ѹݵ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17:22
순애 제1권 / 제4부 아비를 문 꽃뱀 (5)~(9)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2,216  


 제4부 아비를 문 꽃뱀


 5.
 덕호는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여 내촌마을을 떠났다. 아버지를 산으로 보낸 뒤에 순애는 방 안에 들어가 숫제 방문을 걸어잠그고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벌써부터 아버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울어도 콱 막혀 버린 가슴은 뚫리지 않았다.
 육리댁과 명자는 방 안에서의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며 우는 순애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육리댁이 마루에 올라서 방문을 톡톡 두드리며 순애를 불렀다.
 "순애야! 순애야!"
 순애는 대답이 없고 잠시 흐느낌만 멎었다. 육리댁은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 그대로 마루에 주저앉아 먼산을 바라보았다. 명자도 그 옆에 주저앉아 옷고름을 적셨다. 당장은 아무것도 손에 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덕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명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육리댁이 명자의 코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 집에 발 들여 논지가 얼마여....... 벌씨 사십 년 아녀......."
 햇수로 따지면야 그렇지만, 그동안 그녀의 한맺힌 가슴은 몇천 갈래, 몇만 갈래로 찢어졌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디 갈 곳이 없응게로 살라고 들어왔는디, 굶어죽을 거 같여서....... 그때는 참말로 시어므니가 고마웠구먼."
 명자는 숨을 죽이고 육리댁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가 시집온 뒤로 처음 듣는 시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느 시아부지헌티는 역마살이 끼었응게, 잘 붙들어야 헌다고 혔어. 그렇잖음 평생 독수공방 신세 못 면할 것이라고. 그려도 설마 이러코롬 될 줄은 몰랐구만. 시어므니 말마따나 느 시아부지는 줄창 밖으로만 도는겨. 첨에는 지 여편네가 불쌍혀 보였는지, 그려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두 번 정도는 낯짝을 보이드만......."
 육리댁은 마루 끝으로 손을 뻗어 곰방대와 그 옆의 담배봉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담배가루를 곰방대 끝에 밀어넣었다.
 "참말로 대단헌 냥반였어. 첨에 그 냥반의 커다란 발을 보고 그만 기절할뻔혔구먼. 구척장신인디다가 숫기가 철철 넘쳤지. 웬만한 한문도 모르능 게 없는 냥반이었구만. 막걸리라믄 앉은 자리서 밤을 꼴까닥 새웠어야......."
 육리댁이 잠시 말을 멈추자 명자는 부엌에 들어가 성냥통을 찾아왔다. 육리댁은 명자에게서 넘겨받은 성냥을 꺼내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성냥불은 불이 잘 붙지가 않아 몇 번이나 그어대야 겨우 불이 생겼다.
 "딱이 내가 싫여서 그런 것도 아닌 거 같고, 딴 여편네를 보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모르긴 혀도 혼자 돌아댕기는 디에 재미를 붙인 거 같드만. 한 달 두 달 하더니 그려, 느이 서방이 태어나고서부터였는가벼. 코빼기도 안 비치드만. 경옥이년 나왔을 때는 아예 구다보지도 않드라고....... 그려도 내가 어떡허겄냐? 시어므니가 냉겨 논 몇 마지기 밭뙤기다가 목심 걸고 사는 수밖에....... 숱허게 기다리고 산겨. 가슴팍이 다 타버려서 벌씨 썩어 버렸구만. 어디서 뭣을 허는지, 남의 집 상머슴을 허는지, 아니믄 어디서 봇짐장사를 허는지. 어쩌다가 나 안 죽었소 허듯이 나타날 때는 그려도 보리쌀이라도 한두 말은 들여 놓더구먼, 놓자마자 휑하니 돌아서길래 어디 마실나가냐 싶기도 혔는디 나가믄 영 안 들어오는겨......."
 명숙이 육리댁의 품으로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육리댁의 입에서 짙은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의 순애도 밖의 이야기를 듣다가 다시 훌쩍였다.
 "잡어볼려고도 애를 써봤지. 죽는 시늉도 혀봤어. 이럴 수가 있는 거냐고 따지기도 혀봤어. 그러믄 그 냥반은 지집이 지아비 허는 일 따지먼 워쩌자는 거여? 새끼나 잘 키우는 기여, 새끼나....... 허고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버리는겨. 더 이상 멀 따진단 말여. 붙잡는다고 집구석에 자빠져 있을 냥반이 아니었던겨. 느가 혼례식을 허는 날에는 그 전참에 미리감치 야그를 건네 놓았었지. 그지헌테 적선허는 셈 치고라도 딱 한 번만 와 달라고....... 왔드만. 그 잘난 얼굴 사또님 얼굴처럼 번지르허게 처발르고는....... 임자가 참말로 잘 혔어. 앞으로 사는 거야 지 복잉 게. 잊어뻔지고 사는 기여 허드니, 아마 거진 달포는 되었을 거여. 어쩔라고 집구석에 있으먼서 허물어진 담벼락도 고쳐 주고, 삽이랑 낫이랑 호미랑, 봐주드구만. 논두렁에 나가 퇴비도 혀다 주고, 밭에 나가 거름도 뿌려 주고....... 난 그때야 첨으로 서방다운 서방을 느꼈었고만. 오랜만이 어찌나 가슴이 설레든지. 잊어먹지도 안혀. 그러고는 내가 밭이 나간 그 사이에 암말도 없이 나가 버린겨. 오늘까정 안 들어오는겨."
