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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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금강리 유년기
하나.
물 건너 싸움패들이 실은 무서워
샛길로 샛길로 대낮을 숨어다니다가
해방같은 졸업식날
-개새끼
내뱉은 내 얼굴에 부스럼이 생겼다
둘.
단수수를 씹다가 뱉어낸 버러지 하나
눈 뒤집히고 속 뒤집혀도 아무 말 못한 채
드러누워 기다린 죽음 끝내 오지 않고
해 저물녘 드디어 일어서는 목숨
이래도 사는구나 정말 이래도 사는구나
셋.
동네 한 가운데에는 너른 방죽이 있었고
매일같이 수면엔 해가 뜨고 달이 비쳤다
나는 물 속에 가라앉은 달그림자를 좋아했고
동생은 언제나 머리 젖혀 숭배하는
하늘을 가득 안고 있었다
내가 열 살이던 대보름날 밤
우리는 방죽에서 허우적이던 동생을 끌어냈다
지금 말이야 나는 형아가 그르다는 걸
알았단 말이다
넷.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겨울의 새벽들
그 여름의 보리밭 난장 그렇게 예쁘던
계집아이의 수다여
비인 금강리
상둣꾼 소금장수 용세 양반도 가고
말수레 끌던 금동이 그 양반도 가고
술 잘 하던 사거리집 덕재 아버지도 가고
다리 건너 빨갱이 잡던 주먹 황세환도 갔다
남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던
경옥인 지금 안양천변서 애를 기른대고
수재라던 주근깨 미야는
독산동 어디쯤서 회사 경리를 본대고
유행가 잘하던 정택이는 구로 공단,
이장 아들 영기는 형제가 사우디로
싸움꾼 길수는 부친 따라 남도로 갔단다
이리저리 아름다운 금강리 다 떠나고
비인 금강리만 남아서 운다는데
떠나온 금강리 얼굴들 어디서든
이쁠지는 몰라도
남은 금강리에 돋는 새 살이
얼마나 이쁠지 알 수는 없어도
비인 금강리 남아서 운다는데
남아서 운다는데
가을 금강리
백리 밖으로
사뭇 넘실거리는 금강
눈 앞에 범종 소리
몰고 오는 팔달벼
뱃길이듯 두둥실
떠가는 버스
누이야, 하늘 만큼이나 한
세월이구나
젖가슴에 기대여
조으는 지아비
토닥이는 아낙네 손목에
금줄이 감긴다
누이야,
애띤 감이 뚜욱 떨어지고
그 소리에 가슴이 덜컥
수상한 가을이 가슴으로
불길처럼 번지는데
누이야, 하늘만큼이나 한
세월이구나
금강리 검둥개
금강리 검둥개는 비겁했다
꼬리는 사타구니로 잔뜩 도사리고
귀는 늘어지게 흔들리고
늘상 코끝으로 땅끝을 해매면서
겁없는 세상의 모두가 두려웠다
때로는 성난 숫탉에 붸기고
때로는 당돌한 강아지에 붸기고
때로는 짖궂은 발길에 채이면서
그래도 살아있는 이승은 천복이라
금강리 검둥개는 비겁해도 마냥 좋았다
황서방은 그런 검둥개를 좋아했다
황서방,
석유 팔다 석유 먹고 죽은
금강리 팔불출 홀애비
금강리 주근깨
주근깨야, 남부끄러워
고샅머리 흙담 밑으로
숨어들던 열두 살 주근깨야
휘영청 보름달보다 더 밝던 네 공부방
금산사 종소리 같던
주판알 소리
다 두고 서울 가
천하에 못된 주근깨야
숨바꼭질 하다 들이닥친
머슴애 꼭지들 꼭지들
뒷곁에서 욕물 들이키다
너는 울었지 몇 날을 울었지
이제 서울역 어디쯤에서
아니면 영등포 어디쯤에서
너는 웃느냐 가끔은 우느냐
저엉말 모르지 너는 모르지
아직도 금강리 별을 따는
금강리 머슴아의 꿈
그 어두운 서울의 밤거리에서
너의 뒷모습을 만나고
쉬파리 골목
저무는 들녁의 달길
할 일 없는 처녀들이 흔들거리며 간다
