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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훔치는 것/삼부사보 1994. 11. 10(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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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937회 작성일 02-06-1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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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 주식회사의 영업부에 근무하고 있는 추동표 씨는 월요일 아침 동기호 사장실을 나서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이 화끈거리는 두 볼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훑어 내리다가 추동표 씨는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한껏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는 아직도 충혈된 두 눈동자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내놓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동기호 사장은 평소의 다혈질 기질 그대로 어안이 벙벙한 추동표 씨를 몰아부쳤다.
"이봐요, 추동표 군. 그 따위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하려거든 차라리 보따리를 챙겨요. 여기는....... 이 회사는 말이요, 돈 많은 독지가가 자선 사업을 벌이는 복지 단체가 절대로 아니란 말이요"
"그렇지만 사장님......."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말대꾸를 하는 거요?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어서!"
제대로 입도 벙긋도 못해 보고 추동표 씨는 동기호 사장실을 나와야 했다. 도망치듯 나오지 않으면 동기호 사장은 언제 또 닥치는 대로 집기를 걷어차며 제 화를 이기지 못하여 뒤로 벌렁 나자빠질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사원들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추동표 씨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도록 긴장해 버린 까닭은, 그러나 기실 동기호 사장의 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장실 입구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마송희 씨, 평소엔 '사장님, 사장님.' 깍듯이 하다가도 사원들이 보지 않으면 '삼촌, 삼촌.' 하며 갖은 아양을 떨어댄다는, 추동표 씨가 아예 넋을 잃고 빠져 있는, 마송희 씨가 미동조차 하지 않으면서, 동기호 사장으로부터 박살이 나고 있는 처참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렇다, 그것 때문에 추동표.씨는 얼굴이 더욱 화끈거리고 안절부절했던 것이다.
그녀의 무심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스인가, 노우인가, 그녀의 반응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추동표 씨에게 이런 망신은 실로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좋을 게 하나 없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그녀가 만약 최소한 망설이는 중에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일로 하여 그녀는 여지없이 자신을 포기해 버릴 것이 분명한 것이어서, 추동표 씨는 더욱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며칠 전 추동표 씨는 장문의 편지를 썼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썼다가는 다시 지우기를 수십 번, 오로지 이 한 통의 편지에 모든 것을 걸듯이 필사적인 자세로 자기의 심경을 토로했었다. '제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을 지키며,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제겐 당신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으며, 당신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뭐 이런 따위의 상투적인 사랑 고백과 사탕발림으로 시작하여, 구구절절이 애절한 바람과, 또 거기에 반 협박성 발언까지 충분히 곁들여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다 보니 자연 내용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신의 답신을 기다립니다. 목을 길게 늘이고, 눈이 빠지도록.......'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추동표 씨는 이 편지를 그녀의 생일 선물과 함께 곱게 포장하였다. 그리고는 마송희 씨가 주로 오르내리는 전철역 지하보도의 유료 물건보관함에 넣어두었다.
"누군가가 물건을 맡겨두었습니다"
그는 지나치는 마송희 씨에게 열쇠를 건네 주었다. 다음날 보관함은 비어 있었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저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던 추동표 씨는 퇴근 시간 직전, 또다시 동기호 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추동표 씨는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이번엔 당당하게 따져야겠다. 기가 죽어 두 귀를 축 늘어뜨리고, 꽁지를 사타구니 속에 잔뜩 구겨넣은 비 맞은 개꼴이라니.......
마음을 다지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냉수 한잔으로 진정시키면서, 추동표 씨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을 앞으로 처억 내밀고, 사장실로 들어섰다.
다행히 입구에 앉아 있어야 할 마송희 씨가 보이질 않았다. 동기호 사장은 소파에 깊숙이 앉아서 들어서는 추동표 씨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앉게."
"예."
"할 말 있나?"
"어제의 일에 관해서는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동기호 사장이 경멸하듯 내뱉었다.
"전 말입니다."
"이봐요, 추동표 군. 나는 지금 회사 일로 자네를 부른 게 아냐. 그 일은 아침에 이미 결론이 난 것 아닌가?"
추동표 씨는 움찔하였다. 그렇다면 동기호 사장이 자신을 부를 만한 무슨 일이 또 있단 말인가?
"내 책상 위를 보게."
그렇구나. 고개를 돌린 추동표 씨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거기엔 며칠 전 그가 마송희 씨에게 보냈던 선물 꾸러미가 그 포장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일시에 모든 일이 확연히 이해되었다. 마송희 씨는 자신의 선물 꾸러미를 곧장 동기호 사장에게 내밀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자네가 우리 송희한테 눈독을 들이는 모양인데, 어림없는 짓은 안하는 게 좋을 걸세. 그 애가 어떤 아이인데 훔치러 들어?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선물을 돌려준다고 하니, 가지고 가게. 우리 송희와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게. 잊도록 해. 그리고 내일부터는 기획실로 출근하도록. 이상이네."
가능한 한 기분 나쁜, 또는 화가 난 감정을 억제하는 듯, 동기호 사장은 점잖게 타이르고 있었다.
추동표 씨는 두 다리에서 힘이 쏙 빠져나감을 느꼈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선물 꾸러미를 든 추동표 씨는, 돌아서며 마침내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말았다. 그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 입술에 적셔졌다.
자리에 돌아온 추동표 씨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되돌려 받은 선물 꾸러미의 촉감과 무게가 전과는 달랐다. 정신없이 포장지를 뜯는 추동표 씨의 손에 아, 예쁜 카드 한장이 잡혔다. 추동표 씨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펼쳤다.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송희 송희 송희로부터' 추동표 씨는 만세를 부르다가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삼부사보 1994. 11. 10(159호)> <인천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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