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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고명철/문학의 천형天刑, 천형天刑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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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417회 작성일 10-08-2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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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문학의 천형天刑, 천형天刑의 문학

고명철|문학평론가


선배,
그러니까, 제가 선배와 본격적으로 문학을 매개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십 년이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선배와 함께 한 대학원 시절로 거슬러 오르면 이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선배가 문학계간지 ≪리토피아≫를 창간하게 되었다면서, 제게 함께 계간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이후 편집위원으로서 문학적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문학잡지를 남보란 듯이 운영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매호 문단의 공기公器로서 문학적 쟁점을 제기하고, 좋은 작품들을 발굴하고 섭외하여 잡지에 발표 지면을 제공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니까요. 다른 상업 잡지류와 그 성격이 달라 문예지를 팔아 수익을 남기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고, 아무리 잘 해도 문학 안팎으로부터의 칭찬은 인색하고, 자칫 조그만 실수(?)라도 있으면, 이곳저곳에서 가차 없이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힐난의 말들 때문에 잡지를 계속하여 발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적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잡지의 주간으로서 잡지를 운영하고 편집하는 데 이만저만 신경을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도 선배는 시인으로서 쉼 없이 시작詩作 활동을 해왔습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후배로서는 선배의 왕성한 문학 활동을 지켜보며 그저 놀라워할 뿐입니다.
이번에도 선배는 신작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대하면서, 때로는 비평가로서 때로는 후배로서 선배의 시들을 음미하는데, 이번 시들은 그동안 선배가 보였던 시 세계와 크게 격절되지는 않되, 모종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시집은 선배가 1985년에 ≪현대시학≫을 통해 시단에 입문한 지 25년의 시간이 흘렀음을 웅변해주는 것으로, 이제 시단에서는 중견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튼실히 다지고 있는 것으로 감히 평가해봅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선배의 그 어느 시집보다 더욱 각별히 다가왔습니다. 
저는 선배의 시를 대할 때마다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상념이 있습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선배의 시를 음미하고 있자면, 어떤 주체할 수 없는 원시 본연의 욕망이 시의 심연에서 꿈틀거린다고 할까요(“참말로 활활 타버리고 싶을 때 있다.”―「장작불」 부분). 그 누구도, 심지어 시를 쓰는 시인 자신도 이 욕망을 제어할 수 없어, 차라리 욕망의 자연스런 분출에 시와 시인을 맡겨놓은 듯합니다. 저는 바로 여기서 선배의 시세계를 꿰뚫고 있는 이른바 ‘장종권 시의 미학’을 훔쳐보곤 합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두 시를 비교해보는데요.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
사람의 피로 시는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니면 어찌 꽃이랴, 하기에
기운 없는 꽃의 창백함은 고독한 자의 천국이다
아산호 가는 길에 나는 사람을 묻으리라
사람의 피로 아산호를 물들이고
머지않은 날에 선혈이 낭자한 한 송이 꽃
피게 하리라 그대 치마폭에 피게 하리라
―「아름다운 사람을 먹는다-아산호 가는 길 8」 부분

예쁜 그녀의 손에는 늘 꽃이 들려 있었다
저 아름다운 손도 봄이면 봄마다 꽃을 꺾었으니
세상은 선혈이 낭자한 핏덩이로 가득하였다.
우지끈 목이 꺾여보지 않고서는
꽃이라 말하지 마라.

누이가 밤새 묶어둔 손톱 끝에는
피보다 붉은 봉숭아 꽃물이 들어서
세상 온 잡놈들 가슴팍을 긁어댔으니
아, 저 핏물 든 몸뚱아리, 소름끼치는 몸뚱아리,
꽃이 죽어 다시 꽃으로 피지 않으면
꽃이라 말하지 마라.

