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한반도
장종권 작품세계

중편소설

 

불 꺼진 봉화대(완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167회 작성일 02-06-15 15:30

본문

불 꺼진 봉화대


정말이지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더벅머리 사내아이에 불과했다. 어쩌면 나이만 들었지 사춘기조차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런 어정쩡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 역시 환경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거덜이 나버린 집안을 아버지가 다시 일으키기에는 분명 역부족이었고, 동생들은 모두 학업도 마치지 못한 어린애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캠퍼스를 떠나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에는 능력도 자신감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인생의 커다란 계획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에도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그랬다. 이미 충분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내가 아무리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정말이지, 나는 그때 아무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럴까. 벌써 한 이십 년쯤이나 지나가 버린 아득한 옛날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굳이 들어주는 이도 없는 변명을 하려드는 것일까. 아니, 나는 지금 정말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오늘까지도 그녀를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내는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그녀가 내게 의미 있는 여자였을까. 그래서 지우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끝내 포기해 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분명 영현이 녀석 때문일 것 같다. 그렇다는 생각이 나를 가장 무게 있게 지배한다.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바로 말은 하지 않고, 내게서 멀어지지도 않으면서 줄기차게 반성을 요구하는 듯한 바로 그 녀석 때문일 것이다.
오늘 느닷없이 걸려온 그의 전화는 어김없이 나를 다시 천 길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내 생각 역시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영현이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의 곁에서 여지껏 끈질기게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맞는 말일 지도 모른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영현이 나를 찾을 만한 이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만난 술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가까운 사이이기는 하였으나 고등학교 동창인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불알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에 핑계를 대고 멀어지려면 얼마든지 멀어질 수도 있는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왜 나는 그의 곁에서 아직 맴돌고 있는 것일까. 내가 지은 죄 때문일까. 한때는 사랑할 뻔도 했던, 그러나 끝내 사랑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했던 탓일까.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되씹으면서 평생 가슴 한 구석에 접어 두고 있는 그녀, 그녀를 너무도 가슴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당시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믿었던 탓일까. 그래서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위해 그를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초록이 빠져나가는 가을풀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던 그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던 그녀, 그녀가 내미는 손을 부끄럽게도 나는 모른 척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먼발치에서 다만 그녀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그녀는 정녕 내게 천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판단해버린 나의 생각은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그녀가 내미는 구원의 손을 바라보지 못하고 비겁하게 눈을 감아버린 나는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참말이지 나는 아주 나쁜 녀석이었다.
나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공부하러 떠났던 독일에서 결국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그와 함께 그 생소한 땅에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소식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남자는 독일인이었다. 이런 소식을 나는 오직 영현으로부터만 얻을 수가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그녀가 둘이든 혼자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도 들려주었다. 그런데 영현이 유독 그런 소식을 내게 끊임없이 전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마다 묘하게도 기분이 영 찝찝할 만큼 심상치 않은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나의 죄를 모조리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정말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되었다.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명륜동에 돌아왔을 때는 막 찬 바람이 슬슬 불어오기 시작할 늦가을쯤이었다. 나는 시내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 바로 재채기를 시작했다. 캠퍼스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에는 아예 눈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코를 싸매고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야릇한 희열에 빠져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틀거림과 비명 소리는 숨 쉴 틈도 없이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캠퍼스는 예전에도 이랬으므로, 지금도 이러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도 끝없이 이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이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하얀 최루탄 분말이 바람이 불 때마다 풀썩대며 고통스럽게 날아오르는 대성로를 지나 문과대학 강의실로 들어섰다. 강의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오직 나 혼자 뿐인 것 같았다.
감개무량한 첫 강의가 끝나고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인생의 부담스러운 일들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낯익은 얼굴들은 모두 캠퍼스를 떠나고 나 홀로 돌아와 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작이다. 슬며시 눈을 내리감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제끼면서 물었다.
