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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다발에 묻혀서/한국자원재생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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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203회 작성일 02-06-1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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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씨는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내일은 대궐 같은 내집으로 이사가는 날이다. 이삿짐을 싸다가 잠시 소파에 푹신하게 처박히며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기쁨이 넘쳐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실로 12년 만의 감격적인 행복이었다. 꿈은 아닌가 싶어 괜시리 얼굴을 꼬집어도 보면서 절대로 꿈이 아니라는 확신과 거듭거듭 충전되어 오는 기쁨에 스스로 몸서리를 쳤다.
지금쯤 그는 은행문을 나서고 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 평소 직장은 보통 한 시가 넘고 두 시가 넘어도 홀가분한 퇴근이 쉽지 않지만, 오늘만은 특별히 사장님의 허락을 얻어 은행문을 닫기 전에 퇴근을 해서 매매잔금을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불안해졌다. 그가 인출해 와야 할 돈은 물경 사천여만 원이었다. 이사 날짜에 맞춰 그동안 들어왔던 정기적금도 만기 해약하여 찾아두고, 동생에게 잠시 맡겨두었던 돈도 다시 돌려받아 넣어두고, 조금 모자란 돈은 이미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통장에 모조리 입금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왜 이 인간에게 그 큰돈을 함부로 맡겼을까? 이삿짐 싸는 것 다 팽개쳐 두고 자신이 직접 은행에 들렀어야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평소의 푼수기가 발동을 해서 아무데나 돈가방을 두고 오진 않을까. 눈맵시 좋은 소매치기들에게 홀라당 털리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그냥 그를 믿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못 믿는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그녀는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은행문은 충분히 닫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은행문을 나서서 집으로 왔어도 벌써 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라도 줄 일이지. 그러나 전화벨은 아예 울릴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십여 년 전 그녀는 알거지인 그를 따라서 집을 나섰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붙잡지는 않았다. 네 인생은 네 것이니까, 네 자신이 알아서 해라.
그것은 옹고집을 피우는 딸에게 내뱉은 아버지의 마지막 통고였다. 그 말은 뒤집어서 말하면 그 인간 따라가서 잘 살면 본전이지만, 못살게 되더라도 네 탓이니 도움 받을 생각일랑 아예 말라는 말인 것이다.
당시 그녀를 기다리는 신혼 살림집은 보증금 삼십만 원에 월 오만 원씩의 사글세 단칸방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면 마지막이었다. 기댈 곳조차 없는 그녀의 희망은 오로지 내집 마련이었었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일 이사를 마치면 그녀는 보란듯이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 모시고 자랑스런 손주들을 품에 안겨드려야지. 그런 생각들이 힘든 가재도구들을 묶는 그녀의 손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은 오후 여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고도 두세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돌아왔다. 현관을 들어서는 그의 입에서 술냄새가 울컥 풍겨나왔다. 그녀는 소스라치며 물었다.
"아니, 돈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깜짝 놀라며 낭패스럽게 주저앉았다.
"깜박 잊어버렸네. 본사에서 이사님이 내려오셔서 브리핑을 하다 보니 그만......."
"오후까지 브리핑을 했다는 말예요? 그놈의 회사는 근무 시간도 제맘대로예요?"
"아니, 브리핑은 오전에 끝났는데 오후에는 그 일로 회식이 있어서......."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일단은 마음을 놓았다. 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고 그가 이 중요한 사안을 몽땅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은 아직 은행에 안전하게 있기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내일의 이사는 어떡한다는 말인가. 잔금을 치러야 집을 비워줄 것 아닌가. 은행이 일요일에도 영업을 할 리는 없을 것이고, 아침 일찍 잔금지불이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낭패 아닌가. 설령 시간이 있다 하여도 문제였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현금을 사천만 원이나 집에 보관하고 있겠는가.
사색이 되어서 주저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그렇다. 자동화 코너가 그들을 위해 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풀이 죽은 그를 일으켜 세워 근처의 자동화 코너로 달렸다.
자동화 코너에는 역시 언제든 돈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으로 카드를 집어 넣었다. 그러나 수표 발행중지라는 문자가 그녀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현금이라도 인출할 수밖에 없었다. 통장정리를 해가며 오십만 원씩 거의 한 시간여나 돈을 빼내던 그녀는 또 다른 문자판을 만났다. 더 이상의 현금이 없음.
그녀는 다시 다른 은행의 자동화 코너로 달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수표는 발행중지였다. 어쩔 수 없이 현금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옆에 서있는 그의 손가방은 현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나 그나 온몸에 땀이 흥건히 고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와 마주앉아 현금다발을 풀고 한장한장 헤아리기 시작했다. 최소한 백만 원 단위로는 묶어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아찔하였다. 이삿짐을 챙기는 것도 미루어 두고 밤새도록 돈을 헤아려야 할 판이었다. 마음이 급하다보니 자꾸 헷갈렸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웃고 말았다. 내가 언제 이런 큰돈을 쥐어본단 말이냐. 돈다발 속에 묻혀서 오히려 죽을상이라니, 이건 모순이다. 행복이라고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도 멋쩍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머리 속에 집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잔금은 가능한 한 수표 한 장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연거푸 피식 웃고 말았다. 내일 아침 돈다발을 받아들고 어안이 벙벙해할 집주인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한국자원재생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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