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네 가족/장생
페이지 정보

본문
우울한 저녁 시간이었다. 식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반복되는 TV의 섬짓한 뉴스에 귀를 기울이던 김씨는 끝내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말세로구만, 말세야.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람. 자식이 애비를 죽이다니. 그것도 대학 교수란 것이…….'
일자무학인 김씨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하니 아마 무슨 까닭이 있기야 있었겠지, 허지만 제 아비 목에 서슴없이 칼을 들이대는 성품이 설마 사람이었겠냐 싶기도 했다. 그 칼질의 동기가 유산이 급해서였다 하니 더욱 가슴이 막혀왔다.
아무리 대학 교육, 아니면 그 이상의 교육을 받으면 무엇하겠는가. 평소 아무리 효도하는 자식으로 서로 믿고 의지한들 또 무엇하겠는가. 재산에 눈이 멀게 되면 한 순간에 천륜이건 인륜이건 모조리 저버리고, 인간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변할 수도 있는 세상. 세상에 돈만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식놈조차도 섣불리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김씨는 제 아비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범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아비가 자신이 아니었음을 조금은 다행스러워 하며 긴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쳤다. '미친 놈이제, 죽일 놈이구만.' 욕설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김씨는 불현듯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채소 장수로 평생을 살아온 백발 머리에 반 곱추, 세월에 여지없이 찌들어버린 자신의 얼굴에서 김씨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렸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 가족을 뒤에 두고 남하했던 김씨는, 굶주린 피난지에서 길거리에 쓰러져 거진 죽어가는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났었다. 그녀는 생면부지의 김씨로 인해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그 고질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뜰 때까지, 그녀는 김씨와 함께 시장통을 전전하며 채소거리를 팔았었다. 그녀는 김씨에게 아이 하나만은 남겨주었다.
그래서 김씨는 아내를 잊지 못한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좌판을 벌였던 바로 그 자리에 상가 빌딩을 지었다. 그리곤 그 한 귀퉁이를 차지하여 아직도 채소거리를 팔고 있다. 뼈 빠지게 고생만 하다가 약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먼저 간 아내, 그녀를 생각하면 김씨는 가슴이 미어진다.
저승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라도 천년 만년 아내를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아 주리라, 몇 번이고 다짐을 해보지만 모두가 허망한 생각이라 남몰래 가슴만 쥐어짤 뿐이었다. 목숨은 질긴 것인지 쉽사리 죽지도 않고 그리움만 더해갔다.
김씨는 언제나 자신의 옆 자리에 방석을 깔아둔다. 아내의 자리다. 좌판 시절에도 매양 그랬다. 아내는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콜록거리며 가끔은 피를 토하며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언제든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아내를 위해서, 아니 꼭 나타날 것만 같은 아내를 위하여, 김씨는 어김없이 방석을 깔아놓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김씨는 부자다.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물론 김씨 자신의 생각이다. 남들이야 어찌 생각하건 간에 김씨에게는 시장통의 이 수억 짜리 상가 빌딩이 있고, 매달 상가와 사무실 임대료가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전액 정기 적금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돈인가.
생활은 아들 내외가 끌어간다. 아들 내외는 부부 교사이다. 그들 내외는 처음 김씨가 손길이 너무 가는 채소 가게를 그만 두었으면 했다. 아니면 달리 좀 편한 업종으로 가게를 바꾸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아서라 했다. 아들 내외도 재빨리 김씨의 뜻을 이해했다.
김씨는 자신의 재산을 대충 어림으로 짐작해보면서 문득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늙으면 하나같이 애가 된다지 않았는가. '애비야, 애미야.' 김씨는 건넌방의 아들 내외를 불러들였다. 마악 설거지를 마치고 앞치마도 풀지 못한 며느리의 뒤를 따라 아들도 안방으로 들어섰다.
