ѹݵ
 
 
 
     
  장편소설 '순애'
 
작성일 : 02-06-14 19:26
순애 제1권 / 제5부 뜸뚜럭의 첫사랑
 글쓴이 : 장종권
조회 : 2,233  


 제5부 틈뚜럭의 첫사랑


 1.
 명자가 훌쩍 떠나고 텅 비어 버린 내촌에 오랜만에 육리댁의 사위 화영이 딸 경옥과 함께 들렀다. 화영은 읍내에서 작은 일거리를 갖고 있었다.
 그의 일거리는 누룩의 일종인 종곡을 이 지역의 양조장에 조달하는 것이었다. 종곡은 쌀이나 조 등의 곡식에 곰팡이와 산소를 집어넣어 발효시킨 것으로써 누룩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국 판매망이 독과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제품은 서울의 모사에서만 제작하여 각 지역으로 할당이 되어졌다. 부대자루에 담겨 넘겨받은 이 종곡을 화영의 온 가족을 밤늦게까지 모여앉아 작은 봉투에 나누어 담아야 했다. 그리고는 이튿날 배달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 지역의 판매권을 갖고 있던 화영에게 새로운 도전자가 생겨 버렸다.
 그는 서울에 올라가 사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화영이 아무리 사주를 붙들고 사정을 하여도 요지부동이었다. 돈도 없는 판이라 승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정서방, 일이 잘 안 된다믄서......?"
 "때가 쪼메 안 좋구만이라오."
 "돈 들어가능 게 많을 턴디 어쩐디야?"
 육리댁이 혀를 쯪쯪거리며 안쓰러워 했다. 화영의 큰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이리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둘째는 딸이었다. 그 아이는 읍내의 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웬만큼 들어가는 돈이 아니었다.
 "지보다 장모님이 더 큰일이잖어요?"
 "그려......."
 육리댁이 코를 빠뜨리며 말을 흐렸다.
 "이 농삿일을 다 어찌케 헌다요......?"
 이 집안에 이제 남자라고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영은 어쩐지 미안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라도 나서야만 이 일이 해결이 될 것 같았다.
 "그려서 허는 말인디......."
 육리댁이 정색을 하자 화영은 곧 긴장했다. 아마도 머지않아 무언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것만 같았다.
 "정서방이 당분간만 여그로 들어오믄 안 될랑가?"
 예상했던 말이지만 화영은 문득 되물었다.
 "지가요?"
 "그려. 여그서 농사를 지으먼서 그 일도 하먼 좋겄는디......."
 화영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일루 들어오먼 그 일은 때려쳐야지요. 여그선 할 수도 없구만이라오".
듣고 있던 경옥이 끼어들었다.
 "더는 헐 수도 없는 일 아닌가벼요......?"
 내촌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어차피 그 일은 더 할 수가 없으니 충분히 생각해 보자는 뜻이었다. 육리댁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순애만 시집을 보내믄 될 것인디. 나야 얼마나 살겄어......."
 화영이 이곳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라 하더라도 그의 몫이 될 수가 있었다. 경옥은 그것이라도 감지덕지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영이 못내 답답해 보였다.
 화영은 눈을 내리감은 채로 말이 없었다. 육리댁이 화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서두르진 않을 것잉게 찬찬히 생각혀 봐, 정서방."
 "......."
 "우리가 굶어 죽어도 정서방을 원망허지는 않을 것이구만."
 말은 그래도 다분히 협박의 의미가 짙게 배인 중얼거림이었다. 화영이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장모님도 먼 말씀을 그리 허시능가라오? 지가 아무리 능력이 없다고 혀도 장모님이나 순애를 모른 척은 안할 것이고만요."
 "그려. 누가 그 마음을 모르겄능가......."
 "그렇다고 장모님이 읍내로 들어오실 수도 없는 것 아녀요?"
 화영의 마음이 슬슬 변하고 있었다.

 화영과 경옥은 짐을 꾸려 내촌으로 들어온 곳은 그 해 가을이었다. 화영의 식구도 벌써 넷인지라 그 입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먹고 살 자신도 없었던 육리댁에게는 그것은 곧 하늘의 도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영은 당분간 들로 나가 농사를 지으면서 재기를 도모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싶어 쉽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들이 내촌으로 들어오자 육리댁은 들일이나 살림살이가 한결 순탄해졌다. 그들만 있어 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육리댁의 몇 마지기 논은 화영의 기본적 자산이 되어 주었다. 잘만 하면 얼마든지 더 늘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화영의 부지런하고 야무진 생활방식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화영은 성격도 너그럽고 원만하여, 굴러들어온 사람은 따돌림 받기 십상인 농촌마을에서도 쉽게 동네 사람들과 융화가 되어 주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그저 껄껄대는 그의 너털웃음은 온 동네 여자들의 놀림감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이 내촌으로 들어온 날부터 순애는 웬일인지 집이 편하지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육리댁은 경옥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고종 오빠는 이리로 나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주 부딪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늘상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고종언니 기봉이 문제였다. 그녀는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순애와는 잘 어울릴 것 같은 나이임에도 서로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순애는 종종 함께 놀아줄 것을 부탁했다.
 "언니, 쪼메 놀자."
 그러면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거절했다.
 "공부를 혀야 혀. 집 안에 헐 일도 많잖어?"
 순애는 토라져서 홀로 밖으로 나서곤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경옥은 성격이 직선적이었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족족 참견하고, 원칙대로 비판하고 가르치곤 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과 잦은 언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번 화영의 유연한 처세 덕택으로 별일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정작 집 안에서 순애와 사사건건 생기는 마찰은 화영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특히나 육리댁도 포기해 버린 순애의 죽동 명자네에 가는 일은 경옥은 기를 쓰고 반대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심했다.
 "순애야, 이년아. 니년은 앞으로 날 믿고 살어가야 허는디, 시집간 니 에미는 머땀시 자꾸만 쫓아댕기는겨? 허구한 날 니년을 쳐다봐야 허는 니 에미 속아지는 오죽 뒤집어지겄냐? 시집 갈 때까정만이라도 지발 부탁인디 집구석으 좀 안 있을라냐?."
 그러면 순애는 야무지게 경옥을 쏘아보며 입을 삐쭉거렸다.
 "고모가 울 엄니 생각은 머땀시 허는겨요? 지가 죽동을 가든 말든, 울 엄니 속을 뒤집어 놓든 말든, 머땀시 참견하능겨요?"
 그리고 돌아서면서 경옥이 들을 똥 말 똥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므이한티 얹혀사는 꼬라지는 머 보기 좋은가?"
 잘 알아듣지 못한 경옥은 그 삐죽거림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니년은 바쁠 때만 되먼 꼭 죽동 간다드라. 일 안 할라믄 먹지를 말어야 헐 것 아녀?"
