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 1 -아산호 가는 길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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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 쓰는 연서는 불륜 같아 쑥스럽다
남자는 죽어서도 여자가 필요하다는데
살아서 어여쁜 여자가 웬일로 이리 부끄러운가
내가 사춘기 적부터 쓰던 연서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다가 끝내 시가 되었다
그녀는 한번도 나의 시를 읽은 적이 없으니
나는 일찍이 연서를 보낸 적이 없는 것이다
감추고 감추고 감추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어지더라
연서는 쓰면 쓸수록 마치 꿀통과 같아서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
그녀보다 쓰고 있는 내가 더 감미롭더라
하여 내가 밤새 쓰는 연서는
어쩌면 나를 향한 그리움은 아니었던가
맹랑한 농담이겠지만 또 다른 그녀가
연서를 들먹이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 이미 나는
그녀를 향해 마음의 연서를 쓰고 말았나보다
--<학산문학 200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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