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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16:56
순애 제1권 / 제3부 황금을 일구는 생명수 (4)~(6)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2,716  


제3부 황금을 일구는 생명수


4.
도대체가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생판 모르는 군인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녀를 찾아왔다.
"김미선 기자님이신가요?"
그녀는 보통의 일상적인 손님으로만 알고 곁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계속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가 다시 물어왔다.
"김미선 기자님이신가요."
미선이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어지간히 컸던지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의 눈이 일시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예, 제가 김미선인데요."
"알고 있구만이라오. 지금 바쁘시면 저쪽에서 잠깐 기다리겄습니다."
미선이 조금은 미안하여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녜요.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어서 잘못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쪼메 앉어도 되겄습니까?"
"예, 그러시죠."
그녀는 앞자리에 놓여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잘 다려진 푸른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인이라서인지 그의 얼굴은 몹씨 검어 보였다. 짙은 눈썹과 얼굴에 비해 비교적 작은 입이 꽤 인상적이었다.
"지는 장성옥이라는 사람인디요. 현재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구만요."
그리고는 그녀의 책상 위로 들고왔던 책 한 권을 턱 하고 내밀었다.
"신분은 확실헌 사람이니 혹시라도 의심허진 말어요. 이것은 지가 쓴 작품이니 나중으라도 보시먼 절 의심하시는 일은 아마 없을 거구만요. 사전에 연락을 못 드리고 찾어와서 죄송헙니다. 그동안 휴가를 나올 때마다 두어 번 여그를 다녀갔구만요. 전 이미 김 기자님의 얼굴을 쬐끔 익혀두었다 이 말여요."
그는 의아해하는 미선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선은 그가 내민 책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된 단편집이었다. 잡지사에 있다보니 웬만한 글쓰는 이들의 이름은 이미 대부분 보통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게다가 그는 요즈음의 잘 나가는 젊은 대학생 작가 중의 하나로 꽤 알려진 편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모를 리는 없었다.
요즘 문학은 그 본연의 위치가 무엇이건간에 무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일사분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소설 작품의 본래적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는 쉽게 단정을 내릴 수도 없고, 섣불리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요즘의 소설은 분명 의도적인 확실한 목표를 향하여 한결같이 집중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선은 그의 작품세계가 한마디로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성함은 저도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만......."
"예, 고마운 일이구만요."
순간 미선은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에게로 당당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두 손을 단정하게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였다.
"무슨 일로 저를......."
"예....... 어떻게 야그를 시작혀야 헐지 잘 모르겄구만요."
그가 고개를 잠시 수그렸다가 다시 쳐들었다.
"김 기자님의 고향이 혹시 전라도 김제가 아닌가요? 더 자세허게 말씀드리먼 죽산면의 제내가 맞는가라오?"
그녀의 눈이 약간 커지며 경계심이 발동했다.
"예, 맞습니다만......."
"아버님의 성함은 김자 동자 태자시고요?"
미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 자신도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리에서 사라져 버린지 오래인 아버지의 이름 석 자였다.
"......."
미선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분은 50년도에 월북하셨다고 알고 있는디요? 그리고 김 기자님 위로는 오빠 한 분이 더 계시는 게 맞는지 모르겄네요?"
"......."
"맞는가라오?"
그녀가 잔뜩 긴장하여 낮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예, 맞긴 맞는데요......."
미선은 소름이 끼쳤다. 월북한 아버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서울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내보이는 듯한 묘한 수치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자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그는 십중팔구 군의 기관원일 가능성이 짙었다.
그녀는 재학 시절 극렬한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 얽혀들어가 일이 어긋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문득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얼굴이 수치심으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흩으러져 버린 머리가 모든 사고력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얼이 빠져 버린 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믄 됐구만이라오."
"......."
그제서야 그는 미선의 하얘지는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디 몸이 안 좋은가벼요? 아니믄 지가 먼 실수라도 혔는가요?"
그녀가 힘들게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가 빙그시 웃으며 비로소 멋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오해허지 말라고 혔잖어요? 지는 그냥 장성옥이라는 육군병장이라니까요."
"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지가 김 기자님을 찾게 된 것은...... 그러닝께 저희 어머님의 청이 기셨기 땜시구만요. 저희 어머님께서는 김동태와 김미선이라는 이름을 평생동안 가슴 속에 담고 기신 듯혔어요. 오래 전부터 찾어보라는 말씀이 기셨었지요....... 허지만서도 그때는 지가 별로 내키지 않어 그만두었구만이라오. 왜냐허믄 어머님께서는 찾어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씀도 안 혀주셨기 땜시 저 역시도 급헌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는 이야기여요.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으먼 어머님께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셨거든요. 그러나 저는 어머님의 가슴 깊은 곳에 아주 명확허게 각인되어 있는 이 이름들이 어머님에게는 보통의 이름이 아니란 것을 시간이 흐르먼서 깨달았구만이라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이름들 속에는 어머님의 말허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가 담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차츰 저를 깨우쳤던 거여요."

미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거두고 슬그머니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그가 남기고 간 그의 작품집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의 밝은 사진이 장식하고 있는 첫장을 넘기자 책의 날개에 그의 약력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 보았다. 약력은 '작가 장성옥은 195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로 시작해서 '현재는 군 복무중'으로 끝나 있었다.
