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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동진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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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537회 작성일 02-06-1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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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동진강


민자는 우리의 앞집에 산다. 내가 사립문이 없는 우리 집을 벗어나 한 열 발쯤만 고샅길을 걸으면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민자네의 사립문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사립문은 문다운 문은 아니다. 사람의 출입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당에 내어기르는 닭들이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을 막자는 것일 뿐이다.
그 사립문 옆으로는 작은 도랑이 흐른다. 집안에서 쓰다 버린 허드렛물이 집 밖으로 빠져나가는 냄새가 지독한 도랑이다. 우리는 그것을 개굴창이라고 부른다. 나는 가끔 이 도랑에 오줌을 누곤 한다. 고샅을 지나가던 어른들이 그런 나를 바라보면 혀를 차며 말한다. ‘이눔아, 개굴창에 쉬를 허면 고추가 붉힌단 말여.’ 그 소리를 듣고 나면 정말 거의 영락없이 고추 끝은 붉어지면서 가려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 오줌 줄기가 도랑의 개굴창에 닿으면 개굴창의 못된 작은 벌레가 오줌 줄기를 타고 올라와 고추 끝을 깨무나 보다.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부터는 다시는 도랑에 오줌을 누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다.
사립문을 살짝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민자네의 뒷간 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 뒷간 벽을 타고 몇 걸음 더 걸으면 바로 옆으로 뒷간문이 그 음침한 입구를 드러내고 정면으로는 민자네의 마루와 안방문이 보인다.
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계속 안으로 걸어 들어가 수십 년은 닦았을 바닥이 반들거리는 마루에 이르면 작은 퇴창문이 비긋이 열린다. 그리고 곧 주름살과 검버섯이 가득한 민자네 할머니의 얼굴이 나타난다. 할머니는 말 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나는 적당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어 버린다.
“울 엄니가요, 계돈 달라대요.”
동시에 건넛방 문이 살짝 열리며 민자가 얼굴을 내민다. 내가 민자를 향해 묘하고 궁색한 눈길을 보내는 사이 민자의 할머니가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린다.
“느 엄니는 시도 때도 없이 계돈만 달란다냐?”
그 중얼거림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곧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콩콩거리기 시작한다. 간신히 견디며 마루 끝에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으면 민자가 방문을 열고 마루를 사뿐사뿐 걸어 나온다. 곁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종아리는 비록 흙빛이었으나 너무도 미끈하다.

나와 민자는 동네 형들과 함께 오리 밖의 동진강 하구로 나간다. 드넓은 벌판을 지나 논두렁길이 서서히 푸른 빛 돋는 개흙 길로 바뀌면, 여기저기 게 떼들이 마치 우수수 땅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가을의 낙엽 소리를 내면서 일시에 사라졌다가 우리가 지나가면 다시 나타나곤 한다.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커다랗고 긴 도랑에는 길게 자란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 풀냄새가 진하게 배어난다. 이 냄새는 동네 담벼락 여기저기에서 자라는 신위대 더미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와 거의 동일하다. 그 갈대숲의 도랑 바닥에는 발등이나 겨우 덮을락말락 하는 물이 잽싸게 흐르고 있고 망둥어 새끼들이 팔짝거리며 뛰어다닌다.
이곳에 이르면 언제나처럼 나는 가슴이 벌렁거린다. 변함이 없고 이미 익숙해져 버린 들녘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새로운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는 것이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제끼고 하늘은 대단하게도 무섭고 강한 얼굴을 하고 나를 지켜본다. 저것은 동네에서 바라보는 편안한 하늘이 결코 아니다. 들판에서 바라보는 고요하고 점잖은 하늘도 결코 아니다. 이 갯벌 근처에만 이르면 분노한 사자처럼 변해버리는 하늘을 감히 바라보지 못하며 나는 남모르게 겁에 질리는 것이다. 왜일까. 나는 거대한 바다와 만나면 하늘도 거대해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고 만다.