 그러면 순애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기봉 언니는 일 많이 허는겨요? 머땀시 지헌티만 그려요?"
 "언니가 노는겨?"
 "그러믄 언니는 편안허게 앉어서 공부나 허고, 지는 뼈빠지게 일이나 허란 말여요?"
 그러면 방 안에서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봉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는 곱게 웃으며 제 어머니를 다독였다.
 "엄니! 고만혀 둬요. 아무렴 지보다야 순애가 더 고생이잖어요? 순애 없을 때는 지가 다 헐거닝께 죽동에 가라고 혀요."

 2
 찬 바람이 쌩쌩 불어제끼는 저녁이었다. 순애는 부엌에서 경옥이 준비해 준 밥상을 들고 부엌문을 나서다가 갑자기 발이 미끌어지며 넘어졌다. 아무래도 허드렛물이 입구에 떨어진 것이 금세 얼어붙었던 모양이었다. 순애는 처음에는 기우뚱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종내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밥상을 잡은 채 널브러져 버렸다.
 부엌 바닥의 여기저기에 흩어진 보리밥알과 깨어진 반찬그릇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정성껏 차려 놓은 저녁밥상이 순식간에 요절이 나버린 것이었다. 그모양을 바라보던 경옥이 마침내 속아지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 창시 빠진 년아! 니년은 애가 머땀시 그러코롬 허는 일마다 방정 맞냐? 쬐끔 조심조심허믄 누가 잡어 쥑인다냐? 도대체 누그럴 닮어서 그런디야? 어이구! 속상혀 죽겄네."
 순애는 넋을 놓고 일어나 엉덩이를 만지다가 피가 묻어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넘어질 때 잘못 짚은 손바닥이 부엌 바닥에 스치면서 손가락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일시에 일어난 속아지도 벌써 그녀의 머리통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제 스스로도 화가 나고 민망하여 죽을 지경인데 경옥의 엉뚱한 말이 거기에 왈칵 기름을 부어넣어 버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어디 다치지나 않았는지를 먼저 살펴보았을 것이었다.
 "고모! 지발 가줘. 고모집으로 가주랑게. 여그는 우리집이란 말여요. 머땀시 여그는 와 살먼서 날 못살게 구능겨요? 머땀시 나나 할므이가 고모 눈치를 보고 살어야 허능겨? 고모가 못 나가믄 내가 나갈겨. 시방 내가 나가 버릴겨."
 속아지대로 무작정 뱉어내고 부엌문을 나서는 순애의 눈에 얼핏 경옥의 글썽거리는 눈물이 보였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대문을 빠져나가는 순애를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부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봉이 순애를 부르면서 뒤쫓아나오다가 고샅머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그 길로 순애는 죽동으로 달렸다. 십리는 족히 될 죽동이었다. 순애는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하여 한겨울의 추위도 아랑곳 없이 틈뚜럭을 따라 달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순애는 문득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자신이 간단한 저고리와 치마 차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거리를 뛰어와 이제는 돌아가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순애는 몸을 으스스 떨며 틈뚜럭에 주저앉았다. 어스름이 깔리는 들판에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내려앉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떼지어 나타나 허공을 돈다는 저 까마귀들. 해 저무는 들판에 내려앉아 죽은 쥐들의 시체나 줏어먹는 저 까마귀들. 순애는 갑자기 그 까마귀들이 무서워졌다.
 순애는 그제서야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이대로 죽동에 간다 하여도 어머니나 영도가 좋은 얼굴로 받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반드시 어머니는 물을 것이었다.
 '먼 일이 생겼구먼. 도대체 먼 일이데여? 말 좀 혀봐.'
그러면 순애는 신이 나서 고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것이고, 듣고난 어머니는 순애를 껴안고 목을 놓아 흐느낄 것이다. 그러면 옆에서 듣고 있던 영도는 순애에게 대뜸 호통을 칠 것이다.
 '돌아가뻔져. 너같은 년 다시는 이 집에 발을 못들여 놓게 헐 것이구만. 다시 이 집구석에 나타나믄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것잉게. 얼른 돌아가, 싸게싸게 돌아가 뻔지라고.'
 순애는 틈뚜럭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온몸에 흘렀던 땀이 차츰 식어가며 얼어붙는 듯 등허리가 얼얼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가는 추위에 순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촌이든 죽동이든 이제 어디 도달하기도 전에 얼어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저 까마귀들이 나의 온몸을 파 먹겠지. 순애는 더욱 눈물이 났다.
 '어디로 간디야.'
 이빨이 아래 위로 부딪치며 더덕더덕 소리를 냈다.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순애는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이대로 죽어 버리능겨. 할므이한티도 나는 짐만 될 거고, 엄니헌티도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거고. 갈 곳이 없잖어.'
 순애는 점점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뜸뚜럭에 쪼그려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다시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아부지!"
 순애는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엄니!"
 순애는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았다.
 "할므이!"
 할머니를 부르자 눈물이 더욱 거세게 쏟아졌다.
 어디선가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는 듯도 했다. 아버지는 덜덜 떨고 있는 순애를 알아보고 불쌍하여 못 견디겠다는 듯이 혀를 차며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 따스한 두 팔로 순애를 감싸안았다. 순애는 아버지의 가슴이 너무도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순애는 아버지를 계속 불러댔다.

 순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 온몸을 이불이 짓누르고 있었다. 웃목에는 할머니와 고모, 그리고 고모부 화영이 앉아 있었다. 화영이 연방 쯧쯧거리며 말했다.
 "아, 글씨. 뒤쫓아가길 잘혔지 뭐여! 하마트먼 멀쩡헌 애 죽일 뻔혔쟎어? 당신이 도대체 사람여? 짐승여?"
 경옥은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아갖고 아이 맘 하나 이해를 못허믄 그게 어른여?"
 "누가 지를 미워혀서 그렸나요? 기양 속아지 땜시 그런 건디 이 날씨에 어딜 간다고......."
 "자 속도 이해를 혀야 혀. 자가 먼 낙으로 살겄어? 즈 엄니조차 못 만난다믄 그게 어디 사는 거여? 임자가 참었어야혀......."
 "남 보기 민망혀서 그렁겨요. 에미 없는 아이 함부로 놔둔다고 흉볼까봐 그런겨요. 내가 자를 돌보지 않으먼 누가 돌본다요?"
 "자도 인자 클 만큼 컸구만....... 지가 알어서 잘허겄지......."
