온 동료가 밤마다 가위에 눌려 고통을 받다가 끝내 숨진 것이었다. 그 싸늘한 자취방에서....... 그들은 누군가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의 먹이를 노리고 있는 공동묘지에조차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외롭게 묻혔다. 그것이 이들의 아픔이요, 눈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한 선일 수는 없었다. 무엇도 이 사회에 가장 적절한 처방일 수는 없었다. 우선은 가장 시급한 문제점에 해결하기 위해 젊은 대학생들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상처를 입지 않고도 분노한 바위는 계란 바구니를 통째로 짓밟아버리는 것으로 그들의 무서운 힘을 과시하였다.
 성옥은 가끔 짓이겨진 그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성옥을 필요로 했고, 성옥에겐 얼마든지 그들과 동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성옥은 궁극적으로는 그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너무도 미약한 힘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어머니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와의 슬픈 약속 때문이었다. 삼용은 숨을 거두면서 어린 성옥에게 말했었다.
 '니 엄니를 지키그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성옥이 순애에게 물었었다.
 '아부지가 머땀시 박주임에게 그랬던 거여요?'
 순애는 차갑게 얼굴을 돌리며 내뱉었다.
 '너도 니 마누라를 지키다보먼 그러코롬 되는겨.......'

 다음해 정월 성옥은 모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작 『동진강』은 문단에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목소리를 앞세운 일군의 작가들에게 겸허한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성옥의 미처 다듬어지지 못한 작가적 정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소설의 기본적 테두리를 이미 벗어나 버린 모순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아이러니였다.
 그는 그의 작품이 살아 숨쉬기를 원하였다. 그는 허구를 바탕으로 의미있는 인생을 창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목적한 바의 살아있는 인생에 최대한 접근하여 가능한 한 허구를 줄여 표현하자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성옥이 2학년이 되어 수강신청서를 거의 다 접수하고 마악 새로운 수업이 시작된 3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가 첫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학과 조교가 성옥을 찾았다. 학과사무실에 손님이 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옥은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지라 약간은 의아해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등이 보이는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긴 머리칼로 보아 분명 여자였다. 조교선배가 소파에 앉으며 성옥을 소개하자, 그녀는 일어서며 성옥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수그렸다. 아직 앳된 얼굴의 그녀에게서 풋풋한 싱그러움이 한껏 풍겨나왔다.
 성옥은 문득 그녀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
 "성옥 씨......, 저 정림이에요."
 성옥의 기억 저편에서 아스라하게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가 답답한 듯 말을 덧붙였다.
 "저희 아버님 성함은 윤천섭이셔요. 그 이름도 생각나지 않으세요?"
 윤천섭......? 천섭 아저씨.......
 "수월......."
 그가 중얼거리듯 짧게 말하자 비로소 그녀가 안심이 된 듯 얼굴을 폈다.
 "맞아요. 수월의 정림이에요."
 성옥이 얼굴에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니, 정림의 얼굴을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리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그리운 얼굴을 과연 언제부터 잊어버리고 있었던가. 그의 의식 한켠에 끈질기게 남아 꿈처럼 남아있던 추억 속의 소녀, 그가 바로 정림이 아니던가.
 "앉아서 천천히 말씀하세요."
 조교선배가 책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며 말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그를 향하여 목례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은 섭섭하네요......."
 "......."
 성옥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어 버리자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사실은 저도 잊고 있었어요."
 "......."
 "일단 대답 좀 확실하게 해보세요. 절 기억하시는지요? 정말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아녜요?"
 성옥이 부끄러운 얼굴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잊어뻔질 리가 있겄습니까?"
 "그럼 제가 제대로 찾아온 거군요."
 그녀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성옥은 얼떨떨한 채로 그냥 앉아 있었다.
 "신문에서 보았어요. 신춘문예에 당선된 거 말예요. 축하드립니다. 저보다 저희 아버님이 먼저 보셨어요. 바로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망설이고 질질 끌다가 이제서야 찾아온 거죠."
 "아버님이요?"
 "예, 아버님은 성옥씨와 성옥씨 어머님을 잘 기억하고 계셔요. 아저씨와도 절친한 사이시잖아요? 아버님께서는 저더러 성옥 씨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오라 하셨는데요, 제가 좀 늦은 거예요."
 성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 말씀이신지 알겄네요."
 "언제쯤 저희 집에 들러주시겠어요? 오늘 당장도 괜찮거든요."
 "......."
 "다른 약속이 있으면 다음에 가셔도 됩니다."
 "그건 아닌디요. 왠지 좀......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그러실 거예요. 그러면 말예요. 저희 집에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시고요, 오늘은 저 커피 한잔 사주시지 않을래요? 사실은 저도 너무 긴장해서 목이 타거든요."
 "그러죠 머......."
 두 사람은 학과 사무실을 빠져나와 캠퍼스를 나란히 걸어내려갔다. 그 사이에도 그녀는 도대체가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은지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대학생 작가라는 프리미엄은 있었지만, 사실은 좀 불안했거든요. 세월이 흘렀으니 분명 변하긴 변했을 텐데, 옛날보다 못생긴 쪽으로 변해 버렸으면 어떡허나 하고 말예요. 그런데 만나고보니까 옛날보다 더 멋있어졌네요. 절 실망시키지 않아서 고마워요.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오는 건데 제가 늦어도 너무 늦은 거 같아요."
 낯이 간지러워진 성옥이 말했다.
 "전 제가 산적의 자손은 아닌가 늘 생각허는디요? 아니믄 아프리카서 굴러운 깜둥이 노예의 후손이거나요."
 "호호호. 얼굴이 검은 건 오히려 더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거 아닐까요? 실제로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건강한 체질이라고 들었는데요."