그는 월촌면의 수월에서 태어나 부량면의 금강리 김촌에서 자랐다고 말했었다. 그녀의 고향 죽산면 제내와는 바로 근처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오순애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장삼용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미선으로서는 어떤 이름도 들어보질 못하였다. 그녀는 천천히 표지를 덮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사진 속의 그의 눈은 특별했다. 실제로 그를 만났을 때에 그녀는 그의 눈의 특별함이 곧 깊은 우수나 우울 같은 것임을 알았다. 그의 얼굴과 손은 지나치게 검었다. 그러나 그 검은빛조차도 촌스러운 방향으로 흐르거나 하여 전체적으로 그의 문학적 인상을 망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오히려 건강함이 넘쳐흘렀다. 또래의 젊은이들에게서는 쉽사리 보기 드문 무게있는 여유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할 때에도 한마디한마디가 모두 정성이었다. 하였던 말을 반복하지도 않았고 반면 너무 느려 상대가 지루하게 여기도록 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재빨리 서울말에 익숙해져 버린 그녀와는 달리,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오기가 보통이 아님을 말해 주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서울에 살다보면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전라도 사람들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본적이나 고향을 서울이나 아니면 전혀 엉뚱한 지방으로 둘러대는 일이 생기는 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업을 위해서도, 출세를 위해서도,하다못해 생활을 위해서도 전라도 출신으로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려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의적인 오기가 작용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추궁했었다.
'깜짝 놀랬구만이라오. 혹시 번지수를 잘못 짚지 않었나 혔당게요. 언지 그렇게 서울말을 배워 뿌렸어라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시골에는 드물었던 가난한 젊은 지식인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대단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면직원도 순경도 법을 빙자한 날강도에 불과했다. 그의 눈에 그들은 헐벗고 불쌍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악마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일제는 물러갔어도 해방은 오지 않은 것이었다. 일제보다도 더 간교하고 악랄한 당시 정부의 추종자들은 무지한 농민들의 순수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축적해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작태로 인하여 농민들은 처참한 보릿고개로 내몰린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진정한 해방은 꿈이었으며, 공산당의 남침은 그 가능성을 열어 주는 단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민군이 천하를 차지하였을 때에 그는 금방이라도 그의 뜻을 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백일천하에 불과했다. 그들이 물러가자 그도 후퇴하는 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로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라 하였지만, 그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허겁지겁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 년쯤 후에 미선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에 어머니에게 자주 멀었었다.
"엄니, 울 아부진 어디 있어?"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서렸고 그 어둠은 분노로 변해갔다. 어머니는 내뱉듯 말했었다.
'그 웬수 같은 빨갱이는 생각도 말어라....... 벌씨 북으로 가뻔졌는지, 하늘로 솟아 뻔졌는지, 아니믄 땅 속으로 꺼져 뻔졌는지, 난 모르겄다.'
그러다가도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그녀는 아버지를 그리워 했었다. 아버지가 이 땅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었다.

소리없이 들어온 성옥이 그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언제 왔어요? 깜짝 놀랐네."
성옥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그녀의 핸드백을 챙겨 주며 말했다. 일부러 더듬는 듯한 어눌한 말투였다.
"암도 없는 이 어두컴컴헌 사무실에서, 불도 안 키고 처녀가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여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대를 하고 봉게로 참말로 홀가분하고만이라오."
"고생이 많으셨지요? 전 면회갈 기회도 없었네요?"
그가 빙그시 웃었다.
"기회가 있다고 혀도 면회 댕기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라오?"
"하긴요......."
서너 번은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와 거듭 만나는 사이에 차츰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에게 접근이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전혀 경계하지도 않았으며,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더더욱 불편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면서도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는 하얀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차려 입어 검은 얼굴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하지만 미처 자라지 못한 머리가 최근의 전역자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차림새로 오히려 무척 정간해 보였다.
"마치 제대병이 애인 만나러 온 차림인데요?"
"그러믄 안 되는가요? 미선 씨도 이쁘게 입으셨구만요."
"정말이세요?"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되물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같구만이라오."
"호호. 기분이 좋네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녀의 귀 밑이 발그레해졌다.
"지가 여러 번 놀랬구만이라오. 첨엔 미선 씨를 여장부로 보았는디 부끄럼도 많이 타드만요."
"놀랜 건 제가 아닌가요?"
"그런가요?"
"그럼요. 어쨌튼 오늘은 제가 성옥씨 애인 해드리죠. 저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거든요?"
미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짜고짜로 성옥의 팔짱을 끼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어디선가 매케한 최루탄 냄새가 몰려왔다. 시위대와 경찰 간의 한바탕의 접전이 있었던 듯 거리는 어수선하였다. 한길 가운데로 타다 남은 재들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선이 심하게 재채기를 하자 성옥이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도착한 그들은 차에 올라 서둘러 거리를 빠져나갔다.
"차 안의 냄새가 참 싱그럽네요. 무슨 향수 같은데요?"
차가 대로로 나서자 그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지가 차를 몰 형편이 되는가라오? 일 땜시로 며칠 빌린 거여요."
"승용차도 빌려 타실 수가 있는 걸 보니 세월이 무척 좋으신 것 같네요.
"차주가 여자인 모양이죠?"
그가 약간 당황해 하며 대답했다.
"예, 잘 맞추셨구만이라오."
"재벌의 딸이라도 되는 모양이군요. 차를 가지고 있으니 말예요. 부럽네요."
그녀의 말은 비꼬는 기색이 완연했다.