 화영도 더 이상은 말하기가 싫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애는 이불 속에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불화였다. 하지만 자신의 편을 들어 주는 고모부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아마 할머니는 말도 못하고 속으로 더 울고 있으리라. 애꿎게 혼이 나는 고모와 속만 터져가는 할머니 생각에 순애는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들창 밖으로 장독대를 스쳐가던 세찬 바람이 문풍지를 심하게 때리며 지나갔다. 좀전의 추위가 다시 떠올려지자 순애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졸음이 엄습해 왔다. 순애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스르르 잠을 청했다.

 3
 순애가 눈을 뜨자 방문에 햇살이 화사하게 피어 들어왔다. 창호지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랫목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로 미루어, 그녀는 할머니는 벌써 일어나 군불을 지피고 아침을 준비하는 걸로 생각했다. 아마도 밤 사이 할머니는 밤잠을 설치고 두어 번을 더 부엌으로 나가 군불을 지폈을 것이다.
 아무리 불을 지펴도 뎁혀진 방구들은 그 온기가 서너 시간 이상을 가지는 않는다. 그러니 새벽쯤이면 방구들은 당연히 식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새벽잠을 추위 때문에 설치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않을려면 누군가가 감겨지는 눈을 비비면서라도 다시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했다.
 '얼른얼른 일어나 솥이다 물 붓고 불좀 지펴야 혀. 그려야 고모부 세수를 헐 것 아녀?'
 어제만 같아도 이렇게 소리칠 할머니였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했다. 고모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만 눕혀 두고 다들 어디로 간겨?'
 순애는 몸을 가만히 움직여 보았다. 별 탈은 없는 것 같았다. 두 손을 아랫배 쯤으로 모으면서 살며시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어제 저녁 꽁꽁 얼어붙었던 손가락이 신기하게도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순애가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대문간으로부터 황급하게 걸어오는 발자욱소리가 들렸다. 발자욱소리만 들어도 순애는 그 소리가 육리댁의 것임을 알았다. 뒤따라 들어오는 소리는 분명 고모와 고모부의 것일 터였다.
 "아침부텀 어딜 댕겨오는겨?"
 순애가 밖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어! 우리 순애 살어났네? 일어난겨?"
 화영이 마루로 올라서며 방문을 열기도 전에 먼저 순애에게 반갑게 되물었다.
 " 벌씨 일어났고만이라오."
 화영이 방으로 들어서서 누워있는 순애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자 육리댁과 경옥도 따라와 앉았다. 모두의 얼굴에 야릇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경옥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였다. 일어나 앉은 순애가 궁금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화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순애야! 니 시집 안 가고 싶냐?"
 "시집요?"
 "그래, 시집 말여."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냐 싶어 순애가 다시 이부자리를 끌어당겨 더욱 뒤집어 썼다. 이제 겨우 해가 지나야 열여섯에 들어서는 순애였다. 경옥이 이불을 제끼며 말했다.
 "순애야, 일어나봐라. 너한티 참말로 좋은 소식이 있구만."
 순애가 다시 이불 자락을 당기며 쏘아부쳤다.
 "지가 벌써 시집은 무슨 시집이여요? 괜시리 장난치지 말어요들......."
 "아니여. 니를 탐내는 사람이 있구먼. 저 웃멀의 월촌댁네 있잖여? 그 댁네의 친정 막내동상이라는디, 오늘 아침 우리집을 댕겨갔구먼. 동상이 시방 와 있응게 한 번 볼라냐고 혀서....... 언진가 여그 들렀다가 너를 본 모냥이라, 그 총각이 너를 솔찬히 욕심낸다는 거 같여....... 그려서 얼굴 구경이라도 할겸 혀서 모다 그 집에 댕겨왔구만."
 "실없는 소리 고만혀요. 지는 쪼메 더 자야겄구만요."
 화영이 경옥을 거들었다.
 "순애야, 화 좀 고만 풀고 야그 좀 허자. 내 보기엔 꽤 쓸만헌 총각이던디, 니도 웬만허믄 한번 안 볼라냐?"
 "지는 시집 안 갈 거여요. 괜히 쫓아내고 싶으먼 좋은 말로 나가라고 혀요. 그러코롬 좋은 총각이믄 기봉 언니를 보내지. 머땀시 나를 붙잡고 그려요?"
 "아따, 누가 니를 쫓아내고 싶어서 그렁겨? 니도 이만한 나이믄 충분히 시집 갈 수 있단 말여. 그리고 그 총각이 니를 좋아헌다고 그러는디, 머땀시 기봉이는 들먹이는겨?"
 순애가 가소로운지 괜한 총각네를 탓했다.
 "그 집구석도 웃기는 집구석 아녀요?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지집애 데려다가 어따가 쓸려고 그런데요?"
 육리댁은 그저 웃고만 앉아 있었다. 순애가 시집을 가든 안 가든간에 이 아이가 벌써 자라서 욕심내는 총각이 있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한 것이었다.
 가만히 듣고있던 화영이 넌지시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불 속의 순애에게 물었다.
 "너 혹 남몰래 생각혀 둔 총각이 있는 거 아녀?"
 순애가 이불을 발랑 뒤집으며 일어나 화영을 쏘아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허셔요?"
 순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지고 있었다. 화영은 그녀의 얼굴에서 충분히 시간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화영이 껄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애가 어른이 되어간다니.......

 4.
 다시 한 해가 훌러덩 지나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에게 익숙해진 육리댁네에도 별 커다란 문제가 없이 바쁘게 세월만 흘러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선뜻선뜻 다가왔다.
 바깥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내촌마을은 조용했다. 내촌마을에는 소달구지가 덜거덕거리며 마을 안길을 지나가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저녁이면 합세하여 짖어대는 개들과, 새벽이면 울어대는 수탉들과, 한낮에 점잖게 목청을 뽑는 황소의 울음소리만이 내촌마을의 소리다운 소리요, 그것은 곧 이 내촌마을의 수백 년 징표이기도 했다.
 내촌의 아낙들은 낮의 힘든 들일이 끝나면 밤에는 늦게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바느질을 했다. 다 큰 처녀들은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곁에서 자수를 했다. 시집갈 준비였다. 그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꽃이나 새, 아니면 산수 자연 등으로 자수를 놓은 이불보며 배겟잇이며 옷가리개 등을 준비했다. 대개의 어머니는 그 옆에서 그녀가 시댁에 가져갈 여러 가지의 옷들을 손수 만들어 주었다.