꽃은 시들어도 꽃이다.
―「꽃은 시들어도 꽃이다」 부분

「아름다운 사람을 먹는다」는 선배의 시집 󰡔아산호 가는 길󰡕(2002)에 수록된 시이며, 「꽃은 시들어도 꽃이다」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입니다. 그런데, 이 두 시는 시간의 간극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에로티즘의 미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바타이유의 말을 빌리자면, 에로티즘은 ‘죽음을 파고드는 사랑’이기에, 이 두 시에는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 꽃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저는 선배님의 이러한 시적 특질에 대해 다른 지면에서 “장종권의 에로티즘에는 불멸의 삶에 대한 사랑보다 계속하여 소멸해가고, 떠나가며, 스러져가는 도정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심상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에로티즘에는 ‘갱생’을 위한 ‘죽음’의 파토스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아산호의 마법, 그 성속일여의 세계」, 󰡔‘쓰다’의 정치학󰡕, 새움, 2002, 329쪽)이라고 적시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 에로티즘의 미학의 골격은 선배의 시를 이루는 자양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꽃은 시들어도 꽃이다」의 누이는 손톱에 “피보다 붉은 봉숭아 꽃물”을 들이기 위해 “봄이면 봄마다 꽃을” “우지끈” 꺾습니다. 봉숭아의 목을 꺾는, 봉숭아를 죽이는 행위를 통해 누이는 봉숭아가 지닌 아름다움을 자신의 손톱으로 전이시키면서, 봉숭아를 되살려냅니다. 말하자면, 누이의 행위는 봉숭아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세상에 개진하기 위한, 봉숭아의 미를 현현하기 위한 미적 통과제의를 실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죠. 즉, 누이는 봉숭아의 죽음을 파고드는 사랑을 미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여, “세상 온 잡놈들 가슴팍을 긁어”대는 미의 마법을 소유하겠죠!?
그렇습니다. 어느 시인인들 자기만의 ‘미의 마법’을 욕망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시인으로서 ‘좋은 시’를 쓰고 싶으며, 그 ‘좋은 시’가 자연스레 ‘미의 마법’을 갖고, ‘미의 마법’은 또 ‘좋은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다음의 시를 대하면서, 25년의 시력詩歷을 지닌 선배의 시에 대한 입장을 곰곰 숙고해보았습니다.

서정춘 시인의 ‘새장 앞에서’라는 시를
‘세상 앞에서’로 내보내고 말았다
‘위성’이 ‘외상’이 되면서
지구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서정춘 시인 자꾸 입맛을 다시며
그게 더 시 같다 더 좋다 하시더만
읽는 이 두엇도 그냥 두어라 하시더만
이 ‘새장’과 ‘세상’의 밑도 끝도 없는 불일치가
일치로 둔갑하는 것이 시였던 것은 아니다
그 거룩한 일치의 위선과 용서는
시의 밖에서 얼마든지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며
더군다나
‘새장’이나 ‘세상’이나 도진개진인 것이
생사의 지극히 짧은 사이에서 번득이는
아리송한 시의 숨은 얼굴 아니겠는가
―「새장이거나 세상이거나」 전문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찌나 시적 상황이 재밌던지 한바탕 웃고 말았습니다. 잡지 편집자로서 선배의 고충이 먼저 떠오르면서, 분명, 편집자가 대단히 큰 사고를 쳐, 원래의 시가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인 당사자는 오히려 편집자의 실수로 발표된 자신의 시가 “더 시 같다 더 좋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잡지 편집의 해프닝을 통해 선배는 시의 비의성秘儀性을 예리하게 포착해냅니다. ‘새장’을 ‘세상’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새장’과 ‘세상’ 사이에는 각 단어가 내포하는 시인이 애초 품었던 시상詩想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되, 일단 시인의 손을 떠난 이상 알 수 없는 세상의 어떤 움직임에 의해 애초 시인의 시상은 순간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두고 선배는 “생사의 지극히 짧은 사이에서 번득이는/아리송한 시의 숨은 얼굴 아니겠는가”라고 시의 오묘한 그 무엇을 포착합니다. 서정춘 시인도 인정했듯이 말이죠.
저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새장’을 ‘세상’으로 바꾸는 게 단순한 실수일까. 그래서 선배가 새롭게 발견하듯, “아리송한 시의 숨은 얼굴”을 어떻게 하다보니, 우연히, 의도하지 않게, 포착한 것일까.
어두운 도시의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끝없이 쫓아오기는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도 항상 안전하다고 믿는다.
나는 꿈속에서 결코 죽는 일이 없었다.
나는 꿈속에서 결코 독사와 만나는 일이 없었다.
나는 내 꿈을 만들어간다고 스스로 믿는다.
잠을 자다가도 꿈을 만나면 나는 이성적이 된다.
―「비몽사몽」 부분

