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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티스 한 묶음/인천상의 199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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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954회 작성일 02-06-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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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울화통이 치밀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벽시계는 이미 열두 시를 넘어서서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그놈의 알 수 없는 전화도 두 번이나 있었다, 받으면 끊고 받으면 끊는데, 그 썩을 놈의 준태를 찾는 전화임이 분명하였다. 하루에 보통 서너 번씩이 걸려오곤 했다.
도무지 이해도 안 되는 일이요,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준태는 또다시 술 한 잔도 안 걸친 그야말로 말짱한 정신으로 벨을 두어 번 누르고 난 뒤에 현관을 들어설 것이었다. 그리고는 선영의 눈치를 살피다가 적당한 순간에 세면장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 다음엔 벌렁 드러누워 꿈나라로 직행할 것이었다.
예전엔 그랬다. 사무실을 나선 준태는 언제나처럼 동료들에게 끌려 술집으로 향하는 날이 많았다. 업무상의 술자리도 가끔 있었다. 그런 날에 준태는 퇴근 전 반드시 너무너무 미안하다느니 장말정말 사랑한다느니 하는 전화를 해주곤 했었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짬짬이 실없는 전화를 걸어 비뚤어진 코맹맹이 소리로 이젠 귀에 다 닳아빠진 그런 너저분하고 유치한 소리를 계속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입에 바른 소리라고는 해도 선영은 왠지 가슴이 뿌듯하고 듣기에 좋았었다.
그런데 벌써 보름 가까이 준태는 선영의 무슨 일이냐는 물음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예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선영은 줄기차게 물었지만 영 무소식이었다. 술을 먹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다니는 것일까.
선영은 며칠 전 준태의 승용차 뒷좌석에 보라빛 스카티스 한 묶음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누구한테서 받은 것일까. 이 이가 정말 바람을 피우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선영은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준태에게 여자가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 아침 와이셔츠를 고르다가 준태는 느닷없이 화를 냈다. 마침 세탁된 것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선영은 미안해 했지만 준태는 오만 가지 인상을 찌푸려가며 투덜거렸다.
"여자가 집에서 무얼하는 거야? 아무리 바빠도 일상적인 일은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준태는 아마도 선영이 요즈음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수영이나 건강 체조를 못마땅해 하고 있는 듯하였다. 은연중에 그걸 암시하고는 있었지만 물러설 선영도 아니었다. 다 핑계일 것이 분명한 것이다. 준태는 평소 스포티한 티셔츠 차림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선영은 참다못해 쏘아부쳐 주었다.
"웬일로 매일 정장이셔? 바람이 나면 그런가 보죠? 다 알고 있어요. 두고볼 거예요."
그러면서 준태의 기색을 살펴보았지만 준태는 금방 뒤돌아서 현관문을 밀치고 나가 버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작작하라는 한마디가 선영의 귓가에 웽웽거렸다.
집을 나서는 준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영은 그에게서 다시금 분명 여자의 냄새가 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지식하고 단순한 성격이기 때문에 열심히 감추려고는 하지만 오히려 쉽게 드러나는 것이리라고 선영은 생각했다.
선영은 친구 병숙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묘책이 서질 않아서였다. 자초지종을 모두 말해 주었더니 병숙이 더 걱정을 하였다. 십중 팔구 바람이 확실하단다. 선영은 가슴이 더욱 막혀왔다.
한편으로는 별일 아닌 거 같다라는 말을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평소 말없는 병숙이까지도 바람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병숙은 선영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한 번 전화를 하려고 했어. 아주 이상하단 말이야. 며칠 전에 우리 사무실 앞에서 말이야. 준태 씨가 왠 아가씨하고 함께 서 있더라구, 한두 번도 아니고 가끔이야. 항상 같은 아가씨 같던데 난 설마 하고 말 안할려고 했었지……."
간도 참 큰 남자였다. 병숙의 사무실을 모를 리가 없는 그인데, 이젠 아주 내놓고 바람을 피겠다는 거 아닌가. 병숙은 덧붙였다.
"확실히 잡아야 돼. 그냥 두면 너 병신 된다. 그런 거 눈감아 주는 여자는 이해가 많은 게 아니라 꼴불견이라는거다. 너 그거 알지? 나 그 아가씨 얼굴도 기억할 수 있다구. 증인 되어 줄 테니 오늘은 기어이 실토하도록 주리를 좀 틀라구."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지자 드디어 준태는 벨을 눌렀다. 선영이 현관문을 따주자마자 들어서는 준태의 몸에서 술냄새가 일시에 선영의 코를 덮쳤다. 인사불성이 되다시피한 준태는 걸음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꼴로 어떻게 집에 온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해?"
취중에도 준태는 선영을 문득문득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치는 거예요? 누구 미치는 꼴 볼려고 그러는 거예요?"
아무리 술이 곤죽이 되어서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닌 둣해서 선영은 본론을 꺼냈다.
"당신 요즘 어떤 여자 만나는 거죠?"
"여자를 만나다니?……."
"아니면 늦게까지 어디에서 누구하고 무얼 한 거예요? 얘기하세요."
"……."
"말 못해요? 차 속의 꽃다발은 누구한테서 받은 거예요? 병숙이 사무실 앞에서 만난 여자,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만난다는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예요?"
"……."
"오늘은 결판을 내야 되겠어요. 당신한테 요즘 내가 무심하긴 했지만,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좀 젊어지고 싶었다구요. 허지만 그 점은 제가 잘못했어요. 반성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 거예요. 난 당신 없으면 죽는다구요?"
문득 준태의 술로 이그러진 입가에 미소가 서린 듯 했다. 준태의 눈이 선영을 응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야."
"뭐가 나예요?"
"꽃다발 사준 사람……. 내가 그냥 산 거라구."
"무슨 말예요? 그 아가씨는요?"
"그냥 다방 아가씨지 뭐……. 일부러 그런 거야, 좀 부탁을 했지……."
"밤늦게 전화 걸어오는 사람은요?"
"그것도 나지 뭐……."
선영은 기가 막혔다.
"왜 그런 거예요?"
"반성하면 됐어."
준태는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금방 그의 코고는 소리가 온 방안을 어지럽혔다. 선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준태의 얄미운 술냄새가 오히려 봄바람처럼 선영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순 사깃꾼 같으니라구…….'
선영은 준태의 코를 세차게 비틀었다. '아악!' 하는 준태의 비명 소리가 무척이나 고소하게 들렸다.

--<인천상의 199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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