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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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월미도의 보름달
-바람불10
어두운 월미도 바다 끝에서
서툰 강태공들이 낚싯줄을 드리운다
저기서 어떻게 고기가 나오냐
설마 바다를 낚으랴
그래도 그들은 신명나게
낚싯줄을 던지는데
그 끄트머리에서 기어코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저 아름다운 엉덩이가
백 년도 채 못사는 인간을
수천 년이나 살아있게 하였구나
호박꽃
바람불11
누군들 들꽃이길 좋아하리야
어둠은 그리운 별눈을 내리고
새벽 이슬은 영롱하게 떨고 있지만
지순한 바람보다 좋은 게 있어라
화냥끼 젖은 그녀의 치마끝
무시로 풀어지는 옷고름
사랑은 사랑이라 말하자마자
세상에 퍼질러진 호박꽃 되었네
통 로
-바람불12
말 한마디 잘못하고
속곳을 빼앗긴 순이는
밤잠 설친 새벽 으레
물가로 나가 가랭이를 씻었다
그녀를 보면 나는 불현듯
한낮의 소나기를 고대하는데
세상사는 자연이란다
막힌 곳은 오로지 세상으로부터
그대와의 짧은 통로
기가 막혀라
거 미
-바람불13
그녀가 자고 간 방안엔
거미가 혼자 남아
연습 중입니다
매달리기,엎어지기,
굴러 떨어지기.
사랑한다는 것은
말만큼의 자유도
행복도 아니고
금빛 치장한 수갑인 듯합니다
그녀가 가고 없는 방안엔
거미가 혼자 남아
쇳물 같은 한모금의 피
쏟아냅니다
빡빡한 꽃물
진물입니다
바 람
-바람불14
나의 사랑은 외로움 뒤의
진땀이 흥건한 비겁성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았으면
나는 얼마나 부끄러울까
사랑은 제각기 서까래처럼
한곳에다 몸을 대고
비빈다지만
나는 할 수 없어
누울 수 없어
몸 세우고 하늘에다
침을 뱉는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여자였으며
세상의 모든 여자는
그녀의 꽃을 여는 한 줄기의
바람이었다
사랑은
-바람불15
사랑은 무엇인가 온갖
불신의 꽃대궁을 타고올라
마지막으로 목을 꺾는
꽃이어라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들 어머니
배신의 그물을 기우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마디마디 옹골진
전생의 유형이어라
알 수 없는 무게로
알 수 없는 손길로
우리들의 주검을 어루만지는
신의 영원한 마법이어라
주문이어라 사랑은
그녀의 머리칼
-바람불16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 머리칼
함박눈만한
살비듬 그리고
살비듬
그녀의 촛물 같은 발톱
수도승 같은 발톱
발톱
하얀 동공에서 풍겨나오는
암컷의 냄새
가끔씩 흩어지는 귓밥
그리고 눈물
그녀의 콧물
그녀의 때가 묻은
오,자연의 세상
우리들의 바다
-바람불17
그녀가 서 있던 바다는
정말로 예사 바다였을까
내가 바라보던 바다는
정말로 그냥 바다였을까
무심코 바라보는 마음이
사랑은 아니였으면
그니보다 두려운
나를 데불고 산다
정녕 떠나서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돌아와 죽는 날까지라도
타는 눈을
보고싶은 사람들
우리들의 바다는 결국
아무도 떠나지 못하도록
그저 떠나지 못하도록
여름에도 겨울에도
버티고 있었다
서쪽에서 뜨는 해
-바람불18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겠군
-아니요,그래도 해는
서쪽에서 뜰 겁니다
네 몸으로 아이를 낳는
까닭을 알겠다
비로소 확연해지는
동그라미 하나
이별 후
-바람불19
그녀가 떠나드래도
울지 않는다
사랑은 덧없이 바뀌지만
겹겹이 묻어있는
우리들의 손때는
향기 없는 냄새로
잊혀진 꽃물로
남아서 세상 천지에 쌘
그리움이 되나니
끈
-바람불20
헤어스타일을 바꾸라고
만날 때마다 재촉하는 여자
생활의 무덤가에서
풀지 못한 끈을 달고와
시린 머리 풀어지면
엉긴 가슴도 풀자고 한다
어쩌면 이 머리결
갈잎처럼 흔들거려
사랑하나 사랑하나
눈물 마른 여자 하나
복사꽃 입술이 터지도록
관 계
-바람불21
무엇도 아니고 싶은 관계로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네
남겨지고 싶지 않은 그대는
남겨두고 가는 죄인이었네
유서는 아름다웠으나
저승은 비극이었지
그대의 피가 낯설지 않은
이유 하나 있으리
지순한 인연은
평생을 동반하지만
아픈 인연은 단 한 번으로도
아름다워라
양파 껍질
-바람불22
양파 껍질을 벗기다가
양파 껍질과 만난다
양파 속을 더듬다가
바람과 만나는 양파 속
양파 껍질을 벗기다가
양파 껍질과 만나다가
흩어지는 양파 껍질에서
일어나는 독한 양파 냄새
온전한 양파
그대에 질식한다
순 이
-바람불23
만나리라 그리운
얼굴 하나 가슴 하나
어머니처럼 낯익지도 아니한
미쓰김처럼 낯설지도 아니한
순이처럼 뜨거운 뜨거운
눈물이 글썽한 어떤 여자의
얼굴 하나 사랑 하나
만나리라
까 닭
-바람불24
닿을 이유가 없는 곳에
닿으니 이유가 생긴다
만날 까닭이 없는 곳에서
만나니 까닭이 생긴다
간 격
-바람불25
어디서든 통용되는 화폐를 사용할 것
그녀는 그이에게로 떠나지만 떠나서도
그가 만든 그녀와 나와의 간격은
녹이 슨 엽전 하나면 거뜬히 메워지고
어떻게든 믿겨지는 거짓말을 사용할 것
그녀는 그이에게로 떠나지만 떠나서도
그가 만든 그녀와 나와의 간격은
뜨거운 꽃물 한방울이면 거뜬히 무너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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