 내촌의 아낙들은 이렇듯 밤늦게까지 호롱불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키웠다. 한뜸한뜸 바늘이 잡힌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정성스럽게 식구들의 옷을 만들기도 하고, 기우면서 그들의 건강을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녀 자신은 낮동안 세상일에 찌들었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켰다. 바느질을 하다보면 어느새 세상의 모든 잡념은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순애는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바느질도 자수도 할 수 있는 다 큰 처녀였다. 그래서 순애도 가끔은 육리댁의 바느질을 거들기도 하고, 경옥이나 기봉에게서 자수를 배우기도 했다. 기봉은 학교에서 배워온 자수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한동안 식구들은 겨울 동안에 있게 될 가마니 짜는 일을 위해 새끼줄을 꼬았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할머니나 고모부 화영이 물에 살짝 젖은 짚단을 방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면 온 식구들은 호롱불 아래에서 자정 무렵까지 조잘조잘 이야기들을 나누며 새끼줄을 꼬았다.
 지푸라기에 물기가 사라지면 다시 나가 바가지에 떠온 물을 입 안에 가득 넣었다가 지푸라기에 뿜어대기도 했다. 아니면 손바닥에 퇴퇴 침을 뱉어야 쉬이 꼬아졌다.
 지금은 새끼 꼬는 일이 대충 끝이 났다. 얼마 후에 화영과 경옥이 나란히 앉아 가마니 짜기를 시작하면, 그때 거기에 맞춰 부족한 새끼줄을 대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 소리들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고요가 내촌마을을 덮고 있었다. 그 고요조차도 잊어버린 채 호롱불 아래에서 아직 미숙한 자수를 하다가, 순애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눈을 부볐다.
 아무리 힘을 내어도 바느질 자리는 항상 거기가 거기였다. 바늘을 쥔 손가락이 저려왔다. 바늘 끝을 따라다니던 눈에도 통증이 찾아왔고, 팔다리 허리까지도 결려왔다. 순애는 방구석 한 편에 개어 놓은 이부자리에 허리를 기대었다.
 그때였다. 바깥 토담 쪽 어디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어서 들창문에 모래알 같은 무언가가 우수수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순애는 미소를 흘리며 자수 바구니를 웃목으로 밀어놓고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고친 후에 방문을 열고 개금발로 밖으로 나선 순애가 신발을 막 신으려는데, 안방에서 어흠 하는 화영의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구냐 하는 물음이었다. 순애는 찔끔 놀라며 신발을 신던 동작을 멈추고 방 안을 향해 대답했다.
 "지예요."
 "순애냐?"
 "예, 그렇구만이라오."
 침을 꼴깍 삼키며 순애가 대답했다.
 "날도 추워지는디, 너머 늦게까정 싸돌아다니믄 못쓰능겨. 얼른 들어와야 혀."
 화영은 순애보다 더 빨리 밖에서의 휘파람 소리를 알아들었다. 순애는 화영이 그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하여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더 따져묻지 않고 모르는 척 덮어 주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더욱 고마웠다.
 "예, 금시 들어올 것이구만요. 대문은 잠그지 마시지라오."
 "알았구먼. 후딱 댕겨오그라."
 순애는 피식 웃었다. 분명 화영은 어딘가를 다녀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애가 종종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가 담벼락을 돌아서니 예상대로 천섭의 검은 그림자가 길가에 쪼그려앉아 있었다. 순애가 팔짱을 낀 채로 다가가며 작은 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고모부가 아시는 거 같여요. 미리부텀 말하잖고, 머땀시 깜깜한 밤중에 불러낸디야?"
 천섭이 멋적은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순애가 가까이 다가서자, 천섭이 비로소 일어나며 무의식중에 순애의 팔을 잡으려 했다. 순애가 기겁을 하면서 팔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잠시 천섭을 흘겨보았다.
 "큰일날라고? 누가 보믄 워떡헐려고 그려?"
 "보긴 누가 본다고 그려? 이 밤중에......."
 천섭이 겸연쩍어 하며 손을 거두었다. 어둠 속에서도 한껏 붉어졌다가 서서히 풀어지는 그의 얼굴빛을 순애는 보았다.

 천섭은 틈뚜럭 너머의 수월에 사는 이종사촌 성태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는 순애가 어렸을 때부터 성태와 함께 내촌엘 자주 들렀었다. 그들은 순애보다 비록 한두 살이 위이기는 했으나, 같은 또래였기 때문에 쉽사리 어울릴 수가 있었다.
 성태는 명자가 재가한 뒤부터는 외로운 순애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내촌에서 보냈다. 가끔은 그의 어머니 명숙과 동행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내촌까지의 논두렁길을 천섭과 이야기하며 걸어왔던 것이다.
 천섭은 성태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르긴 해도 그가 처음 성태와 내촌에 놀러와 순애를 본 순간 그녀에게서 받은 남다른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의 이성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순애도 자주 그들을 따라 수월까지 놀러가기도 했다. 셋은 논두렁길을 따라 걸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배꼽을 쥐건 했다.
 논두렁길에는 온갖 들풀과 들꽃들이 자유롭게 자라고 있었다. 봄이 오면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 우뚝우뚝 하얀 꽃을 피워댔다. 이름 모를 나물들과 질경이, 그리고 자운영의 화사한 꽃이 만발하면, 윙윙거리는 벌 나비들과 함께, 들녁은 꿈나라처럼 아름다웠다.
 그들은 토끼풀을 뜯어 손목시계를 만들어 차기도 하고, 질경이 꽃을 따서 그 꽃대를 서로 엇걸어 당겨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누렇게 익어 출렁거리는 보리밭을 지날 때에는 그 보리냄새에 취하여 풋풋한 풍요로움 속에 빠지기도 했다.
 여름에 틈뚜럭에 오르면 성태와 천섭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로에 들어가 첨벙거렸다. 틈뚜럭 위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 순애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속옷을 비틀어 짜 입는 순간까지, 순애는 몸을 들녘 쪽으로 돌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인자 됐구만.'
 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서야 순애는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젖어 바짝 달라붙은 머리칼과 비틀어 주름이 생긴 옷을 바라보고 순애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을이면 틈뚜럭에 자라는 코스모스가 그들을 감추어 주었다. 그들은 틈뚜럭에 앉아 꺾어온 콩대를 태워 익은 콩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시커멓게그을린 콩깎지를 까는 성태와 천섭의 손은 검뎅이 투성이였으며 가끔은 그것이 얼굴에 묻기도 했다. 세상은 그들에게 꽃처럼 빛나는 세계를 주었으며, 동시에 티끌 하나 없는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천섭의 순애에 대한 첫 느낌은 그들이 틈뚜럭을 걷다가 그가 발을 발못 디뎌 넘어졌을 때 찾아왔다. 성태의 손보다 순애의 따뜻한 손이 먼저 그의 손을 잡아주었던 것이다.
 "어머! 피가 흘러......."
 순애는 그의 약간의 상채기가 생긴 팔꿈치를 발견하고는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손바닥으로 그의 팔꿈치 상채기에 생긴 피를 닦아 주었다.