 "엄니! 고만혀요. 속 터지는 야그를 머땀시 계속허는겨요?"
 "아녀, 니는 알어야 혀. 내가 죽으먼 누가 알 거여? 그 인간 차라리 길거리서 병들어갖고 죽어 뿌렸으먼 좋겄다는 생각도 혔지. 벌씨 이승 사람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니먼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 뿌렸는지도 모를 일이고. 동네 사람들은 나헌티 맨날 그렸어야. 인자는 날 잊어뿌린 거라고. 워디 그 냥반이 신수가 모자랑가, 언사가 모자랑가. 밖으서 돈 벌어갖고 하마 잘 사는 거라고 말여. 나더러도 얼른 맘을 바꿔먹어야 헌더고 혔어. 더 늦기 전에......."
 그랬다. 그러면 육리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젖다가 제풀에 꺾이고 말았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육리댁은 그 뒤 사오 년이 넘도록 손주를 보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손녀 하나를 얻었다. 한동안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밤잠을 설치던 육리댁에게 며느리 명자가 어느 날 달거리가 비치지 않는다고 수줍게 말했다. 육리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간의 뒤숭숭했던 꿈자리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집 안에서 기르던 돼지 한 마리가 허름한 돼지우리를 부시고 나가더니 곧장 산으로 들어갔다. 육리댁은 기겁을 하여 속곳바람으로 허둥지둥 돼지를 쫓아가는데 따라가는 그녀의 발걸음보다 달아나는 돼지의 발걸음이 한참이나 빨랐다. 그녀의 힘으로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산으로 들어간 돼지는 커다란 무덤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그 강력한 주둥이로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육리댁은 그제서야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그 무덤은 다른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바로 시아버지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육리댁은 돼지에게 달려들어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다. 그러나 돼지는 황소처럼 강하여 도무지 꿈쩍하지를 않았다. 육리댁은 돼지를 향하여 갖은 악담을 해보기도 하고, 발길질도 해보았지만, 돼지는 멈추지 않고 무덤을 더 깊이 파들어가기만 했다. 육리댁은 소름이 끼쳐 비명을 지르다가 눈을 뜨고 말았었다.
 "설마......."
 육리댁은 애써 간밤 꿈자리의 기억을 지우며 며느리를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얼마 후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그 아이는 계집아이였다. 달리 자손이 없는 육리댁은 대단히 섭섭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싶기도 하였다. 불안한 꿈자리도 꿈자리였지만, 나라도 없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사내로 태어나 봐야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순애였다.

 덕호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순애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순애가 학교에 가기 위해 책보를 챙기던 날 아침에 육리댁은 순애의 손에서 책보따리를 빼앗아 아무렇게나 풀어 버린 다음 잡히는대로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인자부터 니년은 핵교 못 댕겨. 애비도 없는 년이 핵교 댕겨선 머덜 것여! 들이 나가서 일을 혀야 혀. 그려야 먹고 살지. 죽이라도 먹을라믄 일을 혀야 혀."
 그동안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던 다른 더 가난한 아이들에 비해 순애는 남다른 호강을 받고 살았는지도 몰랐다. 순애는 찢겨진 책과 공책들을 남의 물건 쳐다보듯이 바라보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썼다가는 모조리 지우고 다시 눌러쓰곤 했던 소중한 공책들이 순식간에 찢겨진 휴지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순애는 발 끝으로 그것들을 무심히 헤쳐보았다. 손때가 가득 묻어 있는 몽당연필이 책 속에서 굴러나와 떨어지자 코 끝이 찡해왔다. 아무리 깎아도 자꾸만 부러져 나가던 연필심, 어렵사리 사가지고 온 새 연필이 한순간에 몽당연필로 변해 버리던 가슴 아린 순간도 이젠 이별이었다. 순애는 그것들을 거두어 치마폭에 담아들고 밖으로 나가서는 뒷간 속의 잿더미에 던져 버렸다.
 "미친 년, 핵교 안 댕긴당게 살판났능가벼."
 부엌에서 나오다가 그 모양을 지그시 바라보던 명자도 달리 방법이 없는지 한마디 투덜거리고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순애는 풀이 죽은 어머니 명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시간이 흐르자 덕호의 빈 자리도 그런대로 차츰 기억에서 사라졌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쉴 틈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한가롭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단 겉으로는 어느 정도 아픔도 가셔지는 듯했다. 육리댁은 여느때처럼 혼자 된 명자를 데불고 품앗이를 다녔다.
 "집이 기양 있으먼 뭣 헐 것여? 속만 터질 턴디."