밤이슬 막고추 보싸가지고는
제 몸에 섣불리
몇 원짜리 가치를 매겨놓고
읍내로 읍내로 흔들거리며 간다
십 원짜리 계집은 십 원짜리 동전으로
백 원짜리 계집은 백 원짜리 동전으로
때묻은 동전 난장으로 깔린
청바지 저고리길
해가 떠선 안된다
달도 떠선 안된다
쉬파리 골목엔 행여 비올까
바람이 불까
계집들의 깊은 곳으로
죄 썩은 능구렁이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그쯤 걸릴 것 없는 들녁엔 물난리가 나서
아버지가 어디론지 싹 가버리고
어머니가 어디론지 싹 가버리고
콧구멍 벌름벌름
그녀석도 어디론지 싹 가버려서
빈 들에 한숨만 영글대로 영글어간다
능 허 대
바윗돌 몇 무더기
세월에 말라붙어서
생각도 아니 나는 이곳에
천 년 백제는 묻혀 있다
일찌기 동방의 무궁한
몇 포기 들풀이었다가
들꽃이었다가
바다로 눈을 뜬 나라
대륙에 눈 돌린 나라
반도의 뜨거운 벼꽃이었나니
누가 바다를 꿈이라 하지 않아도
누가 여기로부터
수모의 꽃은 피었다 하여도
내 나라 한으로 뿌리내린
그 무서운 사랑은
바다를 열 줄 아는 지혜였나니
저만치 밀려간 파도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이 저녁에 하나의
돌비로 남아있는
능허대
부여에서
달조차 문드러진 강은 어지러워라
잃어버린 역사의 근저리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빠진 달을 줍고 계시네
간통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돌멩이에 묻힌 선혈
이 땅의 피라는 피는 모조리
이곳에다 부었니라
우리들의 아내 우리들의 아들
우리들의 뜨거운 핏물이
장군의 주검을 적셨니라
살처럼 감쌌니라
타오르는 장군의 사랑은 빛이었다 빛일
뿐인 전설이 아니라
그 빛의 하나인
어머니
그대 오늘 황토빛 하늘처럼 터졌구나
뒤집히는 백마강 물굽이를 휘돌다 와
그대 오늘 미치게 피었다가
피를 토하고 무너지는구나
아지랑인들 오죽 흔들렸으랴
밤인들 오죽
무서웠으랴
산 삼
단군 왕검께옵서 이 땅에
심으신 산삼
불로초처럼 심심산곡에
도라지 뿌리처럼
방방곡곡에
알게 모르게
약속이듯 경계이듯
심으신 산삼
마늘 뿌리였을까 마늘
냄새로 환생한 웅녀
그녀의 쓸개였을까
알 수는 없어도
사랑이듯 분노이듯
그리 하라고
단군 왕검께옵서 이 땅에
심으신
산삼
빛의 땅
태초에 아시아는 조선이었네
한 하늘 아래 한 땅이 열리고
그곳에 산삼의 오묘한 뿌리
전설처럼 깊숙히 심어내린 땅
몸 속에는 하얀 피가 흐르고
키보다 큰 활 둘러맸던 자연인
끝없이 달려도 말은 지치지 않고
청산에 흩날리는 옷자락이
빛이었던 땅,꿈이었던 나라
거룩한 아버지와 위대한 아들들이
겁없이 달리던 신비의 대륙
용서의 강이 천 년을 흐르고
장부의 사랑이 동토를 어루만지던
태초에 아시아는 하나였네
조선이었네
봉황새
천 년 세월이라야 한 번쯤
나타난다는 봉황새
나타나면 온갖 근심 사라지고
천하가 두루 태평해진다는
봉황새는
멀고 먼 동방의 군자국으로부터
사해를 훨훨 날아서 온다는데
그 옛날 천 년의 왕국 나의 조상들이
지리멸렬한 불모의 땅
사랑을 모르고 의리를 모르던 땅
흙탕물은 범람하고 무지가
이끼처럼 뒤덮혔던 땅
찾아가 큰손으로 감싸주던 일
가슴으로 끌어주던 일
잊지못해 불현듯이 나타나는
중화인의 본능이라
성인 공자도 살아 생전에
걸핏하면 이 땅이 그리워
꿈에라도 가고 싶어
소원했느니
이제는 후손조차 망각해버린
대제국
나의 고조선
숭의동 일기
하나.
