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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맹 여사님/인천상의 19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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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994회 작성일 02-06-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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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청라>의 사장님이신 우리의 맹 여사께서는 1993년 12월 1일 월요일 아침, 여느 때와는 달리 창밖으로 자동차 소리 요란한 10시에 눈을 떴습니다.
왜냐하면 맹 여사께서는 어젯밤 忘年會 아닌 忘月會를 개최하여 자정 무렵까지 술을 진탕 마셔댔고, 그야말로 술집을 거의 기어서야 나올 정도로 아니 아예 숨이 넘어갈 정도로 마셔댔고, 그 후엔 또다시 단골 노래방에 숨어 들어가 그 잘 부르는 노래를 춤까지 곁들여가면서 한 열 곡쯤 불러댔으므로, 평소 일어나던 6시보다는 무려 네 시간이나 늦게 눈을 뜬 것입니다.
맹 여사는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시계 바늘은 분명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한 1,2분쯤 눈을 비비며 바라보았어도 오른쪽, 그래 바늘은 정확하게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맹 여사는 어젯밤 그의 주문 같은 중얼거림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술이 취하기 전부터 그는 계속 중얼거렸으며, 술이 한참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에도 그는 그 말을 계속 중얼거렸으리라고 맹 여사는 쉽사리 단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세상은 반드시 오른쪽으로만 돌게 될 것이다. 내일부터 사람들은 반드시 오른쪽에만 서야 할 것이다. 내일부터는 맹 여사께서도 이 점을 유의하시기 바란다. 내일부터는 반드시 오른쪽으로만 서시고, 반드시 오른쪽으로만 움직이시고, 반드시 오른쪽으로만 바라보셔야 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왼쪽은 바라보지 말 것. 오직 내일 하루만이라도."
그가 누구냐. 그는 막말로 거의 15년 이상이나 맹 여사의 '밥'에 불과했던, 다시 말하면 '충성스러운 졸개'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의 대학 선배입니다만, 그러나 오늘까지 맹 여사에게 작용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한 것으로써 맹 여사의 뒤를 그녀의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던 인물입니다.
맹 여사가 있는 곳엔 항상 그가 있었고, 맹 여사는 그녀의 사업 전반에 걸쳐서 그의 도움을 엄청나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꼭 연인 관계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상대방이 서로 섹시하게 구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후배로 만난 절친한 친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조차도 서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업자랄 수도 있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그의 도움은 사업자금이나 경영면에서의 도움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의 마법사입니다. 그녀를 돕는 술취한 주술가, 곤란할 때마다 탈출구를 제시해 주고, 어려울 때마다 해결책을 암시해 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항상 거의 암시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지만 우리의 맹 여사는 그 말들을 절대로 놓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결과에 대해서 두 사람은 결코 얘기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가 어젯밤에는 쉬임없이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하고 나발을 불어댔으며, 우리의 맹 여사는 또다시 그의 암시에 스스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맹 여사는 우선몸을 오른쪽으로 한바퀴 가볍게 뒹굴어본 다음 오른쪽 발을 먼저 방바닥에 딛고 침대를 벗어났습니다.
'오른쪽이라고 했겠다.'
맹 여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들어 방문을 열고 양치질에서부터 머리를 감는 일까지 세면장에서의 모든 일조차 오른손으로만 해결하고 드디어 오른손에 핸드백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왼쪽은 아니라 했겠다.'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1킬로미터도 채 안되기 때문에 우리의 맹 여사는 승용차를 사무실 건물 차고에 항상 주차해둡니다. '출퇴근은 무조건 걸어서, 아침 저녁으로 건강 운동.' 맹 여사의 세치 철학입니다.
길 오른쪽으로 맹 여사는 걷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절대로 왼쪽으로 길을 잡아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잘못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잠시 걷다가 승용차로 출근하는 영업부 정 부장의 차를 발견합니다. 정 부장도 그녀를 발견하고 차를 세웁니다. 차에서 황급히 내려와 뒷좌석의 문을 활짝 열고는 "타시지요." 했다
그러나 맹 여사는 본체 만체 그냥 걷습니다. 정 부장은 자신이 그녀의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습니다.
맹 여사는 왼쪽을 절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동전을 발견합니다. 백 원짜리이지만 안타깝게도 맹 여사의 왼발 끝입니다.
'재수없어.'
맹 여사는 왼발을 들어 그 동전을 무참하게 짓이겨버립니다. 아예 땅속으로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아, 그런데 웬일입니까
바로 그 옆에 오백 원짜리 동전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우리의 맹 여사는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오른 손을 거침없이 내밀어 동전을 주웠습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이렇게 재수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맹 여사가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맹 여사께서는 오른 편의 사람들에게만 웃어줍니다. 왼 편의 사람들에게는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왼쪽에 자리를 하고 있던 정 부장이 화가 났습니다. 맹 여사의 오른쪽으로 다가와 따집니다.
"혹시 아침 식사 중에 뭐 잘못 드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대답이 없는 맹 여사를 향해 정 부장이 삿대질까지 합니다.
그제서야 맹 여사가 웃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이때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립니다. 수화기를 든 미쓰 리가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전화 속에서 누군가가 호통을 칩니다. 얼굴 가득 웃음꽃이 핀 미쓰 리가 수화기를 사장님에게 넘깁니다. 어젯밤 미쓰 리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맹 여사가 수화기를 받아들자 어젯밤의 그가 전화 속에 아직도 잔뜩 취해 있습니다.
"왜 오른쪽으로만 서라는 거야? 힘들어죽겠는데......."
맹 여사가 먼저 소리를 지릅니다.
"오른쪽? 오른쪽이라니? 오른쪽이 뭐야? 오른쪽은 바른쪽이잖아?"
머리 회전이 더딘 우리의 맹 여사님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바른쪽이라니?????"

--<인천상의 19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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