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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5 09:21
순애 제2권 / 제13부 미선에게 남긴 유서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4,011  


 제13부 미선에게 남긴 유서


 1.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명수는 아버지의 육필원고를 덮으면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슬픈 이야기였다. 아니, 그것은 한편의 전설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어쩌면 오로지 신들만의 비밀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녀는 결코 열어 보아서는 안 되는 그 상자를 너무도 손쉽게 열어 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명수에게 아버지의 작품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에게야 재미로 읽는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을 비롯한 아버지나 작품 속의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혼이 담긴 일종의 피로 쓴 한맺힌 일기였다. 아버지는 뜨거운 심장을 활짝 열어 놓고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이야기 속에 아버지는 무엇을 심어두고 싶었을까.
 외할아버지는 말도 없이 떠나 버린 할머니를 그저 평생 증오하고만 있었을까. 그 증오가 너무나 깊어서 결코 할머니를 용서할 수도, 그리고 그녀의 아이인 아버지를 용납할 수도 없었을까. 다만 그뿐이었을까. 명수는 그들의 결혼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쉽게 받아들였던 할머니를 비교해 보았다. 두 분 사이에 무언가 이해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할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그리 범상한 분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을 그녀는 종종 들어왔었다. 그분은 지난날의 상처받은 감상적인 기분만으로 그렇게 극렬한 반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무언가 두 분 사이에 남모르는 사연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던 명수는 누구보다 먼저 눈을 떴다. 그녀는 마치 도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했던 간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만큼 마음이 편하지를 못했다. 명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미선과 경도를 깨우고는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명수는 며칠간을 두문불출하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열이 생기고 기운이 없어져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사건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온 탓이었을까. 종잡을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이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멍청한 아이로 바꾸어놓아 버린 듯했다.
 참다못한 성준의 아내가 미음을 끓여들고 명수 방으로 들어왔다.
 "넌 날 참으로 속상하게 만드는구나. 어디가 아프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니?"
 명수는 침대에서 돌아누운 채로 힘없이 말했다.
 "작은엄마, 죄송해요. 조금만 더 쉴게요."
 "그래, 쉬어야지. 그렇지만 요기는 해야할 것 아니니? 입맛이 없을까봐 미음을 끓여왔다. 드러누워 쉬는 것도 좋지만 무얼 좀 먹어야 곧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니?"
 명수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 몸을 일으켰다. 성준의 아내는 숟가락에 가득 미음을 떠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명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작은엄마!"
 명수가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잽싸게 미음 그릇에 담아 놓고는 그대로 명수를 끌어안았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작은엄마가 뭘요?"
 "내가 널 더 아끼고 더 사랑해 주질 못했구나."
 "그게 아니에요."
 끝내 명수는 울음을 터트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괜히 엄마 아빠를 궁금해 했어요."
 "아니야, 그건 잘못한 게 아니야. 자식이니까 당연한 거지."
 "작은엄마, 말해 주세요. 아시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우리 엄마 아빠 왜 날 버리고 가신 거에요?"
 "그 마음은 오죽하셨겠니? 우리가 알 수는 없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두 분은 널 사랑하셨어. 널 버리신 게 결코 아닐 거야."

 경도로부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그녀는 제 방의 침대에 드러누워 깊은 우울의 나락에 빠져 있었다. 성준과 그의 아내는 안타까운 눈초리로 명수의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냥 눈감고 잊어버려야 되는 일이었을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로 간단하게 넘어가 버려도 누가 무어라 할 사람은 전혀 없지 않는가. 이제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져 버린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녀 또한 어차피 모르고 살아온 일이었다. 자신이 어쩌자고 이 일을 시작해 버렸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미선 고모는 무엇을 더 알고 있을까. 고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분명 무언가를 찾아보았다고 말했었다. 얻은 것이 있을 법도 하였다.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작은 일에 불과할지라도 전혀 얻은 것이 없이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들 중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미선은 말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가 아빠의 작품이 중단된 부분부터 작품을 써간다고 말이야. 아빠가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부분을 우리가 완성시킨다면 그 다음에 무언가 보이는 게 있지 않을까?'
 명수는 의아해 하며 물었었다.
 '아빠의 의도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리고 우리는 소설가가 아니잖아요?'
 미선이 빙긋이 웃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네 아빠가 자신이 스스로 완성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분명 아빠는 그렇게 떠나지는 않으셨을 거야.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는지도 모르지. 난 그런 생각을 줄곧 갖고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함께 듣고 있던 경도도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작품을 무슨 수로 완성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아버지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명수는 천천히 일어나 외출준비를 했다. 어디로든 나가고 싶었다. 바람이라도 쏘이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발길은 외가로 향하고 있었다. 명수는 문득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마지막 만났던 순간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었던지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런 궁금함은 그녀로 하여금 곧 외할머니를 그립게 만들었다. 그립기는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교외의 별장에 오랜 세월을 갇혀 사시는 외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죽음과 싸우며 버티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넘어지시고 난 후부터 외가의 살림은 전적으로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외가에는 필요 이상의 부가 쌓여 있었다. 또한 외할머니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예솜씨를 발휘하여 서예학원을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타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2.
 학원에 도착하자 영채가 반갑게 명수를 맞이했다.
 "웬일이냐? 전화도 없이....... 할머니를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네. 고맙기도 혀라."
 그녀는 먹물이 묻은 자신의 손을 의식하고 손등을 이용하여 명수의 뺨을 몇 번 어루만졌다.
 "잘 지내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좀 어떠세요?"
 "글쎄다. 워낙 강한 분이라 잘 견뎌는 오셨는데......."
 "나빠지셨어요?"
 "잘 모르겠다. 변화가 생기신 것도 같고....... 나쁜 쪽으로......."