드디어 밀려드는 바닷물 소리와 함께 바닷새들의 끼룩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다가온다. 아직 바다는 제방에 가려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제방 너머로 피어오른 하늘가의 뭉게구름은 동네에서보다 더욱 가까워져 보인다. 나는 탄성을 지르며 제방을 향해 달려든다. 드디어 바다는 그 우람한 가슴을 드러내고는 어둠보다 더 무서운 소리로 소리친다. ‘이 겁 없는 놈아, 내가 바로 그 무서운 바다이다.’
바다는 마치 거대한 전설 속의 고래처럼 혹은 왕게처럼 거품을 뱉어내며 동진강 하구로 밀려든다. 뜨거운 태양열을 알몸에 가득 받으면서 나는 가슴을 활짝 열고 설레는 가슴으로 두려운 바다를 지켜본다.
작년에 이곳에서 옆 마을의 어른 한 분이 낚시를 하다가 물에 휩쓸렸다. 낚시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둑 아래부터 밀려들기 시작하는 바닷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사태를 알아차리고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돌아갈 길은 막히고 순식간에 엄청난 바닷물이 그를 덮쳐오는 기가 막힌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와 민자는 지금 일곱 살의 발가숭이이다. 구불구불하고 부드러운 능선이 즐비하게 드러누운 개펄 너머로 동진강의 하류가 드러나고, 그 끝에 신비로운 수평선이 마치 꿈속의 풍경처럼 바다를 누르고 있다. 그 위로는 구름이다. 바다는 하늘을 밀어 올리며 언젠가는 위로 솟구칠 자세이다. 금방이라도 수평선이 깨어지면서 그 거대한 상승을 보여줄 것만 같다.
나는 형들과 함께 아직 바닷물이 접근하지 않는 갯펄로 내려간다. 모두가 맨발이다. 이 갯펄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마치 안방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곱게 다져진 부드럽고도 단단한 갯펄은 맨발로 밟아도 황송하기 짝이 없다. 나는 갯펄에 드러누워 한 바퀴 뒹굴어 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갯펄 바닥을 어루만져본다.
동네 형들은 더 아래로 내려가 뻘게를 잡고 있다. 나와 민자는 작은 아이들과 함께 소쿠리에 가득 나문재를 뜯어 담는다. 그러나 이 작업은 너무 단조로워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섭게 밀려드는 바닷물 근처로 다가가 뻘게를 잡을 수는 없다. 만약 저 바닷물이 느닷없이 갯펄로 몰려오면 나는 절대로 이 갯펄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제방 위로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가끔 두려움을 억누르고 키 큰 형들처럼 갯펄의 치맛자락으로 내려가 게구멍에 길게 팔을 들이밀어 넣어보기도 한다. 처음엔 너무 겁이 나서 게가 숨어들어간 구멍만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나도 용감하게 팔뚝을 게구멍에 집어넣을 수가 있게 된다.
먼저 숨어있는 게의 등껍질을 잡아야지 조금만 늦으면 손가락이 물리고 나는 ‘아야, 아야.’ 비명을 질러대야 한다. 간혹 게에 물려 손가락이 잘릴 듯한 아픔을 견디며 팔을 거두면 그 끝에 끝까지 손가락을 놓지 않는 게가 끌려나온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나 죽는가벼, 살려줘.”
민자이다. 갯벌 속의 작은 웅덩이에 들어가 조개를 캐다가 뻘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웅덩이에 갇혀 물이 빠지지 못한 곳은 늘 위험하다. 그러나 조개는 젖은 땅에서만 쉽사리 캐낼 수가 있다. 젖은 뻘을 손으로 뒤집거나 두 발로 짓이기다 보면 시커먼 조개들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뻘 속에 발을 집어넣기가 쉬운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스스로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더 깊이 빠져들어가 나중에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가 보았자 손을 쓸 수도 없는 내가 먼저 달려간다. 웅덩이 속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애꿎은 근처의 뻘만 파올린다. 키 큰 형들은 아버지 같은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다가온다.
“너 혼자 나와 봐.”
