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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겨울 이야기/인천제철 1989년 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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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208회 작성일 02-06-1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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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민섭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발 틈으로 더욱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거리는 흥청거리고 그 흥청거리는 거리의 눈발을 맞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다웠다.
저들은 혼자가 아니고 둘일 것이다. 둘이 아니고 셋일 것이다. 그래서 홀로 걸어도 그 가슴 한구석에는 누군가가 뜨겁게 자리잡고 있어서 언제나 축축한 눈으로 따스한 가슴으로 저렇게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민섭은 가만히 도리질을 했다. 약해져선 안되었다.
이런 식의 감상에 젖어들었다가는 바보스럽게도 만사를 그르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더 아픈 고통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드는 안타까움에 민섭은 도무지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사랑하지 못 할거야.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호주머니 속의 시려운 손에 힘을 주다가 민섭은 마침내 눈물이 핑 돌고야 말았다.
지난 여름 민섭은 불행하게도 오른손 손가락 네 개를 모두 잃어버리는 사고를 겪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눈앞에 붉은 피보라가 일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자신의 완벽한 질서의 틀에서 일순 벗어났던 인간의 뼈마디를 기계는 사정없이 내리찍어버린 것이다. 민섭은 정신을 잃었다.
동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사장이 직접 나오라. 나와서 당당하게 얘기하라."
"당신이 직접 기계를 만져라. 우리는 일하지 않겠다."
"김반장은 이 회사를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
김반장은 해고 통지를 받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저런 철면피 사용자를 믿고 어떻게 우리가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민섭은 부끄러웠다. 오늘 김반장이 이 직장을 떠나게 된 데에는 아마도 민섭의 영향이 너무도 컸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김반장은 민섭의 화려한 경력을 흠모했다. 그의 중도하차한 대학 경력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미 노동권에는 적지않이 그의 이름이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젠 당신 차례야."
누군가가 민섭을 향해 쏘아부쳤다. 그 여름의 일이었다.
그가 얼마 후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느 사이 달려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웬일이에요?……."
눈물이 그녀의 하얀 볼을 타고 흘렀다. 민섭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민섭은 자신도 울컥 울음이 솟는 걸 꾸욱 참았다. 오른손은 전혀 감각이 없다. 치명적 상처임을 예감했다. 사고 순간 움켜쥐었던 소름끼치는 상처 부위의 느낌을 되살려 보았다. 그래, 그럴거야.
무심히 들어서서 링겔병을 살리는 간호원 아가씨의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민섭은 나직이 물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필경은 그녀도 알아야 하리라.
"어느 정도입니까?"
간호원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멈칫거리다가 이내 왼손을 살며시 들어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 전부를 그어보였다. 민섭은 고개를 돌렸다. 구멍이 뚫리듯 가슴이 일시에 내려앉았다.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 눈끝에 자신의 오른손이 아예 다른 사람의 팔처럼 하얀 천에 묶여 놓여 있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어요? 잘려나간 손가락 말이에요?"
간호원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계를 다루었던 그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이 정도는 그래도 나은 편이죠.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민섭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겠지. 이 정도야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다시 가슴이 콱 미어져 왔다.
그녀는 민섭이 퇴원하는 날까지 매일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가능한 한 밝은 얼굴로 친구 이야기며 그녀의 직장 이야기며 학교에서의 운동권의 동향이며 그런 것들을 자상하게 들려주었다. 민섭의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그녀의 배려는 가히 헌신적이었다. 민섭의 가족들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아가서는 퍽이나 안쓰러운 일이기도 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참아낼 수 있을까. 그녀의 기색을 살피는 조심스런 눈초리에서 민섭은 상처받은 자식을 둔 부모의 찢어지는 가슴을 이해할 수 있었다.