 "어떡해요? 나으시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이 어디 한두 해였니? 이젠 지쳤다."
 "그래도 할머니, 희망을 가지세요. 할아버진 꼭 일어서실 거예요."
 "고맙다."
 영채가 손짓으로 앉을 것을 권했다. 명수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할머니한테 여쭙고 싶은 게 있어 왔어요."
 "무언데?"
 "엄마에 관해서요....... 아빠두요."
 영채가 섬뜩해 하며 명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엄마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그냥요."
 영채가 머뭇거리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차 한잔 마실래?"
 "예."
 명수가 물러서며 소파에 앉았다. 작은 물주전자를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은 영채는 서서히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영채는 뒤돌아선 채로 이를 악물었다.
 영채가 찻잔을 챙겨 놓고 소파에 앉았다. 명수는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따르며 영채의 기색을 살폈다. 영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넌 참 철이 없구나."
 "왜요?"
 "넌 어른들을 이해할 줄을 몰라."
 "......."
 "무얼 알고 싶니?"
 명수는 영채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할머니, 옛날 이야기 꺼내면 할머니 속상하실 거 알아요. 그래서 죄송해요."
 "......."
 "그렇지만 말예요. 할머니에게도 자식이기는 하지만, 제게는 부모님이시거든요. 저 그냥 평생 궁금해 하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요, 그게 어려운 일이란 것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무얼 말이냐?"
 "외할아버지께서는 왜 아빠하고 엄마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셨을까요? 할머니는 아실 것 아녜요? 꼭 저희 시골 할머님 때문이었을까요?"
 "새삼스럽게 그것을 몰라서 묻는 거니? 그리고 이제 그걸 알아서 뭘하게? 그렇다고 네 아빠나 네 엄마가 살아오니? 다 부질없는 일이다."
 "아녜요. 알아야 해요. 전 제 부모님들을 존경하고 싶어요. 그분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겠어요."
 영채가 문득 치솟은 분노를 삭이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네 외할아버지하고 내 탓이란 말이냐?"
 "그건 아니구요......."
 "네 말은 꼭 그렇게 들리는구나."
 "누구 탓이라는 것보다두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녜요? 할머니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난 모른다. 할아버지 뱃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그리고 제놈들이 심지가 약했던 게 문제이면 문제이지. 어떻게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는단 말이냐?"
 결국 영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쓰러지면서까지 반대를 하셨잖아요? 그것도 두 번이나요?"
 "자식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을 경우에 대개의 부모는 다 그러는 거 아니냐?"
 "그래도 정도가 있죠. 전 이해가 가지 않는걸요."
 명수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영채가 문 쪽을 향하여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문 열려 있으니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이 열린 입구에 미선이 서 있었다. 명수가 먼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고모가 여기엔 웬일이세요?"
 명수의 고모라는 말에 영채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미선이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김미선입니다."
 영채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으므로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가 곧 미선임을 기억해 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명수가 미선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영채가 몹시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명수하고 약속이 되어 있었나요?"
 미선이 부인을 했다.
 "아니예요. 제 스스로 찾아온 겁니다."
 영채는 전말을 짐작할 만했다. 명수가 드디어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명수가 제 엄마와 아빠에 관해 궁금해 하는 것도 이제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왜 또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까. 더 이상은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엄청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는 말인가.
 영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이세요?"
 미선이 진심으로 미안해 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렇게 다시 찾아뵙게 된 거 정말 나쁜 뜻은 아닙니다."
 "나쁠 것은 없죠. 불필요한 만남이라는 거죠."
 "저 때문에 상하신 속이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이제 잊으실 만하니 다시 나타나 정말 죄송합니다."
 미선은 머리를 조아리다가 말을 이었다.
 "부탁을 드리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
 "윤 교수님의 건강은 어떠신지요?"
 "아직은 안 죽고 살아계셔요."
 영채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요. 윤 교수님을 한 번만 만나뵈었으면 합니다. 제가 여쭐 말씀이 있거든요. 이런 부탁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영채는 그녀가 윤 교수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 양반을 만나겠다는 의도는 뭐죠?"
 "감히 제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겠어요. 직접 뵙고 여쭙고 싶은 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한테 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
 "잘 알아듣지도 못하시고, 말씀도 못하시는 분이에요. 게다가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하시잖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요. 어려울 겁니다."
 미선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서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명수는 미선의 갑작스런 출현을 원군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벽에 부딪치자 명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서 저희 시골 할머니에 관해서 말씀을 들으신 게 없어요?"
 "없다."
 "한번두요?"
 "그래, 없어."
 영채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명수의 질문에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
 듣고 있던 미선이 끼어들었다.
 "윤 교수님께서 두번째 쓰러지셨을 때가...... 그러니까 따님과 사위가 떠나기 반 년쯤 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영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가슴이 아프시겠지만 그때 상황이 궁금합니다."
 영채가 체념한 듯 천천히 말했다.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그 아이들의 거처를 찾아낸 뒤였어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양반은 그 아이들의 집 근처로 가 명수 애비가 돌아오길 기다렸지요. 결국 만나셨어요. 그 양반은 나더러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어요. 차 안에서 명수 애비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나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지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명수 애비가 미친 사람처럼 차 속에서 튀어나왔어요. 그리고는 차 안의 그 양반을 향해 고함을 쳤지. '아이가 생겼어요. 이미 다 자라 버렸어요. 이젠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놀라서 그 양반에게로 뛰어갔을 때에는 이미 그 양반도 입에서 쓰러지고 난 뒤였어요.......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예요."
 영채는 말을 멈추고 손수건을 찾았다.
 "할머니......."
