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지간에도/인천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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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묘한 동물이다. 항상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추구하면서도, 그리고 현재에 마치 정신병자처럼 매달려 살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지나가 버린 과거에도 놀랄 만큼 강하게 집착하는 존재이다.
나도 그 중의 예외는 아니다. 나는 특히 거의 20여 년 전에 떠나와 버린 고향에 아주 민감하다. 나의 고향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나의 고향에서 다만 나의 유년기를 보냈을 뿐이다. 고향이 나에게 준 것은 더더욱 없다. 오히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며 겪어야 했던 참담한 과거가 항상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고향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지방색에 관련된 얘기가 시작되면 극에 달하게 된다. 누구도 나의 고향에 험담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를 못한다. 만일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 급기야는 좋은 자리도 순식간에 싸움장으로 변하고 만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내 고향은 내 아버지와 다름이 아니다. 내 고향을 헐뜯는 것은 곧 내 아버지를 헐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내가 내 부모를 사랑하듯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나는 그런 나의 고향을 영원히 내 가슴속에 소중하게 담아둘 것이다.
오늘은 96년도 프로야구 한국씨리즈 7차전 중 4차전을 진행하는 날이다. 해태와 현대의 대격돌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한다. 해태 구단은 내 고향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그 동안 해태는 무려 일곱 번이나 우승할 정도로 강한 팀이다.
강한 해태는 내 고향 사람들의 우상이며 나의 우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처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심하다. 어쩌면 신앙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파트 근처의 호프집에 앉아 나는 호프집 안에 설치된 수상기를 통해 경기를 지켜본다. 주변에는 이미 사오 명의 주객들이 호프를 마시며 긴장된 눈빛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느닷없이 호프집 여주인이 나를 향해 한마디를 던진다.
"장 선생님, 해태 팬이죠?"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당혹해 한다. 왜냐하면 여기는 지금 해태와 경기 중인 현대 유니콘의 안방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그럴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만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주인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오늘은 현대가 이길 것 같은데요? 어떡하죠?"
묘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던진다. 어쨌든 나는 기분이 갑자기 나빠진다. 그 옆에 앉아있던 주객 중의 하나가 혼잣말이듯 내뱉는다.
"사는 곳이 고향 아닙니까? 여기 살면 여기가 고향이고, 그렇다면 현대를 응원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기분이 더욱 나빠진다. 그치의 말이 주인 여자의 말보다 더 속을 느글거리게 만든다. 이건 차라리 협박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 그는 나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6대 1이예요. 현대 응원은 여섯이고 해태 응원은 장 선생님 혼자라니까요? 아니, 아까까지는 한 분이 더 있었어요. 여기 옆 가게의 박 사장님요. 그분 고향도 거기거든요? 근데 민망해서인지 그냥 가시더라구요."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주인 여자의 말대로 여기는 현대의 텃밭이고 나는 굴러온 돌멩이인데 감히 어떻게 해태를 드러내놓고 응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수상기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나온다. 현대가 기회를 잡고 있는 순간이다. 주객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태는 위기인 것이고 나는 혼자 가슴이 조여온다.
다행히 현대는 아직 점수를 내지 못 했다. 주객들이 다시 앉으며 탁자를 두드린다. 그 중 몇은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을 탓하기도 한다.
"장 선생님, 응원도 못 하시고, 속이 많이 타시죠? 호프 한 잔 더 드릴까요? 호프로 속이나 푸시죠 뭐."
주인 여자가 정말 나를 일부러 약을 올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가 지금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나는 애써 전혀 반응이 없다는 듯 무심히 앉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얼굴 변하지 마세요. 장 선생님. 그렇다고 얼굴까지 변하면 어떡해요?"
그러나 어지간히 참아내고 노력을 하여도 얼굴에는 금방 나타나는 모양이다. 주인 여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가섰다. 주객 중의 누군가가 분위기를 누그려뜨리려는 듯 말한다.
"누가 이기면 어때요? 다 잠시의 기분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도무지 속이 상해서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정말이지 누가 이기면 어떤가? 해태가 밥을 먹여 주나? 아니면 돈을 주나?
호프집을 나선 나는 다른 호프집으로 들어선다. 다행히 수상기가 없는 집이다. 수상기가 없으니 손님도 없다. 다시 마음이 편안해진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문득 야구경기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어떻게 되었을까.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반갑게 맞이하는 큰놈에게 묻는다.
"야구 어떻게 되었니?"
큰놈이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겼어요. 그것도 노히트 노런이에요."
나는 큰놈의 이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이기다니. 누가? 해태가? 현대가? 큰놈은 현대 팬이라는 사실이 문득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놈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여기에서 자라고 있으니 여기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겨서 기분이 좋겠구나."
안방으로 들어서는 나를 큰놈은 미안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더 던진다.
"그래도 해태가 우승할 거예요. 해태는 강하잖아요?"
--<인천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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