시적 화자인 ‘나’는 매우 완강히 주장합니다. 꿈속에서도 “나는 이성적이 된다.”면서, 꿈 속 세계를 ‘나’의 이성으로 제어하려고 합니다. 무의식이 활개를 치면서 의식을 변주하여, 꿈의 주관자인 ‘나’의 마음대로 안 되는 게 꿈인데, ‘나’는 꿈속 세계를 ‘나’의 이성적 의지로 주관하려고 합니다. ‘나’의 심적 상태가 이럴진대, 시를 읽고 쓰는 선배의 정신적 행위는 우연한 실수를 자기합리화하지 않고, 그 실수는 실수가 아닌, 선배의 시에 대한 이성적 행위의 산물로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데에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상당수가, 아니 거의 모든 시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인 양 ‘~습니다’ 혹은 ‘~다’와 같은 서술형 종결어미의 빈도수가 매우 높게 나타는데, 이러한 서술형 종결어미는 시인이 세계에 대해 어떠한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한다는 점, 뭇 존재의 존재성을 겸손히 헤아린다는 점, ‘나’의 존재가 어쨌든지 세계에 ‘있음’으로써 자기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한다는 점 등이 서술형 종결어미의 높은 빈도수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배는 이번 시집에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과학이 만들어가는 위대한 오르가즘은
세상을 바꾸어가는 신기한 장난이 되었다.
덧없어라. 조물주의 계산은 도무지 끝이 없구나.
―「오르가즘」 부분

나는 여나믄 개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비밀번호도 모두 여나믄 개인 셈이다. 내가 기억해야할 숫자의 조합도 그 이상이다. 그만큼 비밀번호도 따로 매달려있는 셈이다. 비밀번호는 나의 밥이고, 옷이고, 집이다. 비밀번호가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못한다. 컴퓨터도 열지 못한다. 돈도 꺼내지 못한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녀를 만나지도 못한다. 그녀를 찾아가는 통로에도 어김없이 비밀번호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숫자가 그녀의 얼굴을 만든다. 숫자가 그녀의 목소리를 만든다. 숫자가 그녀의 향기를 내보낸다. 해서 비밀번호는 나의 목숨이고, 나의 미래이고 나의 그리움이다. 나는 비밀번호에 붙들린 셈이다. 나는 숫자들의 조합에 꼼짝 없이 갇혀버렸다. 하다보니 거꾸로 나 역시 그녀의 그리움 속에 하나의 비밀번호이거나, 하나의 숫자에 지나지는 않는지 궁금해져 버렸다. 뻔뻔한 일이다.
―「비밀번호」 전문


환타지에 미친 도시에는 밤이 오지 않는다.
―「호박꽃나라·4」 부분

선배는 세계에 대한 조소와 냉소가 버무려진 환멸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 IT 기기들의 대활약은 마치 조물주의 현신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첨단의 과학 문명이 만들어가는 황홀경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들 일거수일투족은 숫자의 배열과 조합으로 이뤄진 각종 비밀번호에 지배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개인의 사적 기밀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고안된 비밀번호야말로 문명인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감시 통제 기제라는 데 딴지를 걸 자는 없을 터입니다. 그러니 선배는 “비밀번호는 나의 목숨이고, 나의 미래이고 나의 그리움”이라는 시적 진술을 하는 것이죠. 여기에 덧붙여, “나는 숫자들의 조합에 꼼짝 없이 갇혀버렸다”는 암울한 현재의 자화상을 인식합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사회가 감시 통제로부터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민주화 이전 시대에는 엄혹한 반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부터 일상이 통제 감시되었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선배도 위 「비밀번호」에서 적확히 응시하고 있듯, 첨단의 기기문명에 의해 과거와 달리 통제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감시통제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크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며, 온갖 첨단 기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타지에 미쳐 삶의 실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배는 이러한 지금, 이곳의 묵시록적 현실을 담담히 서술형 종결어미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비록, 서울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서울아리랑」에서는 서울로 표상되는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를 우리 고유의 아리랑조調의 묘미에 기대 역사적 통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아리랑 쓰리랑 꼬부랑 할미랑
고개 없는 고개 아흔아홉 고개 넘어넘어
북망산 가는 것이냐 정녕 가고 있는 것이냐
천지에 널린 망우리 엎어지며 뒤집어지며
홀린 듯 미친 듯 산 듯 죽은 듯 가고 있는 것이냐
유년의 총탄은 아직도 가슴에 박혀있고
청춘은 자본으로 자유로 바다를 넘나들고
황사는 쇳가루 싣고 밤낮으로 불어제끼는데
밀려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고개고개 넘어넘어 신발짝 끌고
서울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도 없었던 자리 연신 뒤돌아보며
저 허망한 문명의 진흙탕이여
오염된 역사의 갯펄이여
버드나무 가지 하늘거리는
수묵의 썩은 지폐를 배경으로
떠나는 것들의 삭은 분노가 만들어내는
저 암울한 일몰
서울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가고 있는 것이냐
―「서울아리랑」 전문