 명수가 무릎걸음으로 영채의 품에 안겼다. 영채는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는 명수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미선이 질문을 계속했다.
 "그때의 충격이 말입니다. 명수 엄마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건 모르지요.......그러나 그랬을 겁니다. 그 양반은 명수 애비를 원하지 않았어요. 나도 이상하게 받아들이기는 했었죠. 평소에 그 양반은 명수 애비를 너무도 챙겼었거든요."
 미선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말예요.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그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점이 있는 듯싶어요. 그 두 사람은 이미 동거를 시작한 지가 꽤 오래 된 시점이거든요. 아이를 갖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어요?"
 "......?"
 영채가 손수건으로 눈물 찍어냈다.
 "당시 두 분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더 있었을 것 같아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말고 말입니다."
 영채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것말고 무엇이 더 있었겠어요? 그리고 있었다 해도 난 알 수가 없잖아요."
 "짐작이 가는 점도 없으십니까?"
 영채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미선을 향한 불만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애를 태우는 것 같았다. 더욱이 명수가 함께 있는 자리였다. 미선이 그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말했다.
 "명수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말씀하셔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거예요."
 명수가 끼어들었다.
 "할머니, 아시는 것만 말씀해 주세요."
 영채의 눈이 명수에게로 가 멈추었다. 그녀의 손이 명수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난 모른다. 정 알고 싶거든, 그것이 네 소원이거든 네 외할아버지한테 직접 물어야 해."
 미선이 핸드백을 열고 낡은 편지봉투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봉투 속에서 빛이 바랜 편지 한 장을 꺼내 영채에게 넘겨 주었다.
 "명수 아빠가 제게 남긴 유서예요."
 순간 영채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해졌다. 명수도 영채의 품에서 몸을 일으켜 미선이 건네 주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탁자 밑에서 안경을 꺼내어 쓴 영채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누님,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도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렸느냐고 화라도 내고 싶겠지요? 그러나 누님, 우리에게는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어오. 우리도 역시 슬프기는 하지만, 너무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떠납니다. 살아서는 다시 누구의 기쁨일 수도 없음을 알았거든요. 누님, 나는 누님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도 나의 딸에게도 견딜 수 없는 비극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부탁을 드려야 합니다. 나의 쓰다만 졸작 『슬픈 톱니바퀴』를 누이에게 드립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고 나머지를 완성해 주세요. 쉬지 않고 굴러가는 톱니바퀴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아 주세요. 우리는 그것이 우리 두 사람만의 짧은 인생의 끝이길 원합니다만. 그러나 지금 제가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은 그 톱니바퀴에 걸려있는 우리의 딸이 안고갈 미래입니다. 누님, 당신은 나의 하나뿐인 누님입니다. 사랑하는 동생 성옥이 .

 편지를 다 읽고 난 영채가 눈을 감았다. 명수가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거두어 읽고 또 읽고 있었다. 미선이 영채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제가 잡지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운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명수 아빠의 유언도 작용을 했을 겁니다. 명수 아빠는 저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을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것이 제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도 말입니다."
 영채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은 명수 아빠가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무척 어수선해져 있었다. 그녀도 그들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나락으로 몰아 떨어지도록 하였을까. 그리고 그 양반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연거푸 쓰러져 종내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미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그들의 사고가 있은 후로 김촌엘 여러 번 들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명수의 할머니로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그녀는 그 날 순애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더듬어 내려갔다.


 3.
 순애는 눈을 돌려 바람벽에 고정시킨 채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도오다 선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혔어. 상상헐 수도 없는 일이었어. 그분은 나를 끔찍허게 아껴 줬었거든........"
 미선이 고개를 떨구며 듣고 있었다.
 "첨 일이었고만....... 도오다 선생은 나를 이용혀서 내 아버지도 죽인겨....... 그 여름의 텅 빈 교무실에서였어......."

 순애는 무작정 일어서긴 했으나 모기만한 소리가 목에 턱 걸려서 잘 발음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돌연 무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도오다 선생은 그녀가 일어섬으로 하여 거부당한 무안한 손을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는 일시에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하고 있었다.
 "너 이놈! 무척 건방지구나. 너 요즘 학교에서 생기는 일 알고 있지? ......혹시 너 아냐?"
 갑자기 안색이 달라지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의 무서운 태도에 순애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앞이 캄캄해졌다. 요즘 들어 부쩍 교내의 분실물 사건이 많아졌었다. 순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무작정 고개를 저어댔다. 벌써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리다가 급기야 양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리 와봐!"
 연이은 호통에 깜짝 놀란 순애가 엉겁결에 그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서자, 그는 순애의 허리를 붙잡아 그의 앞으로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순애의 치마 옆구리에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에 다짜고짜 손을 집어넣어 뒤져보았다. 그의 눈앞을 지나 순애의 눈물이 몇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움직이기만 하면 혼이 날 줄 알아! 손을 들어봐!"
 꼼짝없이 손을 들고 선 순애의 애처로운 겨드랑이에 그의 손이 들랑거렸다. 그녀의 허리 쪽으로 내려와 저고리 밑으로 깊이 집어넣은 그의 손이 그대로 순애의 가슴으로 파고올라가 그녀의 불쑥 튀어나온 작은 젖가슴을 건드렸다.
 순애는 움찔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순애의 가슴 부근에서 천천히 오락가락하며 서성대던 그의 손이 급기야 그녀의 허리며 배며 등으로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그녀의 아직은 덜 영근 젖가슴 부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러더니 별안간 손을 거둔 그가 사정없이 순애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속옷 내려! 그리고 다리를 벌려봐!"
 순애는 주춤거리다가 마지못해 속옷을 내렸다. 그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 올려!"