 가끔은 순애를 들로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처음에는 호락질에만 데리고 다녔으나 차츰 순애도 어른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힘과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내가 없는 집이라 이처럼 온식구가 품앗이에 나서지 않으면 내 농사에 놉을 구하기도 힘이 들고, 보리쌀 한 바가지 구하기도 힘이 들었다. 부지런히 남의 농사를 거들어야 내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고 굶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해야 했던 순애는 가끔 보리밥일지언정 한 그릇 가득 담긴 밥상이 그리웠다.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깨끗한 쌀밥은 이미 꿈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상 속의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삶은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먹는 것도 이제는 진저리가 났다. 차라리 남의 일에라도 나가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6.
 팔월이었다. 육리댁이 논일에서 평소보다 한참이나 일찍 돌아와 상기된 얼굴로 순애를 찾았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이라서인지 마당을 걸어들어오는 그녀의 검은 몸빼바지에서 치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애야!"
 갑자기 오후 새참이라도 하러 온 줄로 알고 순애는 토방에 엉거주춤 서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새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웬일이데여? 오늘은 창근 아저씨네 일 아닌겨?"
 그 집에서 준비를 할 것인데 집으로 들어왔으니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 명자도 남의 집 품앗이에 나가 있었다. 육리댁은 순애의 손을 덥썩 잡으며 그녀의 뺨에 주름살이 가득한 뺨을 거칠게 부볐다.
 "이것아, 시방 새참이 문지냐? 오늘 일 다 끝났어야."
 "먼 소리데여?"
 "일본이 졌디야."
 "예?"
 "인자 우린 산 거 같다. 독립이래여......."
 "독립......?"
 순애는 독립이라는 단어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실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육리댁은 흥분이 가시지 않는 듯 한동안 설레는 모습이었다. 어느 사이 명자도 돌아와 육리댁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답답한지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머릿수건을 연신 주물럭거리면서 물었다.
 "엄니, 시방 뭐라고 혔소? 독립이라니? 쪽바리들이 졌다는 말이라오? 밖으서도 시방 난리고만요."
 "그려, 왜놈 천황이 연합국헌티 항복을 혔다는 거 같여. 방송에 나왔다는디, 나도 들은 소리여. 아적 자세히는 모르겠구만서두......."
 듣고 있던 명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다. 그러더니 금방 눈시울을 붉혔다. 명자를 바라보던 육리댁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오열을 했다.
 "아이고, 덕호야! 쬐끔만 더 살지 그걸 못 견디고 갔단 말이냐!"
명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순애는 육리댁으로부터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바삐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 독립에 관한 소식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것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벌써 창근 아저씨네 집 마당에는 일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창근 아저씨네 논일을 하다가 대충 끝내고 몰려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마루와 토방에 흩어져 앉아 약간은 의아해하면서도 신명나는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순애는 들뜬 마음으로 마당으로 들어서서 토방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먼. 전쟁이 막바지까지 다 찼다는 말을 들었지만서도, 쪽바리들이 이렇게 질 줄 누가 알았어......."
 "어찌튼 하늘이 도운겨. 그놈들 콱 망해 뻔졌으먼 좋겄구만. 코 빠치고 앉아 있는 꼬라지를 쪼메 보았으먼 한이 없겄어."
 순애는 굴러다니는 사금파리를 주워 토방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덕호의 얼굴이었다.

 며칠 후 순애는, 도오다 선생이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고는 곧바로 학교로 가 교무실에서 제 손으로 배를 갈라 자결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학교 관사에서 어정쩡하게 보따리를 싸던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버려두고 그는 학교로 들어가 단숨에 일을 끝냈다는 것이었다.
 그가 교무실 앞에 걸린 일장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단칼에 자기 배를 갈랐다는 것이 순애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시신 옆에는 유서처럼 된 '천황폐하 만세. 황군 만세.'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더란다.
 "피비린내가 진동허는디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디야. 하여간 쪽바리들은 무서운 디가 있는 놈들이랑게. 시상에...... 전쟁에 졌다고 혀서 머땀시 말짱헌 놈이 배를 가른디야."
 일본의 패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이미 젊은 사람들 몇이 그 도오다 선생을 찾아가 똥통을 집어던졌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는 그들이 다가서자 당당하게 서서 일본도를 집어들었지만 끝내 검을 뽑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가끔 관사의 뜰에서 전형적인 저들의 복장을 갖추어 입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검을 수련하곤 했는데, 그 검은 시퍼런 기운이 무시무시하게 뻗치는 진검이어서 아무도 그 근처에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묘한 안타까움이 순애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순애야, 난 너를 좋아한단 말이다.'
 그의 낮으면서도 가슴 깊이 뚫고 들어오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듯했다. 그의 뜨거운 입김과 손가락의 열기가 아직도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풍겨나오는 듯했다.
 연민일까. 아니면 증오일까.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감정이 모르는 사이 이미 순애의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오다 선생을 향한 순애의 감정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면 지배자 일본인이라는 데서 온 신비감일 수도 있었다. 젊고 잘 생긴 선생님이라는 데서 온 존경심일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어 준 유일한 선생님이라는 데서 온 고마움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어루만지며 감격해 함으로 인해 그녀에게 남자를 가르쳐준 첫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순애는 오싹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그의 뜨거웠던 손처럼 차츰 뜨겁게 달구어지는 자신의 몸을 느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꽃뱀이 풀섶을 헤치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꽃뱀! 꽃뱀이야!