 "다 허는 말이죠. 저 같은 사람 열등의식 가질까봐 신경써 주시는 거 아니겄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걷다가 문득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검기는 검네요."
 성옥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와 친밀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성옥의 머리 속은 자꾸 옛날로 더듬어 올라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그녀의 얼굴을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제대로 나타나질 않았다.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갯벌에서 빠져나온 알몸뿐이었다. 무언지도 모르고 바라보았던 그녀의 설익은 알몸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다면 충분히 부끄러울 만한 아릿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그가 물었다.
 "지금 몇 학년여요?"
 "아시잖아요? 이제 갓 들어온 신입생이에요. 성옥 씨는 저보다 한 살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어요......."
 그녀의 천성적인 성품 때문이었을까. 성옥은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신뢰감을 느꼈다. 성옥은 문득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도 예전처럼 그에게 따뜻할 것만 같았다.
 "시방 아버님이 댁에 계실는지 모르겄네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며 반갑게 말했다.
 "계셔요.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거든요. 그럼 지금 저희 집으로 가시죠."
 "아버님께서 대학에 기십니까?"
 "예."
 "수월 같은 시골구석에서 자라셨는디 대하교수가 되셨응게로, 참말로 대단하신 분이구만요."
 "그럼요, 우리 아빠 대단하신 분예요. 만나보세요."
 그녀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2.
 그들을 실은 택시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미아리를 지나 수유리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단장된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골목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그녀는 그 주택들 중에서도 약간은 큼직해 보이는 양옥집 대문간에 올라서 초인종을 눌렀다. 건물 뒤편으로 우거진 숲이 보였다.
 성옥은 약간 기가 눌려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처음 들어서보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대문간의 스피커에서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림이냐?"
 "예, 아빠 저예요. 손님이 있거든요. 성옥 씨요."
 스피커에서 문득 소리가 사라졌다.
 "아빠!"
 그녀가 다시 부르자 잠시 후에 자물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성옥은 그녀의 뒤를 따라 잔디가 심어진 뜰을 거쳐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중앙에 화려한 소파가 놓여진 넓은 거실에는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중년의 부인이 부엌에서 얼굴을 삐죽이 내밀며 거실로 나타났다. 정림의 어머니 영채였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그를 거실의 소파에 앉게 하고는 정림에게 말했다.
 "아빠는 서재에 계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성옥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안았다. 정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 인기척이 없자 그녀가 문을 열었다. 천섭은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정림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아빠! 웬 담배를? 성옥씨 왔어요."
 천섭이 등을 돌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정림이 굳어진 얼굴로 성옥의 맞은편에 앉자 영채가 쟁반에 올려진 찻잔을 들고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작년에 벌써 신춘문예에 당선되셨다구요?"
 성옥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예....... 부끄럽구만요."
 "우리 정림이 실수한 것은 없는지 모르겠네요? 워낙 애가 천방지축이라서......."
 "아녀요. 오히려 제가 몰라뵙고 실수가 많었구만요."
 그러는 사이 천섭이 거실로 모습을 나타냈다. 성옥은 그가 나이에 비해 너무 머리가 흰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수그렸다. 천섭은 성옥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가 김촌의 성옥인가? 세월이 많이 흘렀네....... 편히 앉게."
 성옥은 그의 손을 잡았다 놓으며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안경 너머의 깊숙한 눈이 성옥에게 무언가를 간절하게 말하는 듯했다.
 "우선 들게......."
 이번에는 찻잔을 들어올리던 그의 손이 심하게 떨었다. 그의 손을 바라보던 정림이 눈을 크게 뜨고는 천섭을 바라보았다.
 "아빠, 기운이 없으신가봐......."
 "응, 조금 그렇구나."
 천섭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하여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성옥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신가?"
 성옥은 기억했다. 수월에서도 그는 성옥을 만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물었었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예. 별일은 없구만이라오. 몸이 불편하시면 이만 돌아갔다가 다음에 다시 찾아뵙겁습니다."
 천섭이 머리를 저으며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아차 싶었는지 그의 얼굴색이 변했다.
 "오래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구만이라오."
 성옥은 사고라는 말에 조금 힘을 실어 말했다. 천섭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랬군....... 안됐네. 어머님께서 고생이 많으셨겠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
 "자네 얼굴을 보니 어렸을 때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네 그려......."
 영채가 무심코 끼어들었다.
 "당신하고 비슷한데가 많아요. 어렸을 때에도 그러더니...... 두 분이서 밖에 나가시면 아마 십중팔구 부자지간인 줄 알걸요."
 천섭이 영채의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소리......."
 성옥이 민망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서울에는 아는 분들이 없어 많이 외로웠구만요. 불러 주셔서 감사헙니다."
 천섭의 얼굴이 다시 성옥을 향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의 거처 말이네."
 "자취생활을 허고 있구만이라오."
 "자네도 고생이 많네......."
 "당연헌 고생이구만요....... 별로 고생이라고 생각허진 않고 있구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딱딱하여 보였던지, 아니면 실없는 소리 말라는 아까의 핀잔을 의식해서였던지 영채가 부드럽게 말했다.
 "가끔 놀러 오세요. 정림이보다는 위잖아요? 정림이도 오라비가 없거든요. 동생만 하나 있어요. 같은 고향이라면 가족처럼 지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마침 우리 둘째아이도 누구 공부를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그럴 생각은 없나요?"
 "감사거구만요. 생각해 보겄습니다."
 성옥은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성옥은 그 일을 맡지는 않았다. 웬지 거저 도움을 받는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궁핍한 생활에 대한 걱정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다.


 3.
 두어 달이 지난 초여름에 정림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강의실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정확하게 끝나는 시간에 강의실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성옥을 그녀는 당돌하게 불러세웠다.
 "장성옥 씨!"
 놀란 성옥이 바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희 집 전화번호 잃어버리신 거 아니죠?"