도대체 “서울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아리랑 쓰리랑 꼬부랑 할미랑”이라고 선배는 ‘서울아리랑’을 읊조립니다. “유년의 총탄은 아직도 가슴에 박혀있고” “청춘은 자본”의 유혹 속에서 욕망을 불태우고, 시야를 탁하게 하는 황사는 온갖 오염물질을 서울로 퍼나르고, 이러저러한 난개발로 서울로 표상되는 “저 허망한 문명의 진흙탕이여”라고 선배는 한 맺힌 넋두리를 낮게 읊조립니다. 
사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서울아리랑」처럼 노래조調와 같은 시들은(제가 눈이 어두워 모르겠습니다만) 선배의 기존 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호박꽃 이야기」와 「박꽃 이야기」 연작에서 보이는 노래조의 시들은 유년 시절 호박꽃과 박꽃에 연루된 기억을 배음背音으로 하고 있는,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 있으면서도 말로 다 표현 못할 삶의 서러움이 입가에 나지막한 노래로 맴돌곤 합니다. 그 중 「문 열어라 문 열어라」와 같은 시는 동요풍의 형식을 빌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제의적 과정을 친밀하게 들려준다.

떠나시기 전 장모님
부지런히 열두 대문을 여셨다.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집 나간 손주딸 들어서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십년 만에 먼 나라 둘째딸 들어서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삼년 송사 꿈인 듯 마무리 되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풍년 나락가마니 폭포처럼 쏟아지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돌아가신 장인 어르신도 불쑥 들어서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그 옛날 부끄러운 당나귀 가마꾼도 들어서고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
당신의 하염없는 다듬이 소리도 들려오고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열두 대문 모두 활짝활짝 여신 장모님
귀 먹고 말 못하는 막내아들 손 붙잡고
팔순의 무거운 눈 내려감으시다

당신이 여신 열두 대문 다시는
열리지 말라 열리지 말라 빗장 지르시고는
휘파람 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지시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전문

시의 리듬은 매우 단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선배의 시적 의도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시는 장모의 임종 장면을 담아내고 있는,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 대단히 무겁고 엄숙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이 무겁고 엄숙한 풍경을 동요풍의 단촐한 리듬과 가락을 통해 최대한 가벼우면서도 친밀한 풍경으로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문 열어라. 대문 하나 열리면’이라는 반복 어구를 통해 장모의 죽음을 우리의 일상 속 친밀한 풍경의 하나로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열두 개의 문이란, 장모의 신체가 바깥과 통하는 열두 개의 구멍인바, 장모는 그 열두 개의 구멍이 모두 활짝 열리는 시간 속에서 이승과 이어진 삶의 끈을 놓게 됩니다. 하나하나 문을 열면서 장모는 살아 있을 적 당신과 인연을 맺었던 일들과 사별死別합니다. 장모가 지닌 신체의 열두 개의 구멍을 하나씩 열면서 그는 그 구멍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선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풍경을 동요풍으로 부릅니다. 이 역시 삶의 또 다른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친밀한 풍경 중 하나이며, 가장 순정적 아름다운 삶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선배,
저는 「문 열어라 문 열어라」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습니다. 25년의 시력을 쌓은 선배의 시가 이토록 절창絶唱일 수 있을까, 하고 잠시 허방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시구 하나하나가 기이하지 않되, 언제부터인가 우리 시에서 가뭇없이 소멸해가는 내밀한 율격이 편하게 녹아들어 있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비의적 순간을 매우 친밀한 우리의 일상으로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이번 선배의 시집에서 손꼽아야 할 ‘좋은 시’라고 저는 감히 얘기해봅니다.
끝으로, 저뿐만 아니라 선배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화두처럼 던져진 시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만일 다음의 시를 축자적逐字的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또한 선배와 저 같은 문학을 천형天刑으로 감내하는 자들이 아파해야 할 문학적 과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은 간음을 통해 아들을 세상에 내려보냈고, 그 아들은 바람대로 무너져가는 세상을 구했다. 세상의 평화는 간음이라는 길을 통해 왔으니 간음이야말로 가장 신선한 구원의 통로이다.
―「동문서답」 부분

선배,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떠한 간음의 길을 가야할까요. 문득, 문학 자체가 세상과의 간음이며, 그래서 문학은 천형天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문학의 천형天刑’ 혹은 ‘천형天刑의 문학’은 간음을 통해 간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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