 순애는 스스로 자지러지며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며칠 뒤, 밤 늦게 명자는 이상한 여자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는 젊은 일본인 여자였다. 그러나 한복을 입고 있었던 탓에 쉽사리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이 댁이 오덕호 선생님 댁이 맞는지요?"
 "예, 그런디요?"
 명자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들어서며 마당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는 도오다 선생의 미망인입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오덕호 씨의 따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왔는지 아무도 따라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명자의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순애는 가슴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명자도 무슨 일인가 싶어 섣불리 대답하질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먼 일인디요? 우리 딸애는 머땀시 찾는 거여요?"
 그녀는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더니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도오다 선생의 유언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뵙게 하여 주십시오."
 원수 같은 일본인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 머리채를 휘어잡고도 싶었건만 명자는 꾸욱 참고 있었다.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저들은 무서운 일본인이었다. 언제 다시 상황이 바뀌어 그들이 예전처럼 칼을 휘두를지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이 땅을 지배했던 것이다.
 명자가 쭈삣쭈삣하며 망설이는 순애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가 순앤디요."
 그러자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그녀는 순애를 향하여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동작에서는 범하기 어려운 정성이 담겨 있었다.
 "도오다 선생은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유서를 통하여 이 말씀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순애 씨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된 건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며 그것은 자신과 일본이 이 땅에 저지른 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사죄하노라 하시며, 찾아가 용서를 빌라 하였습니다."
 명자는 그녀의 말이 아리송하였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그렇게 당당하던 일본인들이 아니었던가.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겁이 났다.
 "일어나시지라오. 나도 당신들헌티 감정이야 많지만, 다 지난 아녀요? 머땀시 무릎은 꿇고 그런다요?"
 그러나 그녀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 사죄로는 그 죄의 만분지 일도 갚을 수 없지만, 오 선생님의 하나밖에 없는 따님께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명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먼 말이데요? 아까 말씀하신 거 말여요? 야네 아부지가 도오다 선생 땜이 돌아가셨다니요?"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눈을 내리깔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혹시 집을 잘못 찾아오신 거는 아닌가라오?"
 "이 집이 오덕호 씨댁이라면 분명히 제대로 찾아온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명자가 안절부절을 못하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먼 말인지 잘 모르겄네......."
 그녀가 다시 반복하여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차라리 비장하기조차 했다.
 "도오다 선생의 말씀으로는 오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하였습니다."
 명자가 의아스러워 하면서도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려서 도오다 선생이 자살혔다는 말인가라오?"
 명자는 그녀가 따지러 왔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구만이라오."
 "그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튼간에 손님인디 올라 와서 야그를 헙시다요."
 명자가 다시 한 번 일어서기를 권해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순애 씨로부터 용서하겠다는 말을 반드시 듣고 일어서라 하였습니다."
 명자는 자꾸 더 괴이해졌다.
 "보기 참말로 딱하구만요."
 "아닙니다. 순애 씨의 대답을 꼭 들어야 합니다."
 순애는 눈앞이 아찔했다. 도오다 선생의 망령이 나타난 것이었다. 순애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만 갈수록 더 붉어졌다.
 "알았구만이라오."
 순애가 겨우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자가 놀라서 순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오다 선생의 미망인이 순애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확인했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예, 그렇구만이라오."
 이번에는 조금 또렷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명자가 놀란 눈으로 순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마당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명자와 순애를 향하여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이 구부려 절했다.
 "저는 도오다 선생의 유언을 모두 전한 걸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붙잡을 사이도 없이 그녀는 대문을 나섰다. 명자와 순애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순애는 다시 학교에 나갔다. 졸업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동생뻘 되는 학생들과 함께 한 교실에 앉아서 못 배운 한글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교실에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어른들도 몇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앞에서 갖은 아첨과 굴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들은 그들이 물러가자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승전을 마치 제 나라의 일처럼 열망하고 갈구하더니, 연합군의 원자폭탄 단 두 발로 승부가 갈라지자 모두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교사들이 사라진 학교에는 여기저기에서 교사를 초빙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그래도 남들보다 좀더 배운 사람들을 모셔다가 간단한 재교육을 시킨 후에 다시 교단에 세워 놓았다. 그들은 먼저 한글과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 등을 주로 가르쳤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이 될 리가 없었다.
 순애는 왜놈글에 보다 더 익숙해 있긴 했지만, 틈틈이 몰래 배워둔 한글실력도 그리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순애는 대부분의 한글을 아버지 덕호로부터 배웠다. 덕호는 한문에도 능했다. 일제가 다스리는 동안에도 한문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가 있었고 배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한문에 더 애착을 갖고 있었다.
 "순애야, 한글은 왜놈들 글보담 엄청 쉬운겨. 언지라도 금방 배울 수 있는디, 시방은 어려우닝께로 쪼메씩만 배우거라."
 순애는 그러나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웬만한 집안의 딸이 아니고서는 읍내의 여학교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육리댁네의 형편으로는 이미 순애가 더 공부하기란 애시당초 글러 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공부란 기껏해야 문맹을 벗어나자는 그런 정도의 것이었다.
