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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빙하기(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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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254회 작성일 02-06-1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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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그 해 겨울은 모질게도 차가웠다. 마치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 종내는 금방이라도 파열해 버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또 다시 지구의 빙하기가 서서히 그 매서운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겨놓으며 죄 많은 인류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겨울은 악마의 혓바닥을 흉물스럽게 날름거리며, 그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덩달아서 기쁨이란 기쁨은 모조리 사라지고,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증오의 저주받은 그림자만이 긴긴 겨울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리라.
불안한 가슴을 간신히 추스르면서 하루하루를 넘기던 인구가 기어이 오고야 만 충격에 자지러진 것은, 그 해가 막 바뀌어가던 1월 초순의 어느 깊은 밤이었을 것이다. 요란하게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인구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고서도 한참이나 더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그제야 깨달으며 인구는 먼저 스탠드의 불을 밝혔다. 본능적으로 바라본 벽시계는 새벽 두 시를 성큼 넘어서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창 밖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연신 요란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인구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형이에요?”
전화 속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누구십니까?”
아직 잠에서 덜 깬 인구의 목소리는 전화 속의 심상치 않은 낌새로 인해 서서히 두려움이 묻어가고 있었다.
“인구 형!”
“문호 아닌가?”
“예, 여기 병원입니다.”
“병원이라니?”
“빨리 좀 와주세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문호의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이미 문제가 터지고야 만 것이다. 인구가 머뭇거리며 더 이상 묻지를 못하자 문호가 말을 이었다.
“형이 일을 저질렀어요.”
“곧 가겠네.”
인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온 것이다. 어찌 된 상황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아니야, 설마.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거의 확신처럼 인구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간절하게 기도하며 인구는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눈을 뜬 아내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 챈 듯 몸을 일으키고도 묻지 못하고 인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걱정이 많은 아내에게 인구는 차마 말해줄 수가 없었다. 아직은 분명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분명한 사태에 직면하고도 인구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를 썼다.
인구는 마지막으로 장롱 속에서 두터운 잠바를 꺼내 입으며 아내에게 냉수 한 사발을 청했다. 그녀가 잽싸게 일어나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에 인구는 오늘 입었던 양복의 속주머니를 뒤졌다. 분명 그곳에 들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 그것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녀와서 말해주겠소.”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인구는 아내의 얼굴을 피하며 돌아섰다. 그러다가 그는 신었던 구두를 벗고는 운동화로 바꾸어 신었다. 아내의 손에는 어느 틈에 두툼한 목도리가 들려 있었다.
“그러세요.”
아내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힘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니까 그로부터도 한 다섯 해 전쯤의 일이었다. 인구의 부서에 새로운 동료가 들어왔다. 그는 세칭 일류대학이라는 모 공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첫 직장인 H그룹의 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피치 못할 개인 사정을 이유로 퇴사했다고 했다. 잠시 모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에 이 회사의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를 했고, 그 결과 인구의 부서로 첫 발령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가 바로 태호였다. 인구는 그가 그 대단한 직장을 하루 아침에 내던지고 교사 생활을 시도했다는 점에 대해 상당히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다시 직장을 내던졌을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런 궁금증을 그에게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 차차 알게 될 것이었다.
그가 처음 소개되고 인구의 바로 옆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인구는 적지 않은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문득 강력한 새 라이벌이 눈앞에 버젓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인구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만 같은 대단히 강력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구는 점점 자신의 소심한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한없이 순수했으며 너그럽기 짝이 없었다. 도저히 강력한 라이벌로 여길 만한 부분은 눈을 씻고 들여다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점에 대해 마음을 놓으니 오히려 그가 편안해졌다.
더구나 그는 점차 다른 많은 동료들을 제껴두고 인구에게로만 다가왔다.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인구를 찾았으며, 의논할 일이 있어도 인구를 찾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도 인구의 일이 끝나지 않으면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야말로 찰떡처럼 붙어 다녔다.
인구는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인구를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대상으로 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인구는 그와 더불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그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로 인해 인구는 가슴을 치게 된 자신을 망연자실하며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난 철학이나 아니면 예술을 하고 싶었지, 그런데 결국은 굴복했단 말야.”