 "후딱 물에 씻어야겄어......."
 그 순간 천섭은 처음으로 뿌듯한 행복감에 빠졌다.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팔에 닿았을 때, 그리고 그의 피가 그녀의 손바닥에 묻어났을 때, 그는 온몸이 자지러지는 자신의 비명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피의 비명이었다.
 그것은 순애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애처럼 그녀에게 팔뚝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는 천섭에게서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순종하는 양순한 머스마에 불과했었다.
 "순애......."
 "응."
 "고마워......."
 그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천섭으로부터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편안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의 손바닥에 묻어난 그의 피가 그녀에게 웬일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그제서야 순애는 얼굴을 붉혔다. 그와 어울리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성태가 길가에서 들꽃 한무더기를 꺾어왔다. 순애가 손을 멈추고, 천섭이 팔뚝의 걷은 옷소매를 내리자, 성태는 빙긋이 웃으면서 다가와 들꽃을 순애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리고는 남은 꽃을 순애의 손에 가득 들려 주고 어리벙벙한 천섭을 순애의 옆에 세워 놓았다.
 "인자 된겨. 참말로 보기 좋아. 니들끼리 서로 장가가고 시집가먼 얼마나 좋겄냐? 그러믄 나는 매일 느네들 집이 가서 느네허고 놀 수가 있을 턴디......."
 순애는 더욱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천섭도 뒤질세라 얼굴을 붉혔다. 성태는 만족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성태의 입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천섭도 순애도 천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천섭은 성태와 함께 이리에 있는 공업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기차를 이용하여 김제읍까지 내려왔다. 거기서부터는 태인 가는 신작로를 따라 족히 한 시간 이상은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제서부터 수월까지는 대개 맡겨둔 자전거를 이용했다.
 언젠부턴가, 굳이 더듬어보면 한두 해 전부터 천섭은 순애를 혼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촌에서의 작은 볼일을 핑계삼아 나타나더니, 차츰 순애를 찾는 일이 그의 볼일로 변하여 갔다.
 그는 기차를 타야 하는 김제까지의 길을 아예 내촌을 통과해 가는 작은 시골길로 잡아 버렸다. 그는 신작로를 따라가지 않고 처음부터 내촌쪽으로 들어섰다. 수월에서 틈뚜럭만 넘으면 곧 내촌이 보였다. 그는 내촌에서 순애를 만난 다음 화초산 밑을 지나 입석으로 빠져나가서는 김제읍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안 성태는 이리로 돌아가는 날, 일부러 수월에서 느즈막히 출발을 하여 천섭과 김제에서의 기차시간을 맞추곤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천섭과 순애는 쉽지 않은 정이 들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 천섭이 내촌에 나타났을 때, 순애는 그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동안 그는 순애에게 마치 오라버니나 된 것처럼 점잖았고 어색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순애 앞에서 부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순애는 그것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첫 느낌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5
 동네 아래쪽에서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한 마리가 짖어대자, 곧 온 동네의 개들이 몽땅 짖어대기 시작했다. 순애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이 생각나 순애는 피식 웃었다.
 "저노므 개들은 머땀시 시도 때도 없이 짖어쌌는디야? 가슴 떨리는구만."
 천섭이 짐짓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솔직하게 고백이라도 하는 듯이, 아니면 순애의 떨리는 가슴을 금방 읽기라도 한 듯이 투덜거렸다.
 "머땀시 왔디야? 헐말 있으믄 얼른 허지 그려. 동네 사람들 볼까 무섭구만."
 순애는 내심 반가웠으나, 속마음을 감추고 금방이라도 말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듯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천섭이 정말로 '아무 일도 없구만. 기양 와봤지. 들어가봐.' 하면 오히려 한없이 섭섭해 할 그녀였다.
 천섭은 순애의 다그침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웃으며 순애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툼으로 나갈까? 거그는 쪼메 조용할 것 같은디......."
 "먼 소리데여? 조용한 디 가서 머하게?"
 순애가 계속 퉁명스럽게 쏘아부쳤다. 그러면서도 순애의 발길은 먼저 틈뚜럭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천섭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로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순애를 불러 세웠다.
 "쪼메 천천히 가믄, 누가 잡아먹는다냐? 야그 좀 하믄서 가믄 좋겄네."
 순애가 천섭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나갈라믄 후딱 나가야 혀, 누가 본당게로."
 고샅을 벗어나 틈뚜럭으로 통하는 어두운 논두렁길로 들어서자 비로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순애의 걸음이 눈에 띄게 속도가 떨어지다가 아예 걷는지 마는지 어정거렸다. 사람의 그림자는 모두 사라지고 돌아보면 깜빡거리던 호롱불들도 하나 둘 꺼져갔다.
 이 시간쯤이면 내촌 사람들은 대부분 잠자리에 들어간다. 낮동안의 힘들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리면서 호롱불도 스르르 꺼져간다. 이 시간에는 사실 벼락이 터져도 아무도 모르기가 쉬운 것이다. 그들은 죽음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내일 아침 그들은 또 꼭두새벽에 일어나 들로 나설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길게 자랐다가 서서히 말라가는 풀들이 발목에 자꾸 걸리는 논두렁길을 지나 틈뚜럭에 이르렀다. 틈뚜럭에 올라 두 사람은 나란히 풀밭에 앉았다. 틈뚜럭 안쪽으로 흐르는 잔잔한 물결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물결이 신기한 듯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이 수로를 빠져나간 물줄기는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들녁으로 배급이 된다. 틈뚜럭에서 마지막으로 갈라져 흐르는 물은 질서정연한 작은 물길을 통하여 온 들녁에 실핏줄처럼 뻗어나간다.
 이 수로에는 항상 물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바닥까지 바짝 말라 있다가도 봄이 지나고 서서히 여름 농사철이 다가오면 물은 풍요롭게 넘치며 흘러내렸다. 이곳 사람들은 출렁거리는 물만 쳐다보고 있어도 저절로 배가 불렀다.
 여름 내내 논두렁을 덮으며 철렁거리던 물은 서서히 줄어들면서 늦가을이 되면 다시 바닥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수로의 발원지인 섬진제에 다시 물을 저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풀벌레소리가 요란해졌다. 근처에서 갑자기 귀뚜라미가 울어댔다.
 "여직 안 들리던 요놈의 소리가 갑자기 웬일이래여?"
 천섭이 말을 받았다.
 "아까부텀 울었고만."
 순애는 스스로 놀라웠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감각이 오로지 천섭에게로만 향해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천섭이 다시 말했다.
 "우리가 시방 지들을 방해허고 있능가벼."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순애가 물었다.
 "우리가 멀 방해헌디여?"