녀석이 칼을 들고 뎀빈다
설마 하고 지켜보다가
예사가 아닌 눈빛을 본다
잽싸게 녀석의 손을 비틀었지만
녀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게거품을 내뱉으며 뎀빈다
줘 칼,줘 칼,
온 동네 사람 다 들으라고
줘 칼,줘 칼,
둘.
애비를 닮았다는
녀석의 빈 허공
애미를 닮았다는 녀석의
어두운 침묵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나왔으니
사람일 수밖엔 없었구나
원수같은 세상에도
피만은 복수가 아니어라
셋.
제 그림자에 놀라는
하늘을 보아라
돌아서서 눈물나게
달아나는 돐백이
저럴 수 있을까 내가
있을지 몰라
아내는 부둣가에서
빠진 달을 줍는다
넷.
금붕어는 언제
잠을 자는가
배가 고파 저리도
서대나보다
밤잠 설치고 먹이를
지키던 녀석
이른 아침 어항 속에는
식은 달이 많이 떴다
다섯.
출근길마다 쥐어주던 백동전 한 잎이
십원짜리로 침몰한 그날로부터
싫어서가 아닌 군것질 기피로 보아
놈은 벌써 애비의 주린 창자를 알고 있다
아빠,내 돼지라도 잡아라
놈의 주머니 속에
가득한 어린이 은행권 지폐 다발
아내는 무심히 꺼내다가
예사가 아닌 나를 본다
세상에
인천 아리랑
버려진 항구 도시
서울의 치마끝
상륙군의 포탄에
쥐새끼마저 절멸한 뒤
배냇것이 빠지듯
검푸른 핏덩이 황톳물에 쓸리다
시시각각 튕기는 이빨 붙들고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떠날 것들이 태동하는
오,인천
어디로 향하랴 동서남북
버드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 소금밭
알몸들이 삼삼오오
드러눕는 바람의 들
출타중인 주인이
소문 없이 바뀐 뒤에
선술집에 쌓이는 가래침의
독한 좌절
자라거라
병든 싹이라도 어느날엔가는
사랑을 알리라 애비의
천한 병을 알리라
문학산 봉수대
사라진 문학산 봉수대
철모를 뒤집어쓴 병사가
총대로 휘적거리는 눈밭으로
삼월이 가라앉는다
이젠 적다운 적이 없어
그러나 적은 오고야 말거야
봉숫꾼의 눈썰미에
무겁게 내리던 함박눈
반드시 오고야 말거야
깊은 밤 그의 아내는
봉수대의 서릿발같은
불길을 본다 하늘이야
혀물린 통곡이
밤바다에 투신하였다
철모를 뒤집어쓴 병사는
그 옛날의 썩지 않는 일편단심
아는지 모르는지
삐그덕거리는 총대로
파묻힌 삼월을 캐고 있다
눈은 고공에서 동사한다
죽은 삼월이 죽어있는 땅위에
자꾸 죽어내린다
가끔 아내는
가끔 아내는 핀잔이다
자랑은 못할 망정 하필이면 자기 험담이냐
나도 가끔 본다 남들의 자랑 틈에 끼어서
무심코 흘리는 아내의 자학
생활에 있어서건 아이들에 있어서건
우리 서로의 당신에 있어서건
우리들은 자랑을 못하고 산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참말은
남들의 자랑에 대한 냉소라든지 아니면
우리들 열등의식의 묘한 반작용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은
그러나 신기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험담은 절대로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진실이었다는
슬픈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똑같은 생활
똑같은 아이들
똑같은 서로의 당신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히히 깔깔
숭의동 109번지에
찾아온 바람이
뼈를 다듬는다
서방 많은 암캐의 골반과
향기로운 숫탉의 머리뼈와
시퍼런 총구멍이 정갱이를 파는 뼈와
그리고 아,시리고 아픈 나의 물렁뼈와
죽은 하루가 몽땅 살아서 찾아온 바람
바람과 바람의 손바닥에서
기진한 폭설이 잠못 이루는 산동네
귀신의 얼굴로 바람이
몇천만 년의 썩은 활자를 지우고 있다
바람의 자식들이
뼈다귀를 팔팔 뛰면서
애비의 턱뼈를 애미의 갈비뼈를
떼굴떼굴 굴리면서
마침내 미치고 있다
히히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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