 그녀의 거의 고함에 가까운 커다란 소리에 강의실을 나서던 다른 학생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성옥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저 아가씨도 팬인가? 되게 세련되었는데? 부럽다. 부러워. 전화번호는 나한테나 적어줄 일이지......."
 성옥은 부끄러움과 어이없음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가서 성옥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재미있다는 듯 살짝 눈웃음을 쳤다.
 "전화 한번 주시면 어디 동티가 나나요? 기다렸잖아요."
 "......."
 그녀는 서슴없이 성옥의 팔짱을 꼈다.
 "오늘 약속 없으시죠? 저 데리고 바람 좀 쐬러가요."
 "당장 시험이 시작되는디요?"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장학금 타실 일 있어요?"
 "......."
 "우이동 골짜기가 좋겠어요. 버스를 타면 금방이잖아요? 시험공부는 내일부터 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들은 캠퍼스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 타서도 성옥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떠들어대는 정림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동생 말예요,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요. 근데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나 봐요. 밤새 공부하는 줄 알고 방문을 열어 보면, 글쎄 소설책만 보는 거예요. 그것도 좋은 책이면 내가 말도 안하겠어요. 온갖 무협지는 다 쌓여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지못한 성옥이 말했다.
 "지도 고등학교 댕길 땐 무협지 숱허게 보았구만요."
 "그래도 공부는 하셨으니까 대학에 들어오신 거 아닌가요?"
 "공부는 먼 공부여요? 어찌케 허다보닝께 여그로 온 거지요."
 "전 이해가 안 가요. 학교 성적은 바닥인데 도대체 공부할 생각은 안 하다니......."
 "......."
 "저희 아버지가요, 그 녀석은 성옥 씨한테 맡겨보라 하셨어요. 엄마가 이미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대두요, 다시 한 번 부탁해 보라 하셨거든요. 그 임무를 제가 떠맡았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행차는 작전의 하나가 아니겠어요? 지금은 작전중이라 이거예요."
 "......."
 "아빠는 말씀하시길 공부는 안 가르쳐도 좋으니 사람이 되도록 대화만 나누어 주어도 좋대요. 어때요? 솔깃하지 않으세요? 이런 미끼는 흔하지 않을텐데요......."
 "......."
 "성옥 씨는 말예요. 말도 안 하고 사람 쳐다보는 것 보면 꼭 우리 아빠 같애요.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요. 철없이 떠들어대는 사람을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 쳐다보기만 하면 무슨 특별한 재미라도 있는 건가요?"
 성옥이 피식 웃으며 눈길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그래도 그녀는 그의 과묵함이 과히 싫지는 않은 듯했다. 성옥이 고개를 돌리며 간단하게 말했다.
 "곧 입대할 거구만요."
 정림이 깜짝 놀라면서 성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머땀시 그렇게 놀란데요? 남 군대 간다는디......."
 "언제요?"
 "아직은 잘 모르는구만요. 영장이 날러와봐야 알겄지요."
 정림의 얼굴에 다소 실망하는 빛이 스쳐갔다.
 "그래도 그렇지요. 갈 때 가시더라도 그동안만이라도 애를 좀 봐 주세요."
 "......."
 성옥의 입대 이야기가 나오자 정림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들은 우이동 골짜기의 입구에 도착하여 천천히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그리고 골짜기에 도착하여 골짜기의 평평한 바위 위에 앉을 때까지도,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왠일인지 갈수록 더 상심해 가는 듯 했다. 성옥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가능한 한 그녀의 감정을 더 이상 건드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구만요. 집으로 찾아가면 되겄어요?"
 그녀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럼요. 매일 오시면 좋겠어요. 그게 힘이 들면 이틀에 한 번씩 오셔도 좋구요."

 가을에 성옥은 입대영장을 받았다. 입영연기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예고된 영장이었다. 정림은 새벽부터 찾아와 소집장소인 전라도 김제읍까지 그를 따라와 주었다. 천섭은 그 전날 전화를 통해 군생활을 건강하게 마치고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발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빡빡머리로 나타나는 성옥을 바라보고 정림은 웃다가 울먹이다가를 반복했다. 어느 사이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서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소집장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성옥이 그녀의 손을 떼며 말했다.
 "어여 올라가야 혀."
 "어떻게 해......."
 그녀는 점차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오히려 성옥이 그녀를 걱정했다.
 "자대 배치 받으먼 편지헐 거구만....... 아버님 어머님께 고맙다는 인사 좀 대신 드려줘."
 "알았어. 건강 관리나 잘해야 해."
 그녀는 오랫동안 소집장의 입구에 서 있었다.


 4.
 성옥은 훈련으로 모든 일정이 짜여진 논산훈련소를 벗어나 자대에 배치를 받자마자, 군대라는 곳도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운수만 좋으면 얼마든지 자기 시간을 갖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군대였다. 다행히 그는 이미 얻어놓은 명성으로 인해 부대의 행정반에 배치가 되었고, 그 보직은 성옥에게 작품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약속했다.
 그의 부대는 경기도 전곡 부근이었다. 서울에서 한두 시간의 거리였으므로 정림은 거의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그를 찾아왔다.
 두 해가 훌쩍 지난 후 정림은 어느 날 자신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성옥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가슴 한구석이 비어갔지만 비어가는 허전함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남자 친구에 대해 비교적 짤막하게 말해 주었다. 그 속에는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끼어 있었다.
  성옥은 물었었다.
 "어떻게 만난 사람이여?"
 "아빠가 소개시켜 준 사람이야. 어쩌면 난 그때 선을 본 건지도 몰라. 결혼이 전제가 된 만남이었어. 아빠와 그 친구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거든......."
 "아직 학생인디, 머가 그리 급혔디야?"