실례지만 학생이세요? 놀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곧 나의 멱살을 잡으며 다시 다그쳤다. 당신 짭새 아냐? 나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최초에는 그의 질문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히 완력이 있어 보이는 학생이었는데, 눈빛이 대단히 강렬하게 반짝이어서 살의마저 느껴졌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아직 머리를 기를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았다. 제대 말년에는 여유가 있어서 머리를 어느 정도 기르기도 하지만, 그런 머리도 바깥세상으로 나오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 얼굴은 햇빛에 잔뜩 그을어 구릿빛이었다. 또 하나 처음부터 나는 전혀 얼굴도 모르고 소속도 알 수 없는 학생들이 듣기 마련인 이 선택과목 강의는 피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일단 자존심이 상한 터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 나보다는 서너 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순순히 그의 질문에 대답할 리가 없었다. 너 짭새지? 그러는 사이 그의 동료로 보이는 서너 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기세가 등등한 것이 곧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 새끼 죽여버려! 끌고 가!
순간 내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사정없는 발길이 복부를 강타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연이어 여기저기서 주먹이 날라들었다. 강의실을 나서던 여학생들의 질겁하는 비명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나는 멱살이 잡힌 채로 허리를 구부리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주머니를 뒤져 봐! 무언가 있을 거야. 여러 개의 손들이 내 주머니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민등록증은 있는데, 이걸로 무얼 알 수 있어? 이건 병역수첩 아냐? 맨 처음 나를 붙들고 덤벼든 녀석이었다. 나는 잠시 그들의 공격이 느슨해지자 허리를 펴고 창가에 몸을 기댄 채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수첩 속에 끼어있던 등록금 영수증을 펴들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 학생이 맞아요?
그제야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그가 불의의 일격을 받고 주저앉자, 무언가 잘못 짚었다는 낌새를 차린 그들이 내 팔을 안으며 우선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학생들을 헤치고 다가서며 소리쳤다. 형! 아니, 형이 웬일예요? 나는 넋 나간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였다.

나는 그녀를 처음 쌍과부집에서 만났다. 창경원을 돌아나와 혜화동 로타리에 이르기 전에 버스에서 내려 육중하게 서있는 육교를 건너면 명륜동 캠퍼스로 꺾어져 들어가는 인도와 차도가 뒤섞인 작은 도로가 나타난다. 그 도로의 뒷쪽에는 달동네에나 있을 법한 골목길이 나 있었는데, 쌍과부집은 그 맨 처음쯤에 자리잡고 있는 허름한 판자집 주막이었다. 거기에서 나서기만 하면 몇 걸음 걷지 않아도 금방 버스를 탈 수 있는 골목의 어귀쯤이었다.
이 쌍과부집에는 두 중년의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 친 자매지간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돈독한 사이기도 하였다. 그녀들은 우리에게 마치 이모나 고모처럼 따뜻하게 대해주곤 하였는데, 단골이 된 후부터 우리는 아예 그녀들에 대한 호칭을 이모로 바꾸어버렸다. 또 그것이 일반적인 예이기도 하였으므로.
우리는 하루 중의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겨우 움직인다고 해보아야 강의실만을 오갔을 뿐이었고, 그 외에는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다방이 고작이었다.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그곳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언제든 그곳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아니 우리는 하루라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밤잠을 설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래서 그곳은 그 어떤 장소보다도 더 신성했고, 편안했고, 아름다웠고, 따뜻했다.
어느 날인가 거기에 낯선 여학생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연인지 기연인지 처음에 나의 옆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약간 거무스레한 작은 얼굴에 또랑또랑한 눈을 가졌으며, 옷차림은 영락없는 60년대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적어도 이 모임에 끼어들었을 때에는 정말로 똑똑하거나, 아니면 똑똑한 척하는 부류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입을 쉬지 않았다. 그녀는 궁금한 것도 많았으며, 아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현실에 대한 감각이 최소한 나보다는 한참이나 위라는 사실에 대해 적지 아니 놀랐다. 그만한 감각이라면 이 시대 여학생으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여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얼마든지 운동권에 끼어들 수도 있는, 아니면 그 이상의 행동도 서슴치 않을 맹렬한 의식 세계가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보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야 영현이 그녀를 소개했다. 우리 과 후배야. 예전부터 불러 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었어. 널 이미 잘 알고 있어. 인사해. 차명미야. 명미. 이름이 참 밝지?
