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 -아산호 가는 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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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
--아산호 가는 길 14
그대의 귀바퀴에서 찰랑찰랑 쏟아지는 향기는
마치 수면제이듯 미혼약이듯 저항도 없이 침입한다
바라보면 보일 듯도 하고 슬그머니 만지면 잡힐 듯도 하며
이 일상적이지 못한 가슴에 머리에 북소리처럼 다가오나니
나 그대 얼굴도 알지 못하고 나 그대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로지 나 살아있고 그대 살아있음으로 그리는 아산호여라
그러니 눈감으라 사랑이라면 귀도 막으라 사랑이라면
모르는 게 약 아닌가 아는 척하는 굴복 그러나
다시 태어나도 끝끝내 후들거리는 남자로 살고 있어라
어진 인간의 탈바구니 털털거리며 기우뚱기우뚱
때로는 남몰래 땀을 흘리며 피를 흘리며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본능은 분명 언제 어디에서나 팔딱팔딱 살아있으니
달아나지 못하리라 누구도 딱한 세상의 남자들이여
그대의 드러눕는 귀고리에 차라리 귀 막고 눈 가리지만
남몰래 그대의 허름한 치마끝 애처롭게 붙들고
제 손으로 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
--<문학세계 199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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