 "나도 잘 모르겠어."
 "어찌튼 잘 되았구만. 축하혀."
 "......."
 "그리고 나땜시 혹시라도 그 친구 신경쓰는 거 부담스러우닝께 더 이상은 찾어오지 말어."
 "날 동생처럼 변함없이 생각해 줘. 내가 성옥 씨를 찾는 것은 내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 아빠의 뜻이 더 강해. 성옥 씨는 잘 모르는 것 같아."
 "......."
 "다음에는 그 사람하고 함께 올께. 서울이 가까우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

 성옥이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역시 정림이 가장 반가워했다.
 "우리 바다 구경 좀 하지 않을래?"
 "요즘 누가 바다엘 간디야? 엄청 추워."
 성옥은 그녀를 가능한 한 동생처럼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두, 가고 싶어."
 "시간이 많은 모양이네?"
 "......."
 성옥은 정림을 인천 송도의 돌섬으로 안내했다. 5월 초순의 바람은 아직도 차가웠다. 더우기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변의 바람은 마지막 겨울 냄새를 안고 있어서 더욱 추웠다. 게다가 모두들 이미 가벼운 봄옷으로 바꾸어 입은지도 한참이나 지난 시기였기 때문에, 이 바람은 가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살결이 모두 들여다 보이는 얇은 하얀색의 반팔 브라우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쨓든 바람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 같은 망사처럼 헐거운 봄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엔 무늬 없는 하얀색의 깊숙한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는 연신 앞가슴 깊숙히 팔짱을 끼며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비교적 두꺼운 군복을 입은 성옥조차도 더 오래 버티지는 못할 만큼 바람이 세찼다. 그는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얇고 긴 치마가 바람에 자꾸 휩쓸렸다. 블라우스의 소매 끝이 애처롭게 팔랑거렸다. 그녀는 모자를 어느 틈엔가 벗어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모자는 몇 번이나 바람에 날려 벗겨졌을 것이었다.
 허리까지 이르는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자꾸 흩어지자,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모아잡고서는 머리핀을 새로 꽂았다. 그리고는 애써 치마끝을 추스리며 바위 모서리에 앉아 물이 빠져나간 갯펄만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라니 질려 있음에도 그녀는 아직 일어나자는 소리가 없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였을까.
 갯펄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게떼들이 일시에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성옥과 정림을 의식하고 있다는 시위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들 사회의 침입자에 대하여 생존을 위한 비상훈련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그락사그락거리는 그들의 가녀리면서도 무거운 함성이 저물어가는 갯펄에 깊이깊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옥은 그 옛날 내촌 외갓댁의 사랑채에 설치되어 있던 누에들을 생각했다.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의 주둥이를 가만히 바라보면 뽕잎 끝을 마치 기계처럼 쉬임없이 그리고 일사분란하게 먹고 있었는데, 한마리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누가 들을 수 있겠는가. 저처럼 수만 마리 수십만 마리가 한꺼번에 뽕잎을 갉아먹다보니, 방문을 열면 놀랄 정도의 요란하고도 엄청난 소리가 만둘어졌던 것이다. 저 게떼들의 어찌할 수 없는 소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녀의 옆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성옥은 마치 고문을 당하기라도 하는 양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부끼는 블라우스 사이로 하얀 어깨살이 들먹였다. 애처럽게도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살갗에서는 오돌토돌한 작은 돌기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가끔씩 들쳐지는 그녀의 치마 끝으로 잘 뻗어내린 그녀의 창백한 종아리가 얼씬거렸다. 성옥은 시선을 종내는 먼 바다로 돌려버렸다. 바위 틈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소라껍질 같은 것이 엉덩이를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자 그만 가지."
 성옥이 일어서며 가볍게 엉덩이에 묻은 소라껍질을 털어냈다. 그러면서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부드럽게 젖어 있었다. 성옥은 그것이 그녀의 눈물 때문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선을 갯펄의 끝으로 돌렸다.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응"
 "나 말이야?"
 "응."
 "마음이 변했나봐."
 성옥이 잠시 어리둥절했다.
 "먼 말인지 잘 모르겄네."
 "……."
 "내가 무슨 잘못헌 일이라도......."
 "......."
 "말혀봐."
 "그만두겠어, 가."
 그녀가 갑자기 단호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화가 난 듯한 그녀의 얼굴 표정 때문에 성옥은 다소 불안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를 빠져나와 평지로 나서자 그녀는 성옥의 팔짱을 끼었다. 가능한 한 매달리는 자세를 취하며 그녀는 고개를 성옥의 어깨 쪽으로 기울였다. 가끔씩 허리춤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젖가슴이 성옥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어린 소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사잇길로 들어서자 바람의 세기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었다.
 돌섬으로 나서는 연인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많이 어두워졌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과감하게 밀착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옥은 한동안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성옥의 팔을 풀고는 갑자기 정면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나...... 그 남자 떠날래."
 "……."
 "진하 씨 말야."
 "머땀시?"
 "그래야 될 것 같아."
 "그려도 되겄어? 부모님께서 용납허지 않으실 턴디. 문제가 있으먼 해결을 혀야지. 달어나지 말구."
 "달아나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정림은 한번 그와 함께 성옥 앞에 나타났었다. 그의 아버지는 윤교수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윤교수가 탐을 내는 젊은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준수한 용모의 그는 어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도대체 왜지? 그만헌 친구면 다시 구허기 힘들턴디......."
 그녀가 성옥의 어깨에 더욱 달라붙으며 간신히 말했다.
 "성옥 씨를 떠날 수가 없어서 그래......."
 성옥은 휘청거렸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동시에 성옥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한 감동이 물결쳐 왔다.


 5.