그녀가 내게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이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결국 내가 그녀에게 죄를 짓기 시작한 최초의 선입견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녀가 얼굴을 들자 나는 그녀의 입 언저리가 가장 눈에 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그 부분에도 적지 않은 우수가 새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의 입은 자신감에 넘쳐서 다부진 자세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인사가 늦었어요.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나는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계속 내게 호의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나는 그리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애써 모른 체 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사코 담배만 죽이고 있었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늘상 듣는 편이었다.
그녀는 내게도 가끔 질문을 던졌는데, 그러나 나에 대한 그녀의 질문은 우습게도 개인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집이 어디세요? 형제는 많으세요? 군대는 언제 가세요? 뭐 대개 이런 질문들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떠들어대던 내용과는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에 약간은 의아해 했다. 그때의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떨떠름했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나를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쌍과부집에서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섰다. 한 시간쯤 전에 일어나지 못할 바엔 집에 돌아가는 것은 아예 포기해야 했다. 통금 때문이었다. 우리는 쌍과부집을 나와 습관처럼 골목 안쪽의 허름한 소주집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들어서자 주인은 곧 문을 닫고 셔터를 내렸다. 그녀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우리는 다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새벽 셔터가 올라갔을 때 친구들은 잠에 떨어진 두엇을 남겨놓고는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골목으로 나서는데 누군가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몽롱한 눈에도 나는 그녀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별로 술에 취하지 않았던 듯 말짱한 얼굴이었다.
제가 택시를 태워드릴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선은 힘이 드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가슴으로 허리춤으로 순식간에 밀려들어 왔다. 그 순간 나는 취중에도 그녀가 보통 이상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그녀는 내게 거부감 없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나는 문득 그녀에게 벌써 몇 년이나 묵은 애인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만취한 나를 연약한 힘으로 떠안고는 힘들게 택시 안에 밀어 넣었다. 정신 차리세요. 집에는 가야지요.
우리집이 있는 독산동에 이르러 내가 비틀거리며 작은 빌라의 현관 쪽에 다가섰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나에게서 떨어져 돌아섰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또 봅시다! 고마워요. 그녀는 손을 흔들며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다음날 저녁에도 우리는 만났다. 아니 나는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약속이 없이도 이제 언제든 만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입대하기 한 이틀 전에도 그곳에 있었다. 왕창 마실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내게 전에 없이 많은 술을 권했으며, 나는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이제 내일 모레면 이 모든 것들과는 이별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는 아마도 영영 다시는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나는 술을 마실수록 부쩍 처량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코끝이 찡해지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나는 말했다. 잘들 있어. 휴가가 언제일진 모르지만 그때 보자구.
내가 버스 정류장에 서서 막걸리 냄새를 가득 풍기며 한심한 나를 돌아보고 있는 판이었다. 누군가의 팔이 다시 내 허리를 안아왔다. 형, 나야. 한 잔 더 해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측은함으로 가득해 있었다. 나 집에 가야 해. 보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이끌려 육교 넘어 골목의 한 소주집으로 들어섰다. 안은 만원이었다. 우리는 겨우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나는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증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메케한 담배 연기로 인해 그 거북함은 더욱 심해졌다. 나 술 더는 못 마셔. 그러면 나만 마실게요.
그녀는 곧 내게 소주병을 내밀고는 소주잔을 하늘 높이 쳐들면서 따라주기를 원했다. 취한 내가 어렵사리 그 잔에 술을 따르자 그녀는 거침없이 술잔을 들이키고는 다시 내밀었다. 나는 비로소 그녀가 요 며칠 사이 결코 술을 사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주량은 남자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나 솔직하게 말하면 말예요. 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었어요.
