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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기억(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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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077회 작성일 02-06-15 14:43

본문


하얀 기억


나는 할머니를 아슴하게 기억한다. 그 아슴한 기억 속을 더듬어 보면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났다. 왜냐하면 내게 그 이전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육체적인 생명을 주었지만 그것은 정신의 탄생은 아직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야 비로소 내 인간적인 정신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이 세상에서 맨 먼저 햇빛을 보았다. 그 햇빛은 신비하게도 태초의 빛처럼 내게 한꺼번에 쏟아져 왔다. 아니, 그것은 분명 태초의 빛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를 향해 쏟아진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열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무지무지하게 하얗던 햇빛은 내게 인간적 의식의 작동을 최초로 명령했다. 그렇다. 나는 그 햇빛을 느끼는 순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햇빛이야말로 바로 나를 창조한 신인 것이다.
어머니의 신은 그의 놀라운 손으로 어머니의 피와 살을 주물럭거려서 아름다운 내 육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신은 주문과 같은 짧은 기도를 통하여 내게 하얗고 강렬한 최초의 빛을 투사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 빛은 분명 일시에 만물을 창조해준 내 의식의 불멸하는 에너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분명히 태양의 아들이다. 빛은 나의 아버지요, 내 아버지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아버지인 것이다. 이렇게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내 의식의 아버지를 최초로 만났다.
나는 다음 순간 거의 동시에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할머니의 체온은 마치 내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을 때 그랬으리라고 믿어질 만큼 편안했다. 할머니의 체온은 내게 햇빛 다음의 가장 소중한 발견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체온보다도 먼저 할머니의 체온을 느꼈다. 나의 본능은 비록 어머니의 체온에 더욱 친밀하게 반응했을 것이지만, 내 기억 속에서 하늘이 되고, 우주가 되어, 그 기억을 통째로 감싸고 있는 것은 분명 할머니의 체온이었다.
나는 이 하얀 햇빛과 할머니의 따스한 체온을 통하여 내 어린 시절의 황홀한 기억을 가슴에 담아 넣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것은 모두가 황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기쁨이요, 감동이다. 내겐 이후 더 이상의 어떤 기억도 그보다는 덜 황홀했고 덜 감동적이었으므로 나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주장할 수가 있다. 또한 즐거웠던 기억보다 아프고 쓰린 기억은 더 아름답고 더 황홀하다. 그래서 그런 기억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어쩐지 슬프고 하얗다. 아니면 하얗고 슬프다. 아니면 하얗고 하얗다. 아니면 슬프고 슬프다.
나는 지금 할머니의 등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는 다시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까마득 잊혀진 그 하얀 기억들을 만나고자 한다. 나는 지금 나를 결코 기억하지도 못 하면서, 그러나 늘상 친구처럼 스쳐 가는 저 밥맛없는 바람의 꼬리를 따라가서, 그 끝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할머니의 등에서 마음껏 졸고 싶다. 이제 할머니의 따스한 체온은 내게 가장 알맞은 량의 최면제와도 같다. 나는 마음을 열고 할머니에게 나를 맡긴다. 할머니는 과거 나의 정신에 최초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이제 병들고 찌들어버린 나를 어쩌면 다시 소생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른이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아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따스한 체온을 찾는다. 그러기에 인간은 죽는 날까지 아이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른이기 때문에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 한 가지 뿐이다. 나는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 외에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안다고 믿는 것은 다만 허황된 자만심일 뿐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만심으로 안간힘을 쓰다가 허무하게 죽어갈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나는 지쳐 있다. 내가 지쳐있는 것은 고단한 삶 때문이 아니라 무의미한 기다림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것이 혹 죽음이던가.
나를 업은 할머니는 간간이 울먹이며 잘 다듬어진 토방 위를 서성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훌쩍이는 콧소리를 먼 곳에서 들리는 자장가로 삼아 잠을 청한다. 내 감겨지는 눈 속으로 마당 앞 뜰 토담에 붙어 서 있는 대추나무와 개복숭아나무가 차례로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대추나무에는 간혹 새들이 앉아 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빛의 세계에서 날아왔다가, 다시 빛의 세계로 날아간다. 나의 눈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나에게 빛의 나라는 미지의 세계이며, 미지라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완벽한 무의 세계이다. 나에게는 아직 꿈이 자라지 못했고, 상상의 세계도 그 씨앗을 뿌리지 못했다.