 순애는 깜짝 놀라며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속옷이 발끝으로 내려지고 치마가 걷어올려진 다리를 엉거주춤 벌려 주며 순애는 부끄러워 눈을 꼬옥 감아 버렸다. 눈물이 더욱 거세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무서운 손바닥이 사정없이 날라올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이 순애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샅샅이 더듬으며 천천히 그야말로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 손은 그녀의 뒤쪽으로 빠져나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다시 허벅지 안쪽으로 돌아나왔다. 그리고 서슴없이 위로 올라가서는 더 올라갈 수 없는 그곳에 가만히 멈추었다.
 그의 손이 거기에 한동안 머물러 있을 때,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집요하게 찾으며 그곳을 헤맬 때에, 마침내 순애는 엉엉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혹시 다른 데에 숨긴 거 아냐?"
 그는 순애의 울음과는 상관없이 마치 그곳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을 수라도 있다는 것처럼 몇 번을 더 더듬더니 다시 손을 빼내어 그녀의 저고리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이제 자연스럽게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과 작은 젖꼭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눈물이 가득한 순애의 눈과 잠깐 마주친 도오다 선생의 눈이 더욱 이상야릇하게 반짝이며 순애의 가슴으로 향했다.
 "쬐끄만 게 많이 자랐구나."
 그는 옷고름이 이미 풀어진 순애의 저고리를 헤쳐서는 아예 그녀의 어깨까지 제껴 버렸다. 그녀의 검은빛이 돋는 어린 가슴살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꿈틀거렸다.
 그녀의 가슴 양편으로 아주 조그맣게 그러나 야릇하게 솟아 있는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팥알보다 작은 젖꼭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가락으로 가만히 건드렸다. 그러다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두어 번 비틀어댔다. 그녀가 몸을 파르르 떨며 가슴을 비틀었다.
 "아! 아퍼요. 선상님!"
 순애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도오다 선생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도오다 선생의 거칠어진 숨결이 뜨겁게 순애의 가슴 쪽으로 훅훅거렸다. 그녀의 가냘픈 젖가슴은 불쌍하게도 그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순애의 허리에서 치마를 채어 발 밑으로 잡아내려 버렸다. 그의 한쪽 무릎이 어느 사이 치마가 벗겨진 순애의 허벅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의 손 하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있어서 그녀는 몸을 뒤로 빼낼 수도 없었다.
 "선상님!"
 순애가 두 손을 그냥 든 채로 주저앉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저고리만 간신히 어깨에 걸쳐 있는 순애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을 순애의 열려진 가슴에 대었다.
 "순애야!"
 "......."
 순애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움직이더니 그녀의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한 작은 젖무덤이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순애의 얼굴이 홍당무로 변해갔다. 그녀는 도대체 도오다 선생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의 손은 줄기차게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입술로 그녀의 젖꼭지를 몇 번 희롱하더니 뜨거운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선상님...... 지는 집이 가야 혀요......."
 도오다 선생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순애에게 물었다.
 "팔이 아프니?"
 순애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그럼 내리거라."
 순애가 팔을 내리자 도오다 선생은 그녀의 어깨에 걸쳐 있던 저고리를 그녀의 뒤로 벗겨냈다. 이제 어린 순애는 알몸이었다. 그녀의 알몸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황혼빛에 물들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도오다 선생은 그녀의 알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혀 어리다고만 할 수는 없는 조숙한 아이의 기다란 몸매가 자꾸 출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젖은 입술이 다시 그녀의 가슴으로 다가와 그녀의 긴장한 젖꼭지를 건드렸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을 야릇하게 건드리는 그녀의 볼록한 젖무덤을 가득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다가 허벅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불같은 손바닥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점점 분명하게 느껴가고 있었다. 순애의 불안정하게 벌려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선상님!"
 순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그대로 주저앉으며 그에게로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도오다 선생의 두 팔이 순애의 붉게 타오르는 등뒤로 돌아가며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순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난 그 일을 암도 모른다고 생각혔고만...... 근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죽고싶었어......."
 미선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윤 교수님도 그 일을 알고 계실 가능성이 있었겠네요?"
 "......."
 순애가 눈을 뜨며 미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수가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할머니의 아픈 과거가 그녀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슬픔은 그 끝이 없었다. 명수는 비통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가 비극이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겠지. 그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러웠다.
 영채가 미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어렸을 때의 일이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
 "가능하다면 며칠 후에라도 윤 교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 양반 얼마 버티지 못하셔요. 편안하게 보내드려야지. 그 양반이야말로 정말 가슴 아픈 분이 아니겠어요?"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용기를 잃지는 마세요. 벌써 근 이십 년의 세월을 버텨오셨잖아요? 일어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4.
 영채의 학원을 나와 미선과 헤어진 명수는 호출기를 통해 경도를 불러냈다. 명수는 약속장소인 학교 근처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먼저 나온 경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한 한 따뜻하고 밝은 얼굴로 그녀를 맞으려 애를 쓰는 경도의 마음이 눈에 밟혔다. 다가가 자리에 앉는 명수는 초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명수가 측은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경도에게 말을 건넸다.
 "나 어디로 좀 데리고 가."
 경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 미치겠어."
 "그래, 나가. 더 늦으면 돌아오기 힘들어."
 그들은 경도의 승용차에 올라 시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성산대교를 거쳐 서부간선도로를 달리다가 광명시로 들어섰다. 그들은 광명시를 거쳐 제2경인고속도로로 들어갔다가 얼마 전 서평택까지 개통된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심산이었다. 명수는 그가 어디로 가든 상관 않겠다는 듯이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차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광명 네거리를 지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지하철 공사가 한창인지라 도로 사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경도가 답답해할 명수를 의식해서 제가 먼저 투정을 부렸다.