 "지들도 쪼메 자야헐 거 아녀? 아니믄 사랑을 허든가."
 순애가 기가 막혀 피식 하고 웃었다.
 "순애 씨!"
 천섭이 느닷없이 씨자를 붙이자, 순애는 천섭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쏘아부쳤다.
 "뜬굼없이 씨는 먼 놈의 씨래여?"
 "나 말여......, 꼭 허고 싶은 말이 있는디......."
 천섭이 손을 뻗어 발끝의 길게 자란 풀잎을 뜯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뜯어낸 긴 풀잎을 다시 몇 개로 잘라내서는 힘없이 허공으로 떨어뜨렸다.
 "......."
 순애는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말을 해도 더듬거릴 것만 같았다.
 "나...... 순애 씨헌티...... 장가 들고싶은디......."
 "......."
 순애는 콩닥거리던 가슴이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팔이 자신의 가슴을 꼬옥 부둥켜안고 있었다.
 "날 받아줄겨?"
 순애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참말로......."
 천섭이 순애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시방은 어렵고......, 난중에......."
 "......."
 순애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는 천섭의 얼굴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천섭의 얼굴은 어린 아이처럼 천진스러웠다. 그것은 그의 검은 눈동자와 짙은 눈썹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눈 속에 늘 파란 호수가 넓다랗게 가라앉아 있음을 비로서 알았다. 순애는 천섭의 눈 속에 가득 담겨 있는 이 넓고 파란 호수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눈만 바라보면 감동이 온몸으로 퍼져 들어갔다. 그의 눈 속에 온 몸으로 뛰어들어 빠져버리거나, 아니면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쬐끔만 기둘러......."
 힘없이 기어들어가는 천섭의 말을 들으며 순애는 천섭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천섭이네는 근방에서는 알아 주는 부자였다. 집안 대대로 넉넉했던 집안은 아니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재산이 늘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천섭 아버지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한없이 부러워했다.
 천섭의 집은 마치 대궐 같은 커다란 집이었다. 부리는 머슴만도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성태네도 웬만한 부자이긴 하였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천섭이네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성태는 말했었다.
 그런데 만약에 천섭이 그의 아버지에게 순애를 아내로 삼겠다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리고 자신이 어떤 집안의 어떤 처녀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그는 분명 크게 분노할 것이 틀림이 없었다. 아마도 천섭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 천섭과 순애는 다른 것이 너무도 많았다. 순애는 가능한 한 천섭의 아버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를 생각하면 그녀는 스스로 비참해지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 증말 데려갈 수 있어?"
 그녀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긍정적인 질문이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섭이 감동할 차례였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럼! 순애 아니믄 나 장가 안 갈 거구만."
 순애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들이 웃을 겨. 바지 저고리라고....... 후회헐 턴디."
 "남들이 머가 중요혀? 우리 둘만 좋으먼 되능 거 아녀?"
 순애는 대화를 포기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지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천섭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마음을 얼마든지 바꾸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애는 그를 믿고 싶었다. 자신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알았구만....... 나야 머......, 공부나 열심히 혀요......."
 순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천섭이 살짝 순애의 손을 쥐었다. 초저녁의 약간 차가운 바람에 한기가 느껴지는데도 그녀의 손은 아직 따스했다.
 "고맙구먼."
 순애는 천섭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땀이 흥건하게 배인 천섭의 손바닥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손이 온통 땀 투성이여......."
 천섭이 여유를 찾으려 애쓰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가 꼭 쥐고 있는 순애의 손에서도 진한 땀이 솟았다. 그가 팔을 들어 순애의 어깨 위로 걸쳤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순애의 손을 다시 잡았다. 순애의 가슴이 놀란 토끼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약속헌 거여......."
 천섭이 순애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순애는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입김에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천섭의 손에 잡혀있는 순애의 손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서 절구통을 찧는 듯한 거센 방아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에 호흡이 딱 멈추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 증말......."
 천섭이 순식간에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가하며 순애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한쪽 팔로 그녀의 앞으로 뻗은 다리를 끌어모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헉!"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순애가 천섭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발에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졌다.
 "......나 숨 넘어가......."
 천섭은 순애를 안은 채로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대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머리칼을 몇 가닥 입 속에 넣고 깨물었다. 그러자 순애가 고개를 들어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천섭은 무작정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풀 냄새보다도 더 신선하고 달콤한 냄새가 입 안으로 퍼져들어 왔다. 천섭은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아랫배의 힘을 느꼈다. 그 불길이 가슴을 타고 올라오며 활활 타올랐다. 살그머니 다문 순애의 입술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앞으로 잔뜩 오무렸던 그녀의 팔이 열리며 천섭의 가슴을 받아들였다.
 천섭은 잠시 입술을 떼고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와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은 눈을 꼭 감은 순애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눈을 통하여 먼저 그녀의 눈과 코와 입과 만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얼굴로 옮겨져 그녀의 뜨거운 볼을 만졌다. 그녀의 반쯤 열려진 입 속에서 꼴깍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가끔씩 열리는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열망에 휩싸여가고 있었다. 천섭은 그녀의 긴 눈썹과 콧잔등과 귓불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그녀의 팔딱거리는 가슴의 폭동이 그의 가슴에 온전하게 느껴졌다.
 천섭은 지나친 흥분으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천섭이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순애의 옷매무새를 조심스럽게 가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한 번 타오른 불길은 쉽사리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다시 순애의 입술을 덮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의 타오르는 손바닥에 엷은 저고리 속의 도톰한 그녀의 젖가슴이 단번에 만져졌다.
 "안 돼......."
 순애가 얼굴을 돌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이 천섭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천섭의 손이 더욱 강렬하게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순애의 몸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이 천섭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순애의 젖혀진 얼굴에 땀방울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천섭은 그의 얼굴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그의 손은 더욱 편안하고 안정된 자세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시방 이러믄 안 되능겨......."
 어느 사이 순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천섭은 그녀의 얼굴에 흐르던 것이 일부는 눈물이었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머땀시 운디야?"
 천섭이 얼굴을 떼며 물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거두어들이며 그녀의 앞섭을 매만져 주었다.
 "......."
 "어디가 아픈겨?"
 "그냥......, 나도 모르겄어."
 순애 자신도 그 눈물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섭이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 누울겨."
 "......."
 다시 풀벌레소리가 몰려왔다. 순애는 천섭의 머리를 그녀의 무릎에 누이고 멀리 어두운 들녁을 바라보았다. 그 들녘의 끝에 하늘이 이어져서 그 하늘은 곧 별들의 세계를 열고 있었다.
