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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밤바다/인천상의 199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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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038회 작성일 02-06-1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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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전화야!'
인구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마악 퇴근하기 위해 서류가방을 챙기던 판이었다.
'한 시간 전에도 왔었어, 전화 꼭 좀 받고서 퇴근하라고…….'
다시 말해주지 않아도 책상 위에 놓인 메모 쪽지로 인해 알고 있을 터였지만, 옆자리의 강 대리는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싱글거리며 인구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나야.'
언제 들어도 발랄하고 생기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사무실 근처거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인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은 잔뜩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그러나 별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거의 그녀의 기분을 판단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인구는 그녀에게 민감해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자주 흔들렸다.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감정의 양극단을 오락가락하며, 어느 때는 한껏 쏟아지는 햇살 같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짚더미 같기도 했다. 알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러지 않으면…….어떡할 수 있단 말이야?'
그녀는 가끔 혼잣말처럼 내뱉곤 했다.
'인구 씨는 이기주의자야.'
그녀의 불만 섞인 소리를 듣고도 인구는 대답할 바를 몰라 했다. 자칫 쉽사리 변명성 대꾸를 하려 한다거나, 거꾸로 위로의 말 또는 충고성 발언이 있기만 하면, 그녀는 어김없이 신경질적인 자세로 돌변하여 두 사람 사이를 전투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곤 하기 때문이었다.
인구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구는 자신의 성격이 다분히 다혈질이고 단순한데다가 대단히 정말 대단히 고지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끌어갈 수 있는 언변의 재주도 없었고, 상대방의 기분을 미리 알아서 맞춰줄 수 있는 이해심이나 포용력도 적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인구는 대부분 그녀의 알게 모르게 타오르는 용광로에 석유를 끼얹는 일이 많은 셈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인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지겨운 일이 아닌가. 허지만 인구로서는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딱하게 보였고, 딱해 보이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앙 생활이 도피여서는 안될 텐데…….'
'아는 척하지마, 내게 신앙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달아나지 말고 부딪쳐 싸워보라는 거지…….'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야. 자신이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구. 싸워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거야?'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모습이라도 좋아. 그건 차라리 아름답기라도 하지.'
'인구 씨는 시를 쓰고 있는거야. 아주 낭만적이면서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유치한 시를 쓰고 있는 거지. 그러나 인생은 절대로 시가 아냐, 아니라구.'
그녀는 자주 술을 마셨다. 어디까지가 보편적인 인간이고 어디서부터가 신앙인인지 인구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곤 실없이 웃곤 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곤 했다. 그것이 인구에게는 도리 없는 슬픔으로 매번 가슴을 적셔왔다.
'적극적인 여자가 되어보는 것이 어때?'
'이보다 어떻게 더? 내가 적극적이면, 어떤 남자가 나를 받아줄 것 같애? 돌아오는 망신까지 내가 다 견뎌야 하는 거야? 아니, 나더러 사랑을 구걸하라는 거야? 싫어, 그건 싫어.'
그러다가도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수그리며 말하곤 했다.
'구걸을 해서라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수만 있다면, 구걸하고 싶어. 난 살고 싶다고, 내 아이도 갖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어…….목사님이 나더러 은둔하래.'
그녀는 은둔이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말하는 은둔이란 수녀원이나 수도원 같은 곳으로 잠적해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쓸모 없는 여자가 갈 곳은 그곳뿐인가요? 하고는 싫다고 말했어. 난 반드시 결혼할거라고. 그랬더니 수도사하고 결혼하면 될 게 아니네. 이렇게 됐어, 내 꼴이……. 나이 스물이었을 때의 첫사랑이 생각이 나.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감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두운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송도 산자락에 차를 세우고, 인구는 그녀와 차창 밖의 끝없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젯밤엔 이렇게 기도를 했어. 그렇게 멀진 않은 지난 어느 날, 당신의 제단 앞에 서로 사랑하게 된 두 남녀가 문득 원하지 않는 딸을 낳았습니다. 누구에게도 축복 받지 못한 생명이었습니다. 당신께서도 절 축복하지 않으십니까?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나를 받아주신다고 해도 그러나, 지금 제겐 당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인구는 그녀가 그저 이십 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친구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이제는 서서히 그의 인생의 분명한 일부분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작은 증거로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엄청난 무게로 다가서는 그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도대체 무엇인가.
'난 인구 씨의 관념 속에만 들어있는 거야. 실체는 어디에도 있지 않아. 있을 수가 없어. 사랑이 도대체 뭐야? 몸은 어디에 있는 거야?'
'난 매일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혜영일 이렇게 완벽하게 감싸주고 계시니 더 바랄 게 없어. 허지만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해. 하나님이 혜영이 속에 가득 들어있는 한, 아무도 혜영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거든. 혜영인 사실 아무말도 듣질 않고 있어. 누구의 말도 누구의 관심도 혜영에겐 시답지 않고, 언제나 혜영의 속에는 하나님으로 충만해 있지. 혜영인 하나님 외엔 아무도 믿질 않아. 그렇기 때문에 난 염려스러워. 신앙이 무엇이든, 혹은 신앙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든 간에, 그 인간이 진실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거야. 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싶고, 우리들의 인간적인 감정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이야. 하나님의 세계나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이상의 세계는 어쩌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는 일이야.'
인구는 그녀의 거의 무조건적인 신앙생활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가끔 만나는 두 사람의 시간도 거의 그녀의 신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지라, 인구는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인구가 싫어하는 이 점에 있어서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버린다면…….인구 씨는 내게 줄 게 있어?'
갑자기 정색하며 그녀가 물어왔을 때, 인구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암, 있지. 있고 말고,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가 있지. 그러나 그러나. 인구는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인천상의 199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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