 "야, 참말로 지독하구나."
 명수가 경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나한테 신경쓰지 말고 운전이나 잘해. 시간 때문에 다급해 하지 말고......."
 명수는 자신의 머리 속이 웬일인지 텅 비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가슴속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뿌리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그동안 어디에 나의 몸을 기대고 살아왔단 말인가. 문득 허공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동물의 몸짓에 불과하였다. 코 끝이 찡해오면서 눈물이 돌았다. 그녀는 며칠 사이에 평생 흘리고도 남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조금 열려진 창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서해안고속도로는 개통된 지 얼마 안 되어 무척 한산한 편이었다. 답답한 기분을 회복한 경도가 명수에게 물었다.
 "대부도로 나갈까? 제부도로 나갈까? 아니면 끝까지 달리다가 아산호로 갈까? 어디든 금방 갈 수가 있어. 선택해 봐."
 명수가 아직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다를 볼 수가 있다면....... 아무데나 좋아."
 "아무래도 국도가 좋을 것 같아. 고속도로는 도대체가 드라이브 기분이 나질 않는단 말씀야.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구....... 제부도로 간다."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경도는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완잔히 내렸다.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명수의 긴 머리칼이 휘날렸다. 경도가 창을 반쯤 다시 올렸다.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력을 좀 줄이면 되지......."
 "알았어. 천천히 갈게."
 차는 잘 다듬어진 국도를 따라 남양과 사강을 지나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대부도와 제부도로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렀다. 경도는 왼쪽의 제부도를 향하여 핸들을 꺾었다.
 "대부도는 이제 안산과 둑으로 연결이 되었거든....... 조금만 기다리면 이렇게 멀리 돌아오지 않아도 서울에서 금방 대부도에 들어가게 될 거야. 요즘 그 둑으로 생긴 썩은 물 때문에 말이 많지? 내가 언젠가 마산포로 들어갔다가 내친 김에 물빠진 어도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어도 말야....... 완전히 갇혀 버렸어. 이제는 섬이 아닌 거야. 그래서 그런지 대부도도 이제는 옛날 같지가 않아. 어쩐지 싫거든....... 거기도 바지락칼국수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긴 있었는데......."
 "제부도에도 가본 거야?"
 "그럼, 몇 번 가봤어. 제부도도 나름대로 정취가 있지. 그래도 아직 물이 덜 들어 있는 곳은 섬이 아니겠어? 문명의 썩은 물 말야. 섬에 들어가면 바람도 달라지고, 햇빛도 달라지거든. 아직도 깨끗한 황톳길의 흙이 얼마든지 손에 잡힌단 말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주 섬에 들어가 배워올 만해. 아무거라도....... 모든 게 다 아직은 살아 있어......."
 "섬에 들어갈려면 배를 타야 되잖아?"
 "아냐, 제부도는 그렇지 않아. 운수가 좋으면 우리도 들어갈 수가 있을 거야. 물이 빠지면 길이 드러나거든.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언젠가 누군가의 소설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남자 주인공이 거기에서 자살하는......."
 "......."
 경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그러나 더욱 또렷한 섬들이 갯벌 위에 늘어서 있었다. 갯내음이 스며들어왔다.
 "좋아."
 "나도 그래."
 명수의 손이 변속기 스틱을 쥔 경도의 팔을 안았다. 경도가 스틱에서 손을 떼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앞 유리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브레이크를 서서히 밟으며 속도를 줄이자, 눈앞에 초병이 나타났다. 그 초병의 뒤로 갯벌을 뚫고 멀리 섬으로 연결된 시멘트 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도가 왼쪽편으로 다가서는 초병에게 물었다.
 "언제쯤 다시 물이 들어올까요?"
 초병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들어오고 있어요. 한 시간이면 막힙니다.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셔야 합니다."
 경도가 명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들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야?"
 명수가 몸을 일으켜 앞 유리창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경도가 천천히 차를 바다 쪽으로 밀고들어갔다. 갯벌 사이를 뚫고 차가 달리고 있었다. 바다 가운데에 마치 떠 있는 듯한 도로는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한참을 달려와 섬으로 올라서자 경도가 차를 일단 세우면서 말했다.
 "여기가 제부도야."
 "안으로 더 들어가봐."
 "늦으면 막혀. 다시 나가서 저녁을 먹어야지."
 "싫어....... 여기서 먹을래."
 경도가 잠시 명수의 옆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를 섬 안으로 몰기 시작했다.
 경도는 철 지난 해수욕장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다가 단촐해 보이는 시골집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도 바지락칼국수가 있네. 어때?"
 "그래, 아무데서나 먹어."
 그들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식사를 주문하였다. 경도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잘 안 되어 가는 거야? 얼굴이 별로야. 걱정되잖아."
 "......."
 "어차피 알아서 기분좋을 일은 아닌 줄 알지만, 제발 빨리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두려워....... 분명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걸 내가 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럼 이쯤에서 모르는 척하고 발을 빼자."
 "......."
 "명수!"
 "가슴이 떨려서 못 견디겠어.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
 식사가 끝난 뒤에 그들은 차 속에 나란히 앉아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뭍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밤은 여기서 묵어야 했다. 명수는 뭍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었던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단 하루지만 적어도 오늘밤만은 불면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명수는 경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명수의 어깨에 둘러왔다. 명수는 눈을 감은 채로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졌다. 그의 어깨는 너무도 따뜻하고 든든하였다. 경도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경도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도 그녀의 뜨거운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귓바퀴를 한 번 쓸어내릴 때마다 그녀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아! 좋아."
 그녀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경도는 손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타오르는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더욱더 그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안아 줘."
