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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마음이 편하면 세월도 멈춘다/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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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882회 작성일 02-06-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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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순 씨는 외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 다시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그리고는 거울 속에 비친 보오얀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이답지 않게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 한가닥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당연히 보일 법도 한 피부의 노화현상이나 주근깨 기미조차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싱싱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면서 쿡-하고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마염순, 그녀의 직업은 대학강사이다. 아직은 두서너 개의 대학을 왔다갔다 하는 강사이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금방 전문강사 자리를 얻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곧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마음 한 번을 바꾸어 먹으니 세상이 온통 기쁨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의 간부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남편 누구에게도 뒤질 것 없는 애틋한 남편이다. 그녀에게 흠이 있다면 둘 사이에 아이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차분히 기다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편은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했고 그녀를 신뢰했다. 남편은 그녀를 그저 여자로만 인식하지도 않았고, 다른 남편들처럼 아내의 바깥생활을 제어하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래서 늘상 자유로웠다.
방금 전 그녀는 그녀가 아침 내내 기다리던 전화를 받았다.
"어젯밤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못 하신다면 제가 큰 실례를 범하는 거구요? 기억하신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뵙고 싶군요."
아직 적당한 정도까지 여물지는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억지나 위장이 전혀 없는 듯한 무척 예의바른 어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오히려 그런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미롭기조차하여 푹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참 듣기가 좋군요. 사실 어젯밤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혀 모르지는 않아요. 고마웠습니다."
어젯밤 그녀는 상아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녀는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그녀에게 만나주기를 원했다. 그녀는 얼마 전 뜻밖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므로 마염순 씨도 그녀를 한 번 만나 위로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어온 터이었다. 그래서 마염순 씨는 그녀와 어울려 온갖 잡념을 다 지워버리자는 듯이 술을 왕창 마셔댔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이 1차 2차를 거쳐 찾아간 3차의 '발전소'라는 술집에서였다. '발전소'는 그 흔한 주점가에 있지도 않으면서 손님들을 정신없이 끌어들이는 곳이었다. 아마도 기존의 술집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해괴하기조차 할 정도의 파격적인 술집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처음 들어서면 이게 무슨 술집이냐 싶어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무슨 연극 무대 같기도 했고, 아니면 무슨 기계를 다루는 공장 같기도 했는데, 엄청나게 시끄러운 음악에 맞추어 무대에서건 좌석에서건 손님들은 아무렇게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해서, 마치 서양의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어느 자유로운 술집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런 술집이었다.
거기에서 마염순 씨가 한껏 취한 상아와 함께 그녀도 한껏 취하여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멀쩡하게 생긴 훤칠한 키의 남자가 그녀의 주변을 오락가락하며 탐색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오로지 그녀의 얼굴에만 고정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시선을 따갑도록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이런 자리에서 있을 수 있는 그런 흔한 일로 무심히 넘기고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오히려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참으로 기분이 좋은 일이었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점잖게 몸을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갈수록 더욱 강렬하게 그녀의 얼굴에 와 번쩍이며 부서졌다. 견디다 못한 마염순 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가 멋적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분명 총각일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이나 얼굴 어디에서도 전혀 여자의 냄새가 나지 않아 보여서였다. 그녀는 취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그런 낯선 남자에 대한 탐색이 우스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새로운 어떤 즐거움 같은 것이 새록하니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물러나 일행에게로 돌아갔고, 그녀는 상아의 어깨를 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한껏 취한 그녀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계산대에 섰는데, 그녀의 지갑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더 이상의 돈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호기있게 '외상합시다.'를 외쳐보았지만, 주인은 난색을 표하면서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갑을 통째로 주인 앞에 내밀었다.
"그 지갑 갖고 계세요. 내일 아침 다시 올게요."
그녀는 주인의 곤란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아를 껴안고 밖으로 나왔다. 길가로 나서자 상아가 참았던 구토를 시작하였다. 상아의 등을 토닥이던 그녀에게로 어느 사이 그가 다가섰다.
"술값은 제가 내 드렸습니다. 이 지갑은 갖고 가시지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섰다. 그러나 다시 어지러움증이 몰려왔다.
"고마워요. 내일 갚아드릴게요. 못 믿으신다면 전화번호를 불러드릴께요."
그런 그에게서 아침에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설마 몇푼 술값 때문에 다시 전화를 걸겠느냐싶어 내심 의심하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마염순 씨는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어떤 신선함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 분명 서른은 넘지 않았을 예의바르고 시원스런 청년에게서 이제 저물어가는 그녀가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꾸 설레는 가슴을 웃음 반 기쁨 반으로 진정시키며 '발전소'로 들어섰다. 그는 역시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술집 안은 낮은 조명으로 인하여 어둑하였다. 아직은 음악이 조용하게 흘러나와 손님들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며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활짝 웃어 주었다.
"어제는 고마웠습니다."
그는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조금은 위축이 되는 듯했다. 술에 취하여 있었던 어젯밤과는 어느 정도 달라져 있었다.
"주제넘게 인심을 쓴 것은 아니었던지요?"
"아뇨!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자리 술값은 제가 낼께요."
그러면서 그녀는 어젯밤의 술값을 봉투에 담은 채로 그에게로 내밀었다.
"아닙니다. 받을 생각 없었어요....... 정 그러시다면 이걸로 오늘 술값을 내지요. 초면에 술값을 내주는 것도 정상적인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런데 말예요?"
그녀는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물었다.
"어떻게 초면에 술값 내줄 생각을 하셨어요?"
"그냥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어젯밤 절 뚫어져라 쳐다보시더러구요. 기억하세요? 제가 그렇게 미인이던가요? 지금은 어떠세요?"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느낌이 좋아서 그랬습니다. 예전엔 가져보지 못한 느낌이었어요. 그건 솔직히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아까 뵙기 전까진 사실 저도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
그녀는 가슴이 문득 방망이질침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가 자신으로부터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느낌이 좋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아직도 자신에게 성적임이 분명할 어떤 매력이 남아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그녀에게도 아직 누군가에게 줄 느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무척 고마운 일이네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서른 안팎의 총각이신 것 같은데요? 제가 몇 살쯤으로 되어 보이세요?"
그녀는 애써 더 이상의 감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저와 동년배쯤이 아니신가요?"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세요? 농담이라면 지나치신 건데요?"
그녀는 핸드백 속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어 천천히 그에게 넘겨주었다. 주민등록증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러나 갑자기 그도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는 그보다 십년이나 연상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원,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속일 수가 있으세요? 좀 솔직하게 하고 다니시면 안 됩니까? 총각 좀 면해 볼려고 단단히 별렀었는데요."

--<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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