민자는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본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나중에는 몸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져서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린다. 그제야 비로소 키 큰 형들은 웅덩이에 들어가 주변의 뻘들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한다. 워낙 찰진 개흙이라 손바닥으로 파올리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민자가 빨려들어 간 주변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적당히 주변의 젖은 뻘흙을 파낸 후에 누군가가 민자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힘 있게 끌어 올린다. 그 안간힘에 민자가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녀가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나는 무심코 민자의 몸뚱아리를 바라본다. 민자의 몸은 온통 시커먼 뻘 투성이었으나 분명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다. 치마와 팬티가 뻘에 붙들려 몸을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내 눈앞에서 민자의 사타구니가 스르르 올라선다. 나는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그녀가 울면서 돌아선 뒤에야 나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된다. 키 큰 형들은 겨우 치마만 끄집어내어 민자의 몸을 가려준다.
태양이 갑작스런 구름으로 가리고 따가운 햇빛이 그 위세를 거두어 세상에 그늘이 젖어들면 서서히 우리들의 반 알몸에도 한기가 스미게 되고, 우리는 그대로 머물 수가 없을 정도의 공포를 느낀다. 바다가 서서히 분노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일시에 제방으로 물러선다. 그리고는 뒤돌아 평화스러운 들녘을 향하여 게 꾸러미와 나문재를 가득 안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동네로 돌아온다. 우리는 정녕 노래 소리도 자랑스러운 행복한 전사들이다.

아직도 어른들은 들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은 다시 맑아지고 아무리 열심히 놀아도 해는 항상 중천의 그 근방이다. 도무지 저녁은 쉬이 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우리집으로 몰려가 안방의 앞뒷문 다 열어제낀 후에, 장독대를 돌아가는 시원한 바람을 불러들이며 드러눕는다. 나는 아버지의 나무로 만들어진 퇴침을 꺼내어 높이 베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한참 자다가 눈을 뜨면 황소만한 누렁이가 안방까지 올라와 볼을 핥는다. 이 누렁이는 제 엄마의 이름도 누렁이이고, 제 놈의 이름도 누렁이이다. 아마 놈의 할머니도 누렁이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느 사이 일어나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가고 민자만이 아직도 잠 속에 빠져 있다. 나는 민자의 얼굴에 누렁이의 코를 돌려놓는다. 그러면 민자는 잠결에도 싫은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저리 안 갈텨?”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 누렁이 때문에 민자는 결국 일어설 수밖에 없다. 나는 저 놈이 내 몸에 입을 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저 놈은 길가나 논두렁에 누어놓은 우리들의 배설물을 좋아하여 수시로 핥아대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협박을 하고 공갈을 쳐도 놈은 고치지를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누렁이를 똥개라고 부른다.
그 외에는 나는 그놈을 너무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녀석만큼 나를 반기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왔냐?’ 하면 그뿐이고,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그만 좀 쏘다니믄 안 되냐?’ 하는 반꾸중만 할 뿐인 것이다.
민자의 얼굴은 꽤 예쁜 편이다. 계집아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내애들처럼 시커멓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흠집 하나 없이 동글동글 말랑말랑 부드럽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나는 민자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민자의 양 볼에는 마치 먹물을 뿌린 듯한 주근깨가 깨알처럼 박혀 있다. 나는 종종 그 주근깨를 만지고 싶다.
민자는 또래로서는 키가 한참이나 크다. 그래서인지 벌써 나 알기를 마치 무슨 자기의 동생뻘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곤 할 때도 있다. 나는 그 애의 그런 행동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힘으로만 하더라도 나는 민자의 상대가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민자는 아직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 민자와의 힘겨루기에서 산처럼 끄떡없는 그 애의 힘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내가 그 애를 힘껏 잡아채어 게임에서 아웃시켜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에, 발이 땅바닥에 들어붙은 것처럼 끄떡 않던 그 애의 힘을 새롭게 느꼈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적어도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애에게서 그런 힘을 느끼진 않았었다. 나는 슬그머니 민자의 팔을 놓고야 말았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분명 더 어른스럽고 빨리 자라는 면이 있다.