어느 사이 그녀는 자신에 대한 호칭이 저에서 나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말투까지도 제멋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형, 알아? 내 마음 알기나 해? 문득 가슴이 떨려 왔다. 그녀의 입에서 앞으로 도대체 무슨 소리가 흘러나올지 사뭇 두려웠다. 나는 주변을 한 번 휘돌아보고는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나 가야 해. 어서 일어나. 싫어. 우리 집은 이미 틀렸어. 형도 이미 틀렸어. 택시를 타도 안 돼. 그녀는 스스로 소주병을 들어 잔에 가득 채우고는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그녀의 그런 자세는 비장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어울릴 정도였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녀는 술잔을 뺏기고도 요지부동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고개를 수그린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미 각오했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그날 밤 그녀는 근처의 내 누이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녀가 아직 캠퍼스에 남아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입대 전에 내가 알고 지냈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미 캠퍼스를 떠났으리라 믿었다.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나갈 만한 충분한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적진 속에서 발견한 단 하나의 우군이었으므로 물론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더 반가웠다. 웬일이야? 아직 졸업 안 했어? 대학원 다니잖아? 근데 이게 웬 봉변야? 학교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 지 알어? 짭새는? 빌어먹을……. 당분간은 누구든 옆에다 끼고 함께 다녀야겠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그건 그렇고, 또 누가 있어? 내가 물었다. 형도 참 무모한 사람이야. 제대가 가까워진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소식을 끊고 살면 어떡해? 영현 씨도 아직은 학교에 있어. 근데 영현 씨는 왜 이 소식을 모르고 있는 거야? 내가 다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어. 다들 졸업했을 텐데 그리워하면 뭐해?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형 속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지. 그냥 넘어가자.

그날 저녁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쌍과부집에 들렀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난 추억이 배인 곳이라서인지 발길이 쉽게 돌아서지는 못했다. 내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우선 주인아주머니들이 깜짝 놀라며 반겼다. 웬일이야? 제대했구먼?
그녀들의 변함없이 반가운 인사가 어느 정도 가슴을 녹여 주기는 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술 마시기가 왠지 어설펐다. 벌써 세월은 이렇게 흘러 버렸는가. 아무도 나타날 것 같지가 않았다. 반갑다는 수다와 함께 다가온 주인아주머니들의 술잔을 서너 잔째 마실 즈음이었다. 생기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통발을 제끼며 나타났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데 그녀의 뒤를 따라 영현의 얼굴도 들어서는 게 아닌가.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병신이 꼴값 한다더니, 아직도 단골을 못 바꾸고 이 골목을 헤매는구먼.
영현이 활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러는 너는 별 거냐? 그의 따뜻한 손이 나의 손을 붙잡았다. 어째튼 살아 있으니 반갑다. 나 할 일 다 했어. 이젠 자유로운 몸이야. 그래, 수고했다. 이젠 마음 놓고 살아 봐라. 서로의 손을 붙들고 흔들다가 우리는 이내 술잔을 집어들었다. 주방으로부터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걸쭉하게 들려왔다. 영현이 학생이 말야, 자네 소식이 없다고 나중에 본때를 보여준다고 장담했었는데, 오늘 그 꼴을 좀 볼까? 요즘 우리도 별로 재미가 없었단 말씀야.