 바깥은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라는 일본인의 손을 벗어났어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빙자한 소련군이 이미 북쪽에 진주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미군이 동시에 진주하여 남과 북이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일본인들은 이 땅을 떠났지만 그들은 이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것은 마치 어리고 정결하던 처녀의 순결을 무자비하게 유린하여, 다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린, 그런 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순결을 잃어버린 처녀들이 죽지 못해 살아온 이 거친 땅에 또다시 일본인과는 전혀 색다른 민족이 진주해 들어오고 있었다. 해방은 순식간에 그녀들의 순결을 찾아줄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좌익과 우익이라는 엉뚱한 색깔로 이 땅은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7.
 그 해 가을, 감격에 겨운 해방 후의 첫 추수가 끝나자마자 육리댁에는 중신애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육리댁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이 없었다. 육리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그들의 발길을 막았다.
 "안 되야! 시방은 안 되야!"
 "허지만 어쩔 것여, 더 늦으먼 불을 받을 것이고만."
 "자를 보내믄 우린 워떠케 살어?"
 "앗따! 보리쌀 구허기도 힘든디, 입 하나 치우는 것도 좋은 일이잖어?"
 "그게 문진가......."
 절대로 보낼 수 없는 며느리였다. 그녀는 이 집안의 대들보인 것이다. 대들보가 빠져나간 집안을 상상하면 육리댁은 살맛이 나질 않았다. 다 늙은 자신과 아직 어린애인 순애가 무슨 힘으로 먹고 살아갈 것인가. 십중 팔구 굶어죽기가 쉬울 것이었다. 허지만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신애비는 도무지 포기하지를 않았다.
 "쬐끔만 더 기달르라고 혀. 내 새끼 죽은 지가 얼마나 된다고......."
 "아따! 새 아들 얻는다고 생각허믄 되잖어요?"
 그들이 줄기차게 찾아다니는 사이 육리댁은 서서히 명자를 포기해 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맙게도 그녀를 탐내 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다는 것도 며느리에게는 차마 못할 짓이었다. 자신도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없는 집안일은 끔찍하였다. 하지만 다음 일은 다음에 생기는대로 알아서 해나가면 될 것도 같았다. 다행히도 순애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 않은가.
 "어디 사는 남정네여?"
 "거 죽산으서 광활로 들어가는 길 있잖어요? 거그 수교다리 못 미처서 쪼메만 들어가먼 되는디, 죽동 말여요."
 육리댁은 수월로 순애를 보내어 명자의 언니 명숙을 보자 했다. 이제 명숙이 죽동에 들러 사람을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엄니! 지는 안 갈라요."
 벌써 눈치챈 명자가 말을 참고 있다가 명숙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하니 그제사 입을 열었다.
 "누구는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겨? 나도 싫여!"
 육리댁도 유난히 역정을 냈다. 명자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서방 잡어먹은 년이 어딜 또 간대요? 지는 못가는구만이라오."
 "니 서방 니가 잡은겨? 그건 모다 팔잔겨. 니 팔자가 오씨 집안 팔자가 아닌가빈디 여그서 죽치고 살먼 멋헐겨?"
 명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팔자 한 번 자빠지먼 영 못 일어나는 것이구만이라오. 이년의 팔자는 여그 팔장게로 고만 두셔요."
 "그러믄 갔다가 오지 그려? 니 팔자가 오씨 집안 팔자가 맞으믄 갔다가라도 다시 올 거 아녀?"
 명자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엄니두 참, 엄니두 엄니지만 저 순애년은 워떡헌데요?"
 육리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겄지? 니가 순애년 땜시 미련이 남겄지만, 다 수가 생기는 겨. 걱정 말고 가그라."
 명자는 드디어 속없는 부아가 치밀었다.
 "장담은 먼놈의 장담을 그러코롬 허는 겨요? 엄니가 죽으믄 쟈를 어떡허냔 말여요?"
 육리댁의 입에서 기어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썩을년, 나 죽으라고 빌어라. 빌어."
 육리댁은 말을 뱉어 놓고도 명자가 말이라도 저리 해주니 속은 풀어졌다. 가는 날까지 말도 않고 있다가 훌쩍 날아가 버리면 그 속상함이야 어찌 이루 말할 수가 있겠는가.
 밤늦게 내촌으로 건너온 명숙이 육리댁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인, 몸둘 바를 모르겄구만요. 어찌케 이 공을 갚는다요."
 육리댁이 명숙의 손을 잡으며 말을 잘랐다.
 "공은 먼 놈의 공이라요? 자도 남은 인생이 구만리인디 살어야지."
 "그려도 용케도 큰 결심을 허셨구만이라오."
 "내사 평생 복이라고는 없는 팔장게로, 상관 없구만이라오. 순애 조것이 걱정인디. 어찌케 되겄지....... 가라도 있으닝게 나헌티는 다행 아녀요? 인자 다 컸으닝게......."
 "순애는 지도 관심을 갖고 돌볼 것이구만이라오. 너무 염려는 마셔요."
 육리댁이 본론을 꺼냈다.
 "명자 자는 인자 우리 딸이나 진 배 없잖어요? 허지만 지가 나설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 같고 헝게 사돈이 잘 알어 보셔야 헐 겨요. 없는 집이라고 얕잡어 볼라치면 기양 돌아오시구....... 함부로 보내고 싶지는 않구만이라오."