"가진 사람들이야 남 생각 허나요? 지들만 편허고 잘살먼 되는디....... 집안이 여유가 있으닝게 이 비싼 승용차도 굴리겄죠."
그녀는 웬일인지 가슴 한 쪽이 텅 비어가는 듯했다. 그것은 그녀가 미혼인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역시 일찌감치부터 여자의 냄새가 났었다. 남자라는 존재는 여자가 있는 한은 다른 여성들에게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성옥은 여의도를 벗어나 영등포를 거쳐 김포공항을 향해 차를 몰았다. 공항을 스치고 난 후 다시 한참을 달리다가 그는 김포로 향하는 작은길로 꺾어져 들어갔다. 성옥은 운전하는 동안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미선은 공연스레 핸드백만 만지작거리며 스쳐가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반짝이는 물로 가득 채워진 모내기 직전의 들녘이 나타났다. 농부들은 논바닥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들녘의 싱그러움이 밀려들자 성옥은 속도를 줄이더니 차를 길 한편의 공터에 세우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차창을 완전히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차 속으로 몰려 들어왔다. 미선이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바람이 참 좋네요. 이만큼만 시내를 벗어나도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군요.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요."
"그렇구만요. 쪼메 더 들어갈까요? 김포를 지나면 곧 강화일 턴디요."
다른 차들이 휙휙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너무 들어가면 돌아올 때 힘들지 않을까요?"
"......."
미선이 성옥의 표정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듯하였다. 그는 들여마신 담배연기를 차창 쪽으로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는 곧 다시 담배를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미선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물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까요?"
성옥이 그녀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럴랑가요?"
"제가 어떤 잡지사에서 일하는지는 잘 아시죠?"
"그러믄요."
"저희 잡지에서 다음 호에 성옥 씨를 다루고 싶다던데요....... 이 달의 인물이라는 코너에 말예요. 문예지는 아니기 때문에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해요. 하지만 고정 독자들이 꽤 있는 편이라 그리 허술하게는 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감이 되겄습니까?"
"좋은 뜻으로 받으시고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네요."
"알겄습니다. 고맙구만요......."
"제 용무는 끝났어요.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알겠어요."
"......."
성옥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선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저도 이젠 자랄 만큼 자라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아요. 이야기해 보세요."
그녀의 자랄 만큼 자랐다는 말에 성옥이 피식 하고 웃었다.
"언제쯤이나 시간이 좀 날랑가요? 시골에 저희 어머님헌티 댕겨왔으먼 혀서요. 둘이서요....... 미선 씨 어머님은 시골에 기시지 않으신가요?"
"계시죠. 오빠하구요....... 얼마 전에 좀 편찮으셔서 다녀오긴 했는데요, 기왕이면 자주 들러 뵙는 것도 좋지요."
"그러믄 다음 주말이라도 한 번 다녀옵시다. 내일은 제가 약속이 있기도 허고, 너무 다급하기도 허고요. 시방은 제가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구만요."
"알 수가 없군요. 제가 마치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요. 성옥 씨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성옥 씨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하지만 제가 성옥 씨와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 느낌을 맛보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으니까요. 부담은 갖지 마세요. 이런 건 아마 제 기자적 근성일 수도 있고, 여성적인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미선의 말에는 별로 신경을 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님께서는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라오?"
내 어머니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곧 그녀에게 무한한 행복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너무도 외로웠었다.
"아녜요.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고마워요."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자라셨는가라오?"
느닷없는 성옥의 질문에 미선은 가슴이 울컥하며 흔들렸다.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마치 그녀의 가족이라도 되는 듯한 따뜻함으로 외로운 그녀를 연거푸 감동시키고 있었다.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구요....... 서울로 올라왔죠. 그리고는 대학을 다녔구요....... 졸업하고 난 후에 이 잡지사에 들어온 거죠. 아주 평범한 인생 아녜요?"
"대학 댕기기가 아주 힘이 들었겄네요?"
"그렇죠. 거의 제 힘으로 다녔어요. 다행히 오빠가 농사를 지으면서 어머니를 돌보아 주셨기 때문에 전 자유로울 수가 있었죠."
"그런 고생 속에서도 아주 이쁘게 자라셨구만이라오."
그의 말은 혼잣말처럼 그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져갔지만, 미선은 웬일인지 그의 말에 한없이 젖어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그와 함께 이런 곳에 앉아서 이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과거의 아버지에게 무슨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데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서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할는지도 몰랐다. 미선은 혼자 생각에 골몰하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본도 없는 시골출신 아이라 그래도 살아가기는 벅차네요."
"그렇겄죠. 하지만 충분히 감당할 만한 분처럼 보여요. 다부지고 당차 보여서 먼가 꼭 혀낼 사람으로 보이는구만요. 혹시 애인은. 정말 없어요? 친구조차도 없는 거여요?"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해맑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씀드렸잖아요. 아직은......."
그는 그녀가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남자를 향하여 어린 아이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경계심을 풀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서울 머스마들 눈이 다 멀었구만요......."
그녀가 밝게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성옥 씨는요?"
이미 드러난 얘기이건만 그녀는 확인이라도 하듯 물었다.
"조만간에 소개를 시켜드릴겨요. 맹랑한 아가씨가 한 분 있거든요. 이 차의 주인인디요, 그 아가씨도 우리와 고향이 같구만이라오."
"좀 섭섭하네요. 없으시다면 제가 충분히 애인해 드릴 의향이 있었는데요. 그 아가씨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성옥 씨를 저한테 넘길 의향이 없으냐구요. 호호......."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한번 물어는 보지요."