  성옥이 군복을 벗고 캠퍼스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김촌에 머무르다가 새 학기 복학신청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성옥이 고속버스 터미날에 내려서자 정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팔짱부터 끼었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성옥은 걱정스럽게 듣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이미 흥분과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성옥이 말을 꺼냈다.
 "어디로 가는 거여?"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주차장......?"
 "누가 온 거여?"
 "아니예요. 아빠가 차를 뽑아 주셨어."
 성옥이 진심으로 말했다.
 "좋겄네."
 "그게 내 차인가? 성옥 씨 차지."
 "먼 소리데여?"
 "아니예요....... 그냥 해본 소리야....... 실은 아빠가......."
 정림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 웬지 성옥의 기분을 거슬를 것만 같아서였다. 천섭은 그녀에게 말했었다.
 '네가 끌다가 성옥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빌려 주거라. 군에서 운전면허는 땄다면서....... 중고차라도 한 대 사주었으면 싶은데, 그 아이가 받을성 싶지가 않구나.'
 정림은 성옥을 아끼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성옥은 정림의 차에 실려 수유리로 들어섰다. 윤교수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의 성옥이 현관에 들어서자 활짝 웃는 영채의 뒤에서 천섭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고생이 많았네. 어서 오게."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자 천섭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몸이 더 건강해진 거 같아. 그동안 시골에서 좀 쉬면서 몸관리도 했겠지만, 이제부터는 공부도 해야 하고 작가니까 좋은 작품도 써야지....... 안 그런가?"
 "예, 열심히 혀야지요. 제게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항상 감사허는 마음을 갖고 있구만요. 정말 감사헙니다."
 "우리가 아들이 없어 그런지도 몰라. 정림이 어머니도 자네한테는 관심이 참 많다네."
 영채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요, 우리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생기는지 모르겠어요. 편안하게 생각하고 우리집에 가능한 한 자주 들러줘요."
 천섭이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시골에는 별일이 없겠지?"
 "예......."
 천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림을 향해 말했다.
 "참, 그런데 너는 요즘 엄군은 만나지 않는 거냐? 왜 자주 오던 전화가 없는 게 이상하지 않니? 장군에게 인사도 시켜야 할 거 아니냐?"
 천섭은 성옥이 이미 그를 만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림이 얼굴을 굳히면서 짧게 말했다.
 "아빠, 저 이제 그 사람 만나지 않아요."
 천섭과 영채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정림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냐?
 "끝냈어요......."
 "왜? 무슨...... 문제가 있었니?"
 천섭이 격앙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자꾸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정림이 어쩔 수 없이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그 사람이 먼저 떠났어요."
 "그럴 리가 없다. 엄군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야."
 "아빠가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잖아요?"
 "이유가 뭐라든?"
 "그 사람 성옥 씨를 의식하고 있었어요."
 순간 천섭이 눈을 감았다. 그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영채가 몸을 일으키며 그를 불렀다.
 "여보!"
 천섭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손바닥을 계속 폈다 쥐었다 하고 있었다. 영채가 다급히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알약을 꺼내왔다. 그 사이 정림은 부엌으로 달려가 물 한 컵을 들고 왔다. 천섭은 그것을 받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천천이 눈을 떠 정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된다....... 정림아, 그러면 안 된다......."
 그는 눈을 돌려 성옥을 바라보더니 힘들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불안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던 성옥이 몸을 일으켜 목례를 한 후 현관을 나서는데 윤교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끼어들면 안 되네. 이 아이들은 결혼을 해야 해."
 그러나 성옥은 몸을 돌려 나오면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하는가 보다. 이제 그는 정림을 결코 놓을 수가 없다는 필연성과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역시도 오늘 그녀를 원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밤늦게 자취방에 돌아온 그에게 정림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인아주머니가 마루 끝으로 밀어내 놓은 전화기를 당겨 수화기를 들자 정림의 흐느낌이 먼저 들려왔다.
 "아빠가 쓰러지셨어요....... 지금 병원이예요."
 성옥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마음 약하게 먹지 말아요......."
 "어느 병원인디?"
 "올 거 없어요. 아빠가 더 나빠질지도 몰라요."
 그러나 성옥은 그녀더러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도록 말하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시계를 바라보니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병원 어딘가에서 새벽까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소 고혈압 증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윤교수는 너무 쉽게 쓰러져 버렸다. 성옥은 윤교수의 집안과 엄진하라는 친구의 집안과 도대체 어떤 인연이 있길래 윤교수를 그렇게 쉽게 무너지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집안 관계에 대해서 성옥은 정림으로부터 일체 들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병원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던 정림이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듯 보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대.......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몸이 불편해질 가능성이 많대......."
 "수술은 안 한디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대나 봐. 차라리 수술을 받는 상태가 오히려 낫다는데......."
 "......."
 다행스럽게도 천섭은 얼마 후 퇴원하였다. 몸이 비록 불편하기는 했지만, 지속적인 운동과 몸의 관리만 있어 준다면 곧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천섭은 학교에 휴직원을 내야 했다. 그 몸으로 당장의 강의는 지극히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천섭은 물리치료를 위하여 병원을 오가는 것만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머물렀다. 차츰 병세가 호전되었으므로 영채나 정림은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천섭은 매일같이 정림을 붙들고 앉아 달래는 걸로 일을 삼았다. 그것은 애원에 가까웠다.
 "정림아......, 아직 늦지 않았을 때에...... 마음을 바꾸자."
 "......."
 정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그렇게 존경해왔던 아버지였다. 그녀의 말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던 아버지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적어도 쓰러질 정도로까지 분노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엄군을 한 번...... 만나게 해 줄래?"
 "아빠, 이젠 그럴 필요없어요. 그 사람 이미 단념했어요. 아직 문제가 남아있는 건 없단 말예요."
 "아니다....... 만나야 돼......."
 천섭은 마치 무언가에 쫒기는 듯 불안해 보였다. 천섭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정림이 물었다.