민자의 별명은 꺼꾸리이다. 민자의 할머니는 민자라는 이름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어디서나 ‘꺼꾸리’이다. 나는 어느 날 어머니에게 왜 그 애의 할머니가 민자를 ‘꺼꾸리’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며 ‘민자 엄니가 민자를 날 때 꺼꿀로 나아서 그렇디야’ 하고 말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전파했다. ‘민자는 말여. 계네 엄니 뱃속에서 나올 때 머리부텀 나왔디야.’ 아기가 나올 때 어떻게 나오는 지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은 그저 신기한 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느 사이 우리들도 민자를 ‘꺼꾸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자는 화를 내지 않는다. 자신의 할머니가 애써 먼저 부르는 별명을 다른 아이들이 부른다고 탓할 수가 없어서이다.
그러나 그 애와는 달리 동네 함석집의 딸아이를 어른들이 ‘예삐’라고 부르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러워하는 눈치가 없지도 않다. 하지만 민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은 예삐처럼 결코 예쁘지가 않다는 것이다.
민자와 나는 매일 함께 굴러다니며 소꿉놀이를 한다. 민자는 집을 나올 때마다 언제나 주머니 안에 누룽지나 삶은 고구마를 준비한다. 어떤 때는 삶은 하지감자를 준비할 때도 있다. 그것은 대부분 나를 위한 것이다. 나는 민자가 준비하는 누룽지를 가장 좋아한다. 민자의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와는 다르다. 우리 어머니는 누룽지를 만들 때에 대충대충 달챙이로 솥바닥을 긁어 파올릴 뿐이다. 그러나 민자의 할머니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솥바닥에 다시 기름을 바르고 그것을 칼로 잘 잘라서 마치 과자처럼 파올리는 것이다. 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삶은 고구마도 나는 좋아한다. 우리 동네에는 하지감자는 지천으로 깔려 있지만 고구마는 나지 않는다. 그러니 민자네 친척 누군가가 해마다 실어다주는 고구마가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른들이 들로 나서면 민자는 부리나케 우리 집으로 온다. 처음엔 담장 밖에서 조심스럽게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는다. 민자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토방에 내려쬐는 햇볕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를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제안을 한다.
“까끄매기 헐텨?”
나는 내가 먼저 꺼내고 싶어 안달이던 말을 그녀가 먼저 해주어 고맙기 짝이 없다. 나는 민자의 마음이 달라지기 전에 얼른 대답한다.
“응, 그려.”
“오늘은 말여, 병원 놀이 허까.”
민자가 조금은 수줍게 말한다.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병원 놀이는 어찌케 허는디?”
나는 처음 듣는 놀이라 궁금하여 묻는다.
“니가 의사를 허고, 난 환잘 허는 거여. 그러고 이 담엔 나가 의사 허고, 너는 환자를 허믄 되는 겨.”
나는 의사에 대해선 알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좋지 머.”
나와 민자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주로 우리집 장독대를 지나 깨꿍나무가 여러 그루 늘어서 있는 토담 밑이다. 그곳은 항상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흙으로 빚은 온갖 살림도구들이 여기저기 구색을 갖추어 놓여 있다. 민자가 없을 때에 나는 홀로 그 자리를 지킨다. 마찬가지로 내가 집에 없을 때면 민자가 홀로 그곳을 지킨다. 어른들은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소꿉놀이 도구를 절대로 치우거나 손대지 않는다. 아버지도 가끔 중얼거리곤 하신다. ‘참 잘도 맹글었다. 이게 누구 솜씨데여?’
내가 없는 사이에 비가 오면 어머니는 장독대로 나가 항아리 뚜껑을 덮고 나서 으레 이 토담 밑으로 와 우리들의 소꿉놀이 도구를 지켜 준다. 나는 이 도구들을 까마득 잊어버리고 놀다가 돌아온다. 그리고 이것들이 무사하게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어머니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역시 어머니는 어떤 것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대단한 분이시다.
지금 대부분의 어른들은 들에 나가 있다. 토담 위에 올라가 동네 주변의 들녘을 한 번 휘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까이 혹은 멀리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마을 안만은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공동의 상태가 된다. 형이나 누나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무렵이면 다시 동네는 이보다는 조금 더 소란스러워질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고요의 무게에 눌려 사실은 제대로 옴짝달싹을 못하는 겨우 그 정도 뿐인 것이다.