그녀는 차주의 손때가 묻어 있을 차 안을 빙 둘러보았다. 부유한 그녀들의 세계는 보통사람들의 세계와는 다를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모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옥이 그녀를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드라도 우리가 애인 헐 사이가 될라능가요?"
미선은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의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말은 어쩌면 우리는 애인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애인할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그 의문에 대해서는 감히 더 이상 확실하게 묻지를 못했다. 대답이 오히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성옥 씨!"
"예?"
"왜 제가 성옥 씨와 여기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말예요."
"운명이라는 놈의 정체를 아시는가라오? 그 막돼먹은 운명이라는 놈 말입니다."
"......."
"그놈의 정체를 알아야 혀요. 그 놈은 천하에 못된 놈이구만요."
그의 약간 흥분한 듯한 말을 들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시골에 가는 것도 그래요? 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지가 아직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 있구만이라오. 이번 주말 뵙기 전에 그것을 해결허고 그때 말씀드리고 싶은디요."
미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그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5.
"즈 엄니가 미선 씨를 뵙자고 하는구만아라오."
"예...."
"가주실 수 있으시죠?"
"......."
그로부터 전화가 있은 며칠 후 미선은 성옥과 함께 시골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속에 앉아서도 미선은 내내 꿈을 꾸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길래 내가 이렇게 쉽게 그와 함께 고향길을 떠날 수가 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서 풍기는 신뢰감을 최대한 믿고 싶었다. 그것은 거의가 그녀의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적어도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이처럼 턱도 없는 그와의 시골행을 감행하게 한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더 어렵고 복잡해짐을 알았다. 그녀는 스스로 잡념을 떨치기 위해 도리질을 했다. 그 순간 그녀는 혼자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마치 선이라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냐는 착각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제가 김촌에 있을 땐디요.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씀이 생각나는구만요. 이 고속도로 말여요. 몇 년 전 첨 생겼을 때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댕겨온 그분들이 그러더만요. 버스 안에 앉아 컵에 물을 따라도 그 물을 흘리지 않고 따를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참말로 신기했구만이라오. 어떻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실 수가 있는가 혔지라오. 시골길이란 온통 터덜거리는 자갈길이잖어요. 천천히 기어가는 속도에서도 그런 건 감히 상상할 수가 없지 않어요? 그려서 어찌나 고속버스를 타보고 싶었던지......."
미선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저도 그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었지요.어쨌든 이 시대의 고속도로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 중의 하나일 겁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으니까요. 버스의 바퀴에서 튕긴 돌멩이는 총알보다 무섭다고도 했었지요. 버스의 앞 유리창에 커다란 새들이 부딪쳐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구요."
"이 호남고속도로는 말여요. 2차선이긴 허지만 전라도 사람들에겐 대단한 도로여요. 어디 서울엘 하루에 댕겨올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혔겄어요?"
"우리 형편에 이런 고속도로가 타당한 것이냐는 반론도 많았잖아요? 데모도 보통이 아니었구요......."
"총을 들어 정권을 잡었응게로 인자 와서 놓을 수도 없고. 참말로 곤란헐 거 아녀요? 국민들에게는 무언가 화끈허게 보여 줘야 헐 것이고."
"카리스마인 그가 문제일까요? 아니면 무턱대고 따라가는 우리 국민들이 문제일까요?"
"모르지요. 그들 말마따나 역사가 판단혀 주겄지요. 우리야 먼 의견을 낼 수나 있능가라오?"
"하긴요......."
그녀가 말을 끊었다가 곧 계속했다.
"기차를 이용하는 것도 낭만적이긴 했어요. 밤차를 타면 새벽녘에야 영등포역이나 서울역에 내리곤 했죠."
"저도 기차는 많이 탔구만이라오."
"이 길도 언젠가는 4차선으로 확장이 된다더군요."
"예, 아예 첨부터 땅을 사들일 때 4차선용지를 확보혀 두었다고 하드만요."
"그래도 경부고속도로보다는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야 그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이닝께요....... 어찌튼 세상은 참말로 빨리도 변해가는구만이라오. 국민들 주둥아리는 쳐막어도 하는 일 보먼 박력 있게 잘 허는 면도 있긴 있능 거 같여요."
"박 대통령 말씀인가요?"
"조심허세요. 한 번 붙들려가면 반은 죽어서 나온대요. 기자들도 많이 당하고 있어요."
"기자들만인가라오. 학생들은 오죽 당했능가라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죠."
"그려요. 그렇지만 세상이 변하믄서 인식의 변화도 꽤 많은 것은 사실인 거 같여요."
그녀는 그의 인식의 변화라는 말이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미선 씨나 저는 동란중에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여요. 불행한 세대이면서도 알고 보면 엄청나게 축복받은 생명들이구만요. 그 전쟁통에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으니까 말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때 차라리 죽어 버렸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녀가 자조적으로 말하자 앞만을 바라보던 그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천하의 김 기자님이 먼 말씀을 그렇게 험하게 하신대요?"
"성옥 씨는 그런 경험이 없었나 보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하하하......."
그가 공허하게 웃었다. 웃음이란 누군가가 합세하여 웃어 주어야만 웃음다운 웃음이 된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열심히 살다보면 응원군도 생기는 거 아녀요? 힘을 내세요. 적어도 시방부턴 지라도 곁에 있게 될 팅게요."