 "아빠, 성옥 씨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천섭이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장군은...... 안 돼......."
 "왜요?"
 "......."
 "아빠, 말해 주세요. 제가 이해가 된다면 성옥 씨를 포기할 수 있어요."
 "......."
 "진하 씨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니면 성옥 씨라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빠, 어느 쪽예요?"
 "......."
 "아빠가 말씀을 안 하시면 제가 아빠의 말을 따를 수가 없잖아요?"
 "장군의 어머니는 말이다......."
 "예."
 "......."
 천섭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림은 그제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꼭 진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성옥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그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을 아버지의 생각에는 분명 성옥에게 무슨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성옥 씨의 어머니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아버지는 그렇게 믿고있을 수도 있었다. 더욱 궁금해진 정림이 물었다.
 "성옥 씨 어머니가요? 아빠, 말씀을 계속하세요."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있어....... 난 그녀를 사랑한단 말이다."
 정림은 가슴이 탁 막히는 듯 답답하여 고개를 수그렸다. 이제야 아버지가 성옥 씨를 찾았던 이유를 알것 같았다.
 "근데, 왜 헤어졌어요?"
 "내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가 떠났어......."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
 "그래서 지금도 그 분을 미워하고 계신가요?"
 "아냐....... 장군을 만나고 싶다. 내가 꼭 할 말이 있어."
 "아빠, 그 사람을 만나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것뿐만이 아니야. 만나야 해......."
 정림은 최근 성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난 장씨가 아닌 거 같어. 어머님이 정확하게 말씀을 혀주신 건 아니지만, 어쩐지 내 아버진 다른 사람이었던 거 같어. 알아봐야 되겄어....... 어머닌 김동태와 김미선이라는 이름을 평생 동안 한 시도 잊지 못하셨어. 내 성은 김씨인 지도 몰러.......'
 정림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두 사람의 결혼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비록 쓰러지긴 하였어도 정림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채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속만 끓였다. 그녀도 딱이 성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 천섭의 반대가 너무도 심각한 상황이다 보니 걱정을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림을 달랬다.
 "엄군도 빠지지 않는 청년이잖니? 왜 잘 지내온 사람을 하루아침에 잊을려고 해?"
 그러면 정림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엄마, 그 사람과의 일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어.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딸자식 잘되기 바라는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거야. 너는 지금은 이해가 어렵겠지만, 아버지 생각도 무언가 있으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니겠니?"
 "내가 그 사람 떠나기가 어려워요, 엄마."
 "집안 형편도 어려운 것 같던데, 괜스리 고생할 것만 같고. 소설을 쓰다보면 가정을 잘 돌볼까 싶다."
 "엄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건 인신공격이야.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제발 걱정은 안 했으면 좋겠어."


 6.
 성옥은 요란하게 울리는 부자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간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었다. 주인댁 아주머니가 그의 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총각! 일어났어? 밖에 손님 왔는가봐."
 주인댁은 초인종을 따로 달아두었으니 부자 소리가 울리면 분명 성옥의 손님이었다. 성옥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개의 용건은 주인댁의 전화를 통해 주고받는다.
 최근 들어 성옥을 집으로 찾아올 사람은 딱 한 사람 정림이 뿐이었다. 이 몇 푼 안가는 부자도 정림이 며칠을 농성한 결과로 겨우 매달아놓은 것이었다. 정림은 주인댁의 초인종을 눌러 매번 자신이 성옥을 찾아오는 것을 광고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안허지만 문 좀 따주시겄어요?"
 성옥은 대문간에 서 있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동안 눈을 감은 채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이 삐그덩거리며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청바지를 다리에 끼워넣었다. 지금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녀의 얼굴은 밤새 그를 괴롭혔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두 손으로 몇 번 문지른 뒤에 미다지를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미 마당으로 들어선 정림이 계면쩍은 얼굴로 눈인사를 했다. 그녀는 진한 청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짧은 치마 끝이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
 그녀의 하얀 종아리 부근에서 검은 핸드백이 달랑거렸다. 담벼락을 따라 한껏 자란 잡초들의 푸르름이 그녀의 옷색깔과 어울려 신선한 생동감을 만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기나 하는 거에요?"
 성옥은 얼굴을 붉히며 말없이 수돗가로 걸어갔다. 수도꼭지를 틀고는 두 손바닥 가득 물을 받아 머리와 얼굴에 연신 퍼올렸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을 대하니 문득 가슴이 아렸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림이 그런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미닫이가 열려 있는 그의 방 안으로 들어서며 코를 막았다.
 "아휴! 이 냄새......."
 그녀는 그가 빠져나간 이부자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새로 마련해다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세탁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어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미안해졌다. 그러나 방안은 그런대로 정돈이 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의 냄새가 짙게 스며있는 이부자리를 천천히 개어 작은 옷장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윗목에 뎅그라니 서있는 그의 낡은 책상을 돌아보았다. 책상 위에는 십여 권의 책이 쌓여 있고 곁에는 쓰다만 원고지가 몇 장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세수가 끝났는지 그의 발걸음 소리가 방 쪽으로 다가왔다. 정림이 벽의 걸려 있는 수건을 걷어들고 미닫이를 열자 그가 들어서다가 수건을 받아들었다.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뚜욱뚝 떨어졌다.
 "어젯밤 잠을 잘 못잤거든......."
 "......."
 그녀의 근심이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괜찮을 거여."
 성옥은 수건으로 얼굴을 마저 닦으며 방 안으로 들어선 뒤에 미닫이를 닫았다.
 "아침은?"
 물어보나마나 아직 못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가 책상 앞의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난중에 먹지 머."
 "참을 수 있겠어? 자기는 배고픈 거 못 참잖아?"