대추나무에는 아직 덜 여문 파란 대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할머니는 나무 밑으로 다가가 떨어진 대추열매를 주워가지고는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는다. 그리고는 그 대추를 입 속에 넣어 잠깐 동안 오물거리며 씨앗을 발라낸 다음 등 뒤의 나를 허리춤으로 끌어당겨 입 속에 넣어준다. 나는 그것을 입 속에 받아 넣고 몇 번 굴려본다. 혀끝에 달콤한 맛이 느껴져야 비로소 삼킨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여지없이 할머니의 등에 뱉어내 버린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그녀의 입 속에서 씨앗만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단맛까지도 충분히 알아본 다음에 내 입 속에 넣어주게 된다. 나는 곧 할머니를 신뢰하게 된다. 할머니의 입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대추는 절대로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옆에는 대추나무보다는 좀 작지만 그래도 무성한 가지를 늘이고 있는 개복숭아나무가 서 있다. 거기에도 어김없이 복숭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다. 가끔 할머니는 그 개복숭아를 따다가 대추열매와 마찬가지로 손바닥으로 쓱싹거리고는 늘어진 포대기끈으로 한 번 더 문지른 후에 입에 넣어 부수곤 한다. 나는 그 개복숭아를 할머니가 부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개복숭아는 너무도 단단하게 보여서 이가 불안한 할머니가 입으로 베어 먹을 때에는 할머니의 턱쯤에서 온갖 묘한 소리들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개복숭아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열매일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고, 할머니는 매번 그것을 이빨로 부수어 먹는다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다 할머니는 토담 너머 고샅길에서 긴 대나무가 개복숭아나무 가지 사이로 흔들리며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 대나무는 불안한 자세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마침내 대나무는 조심스럽게 개복숭아를 건드리고, 개복숭아는 하나씩 둘씩 고샅길로 떨어진다. 할머니는 토담 위로 머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금방 동네의 어린 개구장이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업은 채로 토방에 서서 소리 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고만 있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귀를 대고 할머니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에구, 저런! 그건 먹을 수도 없는 것여. 쪼메 더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 혀.’
할머니는 가끔 침을 꿀꺽 삼키곤 한다. 그러면 나도 따라서 침을 꿀꺽 삼킨다. 할머니의 숨소리가 고요해졌으므로 나는 이 순간만은 울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춤추는 대나무가 빛의 나라에서 나를 찾아온 전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너머에 누군가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눈을 한 번 깜빡 하는 사이에 신기하게도 그 대나무는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는 곧 어디선가 삐그덩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개복숭아나무의 중간쯤에 걸려있는 토담의 용마루를 따라 조금씩 나의 눈을 돌려본다. 내 눈이 멈추는 거기에 함석으로 얼기설기 붙여 때운 대문이 삐끔하게 열려 있다. 소리는 바로 거기에서 나고 있다. 그 대문이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움직이며 삐그덩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삐그덩 소리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리면 어김없이 대문짝은 살짝 흔들거리고 이어서 곧 삐그덩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문득 바람이 사라지고 삐그덩 소리도 사라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나는 숨이 막혀 곧 울음을 터뜨린다. 할머니의 가슴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더욱 큰 소리로 울어 버린다. 할머니의 심장 뛰는 소리는 내가 가장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소리이다. 그 나머지는 가끔씩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듣는 것이므로 별 의미가 없다.