"다행이군요. 어떤 관계가 될지는 모르지만....... 허지만 성옥 씨를 깊이 알고 싶지는 않아요."
"머땀시요?"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죠....... 아무도 지켜 주지 않으니까, 저는 제가 지켜야 한다 이 말이에요."
"허긴 그렇구만요. 지도 늑대는 영락없는 늑대구만요."
"늑대요? 성옥 씨가 늑대예요? 호호."
그녀가 웃었다. 그가 잠시 몸을 조금 뒤틀면서 몸의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 통에 차가 가볍게 흔들리면서 호젓한 차선을 위험스럽게 넘나들었다.
"운전 조심하세요. 지금 죽고 싶진 않거든요."
"알았구만이라오."
그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운전은 언제 배우신 거죠?"
"군에서 배운 솜씨 아닌가라오? 지는 군에 가서 사람 되얐구만이라오. 엄청 배워왔당게요."
"그래서 운전이 이렇게 거친가 보죠?"
"설마요, 조심허지요."
그녀가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소설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거든요? 물어도 될까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지도 잘은 모르는구만요."
"소설의 허구성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허구성요......."
"어쨌튼 진실은 아니잖아요?"
"동질의 모형을 제시혀 갖고 재미도 주고...... 보다 나은 삶의 모습을 제시해 주자는 거 아니겄어요?"
"허구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겠냐 하는 얘기예요?"
"어디까지나 픽션인디요. 그러니까 허구지요. 인생의 참모습에 가까이 갈려고 노력하는 거로 끝나는 거죠."
"그렇다면 논픽션은 글자 그대로 진실인가요?"
"모르겄네요. 진실이 글로 표현이 되겄는가요? 풍경화를 그려도 실제의 풍경을 완벽허게 그려낼 수는 없는 거 아녀요? 논픽션도 픽션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구만요."
"전 지금 다른 걸 묻고 있는 게 아녜요."
그녀는 며칠 사이에 그의 작품을 꽤 읽은 후였다.
"알고 있구만이라오. 시방 연재중인지 작품에 대혀서 알고 싶으신 거 아녀요."
"자전적 실명소설이라고 하더군요?"
"예."
"그 작품의 허구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아니면 전적으로 사실에만 입각해 있다면 그 정도는요?"
"주인공은 지 엄니여요. 지는 엄니를 통혀서 많은 것을 배웠구만요. 지 엄니를 사실대로 그려서 한 여인의 꺼지지 않는 그러나 참혹하고 슬픈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만이라오."
"그 사실대로라는 대목이 궁금해서 그래요. 어느 정도는 허구일 거 아니냐 이겁니다. 사람은 자신에 관한 일도 쓰다 보면 거짓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하물며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남은 남이잖아요?"
"......."
"긍정이신가요?"
"사실에 가까이 가려고 애를 썼구만이라오. 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글로는 삶의 진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는 없는 거여요.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거구만요. 인생에 비허믄 소설은 인생의 발 끝에도 이르지 못하는 거 아녀요? 소설은 그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과한 거여요."
"대답을 피하시는군요. 그 작품은 아마도 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웬만큼은 성공을 할 거라고들 하더군요. 어떤 방향으로 진행이 될지 궁금합니다."
"그건 지도 잘 모르겠구만이라오."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런 것도 없이 연재를 시작하셨나요?"
"아니죠. 첨은 있지만 끝은 보장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여요. 어쩌믄 첨부터 끝은 없는 건지도 모르구요. 혹은 언지라도 결말이 올 수 있기도 하구요."
"아리송하군요......."
그녀는 이해가 쉽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성옥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참말로 어려운 인터뷰네요. 포기허고 싶구만요."
그녀가 다시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는 말씀 좀 해주셔야죠?"
"예......."
대답을 하고서도 그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앞만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말했다.
"북으로 가셨다는 아버님이 살어 계신다면 시방 춘추가 어떻게 되실랑가요?"
"헤아려본 적이 없었어요.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전쟁이 나던 해에 서른둘이셨다니까, 어딘가에 살아 계신다면 쉰아홉쯤 안 되셨을까요?"
"돌아가셨을 가능성은 별로 없구만요."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에요. 살아계신들 어떡하겠어요?"
"제 어머님이 올해 마흔 여섯이구만요."
젊으시네요."
"미선 씨의 아버님을 잘 알고 계시구만요."
"그야 말씀하셨잖아요? 그 때문에 절 찾으셨다구요."
"두분이 어떤 관계이신지 궁금허지 않어요?"
그제서야 미선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로 끝없이 다가서는 고속도로의 끝을 응시하였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미선 씨는 앞으로도 제 작품을 눈여겨 보셔야 허겄습니다."
"그럴려고는 하고 있어요."
"거기 미선 씨의 부친이 실명으로 등장할 거구만요."
"......."

그들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가로운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시골길이라서 마주 달려오던 차가 남기고 가는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리곤 했다. 그들은 이리시를 통과하여 김제읍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리시를 막 통과하면서 그가 무심코 말했다.
"저는 여그서 학교를 나왔구만요."
그녀가 반갑게 말을 받았다.
"저도 그래요."
"역시 다르구만요. 누가 보아도 저희는 마치 오누이 같단 말여요......."
그들은 한참을 더 달려 김제읍마저도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더욱 터덜거리는 자갈길을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미선은 김제읍을 통과하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있는 제내는 김제읍에서 죽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만 한다. 성옥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김촌을 들렀다가 저녁이면 그녀는 어머니 곁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그녀가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차가 길 한편으로 빗겨나더니 곧 정지했다.
