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한반도
장종권 작품세계

엽편소설

 

정월 대보름/인천제철 199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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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168회 작성일 02-06-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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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의 열여덟 청춘은 어쩌면 운명적인 어떤 힘에 의하여 상당히 끌려가고 있었던 듯 했다. 부친의 작은 사업이 엄청난 손실을 불러일으킴으로 해서 뿔뿔이 흩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고통을 홀로 다스리면서, 무너져선 절대로 안 된다는 철저한 자기 관리 속에서도 세영은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감상적인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열여덟 해의 겨울, 세영은 전라도의 어느 작은 마을, 기억에도 생생한 벌판 끝의 어떤 집을 찾아 들었다. 어느 모로 보나 측은하기 짝이 없었던 그를 극진히 대해주었던 그녀, 나이는 그보다 두어 살 위였고 그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인연으로 고교 시절 내내 한치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가영의 정성이 가득 담긴 초대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토요일 오후, 그녀는 일부러 그의 집까지 찾아와 그의 손을 끌었었는데, 혼잡한 시골읍의 버스 터미널을 들어서며 문득 그는 그녀의 뒷덜미를 놓쳐버렸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한참이나 찾아 헤매다가 그녀는 그녀대로 홀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는 그대로 홀로 낯선 시골읍의 버스 터미널 구석에 앉아 한참이나 다음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었다. 마침내 세영이 그녀의 집을 직접 찾아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천지에 함박눈이 가득 날리고 있었다. 비포장된 시골길을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굴러온 버스에서 내려 귀동냥대로 다시 반 시간 여를 걸어야 하는 논두렁길의 끝에 가영의 집은 있었다. 벌써 해는 기운지 오래였고 세상은 다만 눈 속에 덮여 있었다.
조심스런 눈빛으로 어린 밤손님을 그녀의 집 앞까지 안내해준 동네 아낙의 힐끔거리는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세영은 한동안 망설였다. 너무도 고요한 시골의 겨울밤인지라 가영의 이름을 불러대기도 마땅치 않았고, 가끔씩 들어왔던 그녀 가족들의 반응이 내심 두려운 바도 컸으며, 어떻게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불빛이 환한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서며 대문간을 살피는 얼굴이 있었다. 아무래도 대문간에 인기척이 있음을 눈치챘던 것이다.
"누구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얼굴은 곧장 신발을 끌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갑작스런 바깥 공기에 무척이나 추운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조심조심 대문간으로 나서는 작은 키에 가녀린 몸매, 아마도 가영의 동생인 듯싶다. 생각하며 그는 그 얼굴이 대문간으로 나설 때까지 그저 말없이 서 있었다.
"세영씨죠?"
그 얼굴은 뜻밖에도 그를 알고 있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어둠 속에서도 요모조모로 그를 살피는 듯 했다. 마냥 순진하기 짝이 없는 개구쟁이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얼굴이었다.
"들어오세요, 언니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바로 대문 안쪽의 사랑방으로 그를 안내해 주었다. 방안의 따뜻한 공기가 오랜만에 내 집처럼 느껴졌다.
세영이 펄펄 끓는 듯한 아랫목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방문을 닫고 총총걸음으로 안채로 돌아갔다. 세영은 잠시 긴장을 풀고 얼어붙은 손과 발목을 문지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식구들이 쓰는 방 같지는 아니 했고, 바쁜 여름철 일꾼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방일 것이었다.
잠시 후, 안채에서 걸어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이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리면서 가영의 밝은 모습이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예의 동생이 들어서고 또 그 뒤를 따라 당당한 체구의 청년이 들어섰다. 가영이 아랫목의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을 꺼냈다.