 별들의 세계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열렸다. 틈뚜럭의 물길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고여있는 물웅덩이마다에는 밤마다 빛나는 하늘이 내려 앉았다. 별들이 총총히 박힌 아름다운 하늘이 땅바닥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황송하게도 하늘을 밟고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수그려 반짝이는 별들을 주웠다. 밤에는 들이나 하늘이나 오직 하나였다.
 천섭은 손을 들어 순애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곱게 땋아내린 두 갈래의 댕기에서 이상한 나라의 신비한 향기처럼 묘한 냄새가 났다. 그녀의 머리칼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천섭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순애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이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있다니....... 누워 있는 천섭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그녀의 앞가슴 쪽으로 옮겨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 부근에 이르자 그녀가 저고리의 앞섭을 당기며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이 잠시 거기에서 멈추었다.
 순애는 이대로 죽어도 좋을 성만 싶었다. 그의 손이 주춤거리자 그녀의 손이 천섭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사랑의 신호였다. 다시 뜨거워지는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올라가 그녀의 작은 귀바퀴를 어루만졌다. 순애는 황홀해져 눈을 감았다.
 천섭은 이어 그녀의 떨리는 손을 끌어당겨 가늘고 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손에 그의 끈적끈적한 타액이 묻어났다. 순애가 고개를 수그려 천섭을 사랑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팽팽해진 젖가슴으로 향했다. 순애는 자신의 젖가슴에 멈추어진 그의 손을 연신 붙잡아 내렸다. 그러자 천섭의 손은 더욱 용기를 내어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아랫배 쪽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순애가 허리를 구부리며 덥썩 그의 머리를 안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으로 빠져나가 거세게 껴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그럴수록 순애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뜨겁게 감싸안았다. 타오르는 열망이 두 사람의 몸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천섭이 그녀의 볼에서 잠시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사랑해......."
 반쯤 열려진 채로 피해 있던 순애의 입술이 다급하게 천섭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가 두 다리를 쭈욱 뻗자 그녀의 몸이 마치 벌레처럼 휘어 앞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천섭이 몸을 일으켜 순애를 힘차게 끌어 안았다.
 "아!"
 순애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멈추어 있던 그는 아까와는 반대로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뉘었다. 그녀의 머리가 이제는 천섭의 아랫배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에 느껴지는 뜨거움이 곧장 그녀를 황홀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천섭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올려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그녀의 몸이 한 번 움찔 하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그의 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 속으로 파고 들었다. 동시에 천섭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 아래로 내려가 치마에 가려진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허벅지에 그의 손을 느끼자 순애는 더욱 강렬하게 그의 혀를 빨아들이며 몸을 활처럼 솟구쳤다. 그의 숨 죽인 손이 서서히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하얀 종아리가 길다랗게 드러났다. 뒤이어 그가 잡아올리는 치마단을 따라 그녀의 수줍은 허벅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섭의 뜨거운 손이 치마단을 놓고 그녀의 허벅지로 옮겨가자 순애가 다시 몸을 거세게 비틀었다.
 순애의 손이 천섭의 목을 더욱 거세게 휘어잡았다. 천섭의 입술로 틀어막힌 그녀의 입 안 목구멍 근처에서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깊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천섭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따라 위로 올라오자 약간 거친 삼베로 된 속옷이 드러났다.
 천섭은 그 삼베 속옷 위로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그의 손이 용기를 내어 삼베 속옷을 헤치고 그녀의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떨리는 그의 손이 그곳에 이르러 멈추자 그녀의 다리가 힘없이 풀어졌다.
 "아!......."
 그의 목에 휘어 감았던 그녀의 손에서도 일시에 힘이 빠져 나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드러난 가슴이 몇 번 거칠게 출렁였다. 천섭은 사랑이 가득 담긴 손으로 부드럽게 부드럽게 그곳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삼베 속옷이 조금씩 그녀의 엉덩이에서 벗겨져내렸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신비스러운 배꼽 아래살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무의식 중에 천섭의 남성을 건드렸다.
 그러자 천섭이 비명처럼 짧은 소리를 지르더니 순애의 속옷에서 손을 거두고는 부끄럽게 고개를 수그렸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르며 두 사람은 서서히 이성을 찾아갔다.
 "너머 늦은 거 같여, 얼른 가야 혀......."
 순애가 그녀의 입술 주변을 소매로 한 번 훔치며 일어섰다. 그러고도 천섭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순애가 그의 팔을 잡고 일으키자 천섭이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붙들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 바람에 그녀의 치마끈이 풀어져 버렸다.
 "챙피허게 워째 이런디여?"
 순애가 치마끈을 붙들고 부끄럽게 말하자, 천섭이 멋쩍게 웃으며 다시 그녀의 치마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녀가 천섭의 손을 살짝 쳐냈다.

 6.
 "잘들 노시능구만!"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라며 등을 돌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가왔을까. 동네의 젊은 총각들 서너 명의 그림자가 틈뚜럭 아래의 어둠 속 논두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애는 덜컥 겁이 났다. 도대체 어떤 아이들일까. 천섭도 바짝 긴장하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내촌 마을의 아이들인지, 아니면 수월이나 다른 동네의 아이들인지,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틈뚜럭 아래의 어둠 속에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는 히히덕거리며 두 사람을 조롱하는 듯 했다.
 "하나는 우리 동네 순앤지 알 것는디 하나는 누구데여?"
 순애는 그제서야 그 총각들이 내촌마을의 아이들임을 알았다. 자신을 알고 있으니 분명 내촌 마을의 아이들이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천섭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수월 사는 윤천섭이구만. 웬일들여?"
 천섭의 말을 듣고 그들은 약간 놀라는 듯했다. 그러다가 아니꼽다는 듯이 순애를 향해 쏘아부쳤다.
 "야! 순애 니 바람 난겨? 근디 해필이믄 머땀시 저 자식인겨?"
 순애는 그들이 다른 동네의 모르는 아이들인 것보다는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윤천세비! 이 잘난 자슥아, 느이 수월에는 여자가 없어서 내촌까정 원정 온 것여?"
 그 중 하나가 숫제 싸움을 걸겠다는 듯 단호한 시비조로 말을 뱉었다. 천섭은 저들이 누구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그러나 저들이 누구인지 알면 뭐하겠는가. 저들은 어쩌면 지금을 가장 좋은 기회로 삼아 천섭에게 덤벼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천섭은 어릴 때부터 근방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자라왔다. 그는 땟물이 줄줄 흐르는 여느 농촌의 보통 머스마가 아니었다. 기품이 있는 부잣집의 자식으로 여느 양반네의 자식처럼 소중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런 천섭을 근방의 아이들은 못내 부러워 했고, 그 부러움은 점점 자라면서 시기와 질투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남이 할 수 없는 꿈같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부모를 잘 만난 덕에 막히는 것 없이 일사천리로 앞길이 열려가고 있었다.