나는 다시 대문을 바라본다. 나는 그 대문을 내 손으로는 절대로 열지를 못한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그 대문의 아랫부분을 꽉 잡고는 살짝 들어 올려야 비로소 그 함석대문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런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런 힘이 있을 만한 나이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지금 아무리 가벼운 솜털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벌써 나는 여러 번이나 숨이 끊어져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나는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죽은 목숨이라 버려졌다. 내가 버려진 삼월의 밤기운은 아직도 썰렁했다. 숨이 멎었다고 판단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포대기에 둘둘 말아 툇마루에 내밀어 놓았다. 그 날, 이십 리길 읍내에 나가 약을 구해온 할머니는 기겁을 하며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미 숨이 멎어버린 나를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아이처럼 등에 들쳐 업었다. 그리고 숨이 멎은 나를 다독거리며 신령님께 빌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등에 업히자마자 나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녹이 슨 지 오래인 대문짝은 구멍이 여기저기 나 있으며, 심하게 우그러져 처참한 몰골이었고, 또 붉은 핏빛으로 덕지덕지 낀 녹덩어리가 항상 불안스럽게 달라붙어 있다. 열려진 그 대문의 바깥 쪽 면에는 하얀 페인트로 이렇게 쓰여 있다. ‘개조심!’ 그러나 나는 그 글자를 읽을 수는 없다. 나는 아마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글자를 읽게 될 것이다. 그 하얀 글자는 녹슨 대문과 마찬가지로 이미 절반쯤은 지워져 있는 상태이다.
‘개조심’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남의 집에 들어설 때에는 반드시 개를 살피기 마련이다. 또한 ‘개조심’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하더라도 종종 들어서다가, 혹은 고샅길을 지나가다가 애매하게도 개에게 물리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미 쓰나마나한 글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대문짝에 부지런히 ‘개조심’이라는 글자를 써댄다. 우리 집에는 개가 있다. 아니, 우리 집에도 개는 있다. 우리 집도 무서운 집이다. 우리도 무서운 것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 나는 더 자라면서 실제로 그렇게 느끼게 된다.
가끔 열려진 대문 바깥으로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럴 때면 대문 옆에서 졸고 있던 우리집 개 누렁이는 어김없이 일어나 짖어댄다. 내가 고샅길을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의 발자욱 소리를 느끼기도 전에, 이미 누렁이는 그 필사적인 짖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나 요란하게 짖어대느냐가 그의 충성도에 대한 점수가 될 것이다. 누렁이는 그 사실을 영리하게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누렁이가 짖어대는 소리가 처음에는 시끄럽기도 했지만, 차차 이력이 나서인지 개의치를 않게 된다. 할머니가 그렇게 된지는 아마도 수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제 누렁이가 짖어대는 소리는 내 졸린 눈조차도 정상으로 돌려놓지를 못한다. 그런데 참, 우리집 누렁이는 다른 집의 개와는 다르다. 전혀 무섭지 않은 것이다.
가끔은 지나던 거지가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는 짖어대는 누렁이를 두려운 눈으로 경계하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느 집에나 개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개를 두려워하게 되면 그는 머지않아 굶어죽게 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는 마당으로 들어서서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짐짓 더욱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는 짖어대는 누렁이에게 사정없는 발길질을 가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의 불쌍한 모습이 안쓰러워 말없이 대청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깨어지고 금이 가 누더기처럼 기운 바가지에 보리쌀 두어 줌을 퍼와 그의 등에 매달린 자루 속에 부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많이 도셨구먼.’ 그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문 밖으로 사라진다.
가끔은 탁발승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대문간에 들어서자마자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시작한다. 그 소리는 청아하기는 했지만 곧 주변의 모든 것을 깨워버리고 만다. 그래서 탁발승이 동네에 들어서면 그가 떠날 때까지는 온 동네가 소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동네 아이들은 떼를 지어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아이들은 근본을 모르는 거지는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탁발승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부처님의 나라에서 중생들을 살리기 위해 찾아온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이다.