인구는 그가 무엇에 굴복했다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말은 맞는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눈빛은 항상 우울해 보였으며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철학자의 그것과 흡사해 보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훨훨 날았겠네.”
“말도 말아. 대단했어. 내가 생각해도 꿈같은 시절이었어.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뛰거든. 그때 난 무엇이든 해낼 것만 같았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 이 세상에 없었단 말야.”
인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가 가네.”
자연히 술자리도 둘 만의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 곳을 싫어했다. 인구는 그것이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는 말수가 무던히도 적었다. 그러나 가끔 툭툭 내뱉는 말이 좌충우돌이었다. 비약과 생략의 오묘한 경지를 무시로 넘나들고 있었다. 사실 인구로서는 보통 어려운 말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구는 그의 그러한 면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그는 사무실에서는 항상 악의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신선한 미소로 동료들을 대했다. 마치 신선이 세속에 내려와 잠시 쉬어가는 듯하다는 주변의 농담도 가끔씩 듣곤 했다.
그는 또한 서른이 훨씬 넘은 노총각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구차해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사람이 실속 차리는 것 없이 좋기만 하니 어디 요즘 여자들 눈에나 들겠냐 싶어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조차 일었다.
태호는 자연스럽게 인구의 집엘 드나들었다. 그래서 결국 아내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으며, 얼마 뒤 아내는 그녀의 친구 혜숙을 그에게 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혜숙을 소개하고 난 후부터 인구는 그가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결혼 까짖거 하면 뭐 하느냐, 하는 식의 자조적인 얘기를 그는 자주 뱉어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떨결에 중신애비가 되어버린 인구는 내친 김에 결판을 내고 싶었다. 혜숙은 물론 혜숙의 가족들까지도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구는 이것이 다만 좋은 인연 하나 만들어 주는 일이라 사심 없이 그를 설득했다. 그의 집엘 찾아가 그의 부모와 동생을 만나보기도 했다. 그들 역시 반가워하는 모습이 역력하기는 했으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는 듯했다.
태호는 그의 부친과는 별 대화가 없어 보였다. 느낌으로 짐작하건대 집안일의 대부분은 둘째 아들인 문호가 알아서 꾸려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인구는 그때까지도 그런 점들을 별로 대수롭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인구의 주선과 혜숙의 적극적인 자세로 얼마 후 두 사람의 결혼은 성사가 되었다. 가족들의 배려로 태호는 조촐한 아파트를 마련하여 따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다음 해 그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태호가 그의 아들의 백일잔치를 오붓하게 치르던 날이었다. 인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함께한 태호의 고교 동창생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는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고 말았다.
“조울증이 심한 친구입니다. 이삼 년 주기로 증세가 나타나지요. 가정을 이루어 안정을 찾아서인지 더 이상 변화가 없군요. 아무튼 가까이 계시니 특별한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그는 태호가 거쳐 온 이전 직장에서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호가 H그룹에 근무할 때죠. 동료 중의 하나가 현실에 대해 너무 과감하게 비판하면서 접근을 했나 봐요. 물론 그는 태호 역시 현실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엘리트라고 판단을 했었겠죠. 그런데 이 친구가 그것이 이른 바 의식화가 아니겠느냐고 겁을 집어먹은 거예요. 좌경분자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며, 당국에 신고해 버린 겁니다. 당연히 그 친구는 호되게 당하고 회사를 떠났대요.”
그 일로 태호는 정신 이상자로 몰려 시달리다가 결국 그 역시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좌경분자였나요?”
“차라리 그랬으면 문제가 없었겠죠. 그냥 평범한 젊은이였어요.”
“조울증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선천성인가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형성된 겁니까? 후천적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되었을까요?”
“그거야 알 수가 없지요. 하여튼 피해의식 하나는 알아주거든요. 가장 드러나는 증상입니다. 나중에 몇 달을 쉬다가 학교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도 잘 견디지를 못했어요. 학생들의 장난기 섞인 놀림조차도 감당해내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도 학교 사회가 가장 버틸 만한 곳이라 믿어 억지로 밀어 넣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또 포기했군요?”