민자와 내가 소꿉놀이를 시작하면 당연히 나는 아빠이고 민자는 엄마이다.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민자는 이상하리 만치 내게 편안하다. 그녀는 엄마의 역할이 그런 것 아니냐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아빠의 역할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어흠거리며 그녀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맛있게 먹으면 그 뿐이고, 가끔 아빠처럼 ‘그렁 게 아닌디.’ 호통을 쳐주면 그것으로 백 점짜리 아빠인 걸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워디가 아퍼 오신겨?”
의사인 내가 먼저 정중하게 묻는다.
“배가 지독허게 아프구만이라오.”
민자가 배가 아픈 시늉을 하며 대답한다. 민자의 손이 아랫배를 움켜쥔다.
“아, 그려요? 진찰을 혀 보아야겄는디 여기 쪼메 누우실랑가요?”
민자는 착한 환자가 되어 토담 아래 땅바닥에 조용히 드러눕는다. 깨꿍나무 그늘이 흔들거리면서 민자의 얼굴에 묘한 그림을 그려 놓는다. 나는 먼저 민자의 가슴에 나의 귀를 갖다 댄다. 민자의 도톰한 갈비뼈가 한쪽 뺨에 느껴진다. 더욱 바짝 귀를 들이대면 민자의 심장이 콩콩거리며 확실하게 뛰고 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이 ‘콩콩’ 소리가 ‘콩코콩’이거나 ‘코옹 코옹’으로 뛰어야 할 것만 같다. 아주 정상이다.
“잘 모르겄는디요?”
민자는 눈을 꼬옥 감은 채로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며 배를 움켜쥔다.
“배가 아픙게로 배를 봐야 혀요.”
그리고는 자신의 치마 끝을 살짝 만지작거린다. 무척 답답해하는 민자의 태도에 나는 조금 서두른다.
“아, 예.”
나는 재빨리 민자의 엉덩이쯤으로 물러앉는다. 이어 민자의 거친 삼베 치마폭을 들추고 나의 머리를 집어넣는다. 치마폭을 뚫고 들어온 희미한 햇빛이 신기하다. 가녀린 다리를 거슬러 올라간 나의 눈이 그 애의 무릎을 지나 약간 어둠에 가려진 사타구니의 팬티에 도달한다. 두 다리로 뻗어 내려간 허벅지가 마치 기름기를 바른 듯 윤이 난다. 나는 문득 묻는다.
“꺼꾸라, 너 때 좀 벗겨야겄어.”
허벅지 한 부분에 시커멓게 밀려있는 때를 발견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민자는 치마 저쪽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치마끈을 조금 가슴 위쪽으로 당겨준다. 땀냄새가 가득 배인 민자의 개성배로 된 포플린 팬티가 눈앞에 다가선다. 치마끈과 팬티의 고무줄 끈이 잔뜩 조여댄 자국이 꼬불꼬불 마치 뱀꼬리처럼 민자의 배꼽 부분을 두어 겹으로 장식하고 있다. 민자의 치마끈을 민자의 가슴께쯤으로 더욱 밀어 올린다.
나는 민자의 아랫배 여기저기를 쓰다듬다가, 그 애의 배꼽을 만져본다. 움푹하게 파여들어간 배꼽 속에 묻어있던 검은 때가 손가락 끝에 묻어난다. 나는 계속하여 한 번은 오른쪽 귀를 한 번은 왼쪽 귀를 교대로 다시 민자의 배 위에 대어 본다. 불규칙적인 ‘쪼르륵’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온다. 민자의 뱃속에 무언가 이상이 있는 것 같다.
“뱃속에서 먼 소리가 나능 거 가텨.”
“그려요?”
나는 순간 회충약을 먹고 배설물에 섞여나온 커다랗고 징그러운 회충을 생각한다. 말할까 말까 하다가 뱉어낸다.
“글씨요, 뱃속에서 회충이 기어댕기는 것도 같은디요.”