'느들 요즘 텔레비 뉴스를 보고는 있는 것이냐?' 아들이 의아한 듯 아비를 바라보다가 부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예, 암요. 엊그제 아버지를 살해한 불효자식 사건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죠? 방송뿐만이 아니라 신문으로도 자세히 보고 있습니다.' '그런디, 느이들은 뭐 집히는 거나 켕기는 거 없냐?' 김씨의 연이은 질문에 아들이 잠시 쭈삣거렸다. 아무래도 김씨의 눈빛이 이상해 보였다. 의미심장한 눈빛인 것이 아들 내외를 은근히 꼬나보면서 마치 비웃거나 비꼬기라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들이 정색을 했다.
'아니 그럼 설마 아버님께서 지금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설마 제가 아버님의 재산이 탐이 나서…….'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네가 널 어떻게 키웠는디……. 허지만 사람 속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들 내외는 기가 막히다는 듯 말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김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오늘 내가 그동안 내 속에만 가만히 담아두었던 아주 중대한 발표를 할라고 한다.' '말씀하세요.' 듣기만 하던 며느리가 샐쭉해서 말했다.
'사실 얼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느가 알다시피 그간 모아온 내 재산이 좀 있지 않는감? 그런데 말이다. 느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돈은 절대로 내 돈이 아니란 말씀이여. 모두가 느 불쌍한 에미의 돈이란 말이다.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다는 말이제. 그리고 느는 느이의 축재 능력이 따로 있고 이 많은 돈이 필요한 곳도 없지 않는감? 그래 하는 말인디, 내 생각해둔 대로 다른 곳에 유익하게 쓰고 싶고만……. 느들 의견은 어떠냐?'
듣고 있던 아들이 김씨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버님, 참 장하십니다. 암요. 그래야지요. 저희는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며느리와 더불어 안방을 물러갔다.
아들 내외가 물러가자 김씨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들이 전혀 동요를 안 한다 이 말씀이제. 내가 재산을 안 물려준다면 즈들이 어떡헐라고. 즈들이 무슨 성인 군자인감. 어디 두고 보자 몇 시간이나 참아낼건지.'
아니나 다를까, 잠시 건넌방에서 몇 마디 주고 받는 소리가 있는가 싶더니 아들이 불쑥 건너왔다. '아버님, 애미가 아버님 마음대로만은 안 된다고 하는데요? 애미도 할 말이 있답니다.' '뭐여? 할 말은 무슨 놈의 할 말. 내 돈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여. 느들 돈은 느가 모으면 될 것 아닌감?' 김씨는 얼굴 가득 핏대를 올리고 눈에 잔뜩 쌍불을 켜더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린다. '어이구 나 죽는다. 며느리가 시애비 돈에 환장했네.'
놀란 며느리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김씨가 드러누워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바라보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뜻은 그게 아니구요, 아버님 재산에 욕심이 있는 게 아니라, 애비나 저나 아버님과는 한가족이잖아요? 그러니까 저희들도 가족으로 대접해 달라는 뜻이었어요. 저희도 아버님 의견과 같다구요. 허지만 그건 마땅히 가족끼리 의논을 해야 될 일이잖아요? 이거 큰일났네. 당신은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구급차 부르세요.' 그러더니 주방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젖은 수건을 가져다가 김씨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김씨는 며느리의 손길에서 이상하게도 아내의 손길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가게의 빈 자리에 가끔씩 말없이 앉아주던 며느리의 깊은 속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만 두거라. 나 이제 괜찮다.' 김씨는 멋적게 웃으며 일어섰다.
며느리의 눈꼬리가 한없이 치켜졌다. '이 연극 누구 작품이에요? 바른대로 말씀하세요?' '나는 아니다.' 김씨가 먼저 손을 저으며 아들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아닌데.' 아들도 뒷통수를 긁으며 뒷걸음을 쳤다. '아버님 재산 말입니다. 한 푼도 아버님 뜻대로만은 안 될 걸요? 어디 두고 보세요.' 며느리가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그래 다 느들 것이구만. 그저 한번 해본 짓이랑게.' 김씨는 노래하듯 중얼거리며 가게로 내려갔다. 그 걸음 속에는 포만감이 충만해 있었다.
--<장생> <상의>
- 이전글남궁 선생 02.06.16
- 다음글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금성가족 1991년 7월호 02.06.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