아이들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탐색한다. 아이들의 고민은 그가 진짜 절에서 탁발을 나온 스님이냐, 아니면 스님의 모습으로 변복한 거지 곧 땡중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가 두드리는 목탁소리를 열심히 관찰한다. 그가 외워대는 염불의 내용을 열심히 되새겨 듣는다. 염불의 내용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이건만 그래도 대충 듣다보면 아이들은 용케도 땡중을 가려낸다. 만약 땡중임이 드러나면 그는 곧 마을을 떠나야 한다. 아이들은 끝까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땡중, 땡중.’을 외쳐대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대단한 스님이 동네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가 대단한 이유는 이런 것이다. 그는 동네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언가 색다른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탁발보다는 그 이상한 기운이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지를 찾게 되는 것이고, 그 집에 오랜 시간을 머무르면서 고맙게도 그 이상한 기운을 몰아내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동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묻게 되고, 그는 저녁에 가득 채워진 쌀자루를 들고 동네를 떠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그 기운을 우리집에서 찾게 된다. 그는 그 기운을 느끼자마자 우리집 대문간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시작한다. 나를 등에 업은 할머니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스님은 할머니를 향하여 연신 혀를 찬다. ‘어허, 일 나 뻔졌네, 일 나 뻔졌어. 나무관세음보살.’ 할머니가 놀라서 묻는다. ‘스님, 머땀시 그러는가라오? 우리 집에 먼 액운이라도 있능가라오?’ 스님이 말한다. ‘그렇구만이라오. 이 집에 액운이 가득하구만이라오.’ 질겁을 한 할머니는 스님을 안으로 모셔들인다. 스님은 마루에 앉아서도 말을 계속한다. ‘식구들 중 누가 아프지 않으신가라오? 액운이 너무 강하기 땜시 쉽게 일어나지는 못하겠구만이라오.’ 할머니가 더욱 기겁하여 묻는다. 바로 내가 앓고 있는 중인 것이다. ‘먼 말씀이신가라오? 우리 손주가 아프기는 헌디요.’ 눈동자도 굴리지 않으며 스님이 말한다. ‘저번 참에 돌아가신 분이 있구만요.’ ‘예, 즈이 바깥 양반이 돌아가셨구만이라오.’ ‘그 분이 저승으로 가시질 못허고 이 집 주변을 떠돌고 있구만이라오.’ 할머니는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다. ‘참말로 헐 일 없는 냥반이네.’ 스님은 안주머니에서 부적을 몇 장 꺼내어 할머니에게 내민다. ‘이걸 써 보시지요.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구만요.’ 할머니는 고개를 굽신거리며 부적을 받아든다. 곧바로 대청으로 들어가 바가지에 몇 되쯤은 실히 될 성싶은 쌀을 퍼온다. 감사의 표시이다. 스님은 합장을 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읊는다. 그가 마을을 떠나고 나면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고마우신 부처님이 당신의 손주를 지켜주신 것이다. 할머니의 숨소리는 당분간 건강할 것이다. 나는 편안해진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똑같이 마음을 놓는다. 나는 이제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누렁이의 옆에는 가능한 한 가지 않는다. 누렁이는 몸집이 나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마당에 내려서기만 하면, 그놈은 이 때가 기회란 듯이 뛰어와서는, 나의 얼굴이고 팔이고 할 것 없이 사정없이 그 긴 혀로 핥아대기 시작한다. 내가 싫다고 해도 그놈은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놈의 머리를 밀쳐내 보지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놈을 이겨낼 수가 없다. 나는 뒤로 넘어지기도 하고, 앞으로 엎어지기도 하면서, 숨을 깔딱거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놈은 잠시 여유를 주고 머리를 뺏다가도 금방 다시 그 징그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달려든다. 어쩌면 내가 그 놈에게는 귀엽고 앙증맞은 장난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누렁이는 간혹 나로부터 떨어져 마당을 한 바퀴 휘돌다 와서는 다시 격렬하게 나를 향하여 덤벼들곤 한다. 때로는 마루로 껑충 뛰어올랐다가 다시 뛰어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정신없이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기도 한다. 제 딴에는 아마도 신나는 묘기를 자랑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나에게 말도 안 되는 귀염을 떠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놈에게 나는 전혀 두렵지 않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급기야 나는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놈은 발가벗은 내게 다가와 사타구니에 매달린 고추를 핥아댈 때도 있다. 나는 손 쓸 방법이 없어 그냥 바닥에 주저앉거나 그대로 서서 그 희롱을 다 받아내야 한다. 어쩌다 할머니가 이 모양을 발견하면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가와 누렁이를 두드려 패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손에는 어느 사이 쓰다만 싸리 빗자루가 들려있다. 그러면 누렁이는 꽁지를 제 사타구니 사이로 잽싸게 집어넣고는 앞발을 구부리고 앉아 끙끙거린다. 그놈은 절대로 도망가지 않는다. 만약 매를 피하여 도망가게 되면 분명 며칠 동안을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놈은 항복할 때에는 언제나 완벽한 항복으로 할머니를 감동시키곤 한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할머니의 등에 엎드려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도 빛나고 따스한 세상이다. 누군가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누렁이의 인사를 받자마자 앵두나무를 만나게 된다. 철이 되면 앵두가 마치 하늘나라의 신비로운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홍빛 얼굴로 주렁주렁 매달린다. 앵두나무에 이 빠알간 앵두가 매달리면 나는 웬일인지 쿵쾅거리며 가슴이 뛴다.