퇴원하고서부터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는 사이, 민섭은 새로운 불안감으로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싹트기 시작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불확실함이 어느 사이 점점 자라고 있었다. 떠나 버리지는 않을 것인가.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는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민섭은 두 사람의 장래에 관해서는 가급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본능적인 회피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사랑을 굳게 약속했으며 결혼까지 언약한 사이였다. 그리고 요즈음 그녀의 행동으로 미루어 본다면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민섭은 한편으로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상황은 달라져 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돌변하여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평소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엄청난 변화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뇌리에서 아예 떠나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민섭은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은 그 키가 어느만큼 될까. 눈 속에서도 늘푸른 소나무의 가슴만큼 될까. 머리만큼 될까. 아니면 이파리 훌훌 털어버린 겨울 나무의 가지 끝쯤 될까. 민섭은 혼자 중얼거렸다.
민섭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그녀는 매일 그를 찾아주었지만, 그녀는 그녀의 주위로부터 서서히 그러면서도 완고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도리는 아니지만 더 어려워지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거라. 그러찮아도 하는 짓이 불안한 사회운동이라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제 저 지경이 되었으니 그나마 직장이라도 잡을 수가 있겠니? 아니면 손가락이라고는 하지만 사람 구실 제대로 할까 싶구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령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다만 민섭의 상처만이 생각의 전부였고, 상처받은 민섭의 아픈 마음이 생각의 전부였다. 그녀 자신의 일로는 돌아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붕대를 풀던 날의 민섭의 오른손은 그녀에게 이제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충분히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로 드러난 그의 오른손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안쓰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 혐오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두려움이 차츰 그녀를 나락으로 끌어갔다. 세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그쯤 불구인들 어떠랴. 심하기로는 더한 사람들도 아름답게 살아가는데, 그녀는 수치스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지도 몰라.
그녀는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민섭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찾지 않는 한 그 역시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병실에 던지고간 그녀의 짧은 한마디가 마치 주검처럼 그의 책상 위에 누워 있었다. 제 자신도 저를 알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었는데……. 어쩌면 제 이 고민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시간을 갖고 싶어요.
민섭은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는 그 자신이 그녀를 위해 넉넉해야할 참이였다. 그녀가 보여준 그간의 인내는 그녀를 더 소중하게 보이게 했고, 그런 소중한 가슴에서 지금 일고 있는 갈등을 민섭은 절대로 일축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승산이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동안의 사랑을 안타깝게도 소모시키며, 아예 털끝만큼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민섭은 그가 느껴가고 있는 참담한 패배감을 그녀에게 나누어 주어서는 안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가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생활들은 가끔씩 그를 울분으로 온몸을 떨게 하곤 하였다. 모든 것을 새로이 익혀야 했다. 밥을 먹는 행위에서부터 옷입는 일, 글씨를 쓰는 일, 하다못해 화장실 뒷처리에까지도 그는 잃어버린 오른손 대신 왼손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어쩌다 외출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무심코 습관적인 손을 내밀다가 소스라쳐 놀라는 그들을 보고 아직은 여유있게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동참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굴레야.
창밖에는 계속 눈이 날렸다.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둡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그는 마냥 앉아 있었다. 민섭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나타나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나.
반년 가까이의 시간은 우리를 얼마나 떨어뜨려 놓았을까. 널 사랑한다. 하지만 알지 않니. 고민하지 말아라. 난 혼자서도 잡초처럼 거뜬히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너를 불렀다. 내가 말을 하면 그녀는 울까. 나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민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섭은 자신이 곧 벼랑에 서게될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끝이었다. 눈은 왜 저렇게 쏟아지나, 차라리 매서운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민섭은 불현듯 이 만남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하여 그녀를 붙잡아보려는 얄팍한 자신의 속셈이 너무도 여실하게 드러나는 일이 아닌가도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서 마악 깨어난 민섭의 어깨에 따스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가 눈을 돌린 그곳에는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미처 녹지 않은 몇 송이의 눈꽃이 그녀의 머리칼에 어깨에 피어 있었다. 그녀는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털장갑이었다.
"제가 짠 거예요……."
그리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자리에 앉아 귀엣말이듯 속삭이는 것이었다
"오늘부턴 왼손잡이 사내를 사랑할래요.그러니 따끈한 커피 한잔 시켜주세요."

--<인천제철 1989년 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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