그때쯤 낯선 학생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명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무조건 자리에 끼어들었다. 그녀 역시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영현도 이미 그와는 구면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첫눈에도 서글서글한 눈매와 훤칠한 키에 무척 잘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현이 그를 소개했다. 인사해. 국문과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잡는 그의 손이 따스했다.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가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명미 씨가 오늘 함께 한 잔 하자고 해서 들렀지만 어쨌든 전역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용무도 있습니다. 아까 학교에서 제 후배들이 경솔한 짓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사과를 드려야 도리일 것 같아서 애들을 데리고 온 겁니다. 그제야 나는 우르르 몰려들었던 얼굴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낮에 한 판 붙었던 친구들이 분명했다. 그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말없이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당당하고 불쾌한 자세는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자리가 그들이 빠져나간 뒤부터는 약간 오붓해졌다. 술잔이 얼큰해지면서 이야기가 개인적인 대화로 넘어가고 있었다. 영현이 넌지시 속삭였다. 저 친구 말야, 명미 씨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지 않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그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무릎 위에서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그 사이 좋은 남자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로소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달리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그녀, 한때는 내게 그토록 접근했어도 무심하게만 받아들였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결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질 않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현상이었다. 질투인 것일까. 나는 곧 스스로를 책망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이상의 논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나의 신경은 어느 사이 온통 그녀와 그에게로 쏠려 있었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혼자서 막걸리잔을 연신 비워대야만 했다. 영현도 그런 나의 모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는 취한 것을 핑계로 간단한 목례만을 하고 먼저 일어섰다. 그들을 뒤로하고 차가운 골목으로 나서자 빈 저녁바람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나는 흐트러진 마음과 술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 한 쪽의 가로수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체온이 자연스럽게 묻어 왔다. 나는 솔직히 그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체온의 주인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다가서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발길을 창경원 쪽으로 향했다. 보도블럭이 그녀의 높다란 굽에 찍히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여자들은 이 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따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떤 여자든 그녀가 더욱 여성스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약간 추워. 중얼거리며 그녀가 내 허리를 더욱 끌어안았다. 나는 내 허리를 넘어온 그녀의 손을 붙잡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작은 손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연약함이 물씬 배어 있었다. 나는 은근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나를 지탱하며 돌담길을 돌아 비원 쪽으로 나섰다. 아직도 좀 춥지? 응, 하지만 괜찮아. 마음은 아주 따뜻한 걸. 명미가 따뜻한 여자라서 그렇지. 아냐, 형이 날 따뜻하게 해주고 있잖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난 본래 차가운 사람인데…….
그녀가 문득 딸꾹질을 하더니 돌담을 향해 주저앉았다. 나 더는 못 참겠어. 막 넘어올려고 그래. 어지럽기도 하고……. 나는 쪼그려 앉은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문득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녀의 손등에 눈물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왜 그래?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내게 안겨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그날 밤 새벽까지도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아랫녘 시골에서 알량한 땅뙈기에 농사라고 지으신다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그 맨 처음이었다. 아래로만 남동생이 둘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 가운데에서 여지껏 혼자 벌어 학업을 계속해온 것이었다. 물론 전부는 아닌지도 모른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부모님의 피 같은 돈을 어느 정도는 가져다 썼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히 여자구실을 해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녀 못지않게 어려운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나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여자였다. 다른 여학생들처럼 멋도 한 번 못 부려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외길로 공부만 죽어라고 했을 것이다. 공부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길이었을 테니까. 나는 그녀에게 궁금한 어떤 것도 묻지는 않았다. 왜냐 하면 그녀는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내가 궁금해 했던 것을 스스로 모조리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형이 참 편안했어. 마치 내게 오빠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오빠의 모습이 꼭 형의 모습일 것만 같았어. 왜인지는 모르겠어. 사람은 다 제나름대로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니까, 무어라고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건 분명 나만의 느낌이겠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랬어. 그러니 내 생각에 책임이 있었던 건지도 몰라. 처음에는 학보에서 형의 글을 골라 보았고, 그리곤 강의실에서 몇 번 보았지. 가슴이 뛰면서 말야. 언젠 줄 알아? 내가 형을 처음 본 것이 말이야. 언젠가 학교에서 문학강연회가 있었지. 우연히 친구와 함께 거길 들렀는데, 그때 형이 사회를 보고 있었어. 그 목소리가 말야. 가슴 속으로 마구 파고드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 결국 난 영현 씨를 졸랐어. 나는 형에게 완전히 미쳐 버린 거야. 형이 모를 리가 없었겠지. 정말 몰랐어? 몰랐다면 그건 바보가 틀림없을 거야. 쌍과부집에 들르지 않으면 나도 집에 갈 수가 없었어. 그 자리에 형이 나타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도 없었어. 무작정 형을 기다렸던 거야. 그러면 내 기도에 보답이라도 하듯 형은 반드시 나타나곤 했어.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야. 나는 그때마다 형을 기다린 나의 끈기에 스스로 감탄하곤 했지. 물론 나타나지 않을 때도 여러 번이나 있었어. 알아? 나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형이 입대하는 날에도, 나는 나를 이겨내느라 무진 고생을 했어. 그런데 말야, 형은 내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어. 나는 그 이유도 알고 있어. 나는 별로 여성스럽지가 못하거든. 남들이 아무리 나더러 똑똑한 여자라고 추켜세워도, 나는 나에게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단 말야. 그러니 그 말들이 얼마나 가소로웠겠어? 형도 언제나 나를 추켜세울 땐 똑똑한 여자라고 말했지. 비참했어. 형도 그들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죽고만 싶었지. 형만이라도 나를 예쁜 여자로 보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밤을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원망도 많이 했어.
