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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씨 화가 난 날/인천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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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1건 조회 4,661회 작성일 02-06-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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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여사는 목욕을 끝낸 미순이의 머릿결에 빗질을 하다말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씨도 상큼한 이 가을 아침에 웬일인지 이 녀석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이 미친 년 결국 당했구만."
청명 여사는 작은 레스토랑의 주인이다. 혼자 산다. 스물이 갓 넘어 결혼을 했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녀만 남겨놓고 일찌감치 먼저 떠나버렸다. 그 뒤 어렵게 어렵게 식구 하나를 들여왔는데, 그놈이 바로 미순이다.
얼마 전이었다. 갑자기 온 동네 잡놈들이 문 밖에 모여들어서는 기웃기웃 레스토랑 안을 넘보고 있었다. 청명 여사는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지나는 말로 쏘아 부쳤다.
"이놈들아, 왜 여기서 웅성거리는 거야? 어서 사라지지 못하겠어?"
어라, 그런데 이 녀석들 청명 여사의 말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눈치만 살피면서 근처를 빙빙 돌다가 다시 모여들곤 하였다.
"점백이, 너부터 사라져. 썩 꺼지지 않으면 혼이 날 줄 알아."
가만히 놈들의 숫자를 헤아려보니 자그마치 일곱 놈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청명 여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마도 애원조의 눈빛이 아닌가 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놈들의 태도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척 버티고 서서는 오히려 청명 여사를 문득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얼굴에 시커먼 점이 돋보이는 점백이 녀석이 가장 고집스러워 보였다. 청명 여사는 이 녀석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 녀석의 주인이 바로 맞은 편 카페의 이유없이 밉살스런 김마담이렸다. 가게는 애시당초 일 잘하는 미쓰 리한테 맡겨놓고 허구한 날 쏙 빼입고 엉덩이를 흔들흔들거리며, 누군가의 그랜져 승용차에 얹혀서 드라이브를 즐기는데, 우리의 펑퍼짐한 청명 여사는 그것이 너무너무도 배가 아픈 것이다.
귀공자도 와 있었다. 건너건너 노래방 정사장이 주인이다. 이놈은 온몸에 귀티가 줄줄 흘러서 별명이 귀공자다. 청명 여사는 이 귀공자만큼은 가끔 레스토랑의 출입을 허락했다. 이러한 배려는 오로지 너무 심심해하는 미순이를 위해서였지만, 그러나 이 녀석도 그녀의 철저한 감시 하에서만 미순이를 만날 수 있었다. 어쨌든 평소 미순이의 곁을 특별히 내주었던 이 녀석마저도 다른 놈들과 한 통속이 되어 서성거리고 있었다.
청명 여사는 잔뜩 화가 나 있는 판이라 사정 없이 귀쌈을 날렸다.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너도 저 병신 같은 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는 거냐? 아서라, 아서. 내가 잘못 봐도 한참이나 잘못 보았지."
청명 여사의 갑작스런 일격을 받고 귀공자는 혼비백산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웬 걸, 그녀가 일어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녀석은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나 점잖게 앉아 있었다.
더는 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녀석을 한켠으로 가볍게 밀어제치면서 일어서는데, 낯익은 걸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야, 이놈들아. 장가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냐? 여기서 이렇게 거지처럼 웅성거리기만 하면 뭘 해? 그러지 말고 저기 밖으로 나가서 한판 하고들 와라. 한 놈만 오라구."
노래방의 정사장이었다. 너털 웃음을 요란하게 흩트리면서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청명 여사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온 동네 사내놈들 다 모였어. 이놈들 후각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야 뭐 이놈들 냄새는 천리를 간대니까, 한두 놈은 다른 동네에서 온 것 같지?"
그제서야 우리의 청명 여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사장님, 무슨 소리래요? 우리 미순인 말짱합니다. 신소리 그만 하시고 당신 자식놈이나 빨리 치워 가시지요."
청명 여사는 돌아서며 미순이를 꼬옥 껴안았다.
"저 녀석들 말야, 잘 관찰해보라구. 맨 앞에 앉아 있는 두 놈 있잖아. 우리 귀공자하고 점백이 말이야. 나머지 놈들은 이미 틀렸어. 조금 있으면 다 포기하고 돌아갈 거라구. 두 놈이 문제인데, 아마 그것도 몇 시간 안에 결정이 나겠지. 지금은 전초전인 것 같아. 거, 신경전이라는 거 있잖아. 지금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달라질 거라구. 아마 점백이가 더 세겠지?"
그날 오후 청명 여사는 이상하게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잠시 미순이를 잊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바람이 날대로 난 미순이 년이 청명 여사의 눈을 피해 살짝 문 밖으로 달아났다가 돌아온 사실조차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못된 놈 같으니, 분명 점백이 짓일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청명 여사는 미순이를 안고 급기야 카페로 쳐들어 갔다. 들어서자마자 우선 김마담의 멱살부터 잡았다.
"너, 우리 미순이 어떡할래?"
"뭘 어떡해?"
김마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우리 미순이 임신했다구."
"그래? 근데 왜 이래? 수선 떨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청명 여사는 더욱 화가 났다.
"너, 새끼 간수 그렇게 밖에 못 하겠니?"
김마담도 덩달아 열을 받았다.
"느이 딸년이나 간수를 잘 하라구. 내 새낀 걱정 안 해도 돼."
청명 여사는 폭발하는 울화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까지 안고 있던 미순이를 김마담 앞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래, 좋겠다. 이제 느이 새끼니까 잘 걷어 먹여라. 너는 공짜로 며느리 생겨 참 좋겠구나."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온 청명 여사, 마침 카페로 들어서는 점백이를 만났다.
"너 잘 만났다. 이놈 새끼. 세상에 내가 어떻게 키운 미순인데 네깢 놈이 감히 손을 대......."
하고는 힘차게 점백이의 허리께를 걷어차 버렸다. 점백이는 청명 여사의 서슬에 너무 놀라서 달아나지도 못하고 납작 엎드리어 다만 깨갱거릴 뿐이었다.

--<인천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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