 명숙이 육리댁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당연한 말씀이지라오. 지만 믿으셔요."
 육리댁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중신애비 말로는 확실한 남정네 같던디......."
 이튿날 명숙은 중신애비와 함께 죽동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그녀의 얼굴은 활짝 피어 있었다. 별로 흠잡을 데가 없는 혼처였다.
 이후로 혼사는 급히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이듬해 봄이 찾아오기 전에 명자는 죽동의 박씨 집안 홀애비 영도에게 재가를 했다.

 8.
 죽동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논보다는 밭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사람의 일손이 많이 필요한 곳이었다. 영도네는 바로 집 뒤에 앉아 있는 야산을 소유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영도는 논도 그럭저럭 스무여 마지기를 소유하고 있어 몇 식구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이었다. 그는 서글서글한 외모만큼이나 호탕한 성격이었다. 그는 함부로 누구를 속이는 사람도 아니었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 드는 그런 비열한 사람도 아니었다.
 명자를 새로 맞이한 영도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 순애보다 너댓 살이 많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의 아내는 둘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난산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산모도 아이도 아무도 살릴 수가 없었다.
 아내를 살리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끝내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가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썼더라면 혹시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식을 하나라도 더 얻고 싶었던 그 간절한 욕심을 그는 끝내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도는 처음에는 순애까지도 받아들일 것을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 동네에 사는 사촌들의 제지가 여간 아니었고, 육리댁 역시도 손녀딸을 놓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명자만을 데려오는데 그쳤다. 늙은 그녀에게서 순애마저도 뺏어온다는 것은 분명 사람으로서는 쉽게 못할 짓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영도는 순애의 제 집 들락거림에도 전혀 거슬려 하지 않았다. 영도는 순애를 오히려 친딸처럼 허물없이 대했음으로 순애 역시 마음 편하게 들락거릴 수가 있었다.
 "일이 없으먼 자주 댕기거라. 니 할미한티는 꼭 야길 허고 와야 혀, 아님 걱정이 많으시지 않겄냐?"
 "야그는 허고 왔구만이라오......."
 순애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순애의 입에서도 어느 사이 영도에 대해 아부지라는 호칭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명자의 부탁이 있었던 것이다.
 "기왕에 니가 자주 들를 것인디 아부지라 부르먼 어떻겄냐?"
 그 해 여름 바쁜 농사일이 대충 끝난 뒤였다. 순애는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죽동을 찾았다. 영도는 무척 반가워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마루에 앉기도 전에 그는 일부터 시켰다. 이곳은 아직도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순애에게 허물이 없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였다.
 "순애야, 일 안 할라고 여그 와봤자 소용 없다. 여그는 내촌보담 일이 많을 것여."
 시간이 흐를수록 영도는 순애를 더욱 편하게 여겼다. 순애가 자칫하여 무슨 실수라도 할라치면, 그는 눈치보는 일 없이 여지없는 호통을 날렸다.
 "야, 이 가시나야. 똑바로 좀 못헌다냐? 어따가 정신 패댕기치고 해찰하는 겨?"
 이런 영도의 호통소리를 들으면 순애는 갑자기 눈물이 핑하고 돌기도 했다. 애비없는 슬픔이 목울대로 치올라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방 눈물을 닦았다. 영도가 자신을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 결코 아님을 순애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응선은 다행스럽게도 순애를 끼고 돌았다. 그는 사정이야 어떻든 없는 누이동생이 불시에 생겼으니, 그 행복한 기분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순애는 다른 애들과는 판이하게 고운 얼굴에 날씬하고 어른스러운 몸매를 갖고 있었다. 누구에게 내보여도 손색이 없는 자랑스러운 누이였다.
 "아부진 머땀시 순애만 보면 화를 내시능가라오? 야가 아적 먼 일을 할 줄 안다고 그러요? 지가 헐거구만요. 지를 시키시랑게요. 여그까정 놀러 왔으닝께 쪼메 놀라고 허믄 어디 동티나는겨요?"
 그러면 영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이 미친 놈아. 니놈 헐일은 없간디? 순애가 해도 될 일은 가가 허능겨. 니놈은 니놈 일이나 혀!"
 "그려도 그렇지요. 순애는 쪼메 놔두시랑게요."
 "그려도 이놈이......?"
 "알았구만이라오."
 응선은 늘상 마치 자기의 아버지가 어린 순애로부터 어머니를 훔쳐오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자신이 당연히 순애에게 미안해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 계집아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늙으신 할머니를 홀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가끔은 어른스러운 생각도 하는 응선이었다. 그러니 자연 순애를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틈만 생기면 순애를 챙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선은 영도를 피하여 순애를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살강 위 소쿠리에서 날계란을 하나 꺼내어 순애에게 들이밀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미는 계란이 아니었다. 귀한 손님이나 와야 겨우 한두 개를 내어 놓는 것이 이곳의 계란이었다. 그래서 농촌의 아낙들은 계란을 소중하게 여겼다. 부엌의 소쿠리에 하얀 계란이 어느 정도는 쌓여 있어야 겨우 조금이나마의 풍요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거나 먹자."
 "......."