개복숭아처럼 단단하지도 않고, 대추처럼 푸르뎅뎅하지도 않으면서 화려하게 매달려 있는 작은 열매, 나는 그 앵두알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끼게 된다. 내 속에 그 빠알간 앵두알이 마치 어머니의 뜨거운 젖꼭지처럼 들어와 신비한 모습으로 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짙은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내게 잠들지 않는 무한한 생명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끝내는 내가 툇마루에 버려진 포대기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된 행운이요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내 속에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 들어와 있는 그 붉은 앵두알을 나는 지금 할머니의 등에 업혀 가슴을 활짝 열고 다시 바라보고 있다.
대추나무와 개복숭아 나무 사이를 뚫고 멀리 바라보면, 그 너머에는 푸른 가을 하늘이 마치 비단폭처럼 세상을 감싸고 있다. 내가 이 하늘을 발견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에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여러 모양의 가볍고 힘찬 구름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 처져 있다. 지평선에 닿아있는 하늘 끝으로부터 중심을 향하여 날렵하게 솟아오르는 구름은 마치 꿈나라처럼 아름답다.
그 구름의 힘은 그 어떤 힘보다도 더 강렬하여 보인다. 나는 그 하늘 구름 사이에서 논일을 나간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푸른 하늘 가득 어머니의 얼굴이 활짝 웃으며 걸려 있다. 그러다가는 불시에 사라진다. 문득 울고 싶다 ‘엄니!’ 급기야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목이 매인다.
토방 위를 몇 시간이나 서성이던 할머니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할머니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는다. ‘쬐끔만 더 있으믄 엄니 올 거구만, 울지 말고 기다리장게. 우리 이쁜 새끼야.’ 나는 극도로 허약하여 언제 혼절할지 모르는 참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나는 이로 인해 할머니의 야윈 가슴을 벌써 여러 번이나 강타했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나의 변화에 반드시 반응하는 할머니를 느낀다. 그것은 곧 나의 기쁨이다. 나는 할머니를 신뢰한다.
놀란 할머니는 방향을 바꾸어서 나의 시선이 마루 쪽을 향하도록 몸을 돌린다. 갑자기 하늘이 사라지고 마루 위 처마 끝에 금방 돌아와 앉은 제비가 보인다. 이제 다 자란 새끼제비들은 친구들을 데불고 아마도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주둥이를 움직이기도 하고 몸을 떨기도 하면서 제비는 마당 위를 오락가락한다. 내 눈이 조금은 정말 조금은 제비를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 눈으로는 제비의 날렵한 몸놀림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들어오는 제비의 몸놀림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봐라. 저 제비는 지 엄니가 집에 읍서도 안 울잖어. 제비가 너헌티 인사하는구만. 자, 너도 아는 체 좀 혀 봐.’ 그러면 나는 문득 어머니의 생각을 잊는다. 나는 제비가 내게 보내는 인사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말로 제비들은 나를 향하여 지지배배 아는 체를 하고는 처마를 벗어나 먼 하늘로 사라진다.
할머니는 나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최면사이고 마술사이다. 할머니는 손쉽게 나를 울게도 하였다가, 웃게도 하였다가, 화나게도 하였다가 한다. 할머니의 마술이 끝나면 나는 그 주술에서 풀려나 가끔 할머니가 더 미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전보다도 더 큰 소리로 엉엉 울어버리곤 한다.