“집에 드러누워 버렸어요. 자신은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다고 하는데 직접 가보니 아무래도 핑계인 것 같았죠. 대충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인구 역시도 그간 태호의 행동에서 이상했던 점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호는 자주 말하곤 했다.
‘웬일인지 몸이 좋질 않아. 오래 전부터 그러는데 까닭을 알 수가 없단 말야. 어디가 아픈 지도 모르겠어. 어렸을 적에 내가 개펄에서 놀다가 녹슨 철사에 발바닥을 찢긴 적이 있는데, 혹시 그때부터 뭐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니, 어렸을 때 찔렸던 상처가 어떻게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을 수가 있어?’
‘거 있잖아? 혈도 같은 거 말야. 그때 손상을 당해서 내가 이런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아니면 서서히 몸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성이 침투되었거나…….’
나는 그것이 농담인 줄 알았다.
‘우리 애가 날 닮지 않았단 말이네. 나 같은 놈 닮아서도 안 되지만, 닮지 않으니 또 왠지 섭섭해.’
기가 막힌 말이었다. 도무지 보통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허공을 날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끝없는 상상력은 오히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고 있었다.
인구는 그제야 그의 이런 말들이 신경과민이나 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서 올 수 있는 한 증상임을 알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줄기차게 말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엉뚱한 곳으로 줄기차게 달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인구는 무심코 다시 물었다.
“그런 증상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친구분들께서는 아실 것 아닙니까?”
“근본적으로는 태호 자신의 정신력이 약해서라고 보아야지요. 나머지야 우리가 신이 아닌 바에야 알 도리가 없죠.”
인구는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느꼈다.
“가까운 분들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가능한 원인에 대해 분명 생각들을 해 보았을 겁니다. 그 중 몇 가지만이라도 말씀을 좀 해 주시죠.”
“본인이 모두 극복할 수 있었던 점들예요. 다른 사람들 잘못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인구는 그가 사람이라고 표현한 점에 대해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변화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는 최근 태호의 말들을 떠올렸다.
‘사무실 곳곳에서 말이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모조리 내 흉을 보는 것 같단 말이네……. 동료들은 모두가 나를 무시하고 있어. 내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단 말이네. 하기야 알고 보면 내가 무능력자이긴 하지. 당연한 일이야.’
인구는 그런 태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말로 달래면 달랠수록 그는 어린애가 되어 갔다.
‘내가 어린애인가?’
그러나 그런 그가 조울증으로까지 발전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인구는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음이 야속했다. 정말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런 남자에게 평생 의지해야 하는 한 여자의 일생은 왜 생각해주지를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에게는 이제 자식까지 생겨난 판이었다.
백일잔치가 지나고 시간은 그렁저렁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태호로선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악재가 새로이 터지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일은 안타깝게도 혜숙이 쪽에서 터진 일이었다. 혜숙은 결혼하기 전에 그녀의 숙부가 경영하는 작은 회사의 경리부서에 근무했었다. 주로 자금 분야를 맡아보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결혼하자마자 회사는 경영이 악화되어 부도사태를 맞이했고, 그러자 채권자들은 한결같이 잠적한 그녀의 숙부를 찾지 못해 발을 구르다가, 주로 이 일을 맡았던 혜숙을 찾아와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혜숙은 이미 태호가 정신적 의지력이나 자신감이 완전히 소멸된 어린애와 같은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찾아온 인구에게 하소연했다.
“걱정이에요.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들어와요. 술이라도 마시고 동료들과 어울리면 좀 낫겠는데요. 그저 안방에 들어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니…….”
채권자들이 들락거리면서 그들은 종내는 태호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러면 그는 전혀 반항하는 기색도 없이 중얼거린다고 했다. ‘살려주세요. 저같이 약한 놈을 왜 죽이려 드세요?’ 혜숙은 차마 눈뜨고는 바라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구는 하는 수 없이 혜숙과 함께 잠적한 그녀의 숙부를 찾아 나섰다. 가족에게까지 사는 곳을 숨기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그의 주소를 얻었다. 그녀의 숙부는 봉천동 후미진 곳에 단칸방을 얻어 기거하고 있었다.
숙부 앞에 쪼그려 앉은 혜숙은 먼저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숙부, 저 힘들어요. 제발 좀 도와 주세요.”