민자가 ‘쿠욱.’ 하고 웃는다. 나는 민자의 무감각한 배꼽을 다시 한 번 건드린다.
“거그가 아닌디요.”
민자는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나의 손은 엉거주춤하다가 민자의 허리와 배를 정말 의사처럼 여기저기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거그가 아니랑게요.”
민자는 다시 한 번 속삭인다. 더 이상은 그 애의 치마끈이 바짝 조르고 있다. 아래로 눈을 돌린 나는 주저하지 않고 두 손으로 민자의 팬티끈을 붙든다. 탄탄한 고무줄 끈이 조금은 아프게 손끝에 묻어온다. 민자는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준다.
햇볕에 그을린 민자의 두 허벅지가 미동도 없이 쭉 뻗어 있다. 나는 민자의 팬티를 서서히 벗겨 내린다. 그러다가 나의 머리는 잠시 치마 속으로부터 벗어나 벗겨진 팬티를 그 애의 가슴께에 올려놓고는 민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감은 얼굴이 조금 불그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자는 눈을 편안하게 감은 채로 두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올려놓고 있다. 어느 사이 그 애의 손에 들려진 팬티가 돌돌 말려 그 애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민자는 모든 것을 의사의 손에 맡긴 듯 담담하다. 나는 다시 민자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나는 왜 민자가 두 눈을 꼬옥 감고 말없이 내가 하는 대로 그냥 버려두고 있는지를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나는 민자는 왜 나하고 신체적으로 다른 것인지 그것만이 조금, 아주 조금 신기할 뿐이다.
나는 민자의 치마 속에서 진찰을 계속한다. 팬티가 벗겨진 그 애의 치마 속에는 그 애의 가장 부끄러운 것이 조용하고 순결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거기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본다.
“여기여?”
내 손이 닿아있는 그곳이 잠시 움찔거린다. 그 뿐 민자는 다시 대답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더 이상의 속삭임도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눈이 빠져라 쳐다본다. 그리고는 그곳을 여러 차례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인잔 낫을 거구만. 인잔 안 아플 것이구만. 내 손은 약손이랑게.”
나는 문득 그곳에 뽀뽀를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뽀뽀해도 돼아?”
민자가 다급하게 대답한다.
“아녀, 의사는 뽀뽀하는 게 아녀.”
“알았어.”
나는 곧 머리를 빼기는 싫어서 괜스레 묻는다.
“일로 오줌 싸는 겨?”
나는 손가락으로 그 애의 부끄러운 곳을 살며시 파고들면서 묻는다.
“그려.”
민자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내가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다리에서 힘을 빼어 준다. 이제 내가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그 애의 다리는 알아서 움직일 것만 같다. 나는 그러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나의 한쪽 귀를 민자의 그곳에 바짝 대어 본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다른 쪽 귀를 돌려 대어 본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디서부턴지는 알 수가 없지만 한낮의 고요를 뜷고 신기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집중력을 흐트려도 그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 그 소리는 세상의 고요가 내지르는 지극한 순수의 소리이다. 나는 그 고요가 내지르는 함성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간다. 나는 민자의 가장 부끄러운 곳에 얼굴을 묻고 잠시 잠이 든다.
민자의 뒤척거림으로 눈을 뜬 나의 눈에 아직도 그 애의 치마가 덮여 있다.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맡게 되는 비릿한 냄새로 인해 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몇 번 깜박인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 미끈한 그 애의 사타구니는 다시 보아도 그 애의 갸름한 얼굴보다, 그 애의 아직은 밋밋한 가슴보다, 그 애의 때가 절은 배꼽보다 분명 더 신기하다.
진찰을 끝내고 나는 나의 머리를 그녀의 치마 속으로부터 거두어들인다. 민자 역시 잠이 들었던 듯 부시시한 얼굴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나 곁에 떨어진 팬티를 주어 입는다. 나는 그 애의 치마를 발 밑으로 내려 준다. 민자는 잠시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토닥이더니 약간 멋쩍은 듯 피식하고 웃는다.
“인자 다 나은 거 같여.”
나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민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려?”