"쪼메 쉬었다가 갈랑가요."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를 벗어났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시원한 시골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아시다시피 여그는 벽골제의 제방이 있는 곳이구만요. 저그 둑에 올라가먼 엄청 시원허겄는디요?"
그가 동의를 구하는 듯하자 그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 아무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 주었다. 그가 제방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 작품도 대개는 그렇지만, 다음 작품의 배경은 여그 벽골제로 할려고 생각중여요. 참고가 될란지도 모르겄군요."
그녀는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녀의 밝은 얼굴에 힘을 얻은 그가 말을 시작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믄 노령산맥은 충청도의 동쪽에서부터 일어나지요. 그리고는 서남쪽을 향하여 달리먼서 덕유산과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과 마이산을 일으키고, 고덕산과 모악산, 내장산의 절묘한 산세를 세우는구만요. 그런 뒤에 서해바다의 변산반도로 빠져나가는 거죠. 이런 산세를 바탕으로혀서 북쪽으로는 완주군 원정산에서 발원혀서 전주천 등과 합쳐진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들어 가구요. 남쪽으로는 정읍군의 풍방산에서 발원한 물이 섬진댐으로 인혀서 역류하는 섬진강물을 받아들이고, 뒤이어 내장산에서 발원한 정읍천의 물줄기와 합쳐져, 동진강이라는 이름을 달고 마찬가지로 서해로 흘러 들어는구만요. 그 사이로 작은 신평천과 연포천이 흐르고, 그 가운데로 두월천과 감곡천이 합쳐진 원평천이 김제만경의 평야지대를 누비다가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는 거여요. 듣고 기신가라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실랑가 모르겄네요? 김제는 본래 백제 때에는 벽골군이라 했대요. 그러다가 통일신라 때 김제로 고쳤다고 하드만요.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도 금방 이곳이 사금 산지임을 알아요. 왜 여기에 사금이 나느냐 허믄 말여요. 이 땅의 기반암인 편마상화강암에는 석영맥이 끼어들어 갖고 함금석영맥을 이룬다고 허는디, 이것을 뫼산 자 산금이라고 한데요. 이 산금이 두월천과 원평천 물길을 따라 아래로 이동혀 갖고 김제 평야에 널려뻐진 사금이 된다는 거여요. 일제시대에는 금구와 금산면이 유명한 사금산지였대요....... 지금도 농사철이 끝나믄 여그 논바닥은 끝없이 파헤쳐져요. 숨겨진 금을 찾는 것이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일 거여요. 허지만 조상 대대로 갈아먹고 있던 땅들이 어쩔 수 없이 내장을 드러낸 모습을 바라보믄 여그 사람들은 가슴이 아리지 않을랑가요? 정작 황금은 소중한 농토를 파헤치고 뒤엎고 물에 씻어서 아무 때나 찾어지는 것이 아니잖어요? 황금은 농부들의 땀과 고뇌를 바탕으로 혀서, 해마다 추수절이 되야만 비로소 쏟아져 나오는 거 아닌가요? 황금은 빛나는 쇳조각이 아니라, 바로 순백의 쌀인 거란 말여요. 이 땅은 언제나 황금으로 출렁거리는 땅이었구만요. 이 땅의 사람들은 넘실대는 황금밭에서 태어나, 여그서 자라다가, 여그서 숨을 거두죠. 진짜 황금을 무엇보다 소중허게 여기고 동시에 겸손허게 쓸 줄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인 거여요."
그가 말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방 안쪽으로 흘러가는 맑은 물결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이 벽골제는 백제의 비류왕 때에 첨 만들어졌다고 혀요. 여그 부량면 신용리에서 출발허지요. 그래갖고 약 3키로미터쯤을 달려 저 쪽 월승리에서 멈추어요. 보시다시피 일직선으로 길게 누워 있는 거여요. 그 사이 여러 번 증축이 되었다고 허드만요."
그녀는 그가 말하는 도중에 잠시 가리켰던 남쪽 물길의 끝머리에 서 있는 마치 그림 같은 수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벽골제는 그로부터 얼마 안가 폐기되고 말어요. 임진왜란 때말여요. 국가의 관리가 어려워지자, 농민들이 함부로 저수지 안에 들어가 경작을 혀버렸거든요. 또 이 벽골제는 익산의 황등제 고부의 눌제와 함께 호남의 삼대제라 말을 헐 수가 있지요. 호남이라는 지방 이름도 아마 이들 저수지의 이남이라는 뜻에서 생긴 것이라 보는 게 옳을 거여요. 그런디 이 제방은 일제시대에 개조가 되는구만요. 그들은 더 알찬 황금을 거두어 들이기 위혀서 본격적인 제방개조에 들어갔어요. 그때 벽골제의 원형은 여지없이 무너져뻔졌어요. 하나로 길게 뻗어 있던 제방이 둘로 갈라지게 된 거지요. 둘로 나누어진 제방의 가운데를 간선수로로 이용헐려고 혔던 거여요. 그러니까 지금 보고 계시는 이 수로가 몽땅 제방이었던 거여요. 이것만으로도 웅대한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여요....... 듣기 지루허시죠?"
"아니예요. 성옥 씨하고 함께 이 땅에 살았었으면서도 전 잘 모르고 살아와 조금은 부끄럽네요."
"지도 조사를 하고서야 제대로 알게 된 거구만요."
"재미있네요."