그녀의 숙부는 묵묵부답이었다. 혜숙은 마침내 피를 토하듯이 절규하며 하소연했다. 그녀는 먼저 태호의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태를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이런 다급한 시점이니 일단 채권자들을 해결해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졌다.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어요. 숙부, 전 지금 공갈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정말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어요. 왜요? 그 사람이 왜 숙부 때문에 죽어야 해요? 그리고 전 뭐예요?”
숙부는 그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자가 어찌 그리 약하나?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내가 설마 죽기야 하겠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탈한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구가 혜숙에게 물었다.
“왜 저리 되었는지 아는 것이 없습니까? 원인을 알면 치료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혜숙은 연신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저한테 감출 일이 있습니까?”
“그럼요. 인구 씨한테 무얼 숨기겠어요? 애써 좋은 일 하셨는데, 이게 뭐래요? 그게 너무너무 미안해요.”
“말씀해 보세요.”
“분명한 건 아닌데요. 아마도 아버님 때문인 것 같아요.”
인구는 놀랬다. 아버님 때문이라니, 그 점잖으신 아버님이 어쨌길래 태호가 저 지경이란 말인가.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예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무언가 좀 이상한 거예요. 아버님이 갖고 계시던 상가 말입니다. 얼마 전에 매도한 적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장남인 태호 씨와 무언가 한 마디 이야기라도 있어야 되는 것 아녜요? 전혀 말이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상가가 얼마에 팔렸는지, 그래서 아버님이 돈을 얼마를 쥐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거든요. 게다가 말예요. 더욱 이상한 것은 시아주버님은 그 후 아파트를 늘려 이사를 했다는 거죠.”
인구가 머리를 끄덕이며 듣고 있자 혜숙은 말을 계속했다.
“제가 태호 씨한테 그런 점을 따지면 그냥 픽 웃고 말아요. 잘 알아서 하겠지 뭐. 이런 대답이 고작이었죠. 전 차츰 알게 되었어요. 아버님이 태호 씨를 장남으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집안의 대소사는 거의가 다 시아주버님이 하고 있었죠. 태호 씨하고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고요.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거죠. 태호 씨는 전혀 그에 대한 불만이 없었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래서 제가 태호 씨한테 그 까닭을 물었지요. 그랬더니 대답이 너무 간단했어요. 아버님이 자신에 대해 실망하셔서 그렇대나요? 무슨 실망을 그리 크게 드렸길래 장남 대접을 못 받느냐고 따졌죠. 그랬더니 대학이지 뭐, 하는 거예요.”
“아니, 대학은 아버님의 뜻대로 진학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게 문제였나 봐요. 태호 씨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이 아니어서 공부를 전혀 안 한 거예요. 그냥 퍼질러서 놀고 먹고 자고 한 거지요. 아버님이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그리고는 가끔씩 앉아서 책이나 보고 시 나부랭이나 쓰고 있으니, 아버님 성품이 보통이 아니시잖아요? 난리가 아니었나 봐요. 결국 아버님이 지쳐서 포기하신 거겠죠. 자잘한 이야기들이야 드릴 말씀이 많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죠?”
“여자가 있었어요.”
“태호에게요?”
“예, 오랫동안 관계를 가졌었나 봐요. 태호 씨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요. 그 여자는 대학에 진학하지를 못 했대요. 가세나 인물도 변변치는 못했었나 봐요. 불을 보듯 뻔하지요. 아버님이 막무가내로 반대하셨대요. 아시잖아요? 태호 씨는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지도 못하고, 거역할 수 있을 만한 강한 성격도 못 되잖아요. 어쩔 수 없이 헤어졌나 봐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아버님과 태호 씨 사이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생긴 거예요. 아버님은 태호 씨를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를 않았어요. 그냥 자식이니까 오면 오느냐, 가면 가느냐 식이었지요. 그러니 집안일을 어떻게 태호 씨와 상의할 수가 있겠어요.”
인구는 답답했다. 혜숙은 아직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는 듯했다.
“결국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피해의식이겠군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있대요.”
“기가 막힐 일이네요.”
“늦기 전에 의사와 상담을 해봅시다.”