문득 돌아와 둥지에 거꾸로 앉아 있던 제비 한 마리가 똥을 눈다. 제비똥은 그대로 마루의 가장자리에 떨어져 사방으로 튀겨버린다. 그것을 발견하고 나는 또 잠시 울음을 멈춘다. 세상은 그 순간 정지한다. 제비의 물 같은 똥이 마루에 떨어져 튀기는 순간, 나는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 오싹 하며 할머니의 등에 더욱 찰싹 달라붙는다. ‘이런! 지미럴.’ 할머니는 그 특유의 욕설을 쉽게 내뱉는다. 그것은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못마땅한 기분을 드러내는 할머니의 일상적인 버릇이다.
할머니는 죄 없는 제비를 드러내놓고 원망하지는 않는다. 할머니의 이 습관적인 욕지거리가 쏟아지면, 토방 위의 양지쪽에 드러누워 있던 누렁이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제가 무어 잘못한 것이 있지는 아니한가 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할머니의 얼굴에서 이상한 기운이 발견되지 않으면 다시 고개를 발끝에 묻고 잠을 청한다. 드디어 시끄러운 거위가 등장할 때이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고 세상은 자주 정지하며 나를 졸리게 한다.
사실 나의 진짜 공포의 대상은 바로 이 거위다. 누렁이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약간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놈은 나를 결코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놈은 내가 손짓 발짓을 열심히 하노라면 어느 정도 여유를 주기도 하면서 치근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거위란 놈은 예삿놈이 아니다. 혹 내가 마당에 내려서기라도 하면 그 놈은 금방 달려와 그 날카롭고 우람한 부리로 내 몸의 이곳저곳을 쪼아댄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피를 흘리며 혼절 직전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예 거위를 감금시켜 버렸다. 거위의 집은 텃밭 쪽의 헛간채 옆에 있었는데, 그곳으로는 부엌물이나 허드렛물이 빠져나가는 집안의 하수용 도랑이 지나가고 있었다. 뒤쪽으로는 남새밭이 있고 그 뒤에는 토담이 세워져 있으므로 앞쪽만 막아놓으면 일단 마당으로 거위가 나서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새끼줄과 몇 개의 판자조각으로 막힌 곳에서 하루 종일 거위는 허드렛물에 목욕을 하며 살고 있다. 그 물은 다시 토담 너머의 왕골밭으로 흘러가게 된다.
나는 그 놈을 가장 무서워한다. 나는 나의 이 가장 강력한 적을 어쩔 수가 없다. 그 놈의 부리와 꽥꽥거리는 듣기 싫은 고함소리를 도무지 이겨낼 수도 견뎌낼 수도 없다. 덩치가 큰 누렁이조차도 가급적 그놈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그놈을 내가 이겨낸다는 것은 차후로도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다. 내가 언제 이 거위보다 더 무서운 적을 만날 수 있으랴.
나에게는 거대한 적이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닌 백부님이다. 백부님도 분명 나의 어김없는 적이다. 사람들은 동네의 누구보다 우락부락한 백부님을 ‘고집불통 호랑이’라고 부른다. 그 말 자체보다도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곧장 백부님을 나의 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백부님에게서 자상한 인정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먼저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대하는 백부님의 태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백부님은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다. 나는 백부님이 두려운 존재이긴 하지만, 백부님의 수염 때문에 가끔 접근을 용납하곤 한다. 나는 백부님의 수염을 만지는 것은 싫지가 않다. 그때만은 백부님이 전혀 무섭지가 않다. 부드러운 백부님의 수염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 외에 그 수염을 도대체 어디에 쓴다는 말인가. 아무리 지켜보아도 특별하게 쓰이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백부님은 냉철하기 짝이 없는 정신과 언제나 근엄한 얼굴, 거기에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과묵함으로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어려워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말이 적으믄 실수도 적은 법여.’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만 갖는다믄 어딜 가도 실수를 안 하는 법이구만.’ 내가 실제로 이런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그런 나이에서부터 내가 다 자랄 때까지 백부님의 이 말씀은 내 뼈 속 깊이 새겨지게 된다. 이것이 과연 내게 어느 정도 피가 되고 살이 될지 나는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할머니는 나를 업은 채로 잘 다듬어진 토방 위를 서성이고 있고, 그 위로 황금빛 같은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토방은 너비가 일 미터 쯤 될까, 아니면 조금은 넘을까, 길이는 마루의 동편 끝에서부터 서편 끝을 거쳐 부엌문을 지나고 집 모퉁이까지 칠팔여 미터에 이르는데, 거의 황토로만 골고루 잘 다듬어져 있다.