 경도가 팔에 힘을 가하여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얼굴이 탐스러운 달처럼 솟아올랐다. 그녀의 젖은 입술이 무방비상태로 그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쳤다.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그의 오른팔이 뻗어나와 그녀의 어깨를 안으며 팽팽한 젖가슴을 건드리자 그녀의 가슴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는 아랫도리에 뜨거운 불길을 느끼며 감동에 겨워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명수는 이렇게 뜨거운 여자였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 속 깊은 곳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입술은 줄기차게 그의 입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칼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안은 채로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일으키고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그녀는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반쯤 열려진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와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그의 손을 그녀의 젖가슴으로 밀어넣었다. 부드러운 브래지어가 그의 손에 밀려 그녀의 젖무덤 밑으로 밀려났다.
 "아!"
 그녀의 가슴이 또 한번 출렁거렸다.
 "경도 씨!"
 "응."
 "경도 씨 손 말야, 그거 정말 손이야?"
 "그럼 손이잖고?"
 "손이 아닌 것 같애."
  바닷물이 서서히 파도를 이루며 차창 앞으로 밀려들었다. 어둠 속에서는 바람소리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이마에 머물러 있었다.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이마를 거세게 애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던지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아 가슴에서 거두어냈다.
 "그만 해......"
 "나 참기 힘들어......."
 "나도 그래."
 경도가 서두르며 말했다.
 "우리 들어가자......."
 그는 아까의 식당 주인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섬에서 묵으셔야겠네요. 저희집은 민박도 가능하니까, 웬만하면 여기서 묵도록 하세요."
 그들이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자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2층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래층의 식당과는 달리 깨끗하게 다듬어진 방이 서너 개쯤 늘어서 있었다.
 "지금은 마침 손님이 없어 다행입니다. 욕실이 딸린 방을 드릴게요. 딱 하나 있거든요."
 주인은 방문을 딴 열쇠를 경도에게 넘겨 주고는 곧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명수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경도도 따라들어섰다. 그가 방문을 닫자마자 명수가 그에게 매달려왔다. 아직도 채 식지 않은 불길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샤워부터 하지 그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았다. 경도는 볼록한 그녀의 젖가슴을 가슴 가득 느끼며 그녀를 껴안았다.
 "사랑해!"
 그녀가 속삭였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은 계속 밑으로 내려가 그녀의 탄탄한 엉덩이 부근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쳐올렸다. 그녀가 돌연 머리를 뒤로 제끼며 입을 벌렸다. 그녀의 목구멍 저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이튿날 오후, 명수가 집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앞에 지수가 버티고 섰다. 그녀의 얼굴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언니!"
 "왜?"
 "정말 심각하다."
 "미안해."
 "언니 인생이니까, 난 상관 없는 일이지만 말야. 이러다가 시집도 가기 전에 집 나가는 거 아냐?"
 "그만 해, 미안하다구......."
 "평산 오빠가 왔다갔어."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명수가 되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김촌 사는 평산 오빠 말야!"
 명수가 깜짝 놀랐다.
 "언제?"
 "얼마 안 됐어. 언니를 기다리다가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곤 가 버렸어."
 "그래? 그런데 난 왜?"
 "나도 모르겠어. 언니는 알 거 아냐?"
 명수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내가 무얼?"
 "한번 만나봐. 이따가 전화가 오든가 직접 오든가 할 거야."


 5.
 미선은 출근하자마자 영채의 전화를 받고 외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시골엘 다녀올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다급한 영채의 목소리로 미루어 이제 서서히 윤 교수의 임종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시간이 급한 것이다. 영채는 말했었다.
 "미선 씨, 부탁할 게 있어 전화를 드렸어요. 이건 내 부탁이 아니라 바깥 양반의 부탁이에요. 김촌에 계시는 명수네 할머니를 모셔왔으면 하거든요. 그 양반이 죽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되겠어요?"
 미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해 주었다. 명수의 할머니가 올라오실지 거절하실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윤 교수가 부탁하는 거라면 지옥에 가는 일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미선은 우선 명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산이 찾아왔다. 그는 성준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아마도 시골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었다.
 그는 바쁘게 일어섰다. 거실로 나온 그가 오랜만에 만나는 명수의 모습을 흘낏 바라보았다. 명수는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여."
 명수가 활짝 웃었다. 부끄러움이 일시에 몰려왔다.
 "아버님헌티 드릴 말씀도 있었지만 명수 얼굴 조메 볼라고 다시 왔구만."
 "저녁이나 들고 가지."
 성준의 아내도 섭섭한 듯 말했다.
 "그래요, 준비가 다 끝났으니 식사를 하고 가요."
 "아녀요, 일이 덜 끝났응게로 얼른 가봐야 허는구만이라오."
 그는 식구들과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명수는 어쩐지 그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파트를 나서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걸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지냈어."
 "기양, 그럭저럭 지냈구만."
 "대학은?"
 "내가 워떠케 대학을 댕겨. 사람은 분수를 알어야 허는구만. 아무나 대학을 가나? 재수를 허고 삼수를 허믄 머덜 것여?"
 "그러면 지금은 무얼 하고?"
 "나야 농사 짓는 재주밖에 더 있어? 근디 너는 좋은 대학 들어갔응게 다행헌 일여."
 "다행은....... 그저 그렇지. 서울엔 왜 올라왔어?"
 "댕겨갈 일도 있었고, 심부름도 있었구만. 며칠 있다가 갈 것 같여."
 "우리집에 있지 그래?"
 "아녀, 묵을 디가 있어. 거그에 볼일도 있고."
 "......."
 "인자 좋은 남자도 나서겄지."
 "......."
 "야그는 들었구만. 대학원 댕긴다는 친구 말야."
 "나이가 너보다 많아."