 "니들, 머땀시 시비거는겨."
 이미 그들의 시비조에 불안하여 가슴이 두근거리던 순애가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순애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틈뚜럭으로 슬금슬금 올라섰다. 목소리로는 긴가민가 했던 그들의 얼굴을 비로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맨 앞에서 다가오는 작달막하면서도 단단하게 생긴 아이는 형석이었고, 그 옆으로는 형석의 단짝인 창만이었다. 나머지 한 아이는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형석의 동생임이 분명하였다. 형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순애 니도 속 챙겨야 혀! 차라리 창시 빼서 개를 주지, 어째 저런 기생 오래비 같은 놈허고 눈이 맞은 거여?"
 그리고는 다시 천섭을 향하여 훈계하듯 말했다.
 "니놈이 순애가 형편이 그렇다고 우습게 알고 뎀비는 모냥인디, 내촌에는 사람이 없는 줄 아냐?"
 순애는 기가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니들 먼 말을 그러코롬 함부로들 하능겨? 천섭 씨가 니들헌티 멀 잘못헌 게 있어 그러능겨?"
 "아, 윤천세비야 참말로 잘나뿌린 윤천세비지이? 아, 누가 못났다고 허능겨? 그려, 우리덜한테 머 잘못헌 것은 없지야. 허지만서도 시방은 쬐끔 빠져나가기가 에룹겠구먼. 아, 안그려?"
 형석이 창만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암 아, 누구는 왜놈 밑이서 손 안 비비고 살고 싶었디여? 아, 누구는 왜놈 밑이서 씹질 안허고 싶었디여?"
 그 순간 천섭의 주먹이 느닷없이 창만의 면상으로 날아갔다. 얼마나 빨랐던지 창만이 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격을 당한 창만이 깜짝 놀래어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순애는 그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디여! 천섭 씨! 이러믄 안 되쟎여?"
 순애가 놀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천섭의 팔에 매달렸다. 천섭이 분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창만은 주저앉은 채로 입술을 닦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손에 피가 묻어남을 알 수 있었다.
 "얼씨구! 좋지! 고 말씀이 아마도 니 속을 발라당 뒤집어 놓았다 이거여?. 이노무 새끼, 오늘이 바로 니 제삿날이다. 퇴!"
 옆에서 엉겹결에 당한 창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형석과 그의 동생이 손바닥에 침을 한 번 뱉더니 천섭에게로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엌!"
 천섭이 틈뚜럭의 풀밭으로 나뒹글었다. 형석의 발길질이 정확하게 천섭의 옆구리를 찍었던 것이다. 벗겨진 형석의 고무신이 틈뚜럭 아래로 굴러갔다. 순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려보았지만 이미 틀린 일이었다.
 "고만들 혀! 고만들 혀!"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젊은 아이들인지라 한 번 시작한 싸움을 멈출 리가 없었다. 형석은 숨이 턱 막혀서 엎어진 천섭의 등을 고무신이 벗겨진 맨발로 한 번 강하게 짓누르더니 그를 일으켜세워 복부에 사정없이 주먹을 질러 넣었다.
 다시 무릎을 꿇고 쓰러진 천섭의 등허리를 그의 동생이 쎄게 걷어찼다. 천섭은 나동그라지면서도 더 이상의 비명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순애는 그의 몸을 감싸며 몸으로라도 막아보려고 애를 썼다.
 "비켜! 니는 비켜! 저노므 새끼 오늘 쥑여뿌릴겨."
 그들이 넘어진 천섭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서자, 엎드려 있던 천섭이 벌떡 일어서며 주먹으로 형석의 턱을 가격했다. 형석이 잠시 머뭇거리자 그의 동생이 코뿔소처럼 머리를 수그리며 돌진하여 천섭의 면상을 옹골지게 받아버렸다.
 씩씩거리며 기회를 엿보던 창만도 합세하여 천섭에게 발길질을 했다. 한동안 어쩔 수 없이 얻어맞은 천섭이 마침 손에 잡히는 창만의 허리를 붙들고는 틈뚜럭 밑의 수로로 굴러 들어갔다. 순애가 따라내려가 그들을 떼어놓고 천섭을 붙잡아 일으켰다. 천섭의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몇 번이나 넘어졌다.
 "죽진 않을 겨. 놔 두고 기양 가뻔져."
 형석이 틈뚜럭 위에서 손바닥을 툭툭 털면서 순애에게 소리쳤다. 흙탕물에 잔뜩 젖어버린 창만이 아직도 아까 얻어맞은 턱을 한 손으로 감싸면서 일어나 틈뚜럭으로 기어 올라갔다.
 순애는 수로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천섭의 허리를 힘들게 붙들고 그냥 물 속에 서서 눈물만 흘리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틈뚜럭 위에서 그런 순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섭이 정신을 차리는 듯 꿈틀 하더니 순애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젖은 몸을 끌고는 다시 틈뚜럭 위로 오르려 했다. 순애는 그런 그를 막으려고 애를 썼다.
 "여그 기양 있어야 혀. 쟈들 쬐끔 있으먼 갈 것이구만. 여그 기양 있어야 혀."
 순애는 천섭을 붙든 채로 틈뚜럭 위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니들 안 갈티여? 인자 그만 혀도 되었잖어?"
 그러나 천섭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다부지게 악다물고는 거침없이 틈뚜럭 위로 올라섰다. 이미 그의 바지도 흙탕물과 진흙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가 틈뚜럭 위로 다 올라서서 아직도 서 있는 그들에게로 다가설 때쯤에야 순애는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 되야요!"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틈뚜럭 위로 오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천섭은 수로에서 주워든 깨어진 유리병을 치켜들더니 물 속에서 걸어나와 틈뚜럭에 앉아 있다가 막 일어나 피하려는 창만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찍어내렸다.
 "어이구메! 이 새끼 환장혔네, 환장혔어."
 비로소 심상치 않은 위험을 느끼고 달아나려다가 일격을 당한 창만이 쓰러져 비명을 질렀다. 형석과 그의 동생은 덤비거나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저만치 달아나서 기어이 벌어지고야 만 큰일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천섭이 미친 사람처럼 깨어진 유리병을 휘두르면서 소리를 쳤다.
 "이 새끼, 니 한 번만 더 주둥빼기를 나불거려 봐라. 어디, 한 번만 더 나불거려 봐!"
 천섭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깨어진 유리병으로 다시 한 번 쓰러진 그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창만의 허벅지 부분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는 몸에서 힘이 다 빠져 달아나 버렸는지 전혀 움직이거나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순애가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천섭에게 달려들어 천섭의 손에서 깨어진 병을 뺏어들려고 했다. 천섭은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