토방의 가운데쯤 마루 밑에는 네모진 자연석이 반듯이 누워 있다. 아마도 마루에 오르기 위한 발돋음용일 것이다. 그리고 토방의 끝머리 부분에는 지붕까지 높다랗게 솟은 굴뚝이 서 있는데, 거무스레한 연기의 그을음이 빗물에 뒤엉키고 그것이 말라붙어 손을 대기도 차마 어려울 정도의 지저분한 모습으로 서 있다. 허지만 이 굴뚝이야말로 이 집의 상징일 것이다. 깨어진 굴뚝 사이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그것이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알고 보면 모조리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할머니의 등에 업혀 건성건성 조는 중이다. 적당히 뚱뚱하면서 작달막한 키의 전형적인 시골 노파인 내 할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햇빛이 따사로운 토방 위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나로 인하여 떨리는 가슴을 가만히 달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할머니의 등이 거대한 늙은 거북의 등처럼 편안하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건강하며 편안한, 그리고 안전한 등이 바로 할머니의 등이다. 수백 갈래로 갈라져 터져 있을 할머니의 등이지만, 내게는 평범하면서도 아름답고 지순한 오로지 나만의 세상이다. 나는 이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으면서도 그 등이 툭툭 소리를 내며 터져 가는 것을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그 거북등은 천년만년 다만 존재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는 나에게 누가 죽음에 대해 말해보라. 나에게 그 죽음이란 잠시 할머니가 나를 마루에 누여놓고 둠벙에 다녀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린 나에게 모순이란 없다. 나는 할머니로 인하여 당연히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는 권태도 있고, 배고픔도 있고, 싫증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의 등에 업혀있는 한 나에게 고통은 없다. 나는 머리를 할머니의 등에 바짝 돌려대며 할머니의 허리께에 가 있는 나의 양손에 힘을 주어본다. 할머니는 내 엉덩이께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면서 한번 힘차게 나를 당신의 등위로 더욱 추스린다. 그리고는 한 쪽 팔을 앞으로 가져가 땀을 닦아낸다. 흐르는 콧물을 마저 손으로 훔쳐낸다.
오랜 동안 할머니는 토방 위를 천천히 오가면서 쉬엄쉬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노래인지 노랫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가 나를 위해서 무어라고 중얼거린다는 것만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가끔 ‘이쁜 내 새끼.’ 라든지, ‘애비가 별일 없어야 할턴디.’ 라든지 하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나더러 굳이 들어보라는 시늉을 하면서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는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의 등 뒤로 더욱 거세게 파고든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가능한 한 나는 오래도록, 아니 영원히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고 싶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다. 내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는 동안 할머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어도, 나는 그것을 나를 위한 할머니의 희극적 배려로만 이해한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깊숙이 귀를 대고 할머니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다. 가끔은 할머니의 목에 걸려있는 가래덩어리가 할머니의 호흡과 함께 거칠게 끓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가끔은 할머니의 뼈 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마찰음도 나는 듣는다. 또한 가끔은 할머니의 뱃속에서 일어나는 기기묘묘한 여러 가지 소리들도 나는 들을 수 있다. 더 깊숙이 귀를 기울이면 나는 거기에서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바튼 기침 소리도 듣게 된다. 그것은 할머니가 평생 안고 살아온 병든 할아버지의 피 말리는 해수성 기침소리이다.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시간까지 오히려 할아버지보다도 더 괴로워하고 아파하셨다는 할머니를 나는 아직 이해하지는 못한다. 허지만 그 기침소리는 할아버지 떠나신 후에도 할머니의 몸 곳곳에 그대로 남아 이 고요한 시간을 기다려 내게 절절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지금 할아버지는 안 계시고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할아버지는 이제 볼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지금 안방의 뒤쪽 벽에 백부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수염을 가지런하게 가다듬은 채로 변함없이 걸려 있는 액자 속의 사진에 불과하다.