 성옥이 그녀를 바라보며 얄궂은 눈빛으로 빙그레 웃었다.
 "뽀뽀만 한번 혀주면 금방 배가 부를걸?"
 정림이 눈을 흘기면서 일어섰다.
 "어딜 가려구?"
 "자기 옷 갈아 입어야잖아?"
 "알았어. 그 전에......, 자......."
 성옥이 입술을 앞으로 길게 내밀자 정림이 못 이기는 척 그의 입에 그녀의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순간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거세게 끌어당겼다. 기겁을 하면서 입술을 뗀 그녀가 그의 가슴을 미어내려고 버둥거렸다. 성옥은 개의치 않고 달아나는 그녀의 입술만을 쫓아다녔다.
 그녀의 입술이 달아나는 것을 멈추고 정지하자, 그의 손이 허리를 풀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녀가 비로소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의 입술을 확인한 그녀의 혀가 자연스럽게 그의 입 속으로 들어오자 그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허리로 천천히 내려갔다.
 "빨리 가야지?"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 부근에 닿을 때쯤 그녀가 정색을 하며 그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바로잡더니 미다지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옥은 서둘러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가 미닫이를 닫고 구두를 신는 동안 주인댁 아주머니가 자기네의 아침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침도 안 하고 나갈려고......? 뭣하면 우리랑 한 술 같이 뜨지?"
 "아니구만요, 쪼메 늦었고만요."
 "그래도....... 아침을 굶으면 어떡해......."
 "배가 고프먼 재까닥 먹을 거닝께 염려허지 마셔요."
 "어쩔 수 없지. 어쨌튼간에 시골에 가면 성옥 씨 어머님께 안부나 좀 전해줘. 그렇게 비쩍 말라서 가면 내 체면은 뭐가 될까."
 그들은 집을 출발한지 한 시간여가 지난 후에는 경부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덜 밀리는 편이었다. 차가 어느 정도 편안하게 달리기 시작하자 정림이 성옥에게 물었다.
 "가슴이 떨려....... 어머님께서 날 좋아해 주실까?"
 "당연히 좋아하실 거여....... 그보다 아버님께 말씀은 드린겨?"
 "그냥 바람 좀 쐬러 시골에 다녀온다고 했지. 자기하고 함께 간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아예 말씀 안 드렸고....... 응....... 그리고 내일 저녁 성옥씨가 들를 거라는 말씀도 드려놨어."
 "......."
 "아빠도 자기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데....... 마지막으로 꼭 한 마디만 하시겠데"
 "......."
 "아빠가 포기하시려는 건 아닐까?"
 "글쎄....... 아마 그건 아니실 거 같여."
 그러나 결국 성옥은 천섭에게 들르지 않았다.


 7.
 그들이 김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진 뒤였다. 김제읍에서부터의 비포장인 도로는 어둠속이라 운전하는 그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도착한 뒤에 한숨을 길게 내쉰 성옥이 차를 고샅 입구에 세워 놓은 채로 정림의 손을 끌고 캄캄한 골목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가끔 정림의 하이힐 뒤축이 돌멩이에 채여 요란한 소리를 만들었다. 정림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참을 따라들어가자, 대문이 없는 토담 사이로 빨래줄에 매여 있는 마당을 환하게 밝혀주는 전등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전등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였다. 성옥은 정림을 이끌고 그 밝은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오느라 욕봤다. 어서 오그라."
 누군가가 마루에 앉아 있었다. 정림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성옥의 어머니임을 직감했다. 순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전등불에 비친 그녀는 검은빛의 치마에 삼베저고리를 단정하게 걸치고 있었다.
 "엄니, 많이 기다렸능가벼요. 몸은 좀 어떠셔요?"
 "내사 팔팔허닝께 걱정허지 말그라."
 순애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말없이 서 있는 정림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여들 올라가. 배고플 것인디....... 방에 상 챙겨져 있구만......."
 "엄니도 들어가셔요."
 "그려."
 성옥이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서서는 멀거니 서있는 정림을 눈짓으로 불러 들였다. 순애가 마지막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고 웃목에 앉았다. 방 한켠에는 낮은 밥상이 밥상에 덮혀 뎅그라니 앉아 있었다.
 "엄니, 아래로 가셔요. 절 받으셔야죠."
 "절은 무슨....... 기양 둬."
 "그려도 그렁게 아니잖어요? 어서요."
 순애는 마지못해 아랫목으로 가 편안하게 앉았다. 성옥이 정림에게 자신과 나란히 서도록 하고는 무릎을 굽히자 정림도 따라 절을 올렸다. 순애는 넌즈시 정림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처자가 바로......."
 "그렇구만이라오. 윤교수님의 따님이구만요. 이름은 정림이여요."
 순애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림의 얼굴에서 그리운 천섭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정림은 정림대로 그녀의 햇볕에 그을린 작은 얼굴에서 옛날의 그 고왔을 얼굴을 얼마든지 상상해낼 수가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순애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듯 느껴졌다.
 "예."
 "별일 없으실 테지......."
 "......."
 "어여 배들 채워. 야기는 난중의 혀도 되잖어?"
 성옥이 한켠에 치워져 있던 밥상을 방 가운데로 당겼다. 그리고는 밥상를 제끼자 정성껏 준비한 반찬들이 가득 드러났다. 성옥은 코 끝이 찡해 왔다. 성옥은 어머니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보았던 것이다.
 밥숟갈을 뜨는지 마는지 줄어들지 않는 정림의 밥그릇을 힐끗 바라보면서 성옥이 입 속의 것을 마저 삼킨 뒤에 말했다.
 "편하게 먹어. 우리 엄니 무서워 안 혀도 되는구만."
 그 말을 듣던 순애가 일어나 방을 나갔다. 정림이 성옥에게 눈을 흘겼다.
