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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유령/인천상의 199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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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183회 작성일 02-06-1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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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릉......."
세호는 잠결에도 부리나케 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세호니? 나 동구인데 큰일났어. 담임 선생님이 쓰러지셨대."
동구는 세호네 반의 학급 반장입니다.
"무슨 말이야? 선생님께서 왜?"
어제까지도 말짱하셨던 담임 선생님을 떠올리며 세호는 순간 어리둥절했습니다. 사실 어제 수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얻어맞은 알밤 몇 개는 도저히 불편한 사람의 기운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과로신가봐, 위독하시대. 빨리 좀 가봐야지 않겠니?"
알았다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은 세호는 정신없이 옷을 줏어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내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인데 이게 무슨 꼴이람. 시험 공부도 이젠 끝이구나. 문득 스쳐가는 기말고사를 걱정하며 세호는 큰길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차, 어느 병원이랬드라. 이거 큰일났쟎아. 동구 녀석도 지금쯤 집을 나섰을 거고, 선생님 댁에도 사람이 있을 리 없쟎아.'
그러나 세호는 침착하게 머리를 회전시킵니다. '그렇지.' 선생님 댁 부근에는 커다란 종합병원이 있었습니다. 세호는 택시를 잡아세웁니다. 아직도 캄캄한 오밤중인지라 가로등 불빛만이 꿈결처럼 거리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인적 없는 거리에 미끄러져 다가선 택시의 문이 열리며 동구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타났습니다.
"빨리 타라."
'이 자식 어떻게 나타난 거야?' 속으로 내뱉으며 세호는 허지만 다행이라 싶어 재빨리 올라탔습니다. 힐끔 바라본 운전사는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얼굴이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호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해버렸습니다.
"깜빡 병원을 안 가르쳐줬쟎아, 지나는 길이라 서행하며 살피던 중이야."
한두 마디 나누는 사이에 택시는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늦은 밤이라서인지 사람들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오직 응급실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 명의 간호원 아가씨와 젊은 의사들이 무어라고 떠들어대며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얀 색 긴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며 하얀 마스크에 하얀 손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들의 손놀림이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워 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병원이라기보다는 무슨 장의사집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문득 지나던 의사 한 분이 세호에게 말을 겁니다.
"너 공부 되게 안 하게 생겼구나.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명심하라구."
세호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낍니다. 그 의사는 손에 들고 있는 가위를 마치 엿장수처럼 쟁강거리며 금방이라도 세호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곧장 해부해 버릴 듯한 기세였습니다. 세호는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무서웠던지라 결국은 소리가 목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이미 몇 분의 어른들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잘 모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하진 않았으나 세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세호가 불안한 모습으로 고개를 꾸뻑 하는 데도 별 대꾸가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호는 드디어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혹시 선생님이 쓰러지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나는 선생님께 지은 죄가 없어. 난 잘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 선생님께서도 그건 잘 알고 계시단 말야. 선생님께 여쭤보자구.'
"선생님 운명하셨단다."
등허리께에서 속삭이듯 동구가 말했습니다. 세호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 하였습니다. 돌아서서 동구를 붙들었습니다.
"넌 알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건 내 탓이 아니야. 적어도 내 탓만은 아니야. 그렇지?"
동구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빛마저도 무섭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동구야, 집에 가자. 난 무서워."
밖은 어느 사이 아침이었습니다. 달아나듯 병원을 빠져나온 세호는 곧장 학교로 달렸습니니다. 어서 학급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단 말입니다.
교실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그저 왁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담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아직 수업시간 이전이라 칠판에 부지런히 낙서를 하는 녀석도 있었고, 교탁에 버티고 서서 마치 선생님처럼 일장 연설을 하는 녀석도 있었고, 뒤켠에선 한두 녀석이 콧노래를 부르며 요즘 유행하는 최신 디스코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동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호는 교탁 앞에 선 덩치 큰 녀석을 한쪽으로 밀어부치고 소리쳤습니다.
"얘들아, 사고가 생겼다. 내 말 좀 들어 봐."
그러나 아이들은 전혀 세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아예 들을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호는 교탁을 두어 번 두드리고 난 후에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어젯밤 돌아가셨단 말이다. 너희들 정신좀 차릴 수 없니?"
그래도 아이들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 때 마침 한녀석이 출입문을 번개같이 밀치고 들어서며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다."
세호는 잠시 진정되는 기미를 기다렸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아이들이 너무 무심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다시 출입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습니다. 수학 선생님이셨습니다.
"너 임마,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수업 준비는 안 하고."
세호는 정색을 하고 사정하듯 말했습니다.
"저희 담임 선생님께서 어젯밤에 돌아가셨는데요, 애들이 믿어 주질 않습니다."
"뭐라고? 내가 죽어?"
갑자기 알밤이 한 대 날라 왔습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폭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습니다.
"죽긴 내가 왜 죽어 임마."
세호 앞의 수학 선생님의 얼굴이 문득 담임 선생님의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유령이었습니다.
"이 녀석, 너 또 졸았지? 매일이군 매일이야."

--<인천상의 199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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