 "알어. 결혼할 사이라던디. 지수가 그러드만."
 명수는 불현 듯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산과 같았을 것만 같았다. 명수는 자신이 왜 쓸데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의아스러웠다.
 "잘살어."
 명수의 콧등이 시큰해왔다. 평산의 어깨가 몹시 처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산을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심중이 어떠리라는 짐작은 하고도 남았다.
 앞만을 보고 걷던 평산의 눈이 그녀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하고 무거운 눈빛이었다. 명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녹아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제 평산은 어린아이도, 고등학생도 아니었다. 어느 사이 그는 당당한 청년으로 변하여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변함없이 따뜻했다.
 "실은 많이 생각혔어......."
 그녀는 그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임을 알고도 남았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었다믄 아마도 이렇코롬 쉽게 포기허진 않었을 것이고만......."
 "......."
 "다 운명이겄지. 허지만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 혹시 만난다믄 그땐 도망가지 못할 것여......."
 명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감동이 뼈 속까지 파고들어와 도무지 몸도, 마음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한 번 손을 흔들어 주고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일요일이었으므로 모두가 집 안에 있던 참이었다. 경도가 일찍부터 찾아와 성준의 앞에 다부진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에 성준에게 명수와 결혼하길 원한다고 말했었다.
 성준이 딱하다는 듯 경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수는 아직 졸업도 못한 상태가 아닌가? 나중에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데 왜 그리 서두르는가? 함군도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갖고 그래야 되지 않어?"
 "결혼식을 서두르진 않겠습니다. 저희들의 혼인을 허락만 해주십시오."
 성준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 일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친자식이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건만, 부모 없는 자식이다보니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명수는 서서히 자신을 떠나고 있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을 생각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들이 친부모만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성준은 그녀를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니 그 이상이라도 그녀가 나이가 다 찰 때까지는,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나한테 결혼을 승낙받아야 할 사이들이 아니잖는가?"
 성준은 지난밤 명수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의식하며 말했다. 적어도 그래선 안 된다는 어느 정도의 핀잔이 내포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성준은 말이 없는 명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도통 말을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바짝 긴장하여 승낙을 얻어내기 위해 안절부절을 못할 것이건만, 그녀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여유가 있는 얼굴이었다.
 성준은 그녀에게 묻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가 설령 원한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보류해 두고 싶었다. 시간을 좀 보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자 성준의 아내가 수화기를 받더니 곧장 명수에게 건네 었다.
 "여보세요?"
 "나다. 고모."
 "예......."
 명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용히 수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명수가 성준에게 말했다.
 "저...... 작은 아빠, 다녀올 데가 있어요."
 "어딜?"
 "시골에요......."
 성준이 기가 막힌 듯 명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명수가 고개를 수그리며 다시 말했다.
 "작은아빠, 미안해요.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데요."
 그제서야 성준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했다.
 "그 어른 시골에 계신 거 아니잖니?"
 "할머니를 찾으시나 봐요."
 성준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느 할머닌 안 올라오실 거다. 기대하지 말거라."
 명수가 떠날 준비를 위하여 제 방으로 들어가자 성준이 경도의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은 알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명수가 편안하게 자란 아이는 아니잖은가? 나도 섣불리 대답할 사안이 결코 아니란 말이네. 급하지 않으니 좀더 두고보세. 명수가 원한다면 난 반대하지 않겠네."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명수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
 경도가 일어나 성준과 성준의 아내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구부린 뒤에 현관으로 나서자 성준이 그를 붙잡았다.
 "명수 금방 나올 걸세."
 "예,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냐, 같이 나가......."
 경도는 미선의 사무실까지 명수를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명수의 일이 궁금하여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으나, 명수의 과거 집안일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것도 별로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미선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녀는 경도에게 운전을 부탁하고 있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 운전을 할 형편이 못 되거든요. 머리 속이 영 뒤죽박죽이라서 불안해요. 오늘 늦게라도 올라올 수가 있을 것 같은데......."
 경도는 기왕에 명수의 할머니를 뵙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명수의 곁을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아니어서 더욱 마음 편할 것도 같았다. 그녀의 부탁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경도는 자신의 차를 사무실 앞에 주차시키고 미선의 중형 승용차를 운전하기로 했다. 뒷좌석에는 미선과 명수가 나란히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자세를 편안하게 잡은 미선이 명수에게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할머니를 꼭 모셔와야 할 텐데......."
 궁금한 명수가 물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왜 할머니를 보자시는 걸까요?"
 "나도 잘은 몰라. 허지만 알고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네 아빠하고 엄마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명수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이제 와서 두 분이 만난다는 일은 어쩌면 충분히 감상적인 감동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멀리서만 그리워했던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였지만 상경을 허락해 주실 것 같지도 않았다. 두 분이 만나 오히려 아름다웠던 추억이 모조리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것은 아픈 기억이든 즐거웠던 기억이든, 그대로 남아 묻히는 것이 훨씬 아름다워 보일 거 같았다.
 할머니는 그리운 사람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그 연인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불행한 인생에 바짝 붙어서 결코 멀리로 떠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할머니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우연스럽게도 자식들 간의 사랑으로 소용돌이에 말려들더니, 그조차 비극적인 종말로 그녀의 피를 말린 셈이었다. 할머니에게 있어 그녀의 인생은 글자 그대로 피흘리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그녀의 운명적 굴레였다. 외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있어서는 죽는 날까지 어쩔 수 없는 슬픔의 증거로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존재였다.
 "안 가시겠다면 어떡하죠?"
 "가시게 해야 돼. 이젠 황혼기에 접어드신 분들이라 많이 너그러워지셨을 거야. 할머니가 가셔야만 윤 교수님이 입을 여실 가능성이 있거든. 그분은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으실 거야. 오직 할머니에게만이 가능해. 난 확신하고 있어."