“그런디……. 암한티도 말하믄 안 되야.”
“머땀시?”
“기양…… 챙피허잖어.”
“그려.”
민자는 내 대답을 들은 후에야 마음이 놓이는 듯 살짝 허리를 굽혀 나의 이마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댄다. 어디선가 바람이 슬렁 하고 불어와 그 애의 치마를 다시 뒤집어 놓는다. 그 애의 포플린 팬티가 다시 나의 눈에 들어왔다가 금새 사라진다. 내가 말한다.
“인자는 니가 의사를 혀야지.”
“오늘은 그만 혀.”
“왜?”
“누가 본단 말여.”
이튿날에도 나는 민자와 소꿉놀이를 한다. 그러나 다시 민자의 치마 속에 머리를 집어넣을 수는 없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민자에게 조르지만, 그러나 민자는 ‘쿠욱’ 하고 한 번 웃기만 할 뿐 내게 언제나처럼 아빠의 역할을 주고 만다. ‘니 머 알고나 있는 거여?’ 하는 눈빛으로 그 애는 나를 부끄럽게 바라본다. 그러면 내 얼굴이 그 애의 얼굴보다 더 붉어진다. 나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그만 혀.”
나는 민자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뒤곁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빠가 되는 놀이는 이제 시시하다.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살강 위에 놓여진 부엌칼을 집어들고는 텃밭으로 나간다. 텃밭에는 아직 덜 자란 단수수가 간혹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나는 그 중의 가장 나아 보이는 것을 골라잡는다.
“이게 맛있겄지?”
민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단수수의 밑동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나머지 손에 들려진 부엌칼을 단수수 밑동으로 내리친다. 한 번 두 번 여간해서 잘 잘라지지 않는다.
“조심혀, 손 다쳐.”
민자가 겁을 먹으며 소리친다. 몇 번을 거듭 내리친 뒤에야 단수수대가 옆으로 넘어진다. 나와 민자는 넘어진 단수수대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아직 밑동이 다 잘린 것은 아니므로 힘이 좀 필요하다. 힘겹게 잘라낸 단수수대를 들고 나와 민자는 다시 깨꿍나무 밑으로 간다. 우선 단수수의 기다란 잎파리를 모두 떼어내고, 그리고나서 부엌칼로 단수수대의 마디마다에 험집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이 끝나면 단수수대를 모로 들고는 무릎 위에 세차게 내리친다. 단수수대는 토독 소리와 함께 시원스럽게 잘려져 토막이 된다.
단수수 마디가 부러질 때마다 민자는 그것을 넘겨받아 치마폭에 담는다. 다 부러뜨린 후에 나는 그 단수수를 민자로부터 하나씩 넘겨받아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자칫 방심하면 이 예리한 단수수 껍질에 손가락을 다쳐 피를 보기가 쉽다. 나는 껍질이 벗겨진 단수수를 민자에게 먼저 내민다. 그 애는 빙긋이 웃으며 단수수를 받아들고는 입 속에 넣고 씹기 시작한다. 나도 한 입 가득 물어 본다. 단물이 시원하게 입 안을 녹이다가 목줄기를 타고 뱃속으로 내려간다. 뱉어낸 단수수 찌꺼기에 벌써 개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엄니!”
갑자기 민자가 비명을 지른다. 놀란 나는 민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곧 민자가 들고 있는 그 애가 마악 씹어서 이미 삼켜버린 단수수의 나머지 쪽에 벌레 한 마리가 잘려진 채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민자가 배를 움켜쥐고 욱욱거린다. 나도 마찬가지로 욱욱거린다. 그러나 목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색이 된 민자가 벌러덩 땅바닥에 드러눕는다.
“나 인자 죽는가벼.”
나는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민자는 죽을 지도 모른다. 그 애는 징그러운 벌레의 반 쪽을 이미 씹어서 목 안으로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긴장한 나는 민자의 죽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자세로 잠자듯 누워 있다. 민자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왠일인지 나는 별로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민자의 옆에 속수무책으로 그냥 앉아 있다.