 순애는 미안하고 고마워서 말없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면 응선은 곧 계란을 아궁이 위의 솥뚜껑에 몇 번 부딪쳐 깨어서는, 커다란 구멍을 내어 순애의 입에다가 들이밀었다. 순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젖히고 흘러내리는 계란을 받아 먹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끈적끈적한 계란의 흰자가 너무도 달콤했다. 마지막으로 좀 짭잘한 듯한 노른자가 툭 불거지며 기분좋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한 개만 깨먹어도 며칠은 살 것만 같았다.
 "다 먹은겨?"
 "응."
 응선은 자신도 한 개를 깨뜨려 먹은 후에 텅 빈 계란 껍데기를 아궁이 속에 투욱 던져넣었다. 그리고는 옷소매로 순애의 계란이 묻어 있는 입언저리를 닦아 주었다.
 "우리 쪼메 있다가 메가시나 가자."
 "......."
 응선은 부엌을 나와 토담 밑으로 가 닭장 안을 살펴보더니 닭장문을 열고 기어들어가 두어 개의 계란을 꺼내어 왔다. 응선은 그 계란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닦아 순애에게 넘겨 주었다. 아직도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에 포근하게 묻어왔다. 백옥같이 하얀 계란이었다.
 "정지간에 들어가믄 소쿠리가 있을 거여. 거그 올려 놓고 얼른 와."
 순애는 넘겨받은 계란을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만지고 싶었다. 응선은 다시 텃밭의 짚단 속과 잿간의 닭이 자주 앉아 있던 곳들을 살펴보고 팔을 쭈욱 밀어넣어도 보았다. 더 이상의 계란이 없자 그는 부엌에서 나오는 순애의 팔을 잡고 뒤안으로 돌아나갔다. 순애는 착한 누이가 되어 응선의 손에 이끌려 저물어가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9.
 야트막한 뒷산에 올라서면 벌써 많은 아이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여기가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이 낮은 산은 아이들이 어찌나 밟아대고 뛰어 노는지 도대체가 잔풀들이 자랄 겨를이 없었다. 동네 안쪽으로는 별로 어울려 놀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큰형뻘인 응선을 좋아했다. 응선은 아이들을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도록 합리적인 방법으로 편을 가를 줄을 알았다. 그리고 놀이에 들어가서는 최대한으로 재미있게 이끌 줄도 알았다. 그는 가끔은 놀이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엄격하고 공정한 심판이나 총감독으로 전체적인 놀이를 이끌곤 했다.
 아이들의 왁자한 환호성이 이어지고 곧 놀이가 시작되었다. 순애도 미처 낯이 익지는 않은 친구들이었지만 스스럼 없이 놀이에 끼어들었다. 뒤뚱거리며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했다. 순애는 숨이 차올라 헉헉거렸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웃음을 참지 못해 배를 움켜쥐고는 주저앉아서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기울고 소나무 숲의 그림자로 인하여 서로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때쯤에야, 아이들은 놀이를 멈추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산을 내려갔다. 이때쯤이면 벌써 저녁상을 차려 놓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하나 둘 산 밑으로 다가와 자기의 아이 이름을 불러댔다. 강력한 들녘의 모기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녁 요기를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는 여기저기서 손바닥으로 팔다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놀이가 끝나고서도 순애는 더위에 지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땀에 젖은 등허리에 어느 정도의 서늘한 저녁기운이 스미면 그래도 조금의 더위는 사라졌다. 어쨌든 순애는 오랜만에 좋은 친구들과 놀이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밤늦게까지 응선 오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이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 순애는 더욱 기뻤다.
 집쪽으로 내려가던 응선이 문득 순애의 손을 잡아 끌면서 발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우리 땀 좀 식히고 갈래?"
 "......."
 "우리 사춘집 뒤안에 가면 좋은 디가 있어."
 응선이 집으로 가는 길을 약간 비켜나서 비탈길을 성큼성큼 내려가다가, 끝머리에 자리잡은 아담한 토담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도 잘 정돈된 마당이 꽤나 부지런한 집안처럼 보였다.
 "형수!"
 응선이 불빛이 희미한 안방을 향하여 소리치자, 방문이 비시시 열리며 한 손에 숟가락을 든 젊은 아낙의 얼굴이 나타났다. 마침 식사중인 모양이었다.
 "우리 굴 안에 들어가 땀 좀 식힐라네요."
 "도련님! 저녁부터 드실랑가요?"
 "아녀요. 쪼메 있다가 집으서 먹을라네요."
 배가 조금 고프기는 했지만 응선이네보다 한참이나 더 가난하여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 사촌네인지라, 응선은 밥 한 그릇을 사양하는 것이었다.
 "예. 그럼 그러셔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아낙의 얼굴은 방 안으로 사라지고 방문도 스르르 닫혀 버렸다. 응선은 순애를 마당에 세워 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돌아나오는 응선의 손에 다 부서져가는 성냥통과 구불구불해진 가는 양초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가자."
 순애는 도대체 어딜 가자는 것인지 궁금하였으나 응선의 손에 끌려 종종걸음으로 뒤안으로 돌아들어갔다.
 "여그야.