며칠 후 인구는 혜숙을 이끌고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 병원은 해가 묵어 색이 바랜 간판이 쉽게는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어귀의 개인병원이었다. 나중에 함께 와야 할 태호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한 배려였다. 혜숙이 의사와 상담을 하기 위해 진료실로 사라졌다.
인구는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이 헤아려졌다. 그녀의 가슴은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것인가. 아무리 현대인은 누구나가 약간의 정신적 이상은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살아가는데 큰 이상은 주지 않는 정도에 불과하다. 한 번 가라앉으면 다시 일으키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정신이 아닌가. 혜숙도 그런 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급한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한 주의였다. 태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그것은 그의 싱거운 웃음과 초연한 듯한 말투에서 얼마든지 읽을 수가 있었다. 인구는 그의 형편과 입장을 바꾸어 보았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과연 빠져나갈 구멍은 있기라도 한 것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더욱 답답해 왔다.
중신애비 노릇 잘못하면 뺨이 석대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인구는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양쪽으로부터 뺨을 얻어맞아야 할 기가 막힌 형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만 하더라도 신랑 쪽은 잘 생기고 성실했으며 집안도 넉넉한 엘리트였다. 신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잘 나가는 사업가들로 이루어진 탄탄한 집안이 얼마든지 그녀의 콧대를 세울만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겸손하기 그지없는 아리따운 규수였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그 좋은 형편들이 모두 돌변하여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는가.
한 시간쯤 뒤,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을 연신 수건으로 훔치며 혜숙이 나타났고, 출구까지 그녀를 따라 나온 의사가 말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말씀 듣기로는 상당히 진행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인구는 태호를 병원으로 안내했다. 평소 자주 몸이 아프다고 했던 그라서 순순히 따라 나설 줄은 알았으나 뜻밖이었다. 그는 병원행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작 갔어야 했어.’
태호는 병원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슬쩍 신경정신과라는 간판을 바라보는 듯도 했다. 간이 콩알만 해진 혜숙이 얼굴이 하얘져서 인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뿐 역시 태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의사가 태호만을 이끌고 진료실로 사라졌다. 한참 후에 먼저 나온 간호원 아가씨가 두툼한 약봉지를 혜숙에게 내밀었다.
“이건 특별한 약은 아닙니다. 단순한 신경안정제나 소화제류이거든요. 하지만 환자는 모르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일단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도록 주변에서 특별한 노력을 하셔야 될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응급실로 들어선 인구를 맞이한 것은 태호의 부친이었다. 그는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듯 응급실 입구의 차가운 간이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멍하니 천정만 응시하다가 허겁지겁 들어서는 인구를 발견하고는 주르르 눈물부터 쏟았다.
“어서 오게,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 많네…….”
그는 인구의 차가운 두 손을 덥석 쥐었는데, 그의 손은 추위보다는 흥분으로 인해 무척 떨고 있었다. 손만이 아니었다. 온몸 전체를 마치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것이 굳이 날씨 탓만이겠는가. 인구는 그의 손을 오히려 꼬옥 잡아주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러게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시지요. 그 깨끗한 아들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마시는 겁니까?’
그러자 콧등이 시큰해진 인구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놈의 자식…… 영안실로 내려갔네.”
인구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결국 이렇게 바람처럼 사라지다니.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느 정도 예견하기는 했던 일이지만, 그러나 설마 이렇게 느닷없이 그가 사라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형, 오셨군요…….”
문호가 응급실 입구로 들어서며 말했다. 공중전화기가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직도 손에 수첩과 볼펜을 들고 있었다. 다가선 문호가 인구의 손을 붙들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떻게 하죠? 형수님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는데…….”
“어떡하겠나? 알려드려야지…….”
“전 자신이 없어요…….”
“…….”
문호는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철로에 누워버렸다며?”
말꼬리를 흐리는 문호를 바라보며 인구가 물었다.
“예, 마지막 전동차였대요. 손목시계가 0시에 맞추어져 있더라구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요.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대요. 얼굴도 무척 편안해 보이긴 했어요.”
“고통은 없었겠네.”
“순간이었겠죠. 깨끗하게 분리되었어요.”
