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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뭐/인천상의 199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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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764회 작성일 02-06-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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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중에 실시하는 보충수업 5교시 마지막 시간, 이글이글 타오르는 운동장의 뜨거운 열기가 끊임없이 교실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마로부터 줄줄 흘러내리다시피 하는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면서 영호는 눈길을 운동장으로 돌렸다. 지열이 아릿하게 흔들리며 상승하는 운동장은 마치 민방위 훈련장이라도 되는 듯 텅 비어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 몇 죽이겠군' 영호는 생각하며 다시금 한 손에 들고 있는 교과서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글자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눈이 마악 감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무리 다시 치켜 뜨고자 해도 소용없었다. 영호는 몇 번이고 눈을 꼬옥 감았다 떴다 해보다가 넌지시 책 너머로 온통 졸고 있는 녀석들을 둘러보았다. 두 팔로 턱을 받치고 앉아 조는 녀석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이젠 아예 책상에 엎드리어 완벽한 꿈나라로 가고 있는 녀석들도 하나 둘 늘고 있었다. 저러다가 별안간 잠꼬대라도 한다면, 혹시 코를 골기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에 미치자 영호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삼복 더위도 저리 가라 하는 이 팔월 한여름에 방학도 반납하고 녀석들은 학교에 나와 있다. 대학을 가야 하니까, 성적을 올려야 하니까, 집에 있으면 불안하니까, 죽든 살든 공부를 해야 하니까, 녀석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아니 어쩌면 강제로 끌려나오다시피 이 자리에 나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나오기는 하지만 제대로 집중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이 무더운 날의 한낮을 선풍기는커녕 부채 하나 없이 어떻게 견딜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몰려오는 졸음을 어떤 방법으로 쫓아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영호는 그런 녀석들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이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대학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녀석들도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어쩌랴 싶다. 어쨌거나 무엇에서건 남보다는 나아야 앞으로의 인생살이가 더 폭넓은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사회이니.
영호 자신에게도 고등학교 시절은 있었고, 그 시절 역시 공부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요즘 아이들은 전보다 많이 나약해진 듯도 싶고, 영호 자신이 어른이 된 입장에서 바라보아서인지는 몰라도, 이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졸 수 밖에 없는 녀석들이 너무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녀석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라 영호는 조는 녀석들을 일일이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켜주기도 하고, 세면장으로 보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역부족이었다. 급기야는 영호 자신조차도 내리눌리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여 애를 먹고 있질 않는가.
"선생니임……."
모두가 정신없이 조는 판에도 그래도 끝까지 참아가며 견뎌내는 녀석들이 몇몇 있기 마련이다. 그 중 한 녀석이 속삭이듯 가만히 영호를 불렀다. 아마도 녀석은 한참이나 영호의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내심 미안했던지, 촉촉한 얼굴에 은근한 미소까지 배여 있었다. 영호는 녀석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힘 드시죠?……. 아이들도 오늘은 모두 지친 것 같고…… 하니, 그냥 이야기나 해 주시죠……."
"무슨 얘길……?"
영호는 무심코 되물었지만, 녀석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진행이 안 되는 수업이라면 영호의 엉터리 만화 같은 썰(?)이나 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 말입니다."
영호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이제껏 졸고 있던 한 녀석이 맞장구를 쳤다.
"거 있잖아요? 염라교라 하던가요?"
"너 이녀석 그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 거니?"
"졸업한 형들한테서요."
"옛날 얘기다, 이 녀석아."
영호가 귀찮은 둣 말을 잘라버리자, 이번에는 또 한녀석이 붙들고 늘어졌다.
"선생님, 간단히만 해주세요. 염라교가 무언데요?"
"종교지 뭐야 임마, 기독교나 불교 같은……."
"에에…… 그런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완전 사이비네요. 교주는 누구예요?"
"나다."
다시 '에에' 하는 야유와 함께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염라교에도 교리가 있나요?"
"암, 있지."
"설명해 주세요."
"넌 종교를 갖고 있니?"
"예, 기독교요."
"왜 믿나?"
"천국 갈려구요."
"넌 양심도 없냐? 네가 어떻게 천국엘 가니? 맨날 못된 짓만 골라 하는 놈 아니냐?……."
"그러니까 계속 믿어야죠. 속죄하고 기도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잖습니까?"
"그렇다고 네가 더 이상 죄를 안 지을 수 있니? 네가 지금까지 지은 죄, 그건 그렇다 치고. 또 앞으로 지을 죄는 다 어떻게 할 거야?"
"아니, 그렇다면 염라교에선 뭐 별 수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있지, 있고 말고. 어차피 우리는 천국에 갈 능력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염라대왕님께 잘 보이자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지옥으로 갈 운명이라면 미리부터 염라대왕님께 아첨하자 이거야. 천국 갈 자신이 있는 녀석은 믿지 않아도 좋다."
갑자기 우당탕 책상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폭소가 터졌다. 어느 사이 그렇게 졸던 녀석들이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는 열심히 영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는 중얼거리며 다시 교과서를 집어들었다. '하나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뭐.'

--<인천상의 199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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