 "든든하게 좀 먹어야혀. 밤중에 배고프먼 어떡할려고 그려."
 성옥이 맛있게 밥숟갈을 뜨자 정림도 어쩔 수 없이 몇 숟갈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불안하여 도저히 뱃속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성옥의 말대로 한 밤중에 배가 고프면 견딜 수 없을 것을 생각해서였다.
 그들이 대충 식사를 마치자 순애가 숭늉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자 정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밥상을 챙겼다. 설거지라도 할 요량이었다.
 "기양 두어요. 정지간이 어두운디 어떡헐려고......."
 순애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안한 얼굴로 주저앉는 정림의 볼이 빨개졌다. 성옥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러자 방바닥으로 기어온 정림의 손가락이 성옥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성옥이 벌떡 일어나 밥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정림도 따라 일어났다.
 "앉으랑게."
 순애가 고요한 목소리로 정림을 붙잡았다.
 "살강 위에다 올려놓고 기양 오그라."
  밥상을 들고 나간 밖의 성옥에게 하는 말이었다.
 "예, 알았고만이라오."
 부엌문 여닫는 소리가 삐그덩거리며 들려왔다.
 잠시 후 성옥이 다시 들어와 정림의 곁에 앉았다.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침묵에 답답해 하지 않았고, 먼저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인지도 몰랐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얼마든지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전이 니 친구 경순 아부지가 자살허셨구만."
 성옥이 놀라 물었다.
 "아니, 머땀시오?"
 "암이라고 허드라. 읍내 병원일 댕겨오시드니 그날로 농약을 안 마셔뿌렸냐. 돈 내뿌리기 아깝다고......."
 "그려도 사는 날까지는 사셔야지요."
 "어채피 죽을 목숨인디, 멀 더 기대려. 논 팔어서 치료비 대고나믄 남은 새끼들은 워떡허고. 어쩔 수 없능겨. 경순이 와서 퍽도 울드라."
 "......."
 순애가 정림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정림이라고 혔는가?"
 "예."
 "아부지가 그러코롬 반대허신다믄서 워떠케 헐려고......."
 "시간이 흐르면 받아주실 걸로 알고 있어요."
 "나도 이해가 잘 안 가는구만. 그럴 양반이 아닌디. 시방 몸은 조메 어떠신겨?"
 "많이 좋아지셨어요."
 "내 이참에는 성옥이 자헌티 헐 말이 많어서, 부러 불렀구만. 거그도 마찬가지구. 알 건 알어야 혀......."
 성옥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도 대충은 알고 있겄지만......, 친아부지는 제월서 살든 김동태라는 사람이여......."
 성옥은 고개를 수그리고 듣고만 있었다. 정림이 불안한 눈빛으로 성옥의 기색을 살폈다. 다음 순간 성옥이 눈을 감고 있었다.
 "둘이서 혼인을 헌다닝께 허는 말여. 나는 느 둘의 혼인을 막을 생각 없다. 거그서 반대를 헌다닝께 내가 맘에 걸리는 게 많어. 그려서 시방 모든 걸 다 말혀줄라고 허는겨. 성옥이 너도 내 말을 들으먼 엄니에 대혀서 실망이 클겨. 허지만......."
 성옥이 순애의 말을 막았다.
 "엄니, 먼 소리를 허시는겨요?"
 "들어야 혀. 난 그 사람을 사랑혔다. 느는 잘 몰러. 내가 얼마큼이나 그 사람을 사랑혔는지....... 그런디도 내가 그 사람을 떠나온겨.......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말도 안 허고......."
 순애의 눈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치마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느 친아부지 땜시였지....... 니가 생겨뿌리는 바람에 난 그 양반을 떠 나온겨......."
 순애의 이야기를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모르긴 해도 그녀의 한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동안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성옥의 어깨도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림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갔다.
 "인자 미선이를 만나그라. 가가 니 말을 못 믿는다믄 데리고오그라. 내 입으로 말을 혀주지. 가는 니 누이인겨."
 "알았고만이라오."
 성옥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하자 순애가 정림을 향하여 말했다.
 "아가, 자는 남들처럼 편안허게 세상에 태어난 애가 아녀. 언진가는 모다 알게 될 것이고....... 너는 미리부텀 알어야 헐 것 같여서....... 아직 결심을 안 혔다믄 맘을 돌려 먹어도 괜찮여."
 정림이 고개를 들고 천천히 말했다.
 "알았습니다, 어머님. 이젠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순애가 정림의 손을 붙잡았다.
 "그려, 그려....... 허지만 난중에 후회헐 수도 있으닝게 시일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그라."
 "......."
 "널 아가라고 불러도 되겄냐?"
 정림이 순애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럼요, 어머님."
 "그려, 아가! 느 아부지도 참말로 불쌍헌 냥반여. 어떡헌다냐? 허지만서도 나는 요참에 느 아부지헌티 엄청 실망혔다. 나 땜시 느들이 먼 고생이여? 쯪쯪."
 순애는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곧 장농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부자리와 베개를 가져와 아랫목에 펴면서 말했다.
 "오늘은 함께 자자. 나도 느하고 하루밤 자고 싶어."
 "예."
 "아가, 니가 가운데 눕그라."
 "예."
 건넌방으로 건너간 정림은 가방 속에서 잠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편했다. 정림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불쌍한 아버지, 코 끝이 찡해 왔다.
 그 후 정림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림은 상경하는 대로 곧장 성옥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가출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동거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날 기다리지 마. 난 이 사람을 놓을 수가 없어. 아빠한테 전해 줘. 아빠도 사랑한다구....... 그리고 용서해 달라구....... 난 아빠가 언젠간 용서해주실 줄로 알고 기다릴 거야."

 아버지의 작품 『슬픈 톱니바퀴』는 여기에서 멈추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