"자신이 태어난 땅에 관혀서는 제대로 알어야 헌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고향을 내가 모르는데 누가 알고 기억허겄어요?"
"옳은 말씀이에요."
"비록 모습은 변혔지만 그려도 벽골제는 변함없는 자신의 역할을 다 허며 오늘까지 살아 있어요. 이 기존의 제방을 간선수로로 하여갖고 여러 개의 물길이 평야를 향하여 열려 있구만요. 이 물길은 넓은 농토에 공평하고 적절한 생명수를 배급허며 금만평야의 구석구석에 도달허지요. 비록 일본인들에 의하여 개조되기는 혔어도, 오늘날 이 땅이 별다른 수해도 가뭄도 없이 황금벌판을 유지헐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수로의 탁월한 능력 때문일 거구만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오는 거죠?"
"섬진제에서 흘러오는구만요. 섬진제의 물은 대부분 운암에서 퍼올린 물이 수갱을 통헌 후에 칠보까지 내려 오지요. 거그서부터 남쪽으로 동진강과 함께 낙양까지 또 달리는 거여요. 낙양에서 동진강의 물줄기를 벗어나 야 그 물길이 비로소 여그 도달허는 거죠. 여그서부터도 그 물은 평야의 곳곳에 생명수를 뿌리믄서 서해바다까지 십여 시간 이상을 달려야 허는구만이라오."
그녀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전 사람이 다니는 길만 길인 줄 알았었는데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물길이 그동안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었군요."
"그러믄요. 물은 땅 속에도 길이 있고, 땅 위에도 길이 있구만요. 물론 하늘에도 있겄지요. 지는 이 땅에서 태어났어요. 전 이 땅에서 태어나 벽골제에서 흘러나오는 살어있는 물 속에서 유년을 보냈구만요. 그리고 이 물을 마시고 자란 빛나는 황금을 삼키며 자랐지요. 저 뿐만이 아녀요. 제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도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이 땅에서 태어나 벽골제의 젖줄을 빨며 자랐던 거구만요."
성옥은 제방에 선 채로 흥건하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물길만 바라보면 성옥은 살 것 같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한 핏줄이었구만이라오......."
그의 말은 이해가 필요없는 말이었으나 묘하게도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들렸다. 미선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물보다 중허다고 허지요. 허지만 피는 중요허지 않을 수도 는 거여요. 근본은 물이구만요. 물을 기다리는 흙과 그 흙 속에서 자라다가 흙 속에 다시 묻혀 물길을 따라가는 숱한 생명들....... 그럴 것 같어요......."
"그것이 성옥 씨 작품들의 대체적인 주제인가요?"
"모르겄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다시 여그로 내려와 눌러앉을 것이구만요."
"다음 작품도 이미 구상은 다 끝나 있는 것 같은데요? 주인공이라든지......."
성옥이 미선의 얼굴을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주인공은 누구이겄어요? 시방 이 자리에 서 있는 바로 우리들이지요. 우리들 말고 누가 여그 살었어요? 우리들 말고 누가 이 물을 이해헙니까? 그러니 주인공은 바로 우리이고, 우리가 바로 주인공인 셈 아녀요."
"그거 재미있겠네요. 저는 여자 주인공이 될 텐데, 혹시 애인은 안 만들어 주시나요?"
"세상 모든 남자가 애인이라면 너무 통속적일랑가요? 여자는 누구든 사랑헐 수 있지 않어요? 아무나 사랑허믄 그 사람은 싸구려 여자가 되는 건가요? 진짜 여자는 말여요. 지 생각에는 아무나 사랑헐 수 있는 그런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녀는 그의 논리가 자꾸 비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순간만은 적어도 무언가에 흥분해 있었다.
"문학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 어렵다는 신춘문예에 학생 신분으로 당선이 되셨으니 대단하긴 하지요. 언제부터 본인 자신의 재능을 알아 채셨나요?"
"그런 건 없었구만이라오. 장님이 문고리 잡은 거지요. 지가 보아도 지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작품은 크게 다르지 않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여요. 사람은 누구나 기존의 확고했던 틀이 깨어지믄 쉽사리 반응을 나타내게 되지요. 이십여 년 이상을 탈없이 살어왔는디 어느날 갑자기 변화가 생겼어요. 인정헐 수 없는 변화가 말여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인정혀야만 허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가 찾아왔을 때 대개의 사람들처럼 지도 변화를 보인 거구만요. 그게 제 문학이었을 거여요."
"성옥 씨에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첨에는 견디기 무척 어려웠구만요. 지는 사람들을 의심혀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디 그 후부터는 아무도 믿고 싶지 않었단 말여요. 길을 가다가 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저 사람은 과연 저 사람일까, 혹시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은 아닐까 허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혔단 말여요."
"그 변화 말입니다. 알고 싶어요......."
"......."
성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질문을 거두어들였다.
"다음에 듣지요 뭐....... 다른걸 좀 여쭤볼까요? 이 차의 주인 말인데요. 제 느낌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묘한 냄새가 풍겨요.
그녀의 말에 성옥이 얼굴을 붉혔다. 성옥 씨에게 목숨을 걸은 아가씨인가요?"
그녀의 말에 성옥이 얼굴을 붉혔다.
"기자 체질이구만요. 사실은 말여요. 좋은 남자가 있었던 아가씨였구만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기도 했지만서두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두 사람은 정혼이 되어 있었당게요."
그의 말에 미선이 놀랐다.