지금 나의 기억은 시간의 분별력을 잃으며 서서히 엉기고 있다. 인간에게 시간을 초월하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일 뿐이다. 사실 인간들은 무시로 시간을 넘나들고 있다. 스스로 그 순간을 알아채 보라. 그 순간 당신은 놀라서 기절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귀신만이, 아니면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나를 등에 업은 채로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백부님이 점심식사를 위해 돌아올 시간이다. 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솥뚜껑을 한 번 열어본다. 솥 안에는 약간의 물이 담겨져 있지만, 할머니는 찬장 밑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 올려 솥 안에 더 부어 넣는다. 그리고 부엌 구석에 쌓인 짚단 더미에서 한 줌의 짚을 집어다가 불을 붙인다. 백부님이 돌아오시면 할머니는 찬장 안의 식은 보리밥을 꺼내 솥 안의 끓는 물 속에 집어넣을 것이다.
백모님과 내 어머니는 이웃집의 타작논에 품앗이를 갔기 때문에 점심을 집에서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부님은 당신의 논바닥에 베어 말리고 있는 벼를 한 번 뒤집어 주기 위해 나간 것이다. 그러니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한 그릇의 밥으로 두 그릇의 밥을 만들어 백부님과 당신이 드시고 아마 내게도 먹이게 될 것이다. 나는 맨 보리밥은 잘 먹지를 못한다. 그러니 차라리 물에 끓인 부드러운 보리밥이 나을 것이다.
할머니는 적당히 불을 지피고 나서 아궁이 입구의 지푸라기들을 치운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는 나는 매캐한 연기에 켘켘거린다. 할머니는 부산하게 부엌문을 나선다. 마침 백부님이 들어서고 있다. 삼베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붙인 백부님은 새끼줄로 날을 칭칭 동여맨 낫 한 자루를 들고서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백부님을 맨 먼저 맞이하는 것은 역시 눈치 빠른 누렁이이다.
나는 어느 날 할머니의 등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날 나는 동시에 금방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은 할머니의 거친 오열을 읽는다. 할머니는 돌아서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의 눈길을 따라 나도 달을 바라본다. 달은 순식간에 이그러져 손톱 같은 처참한 몰골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나는 할머니의 등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할머니의 등을 떠나 어머니의 등으로 옮겨진다. 말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긴 시간을 아랫목에 누워 있다. 그 옆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백부님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귀밑머리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백부님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그 눈물을 닦아준다.
아버지도 할머니의 머리맡에 앉아 피 같은 눈물을 흘린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그런 눈물을 본다. 할머니가 살며시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한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할머니의 등에 업히고 싶다. 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할머니의 등에 업힐 수 있다고 믿는다.
백부님이 나를 안더니 할머니의 손을 내 얼굴에 가져다 놓는다. 나는 그 손이 깃털처럼 가볍다고 느낀다. ‘어떡헌디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스르르 내리감는 할머니의 눈에 백부님의 손이 덮쳐진다. 그 순간 나는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콩콩거리면서 그 단단하던 할머니의 거북등이 산산이 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밝은 햇빛이 일시에 사라지고 세상은 순식간에 깜깜한 암흑의 세계로 변해 버린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그런 나를 웬일로 백부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말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할머니로부터 자신의 가슴으로 돌려놓는다.
나는 아직 할머니의 등에서 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서만 겨우겨우 살 수가 있다. 할머니의 등에서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거기에서만은 신조차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등을 떠날 수가 없다. 이 거북이의 등짝 같은 편안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으므로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지금 언제나처럼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햇빛이 넉넉한 토방 위를 거닐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오늘도 할머니의 바튼 숨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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