그녀는 훌쩍거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말없이 그녀의 벗겨진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나의 손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가자,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짙은 눈물을 훔쳐내 주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을 계속했다. 이젠 틀린 것 같아. 하지만 마음은 편해. 이렇게 다 이야기 하고 나니까 살 것 같애. 그것도 형하고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 마치 꿈만 같애. 가슴이 마구 뛰어. 난 참 바보 같은 여자야. 그래서 잠을 못 자는 거야. 형은 자고 싶으면 자. 아냐, 나도 잠이 오지 않아. 그 동안 내가 죄를 많이도 졌네. 하지만 내가 명미를 싫어했던 건 아냐. 뭐랄까, 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지. 정말 똑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여자니까, 더 큰 꿈이 있고, 나보다 더 나은 남자도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나 첫 남자가 있었어. 그녀의 돌발적인 발언에 나는 적지 아니 놀랐다. 삼사 년쯤 전 일이야.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날 많이 좋아했어. 나도 그 사람이 좋았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몰라. 난 한 눈에 반해 버렸으니까. 사실은 그 사람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어.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말야. 나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너무도 고마웠어. 어린 마음에도 이런 생각까지 했었어. 나는 나중에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야. 그런데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어. 소아마비를 앓았던 사람이었는데, 심하지는 않았지만 한 쪽 다리를 많이 절름거렸어. 그래도 나는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어. 그 사람이 하루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어. 나는 아무 의심도 없이 따라 갔었지. 아무 것도 모르는 피래미 여학생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어. 그런데 말야. 솔직하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날 어떻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어. 그러니 그 사람을 원망할 수만도 없을 거야. 그 뒤로도 나는 두세 번 그 사람과 함께 밤을 지냈어. 그런데 말야. 지금 생각하니까 참 우스워. 그 사람 섹스할 줄을 전혀 모르더라고. 내가 도와줬지 뭐야. 아무 것도 모르는 애숭이 주제에 말야. 그런데 도와주어도 별로 소용은 없었어.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잖아? 그랬어. 그리고는 그 사람이 스스로 떠나더군. 나는 다시 홀로 버려졌고 생활은 다시 어려워지기 시작했어.
그런 이야기를 왜 해? 감추어 두지 않고……. 하면 어때서? 형은 편안하게 생각해도 돼. 우리가 지금 이조시대를 살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아까 그 친구말야? 그 사람도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이미 이야기 된 거야. 우리 친구 이상의 선은 서로 넘지 말자구. 어이가 없는지 처음에는 빙그시 웃더군. 그러더니 자신이 너무 자신 있게 날 버려 두었었다나? 신경 안 쓰고 돌아섰어. 그랬더니 그가 달려들어 뺨을 한 대 갈기더군. 길거리에서 말야. 정신이 번쩍 들었어. 하지만 이제 됐으면 가라고 했지. 한참을 노려보더니 가 버렸어. 하지만 말야. 걱정하지 마. 그렇다고 형에게 매달리는 일은 없을 거야. 판단은 오로지 형 스스로가 해야 하고, 어떻게 되든 그건 아마도 내 운명으로 받아드릴 테니까.