"정혼한 아가씨를 왜......?"
"머땀시 붙들고 놓아주지 않느냐 이 말씀이죠? 저도 이해가 가지 않어요. 허지만 지는 그녀 옆에 있구만요. 그녀도 지 옆에 있고요. 그게 전부여요. 나머지는 잘 모르겄구만이라오."
"성옥 씨는 문제가 많군요. 잘못하면 소설가입네 하고 스캔들이나 일으켜 구설수에 올라서 인생 끝내는 거 아녜요?"
"많이 두렵구만요....... 허지만 아직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는구만이라오."
"뭣하면 그냥 보내 주세요. 더 정이 들기 전에......."
그러나 그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구만요.'
그녀는 몸을 돌려 천천히 승용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가녀린 몸매가 무척 애처러운 모습으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뱀꼬리처럼 길게 늘어선 물길의 저 멀리에 우뚝 솟아 있는 수문을 다시금 바라보다가 제방의 가운데 쯤에 서 있는 돌비를 돌아 내려왔다. 그녀의 등 뒤에 대고 그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누이......!"
그 순간 그녀는 눈을 찔끔 감으며 그 자리에 서 버렸다.

6.
명수가 몸을 한 번 꿈틀대더니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얼굴로 가져가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머리를 베개에 누인 채로 좌우로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한결 개운해져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 땀기운과 냄새가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니?"
미선의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명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선을 발견했다. 명수는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며 진심으로 미안스럽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선이 일어나려는 명수를 제지하며 말했다.
"죄송할 거 없어......."
"초면에......."
"명수야 초면이지만 난 아니야."
"......."
명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나중에 분명히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근데, 경도 씨는요?"
"언제 병실을 나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집에 안 갔으면 다시 들어오겠지. 편안히 누워 있어."
그는 그녀를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를 비우자 명수는 왠지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어 있었다.
그때 경도가 소리 없이 병실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봉지가 한아름 안겨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그건 뭐고?"
명수가 투정을 부리듯 묻자 그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응, 밖에서 바람 좀 쐬었지. 네가 자길래. 이건 먹을거리야. 많이 먹고 힘을 내야지. 김 선생님께서도 배가 고프실 것 같고."
미선이 그의 손에서 봉지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근데 너무 늦었지 않았어요? 집에 들어가야지요."
"아닙니다. 명수가 일어나면 함께 갈게요. 집에는 전화를 이미 드렸습니다. 혹시 저 때문에 말씀에 방해가 되신다면 복도에 나가 있겠습니다. 사실 담배 때문에 전 바깥이 더 편하거든요."
명수가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 미안하지만 밖에서 좀 기다려 줄래? 이야기가 끝나면 금방 부를게."
경도가 가볍게 웃으며 병실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명수가 미선에게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 중에요. 저하고 초면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차차 알게 될 거야."
"전 궁금한 게 많아요. 저희 아빠와 선생님의 관계도 궁금하구요."
"글세....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
"저희 아빠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나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왜 돌아가셨는지도요?"
"글쎄...."
"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듣기도 왠지 두려워지구요."
"당연한 일이지. 네 부모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고.... 그 죽음에는 분명 의혹이 있었어.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난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어. 너마저 잃기는 싫었던 거야. 그런데 넌 결국 나타나고야 말았잖니? 이젠 나도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왜 아무도 제게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말해 줄 필요가 없었던 거지. 나도 사실은 네게 입을 열기가 상당히 힘이 드는구나."
명수가 거침없이 물었다.
"전 이제 시작해 버렸어요. 알고 계신 부분만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미선의 눈가에 잔잔한 우수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명수야, 너는 이제 네 할머니의 인생을 알아야 한다. 이제 때가 되었는지도 몰라. 너는 이 이야기를 네 할머니에게서 직접 들을 수는 없어. 내가 그때까지 발표되었던 네 아버지의 작품을 가져다 주마. 그것을 읽으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을 거야. 그것은 모두가 사실일 수가 있으니까....... .
미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수는 멍청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병실을 나간 후 머지 않아 경도가 병실로 들어섰다. 그를 보자 명수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분이 무언가를 알고 있어...."
경도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현실은 어차피 현실이야. 두려워할 것 없어."
"아냐. 난 두려워"
그녀는 그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으로 옮겨 놓았다.
"느껴봐, 얼마나 뛰는지......."
그는 그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미선이 한참만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의 손에는 한 권의 스크랩북과 원고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연재된 그 작품들을 찾아 오려서 한꺼번에 묶어 보관해 두었던 듯했다.
"이것은 네 아빠의 마지막 작품이야. 물론 미완성작이지. 네가 이것을 읽고 나면 그 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마. 네 아빠는 이 작품 속에 많은 것을 남겨두셨어. 뒷부분의 원고는 미처 발표되지 못한 부분이야. 네 아빠의 부탁을 받고 내가 출판사에 가서 찾아온 거지. 너무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구나."
명수는 미선이 넘겨 준 아버지의 작품을 펼쳤다. {슬픈 톱니바퀴}였다.
다시 가슴이 콩쾅거리며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오늘은 몸이 불편할 테니 나중에 읽을래? 내가 나중에 줄 걸 그랬나?"
"아녜요. 많이 나아졌어요."
명수는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놓아두고 어떻게 드러누울 수 있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좀 쉬마."
미선이 옆자리의 빈 침대 위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경도는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잠시 멀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슬픈 톱니바퀴』는 해방 이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