 6.
 그들이 김촌에 도착했을 때 순애는 들에 나가 있었다. 집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으나 마루와 방문이 열려 있는 안방 여기저기는 닭들이 누어 놓은 배설물로 가득하여 가축들과 함께 살아가는 시골임을 실감케 했다.
 명수는 우선 마루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배설물을 마루 끝에 놓인 걸레를 집어 닦아냈다. 미선과 경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명수는 이내 밖으로 나가 이집 저집을 기울여 할머니가 나가 있을 만한 논배미를 알아냈다. 미선과 경도를 마루에 앉혀 놓고 명수는 들녘으로 나갔다.
 거의 한 시간 여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순애는 명수를 데리고 나타났다. 순애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미선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시커멓게 타들어간 얼굴 한편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미선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그녀의 가여운 인생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의연하게 모든 고통을 떨치고 살아가고 있었다. 미선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어머니, 무척 건강해 보이네요?"
 미선은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러자 순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늙으막에는 건강이라도 잘 지켜야 헌다는디. 글안혀도 걱정이구만."
 그들은 순애가 부엌으로 들어가 바가지에 가득 퍼온 물을 양은 대야에 붓고 얼굴과 손발을 씻는 동안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닭들이 마당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순애는 얼굴과 손발을 머리에 둘렀던 수건을 벗어 닦으며 닭들을 향해 소리쳤다.
 "훠이! 야들아, 오늘은 인자 들어가야 혀."
 명수와 경도가 마루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섰다.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닭들을 토담 옆에 지어진 닭장 안으로 몰아넣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닭장 안으로 밀어넣자 순애가 다가와 닭장 문을 닫아걸고는 닭장 옆에 놓인 쌀겨통에서 쌀겨를 퍼내 닭장 안의 모이그릇에 부어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씻었던 대야의 물을 그 그릇에 부어넣었다. 닭장 안의 닭들이 요란하게 모이그릇으로 덤벼들었다. 순애는 돼지우리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넣어 준 후에야 비로소 방으로 들어가 삼베적삼으로 갈아입었다. 미선이 명수에게 살며시 물었다.
 "말씀드린 거야?"
 명수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말씀 안 드렸어요.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만 드렸는데요."
 순애가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방바닥의 닭똥들을 치우고는 그들을 불러들였다.
 "들어들와요. 요기는 혔는지 모르겄네."
 명수가 문지방을 넘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오면서 했어요."
 "그려! 잘혔구만. 요즘은 너무 바뻐서 먹을 것도 없당게......."
 그들이 방으로 들어와 윗목에 차례로 앉자 순애가 미선을 향해 물었다.
 "한동안 안 뵈더니만 머땀시 왔능가? 신수는 좋아뵈는구만."
 미선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윤 교수님께서 며칠내로 돌아가실 것 같아요."
 순애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역력히 스치고 지나갔다.
 "그려....... 불쌍헌 냥반......."
 그러나 그녀는 애써 단호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허지만서도 그 냥반은 인자 나허고 관계가 없구만. 사돈은 먼 놈의 사돈이겄어?"
 미선이 순애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윤 교수님이 둘아가시기 전에 어머님을 뵙고싶어 하십니다."
 순애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머땀시?"
 "저희도 잘은 모르겠어요."
 순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 냥반은 내 자식을 죽였어. 내겐 웬수여. 참말로 명도 긴 냥반이구만. 귀신은 뭣허고 있디야. 후딱후딱 그런 사람 챙겨서 데려가지 않구. 얼른 죽어서 죄값을 받어야 혀. 암, 하루라도 빨랑 죽어야 허는구만."
 "......."
 "어찌케 이 긴 세월을 살었을꼬? 어찌케 그 주둥이에 밥이라고 쳐넣었을꼬?"
 순애의 말을 듣고만 있던 명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래도 외할아버지 돌아가시면 할머니도 죽고싶을 거 아녜요?"
 순애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 니가 멀 안다고 그려?"
 "저도 알아요."
 순애가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돌리다가 물었다.
 "근디, 이 총각은 누구신겨?"
 그제서야 미선이 경도를 소개했다.
 "명수 친구예요. 어쩌면 애인일지도 모르겠어요."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순애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서렸다. 답답해진 미선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머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으시대요. 그렇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시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어머님이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들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인자 와서 나헌티 먼 할말이 있다능겨. 난 들을 만한 말이 없구만. 기양 죽으라고 혀. 마지막이라도 당당혀야지. 그 잘난 냥반잉게로......."
 명수가 반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먼저 할머니를 떠나신 건 아니잖아요?"
 순애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먼 말여? 니가 멀 안다고 자꾸 그러능겨?"
 "왜 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미워하시느냐 그거예요?"
 "느 애비허고 애미를 죽인겨. 그 냥반이 죽인겨."
 미선이 말했다.
 "아직도 섭섭하신 거죠? 명수 부모가 죽은 것도 죽은 거지만, 그분한테 끝까지 대접받지 못하신 게 분하신 거죠?"
 "먼 소리여? 당치 않은 소리들 그만혀."
 "가시는 길에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셨어요. 어머님도 그분 못 보시면 돌아가시는 날까지 괴로우실 걸요."
 "......."
 "이십 년을 휠체어에서 사신 분이에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받은 벌이겠죠. 그것으로 벌을 받은 것으로 하고 그만 용서해 주시죠, 어머님."
 "......."
 "윤 교수님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어머님을 뵙고 죽겠다는 생각 하나만이 그분의 전부예요. 그걸로 고통스러운 마지막 이승길을 참아내고 있는 거예요. 제발 이제 용서하시고 편안하게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