"상당히 대담한데? 다시 보아야 하겠어."
예까지 찾아온 세영이 무척 놀라운 모양이었다.
"우리 오빠야, 인사해. 이 쪽은 동생 가희구, 오늘 못 오는 줄 알고 상당히 섭섭해 했다구. 세영이한테 관심이 많아."
가영의 서슴없는 말에도 가희는 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싱글거리며 말했다.
"궁금하잖아? 어떤 남학생인지."
가영의 오빠도 신기한 듯 듣고 있다가 손을 내밀었다.
"잘 왔네, 초행길 찾아오느라 힘들었지?"
"식사도 못 했을 거야."
가영이 말하며 가희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식사 좀 준비해주지 않으련? 그런 의미였을 것인데 이를 눈치챈 가희는 갑자기 입을 댓자나 빼내면서 쏘아붙였다.
"언니는 ? 왜 내가 해? 언니 손님이니까 언니가 하라구. 난 여기 있을거야."
그녀가 더욱 안쪽으로 들어서며 강경한 어조로 말하자 할 수 없다는 듯 가영이 바깥으로 나섰다. 그녀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가희는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언제부터 만났나요? 자주 만나나요? 누나인가요? 연인인가요? 내 얘기 자주 했나요? 무어라고 했어요? 혼자 어떻게 살아요?……."
무수히 쏘아대는 가희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세영은 어정쩡한 자세로 마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편히 쉬게, 그 질문에 대답했다가는 자네 끝이 없네"
오빠가 그녀의 말을 막으며 일어섰다. 그는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하고는 다시 주저앉았다. 밥상이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가희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줄기차게 그를 바라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곤 하였다.
그들은 그날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밖에는 내리던 눈이 벌써 그치고 어느 사이 밝은 대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세상은 다시 온통 대낮처럼 밝아 있었다. 가위 바위 보, 서로의 손목을 때리기도 하고, 혹은 낮은 목소리를 합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세영은 차츰 가희의 갸름한 얼굴과 하얀 손, 그리고 가지런히 드러나 무시로 빛을 내는 치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모자람 없이 한껏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그야말로 청순 그 자체였다. 가영은 자주 말하곤 했었다. 동생이 하나 있지, 세영이완 동갑내기인데 개구쟁이야.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들은 문득 배가 고파옴을 느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가희가 세영을 향해 물었다.
"예, 좀 그런데요."
세영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희가 이번에는 가영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금방 일어섰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서자 하얀 눈발이 시원스럽게 방안으로 날려들어 왔다. 가희가 부엌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서는 신발 소리를 들으며 가영은 무릎걸음으로 마루로 나섰다. 그리고는 토방에 가득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그 눈덩이가 세영을 향해 쏟아졌다. 까르르 웃어대는 가영의 등 뒤로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들고 가희가 서 있었다. 상이 방안에 놓이자마자 세영은 염치 불구하고 우선 먹기로 하였다. 그가 하얀 가래떡을 집어들고 설탕을 가득 묻힌 다음, 입 속에 넣고 한 두번 씹는 순간이었다. 세영은 그가 묻힌 그것이 설탕이 아니고 바로 조미료였다는 것을 알았다. 뱃속의 모든 것을 토해낼 듯한 메스꺼움에 세영은 마루 끝으로 뛰쳐나갔다.
한참을 왝왝거리며 입 속의 것을 뱉어낸 다음, 한 웅큼의 눈을 집어 삼켰다. 머리 들어 바라보는 달은 아직도 밝았다. 웬일인지 눈물 한방울이 그의 눈가에 맺혀 있었다.
"어떡해, 난 설탕인 줄 알았는데……"
미안해 하는 건지 고소해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가희의 얼굴을 보며 가영은 등뒤에서 잔잔히 웃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그랬을 리야 없었겠지. 이제 이십여 년 전의 어느 겨울 대보름날 저녁을 생각하면서 세영은 지금도 가끔씩 설마를 되씹는다.
그리고는 곁에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는 가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중년의 여유와 한편으로는 권태기에 들어서 있는 그녀, 세영은 항상 그해 겨울을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낀다.

--<인천제철 199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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