그러다가 나도 민자의 옆에 드러눕는다. 나도 죽고 싶다. 아니 나도 당연히 죽어야 한다. 민자는 내가 잘라 준 단수수를 먹다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조만간 민자가 죽을 때에 나도 따라서 죽어야 한다. 나는 민자가 먹다 버린 단수수대를 집어 눈을 딱 감고 입 속에 집어넣는다. 한 입 베어 물고 두어 번 씹은 나는 심한 구토를 느끼며 재빨리 뱉어낸다. 그리고는 그대로 민자의 옆에 드러눕는다. 나는 민자와 함께 죽어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민자는 이미 일어나서 나머지의 단수수를 맛있게 씹고 있었다. 그 애는 눈을 뜨는 나를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한다.
“나 안 죽었쟎어.”
벌레를 먹었는데도 죽지 않다니.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해진다. 곧 그것은 기쁨으로 변한다. 그 기쁨으로 인한 희열은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는 갑자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 다시는 죽지 않는 불사조가 된 것이다.

얼마 뒤 민자네는 이사를 간다. 민자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민자의 아버지는 읍내의 장터에 가서 웬일이었는지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잔뜩 마셨다. 그리고는 밤늦게 돌아오다가 논두렁에서 굴러 도랑으로 빠지게 되었고, 그리 깊지 않은 도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새벽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상여가 마을을 떠나는 날 아버지는 민자네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와 민자 아버지가 앞뒷집에 사시면서 꽤나 정이 들어 그러는 줄로만 알 뿐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만 살아 있었어도 저 집안이 이렇게꺼정 되진 않았을 턴디…….”
어머니도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내쉬며 대꾸한다.
“그러게나 말여요.”
나는 궁금하여 묻는다.
“아빠, 그 친구가 누군디요?”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민자헌티는 내 또래의 삼춘이 있었지. 나와는 둘도 없이 가까웠던 불알친구였단다. 그런디 말이다. 인공 때 죽어뿌렸단 말이다. 나는 살어 왔는디…….”
나는 괜시리 묻는다.
“아빠도 총 들고 공산군허고 싸웠단 말여요?”
아버지는 민자네 아버지의 죽음을 잊고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그럼, 중공군허고도 싸웠지 않니? 난 그 전쟁에서 부상을 당헌 거여. 그려서 살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오른쪽 다리를 아직도 절름거린다.
민자네는 읍내에 빵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장날이면 읍내에 다녀오는 어머니는 민자네 빵가게에 들러 단팥이 가득 들어있는 찐빵을 한 봉지씩 사들고 온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손에 맛있는 호떡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 호떡을 너무도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부터 나의 입맛은 찐빵으로 바꾸어진다. 웬일인지 호떡맛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으나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빙그레 웃기만 한다.
“민잔 거그서 핵교를 다닌디야. 장사도 잘 된다던디…….”
나는 다 식어버린 찐빵을 입 속에 집어넣는다. 민자의 냄새가 난다.
“엄니.”
“왜 그려?”
“뜨거운 빵보다 식은 빵이 더 맛있는 거 같여.”
내 머릿속에는 민자의 화안한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민자가 보고 싶니?”
내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아녀요.”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애의 치마 속에 내 머리를 집어넣고 싶다. 그러나 이제 민자를 만나지 못한다. 그녀의 얼굴도 차츰 머릿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조만간에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훗날 누구의 치마 속에 내 머리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내 눈 앞에는 언제나 그 애의 부드러운 사타구니 속의 신비한 세계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꿈을 꾸듯 동진강 하구로 나간다. 언제나처럼 개성베로 만든 팬티 하나만을 걸치고, 학교 갈 때에 들고 가는 신발주머니 하나 들고, 홀몸으로 동네를 빠져나가 십리 길 논두렁길을 지나 개펄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높다란 제방에 앉아 물이 빠져나가는 요란한 소리를 듣는다. 거센 바람과 함께 들락거리는 물새들을 지켜본다. 개펄을 쓸고 다니는 거대한 게 떼들을 바라본다. 저 갯펄의 게구멍 어딘가에 그 애의 잃어버린 팬티가 아직 숨겨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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