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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금성가족 199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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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524회 작성일 02-06-1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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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마악 교무실로 들어서려던 남궁 선생은 낯익은 목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놈이 웬일이야.' 순간 아직도 생생한 놈의 기억이 스쳐갔다. 놈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마치 군복무 동안에 모교를 찾아온 졸업생처럼 당당하고 생기있는 모습이었다. 남궁 선생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변화가 생겨도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내심 궁금해 하면서 남궁선생은 손을 내밀었다.
"웬일이냐? 오랜만이구나."
맞잡은 놈의 손이 무척 따스했다.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들어가자."
놈과 교무실에 들어서자 신문에 열중하던 옆 자리의 김 선생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네가 웬 일이냐?"
"그냥 들렀습니다."
놈이 김 선생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남궁 선생은 자리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난 해였다. 학년초부터 놈이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미 지난 해 놈의 담임 교사로부터 특별히 지도해야 할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렇지 않아도 매번 학생과에 단골 손님으로 들락거리는 폼새를 익히 보아왔던 터이라, 골치 아픈 녀석을 맡았구나 잔뜩 경계를 해왔었다.
그래 하루, 이틀, 사흘 무사히 지내기에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했었는데, 기어이 교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저희들끼리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것도 학칙 위반 사항으로 처벌을 받는 상황이다. 아무리 방과후라지만 버젓이 다른 학생들을 옆에 두고 교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다른 학생들에게 파급되거나 학생들의 집에까지 소문이 미치게 되면 학교로선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도 물론이지만 문제는 놈이다. '간뎅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감히 대낮에.......'
황급히 놈을 찾았으나 놈은 벌써 학교를 뜨고 없었다. 책가방도 버려둔 채 줄행랑을 놓아버린 것이다. 남궁 선생은 어이가 없었다.
이튿날, 놈의 홀어머니가 학교를 방문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는 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남궁 선생은 답답했다. 호미로 막아도 될 일을 가래로 막아도 어쩔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방과후 남궁 선생은 놈의 가까운 친구들 전화번호와 주소를 챙겼다. 이곳 저곳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다녀갔다는 곳이 없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전화조차 없다.
그러던 중 놈이 평소에 자주 만나곤 했던 친구로부터 놈의 어머니에게 별 일 없을 테니 걱정하시지 말라는 전화가 왔다 한다. 남궁 선생은 그가 놈의 소재를 알고 있을 거라 직감했다. 알고 보니 놈은 벌써 학교를 그만둔 몇 녀석들과 더불어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황급히 찾아가 문을 열고 들여다 본 방안은 가관이었다. 예닐곱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방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그 가운덴 놀랍게도 여자 아이가 둘이나 끼어 있었다. 여기 저기 소주병과 컵 나부랑이가 굴러다녔다.
구석의 카세트에서는 팝송이 신나게 흘러나왔다. 놈은 남궁 선생을 보자 움찔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다. 다른 녀석들도 미동도 안 하는 것이 웬 불청객이냐, 어서 방문이나 닫아달라는 태도였다. 어차피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아이들인가'. 놈이 일어서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집에는 가지요. 하지만 학교에는 안 나갈 겁니다."
말대로 한 동안 놈은 등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 선생과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에 밀려 놈은 마지못해 며칠씩 학교에 들르곤 했다.
"그만 두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졸업은 해야 돼."
남궁 선생은 놈과 마주칠 때마다 타일렀다. 지각이나 조퇴, 무단 결석이 문제가 아니었다. 놈이 또 다시 가출하여 영영 학교에 나오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끝내 자퇴서를 냈다.
"그래,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물으며 남궁 선생은 놈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많이 달라져 보였다. 고생을 많이 했구나 싶었다. 고생을 해야 어른이 되지. 남궁 선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낮엔 직장에 다니구요, 밤엔 검정고시 준비를 했습니다."
"그 참 대단하구나. 철이 좀 들었나 보지? 어머니께선 평안하시구?"
"평생 고생이시지요. 자식 하나 잘못 두시어 더 고생이십니다."
"좀 도와드릴 수 있다니 다행 아니냐? 그리고 그 검정시험 준비는 어떻게 기대할 만한가?"
남궁 선생은 놈이 공부를 하고 있다니 무척 신통스럽긴 했으나 결코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재학 때의 그의 수업 능력은 거의 제로 상태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놈은 얼마 전 대입 검정시험에 붙었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어서 찾아왔노라고 덧붙였다. 옆 자리의 김 선생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남궁 선생은 자못 감격스러웠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온 반평생이 다시금 다행스러웠다.
놈이 다녀간 며칠 뒤 출근하자마자 김 선생이 이상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남궁 선생, 일 전에 그놈 말입니다. 우리를 속인 것 같아요, 이걸 보세요."
남궁 선생은 말없이 김 선생이 넘겨주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지난 검정시험 합격자 명단이 새까맣게 실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놈의 이름 석자는 보이질 않았다. 두 번 세 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남궁 선생은 별안간 온몸의 힘이 쏘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탈감이 엄습했다. 왜였을까.
또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남궁 선생은 그의 책상 앞에 놓여있는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이곳은 지리산 산사입니다. 이따금 방문 앞을 스치는 스님의 발자국 소리와 골짜기를 타고온 바람소리만이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선생님을 뵈온 지 벌써 반 년이 지났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 이 글을 올립니다. 저번엔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무릎 꿇어 용서를 비오며 부디 한 가지만 너그러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제 어머님께 보다도 더욱 선생님 한 분께만은 꼬옥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금성가족 199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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