 응선은 뒤안의 산자락을 깍아지른 작은 벼랑 앞에 섰다. 응선이 나무판자 여러 개가 나란히 이어진 그의 키만한 높이의 덮개를 제끼자, 시커먼 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안방의 뒷문이 바로 굴의 입구와 맞서 있어서 그런지, 방문으로 비치는 호롱불빛이 그래도 얼마만큼은 굴 입구를 밝혀 주고 있었다. 안방에서는 아이들이 부족한 끼니를 나누어 먹는 모양으로 어린아이의 짜증스러운 투정이 새어나왔다.
 "이 집은 우리 사춘헌티 잠깐 빌려준 거여. 그렁게로 이 집도 우리집이란 말이구만. 어여 들어가."
 응선이 귀엣말로 순애에게 속삭이면서 성냥불을 당겨 붙인 양초를 들고 굴 안으로 들어섰다. 순애는 이런 굴을 생전 처음 보는지라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응선의 손을 꼬옥 붙들고 살금살금 따라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숨어 있던 들짐승이나 커다란 뱀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촛불로 인해 밝아진 굴 안으로 대여섯 발자욱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바람처럼 온몸을 감싸안았다.
 "쬐끔만 기달러봐. 니는 추워서 아마 오들오들 떨 거여."
 굴은 입구로부터 약간 휘어들어가는 형태였는데, 이십여 걸음은 족히 될 길이였다. 굴 안 바닥에는 쓰다만 가마니 몇 장과 여러 겹으로 된 비료 푸대, 그리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소쿠리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응선은 굴의 맨 안쪽 벽면 흙을 약간 파내고 설치해둔 등잔대에 촛불을 세워두고는, 먼저 쓸만한 가마니 위에 앉더니 곧장 벌러덩 뒤로 누워 버렸다. 순애는 그냥 선 채로 사방을 둘러보며 서성거렸다.
 "겨울에는 여그다가 고구마를 들여놓는 겨. 그려야 겨울 내내 고구마를 먹을 수가 있구만. 안 그러믄 고구마가 죄다 썩어 뿌려서 쫄쫄 굶어야 혀."
 "고구마가 머땀시 썩는디야?"
 "나도 몰러. 허지만 고구마는 잘 썩능겨. 썩으먼 씁쓰레해서 못먹는구만......."
 순애는 고개를 들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천장을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천장은 그녀의 키보다 두어 발쯤은 더 높아 보였다. 아마 어른이라도 들어와 고개를 수그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미세한 모래흙으로 이루어진 붉은 굴의 양 벽은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순애는 손가락으로 살짝 굴의 벽면을 더듬어 보았다. 뜻밖에도 별로 흙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요 맹추야, 걱정 같은 거 허지도 말어! 이 굴은 절대로 안 무너지는 굴여. 이 동네에는 이런 굴이 여러 개 있단 말여. 무너졌단 말은 한 번도 없었당게."
 응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순애는 굴 벽의 검붉은 흙에 초점을 맞추고는 환상의 나라로 날아가고 있었다. 굴이란 참 이상한 곳이었다. 굴은 자신을 방문하는 사람을 쉽게 신비한 세계로 이끌어갔다.
 순애는 이 굴이 아마도 천 년 전쯤 어떤 사랑하는 신선과 선녀가 살았던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사랑을 방해하는 고통스러운 세상의 모든 시선들로부터 도망쳐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둘만의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신선과 선녀가 되어 하늘나라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수명이 다하였을 때 이 굴 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워 두 손을 행복하게 마주잡고 편안한 죽음의 나라로 갔을 것이다. 굴 속의 어딘가에서 그 신선과 선녀의 숨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어느 구석엔가에 꼭 새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순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들의 그림자를 찾아보았다.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는 그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았다. 순애는 언제라도 그들과 만날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순애는 이 굴이 마치 그녀 자신의 세계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가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선과...... 신녀...... 천년굴.......'
 순애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꿈 속에 잠겨 중얼거렸다. 드러누워 그 모양을 지켜보던 응선이 일어나 앉으며 얼이 빠져 있는 순애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그의 앞에 억지로 앉혔다. 그리고는 등 뒤에서 팔을 뻗어내려 순애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순애가 불편하고 부끄러워 응선의 팔을 떼아내며 일어서려 애를 썼다.
 "오빠! 머땀시 이려?"
 응선은 순애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에 감은 팔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끌어 안으며 그의 머리를 순애의 등에 바짝 기대었다. 그는 행복에 겨워 순애의 머리칼에 여러 번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의 강한 팔뚝이 그녀의 작은 젖가슴에 반쯤 걸려 있었다.
 "니는 내 뉘이잉겨. 난 니 오래비지? 난 니를 친동상처럼 생각헐 것이고만....... 니도 날 오래비로 생각혀 주어야 혀....... 안 그렁겨?"
 순애가 계속 그의 팔을 벗어나려 애를 쓰며 대답했다.
 "알았고만....... 그게 머 어려운 일이간디......."
 그제서야 응선은 그의 팔을 거두고는 다시 가마니짝 위에 드러누웠다.
 "고맙구먼. 나도 인자부텀은 외로운 놈이 아니구먼."
 순애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아려왔다. 이제까지 순애는 그녀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외롭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설마 응선이까지도 외로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