그녀가 쌍과부집에 다시 나타난 것은 두어 달쯤 뒤의 일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돌돌 말려진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서류뭉치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 대신 영현이 이미 말해 준 사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미 독일로 공부하러 갈 거야. 지금 서류 준비하고 있어. 잘만 준비하면 괜찮을 것도 같아.
내가 물었다. 어떤 방식인데?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경비를 지원받을 수가 있을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런데 언제 떠나? 그녀가 입을 옹동거리며 대답했다. 금방이야. 순간 그녀의 무서운 눈빛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왜 굳이 가려는 거야? 여기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아는 척하지 마. 여기서는 자신이 없어. 딱이 공부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어려워도 몸으로 부딪치고 가슴으로 깨달으면 일은 쉬이 풀리는 줄로만 알고 살아온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어떤 부분에도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 말야. 정말이지 떠나고 싶지 않아. 여기에 있고 싶어. 가족들하고, 친구들하고, 여태까지처럼 살고 싶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섣불리 어떤 대답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나쁜 놈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아. 아무도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지를 않아. 형, 나 어떻게 해야 돼?
그래도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지금 만신창이야. 세상의 적들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강력한 적들에게 쉴 새 없이 위협을 당하고 있단 말야.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버텨 왔어. 아직도 버티고는 있으니까 당분간은 버틸 수가 있겠지. 그런데 자신이 없어. 더 오래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나에겐 지금 나를 붙잡아줄 사람이 필요해.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아. 그가 나에게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괜찮아. 옛날에 말야, 어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했었는데, 마침 전쟁이 터져 버렸대. 남자는 전쟁터로 떠나야 했지. 통곡하는 여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어. 내가 돌아오게 되면 저 건너의 봉화대에 이르러 먼저 봉화불을 밝히겠노라고. 여자는 이제나저제나 봉화불만 기다렸지. 그것이 일 년, 이 년, 삼 년, 마침내 그녀는 십 년이라는 세월을 그리움으로 보내 버렸어. 기다리다 지친 여자는 결국 죽음을 택했지. 남자가 전쟁터에서 죽었으리라고 믿어 버렸던 거야. 그런데 말야, 그녀가 대들보에 목을 매고 매달리며 바라본 건너 편 봉화대에 봉화불이 오르고 있었던 거야. 이거 기가 막힌 이야기 아냐?
그녀가 자리를 뜬 후에도 나는 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과연 그녀를 위해 봉화불을 밝혀야 하는가. 정말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아직 용서에는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자유로운 모든 정신을 받아들일 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죄에 대해 눈을 뜰 수 없었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어떤 아픔일 지를 돌아볼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녀가 떠났다는 소식과 함께 영현은 그녀가 맡긴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김관식 시인의 「풀이슬 같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이었다.
놀라워라. 어느새 말렸다 풀어지는 한 오리의 희미한 실구름 같이, 흐르던 피 뚝 끊어지고,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어려운 한 고비를 숨결 넘어가면은, 사랑도 원수래도 살뜰히 잃어 버려. 삷이란 한참 스쳐간 소나기비. 선잠 깨인 꿈자리, 그게 아니면 서거픈 쓰디쓴 우음이로다. 구을러 흐터지는 풀이슬 같이.

그런데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아침, 영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온 것이다. 명미 돌아왔다. 혼자서 말야. 애기도 놓아두고……. 헌데 너무 말랐어. 그가 금방이라도 더 내뱉을 것만 같았다. 보기 좋니? 저런 꼴이 되니 보기 좋아? 좋기도 하겠다. 낼름 가서 만나 보시지 그래?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