분리라는 문호의 말에 인구는 태호의 목이 잘린 모습을 상상하고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눈을 감아 버렸다. 인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드러누워 있었다던가? 아니면 엎어져 있었다던가?”
“그건 못 들었는데요.”
하기사 그것이 무슨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인구는 차디찬 철로를 베고 드러누웠을 태호의 모습을 다시 상상했다. 하늘은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눈보라 속에서 그가 결코 하늘을 바라보진 않았을 것 같았다. 몸은 얼어붙어 가고 어느 사이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철로를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겠지. 몇 번이나 다시 고개를 들려고 갈등을 벌였을까.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래도 살고 싶어 했을 실오라기 같은 욕망을 그는 정말 휴지조각처럼 마음 편하게 버렸던 것일까.
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간을 철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로지 혼자서, 아무도 붙잡아 줄 수가 없는 자신의 불행을 피울음으로 곱씹으면서, 그리고 끝내는 자신이 사라져야 하는 자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정말 그는 오늘 저녁부터 죽기를 결심하고 철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정말 죽기를 결심하고 나를 만났던 것일까.
“내 잘못도 크네.”
인구는 콧등이 다시 아릿해옴을 느꼈다. 그는 어제 오후 태호와의 마지막 술자리를 되살리고 있었다. 퇴근길에 나란히 사무실을 나선 두 사람은 근처의 자주 들르던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출근하자마자부터 태호는 저녁에 따로 시간약속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다섯 번이나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 약 효과가 있더구만. 요즘엔 밥맛도 좋고, 잠도 대충 편하게 자는 편이야. 그런데 말이네…….”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인구는 그의 그런데, 라는 말에 다시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문제를 꺼내고 있었다.
“채권자들이 집을 당장이라도 압류하겠다는 자세야. 이거 원, 불안해서…… 어디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지…….”
인구는 은근히 화가 났다.
“자네 왜 이러는 거야?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대두. 자네 처숙부께서 조만간에 수습이 된다고 조금만 참으라고 하셨쟎은가? 그리고 압류는 무슨 압류야? 육법전서 어디에 그런 조항이 있다는 거야?”
그러나 태호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의 섬세한 머리는 다른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속을 몇 번이나 넘나들면서 한참이나 넘겨짚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그마치 수 억이야. 한 번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선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일 년이 다 되어가지 않는가. 너무 힘이 들어. 하루도 더는 못 견디겠어…….”
인구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구 자신이래도 견디기 어려운 형세였다. 그러니 더욱 딱할 뿐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주어야 그가 조금이라도 불안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도대체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은 제대로 들고 있는가?”
“먹으면 뭘 해? 내가 무슨 병 있는 사람인가?”
인구가 화들짝 놀라는 사이 초점 없는 그의 눈이 슬쩍 시계를 향했다.
“가볼 데가 또 있어. 보자는 사람이 있어서…… 한 마디만 물어보자구…… 어쨌든 해결이 될 수 있는 일인가?”
인구는 그가 또 비상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 말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금 그가 궁극적으로 부딪쳐 있는 벽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말대로 지금의 돈 문제일까. 아니면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아이 문제일까. 아니면 가타부타 내색이 없는 아내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내면의 문제일까. 인구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태호, 인생사 모든 일이 딱부러지게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은 없지 않는가? 그저 복잡한 대로 참아가며 사는 거지. 세상에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럴까?”
그가 반문했었다.
인구는 몸을 떨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내가 무얼 안다고. 내가 세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또 그를 얼마나 이해한다고, 차라리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해줄 걸 그랬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내 말을 믿었을까.
그때 그는 바바리코트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불쑥 꺼내 놓았었다.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미 웬만큼 자란 사내아이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무언가?"
“잘 쳐다봐. 쳐다보면 알 수가 있어.”
인구는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금세 목구멍 저 편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 나왔다.
“그녀가 자꾸 내 아이라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맞을 거야. 이건 천벌이야. 그런데 난 돈이 없잖아?”
태호는 힘없이 일어섰다. 코트를 고쳐 입는 그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먼저 가네. 시간 내주어 고마워…….”

문득 문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해 집 근처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집엘 들렀는데요, 형한테 올 1월을 조심하라 했어요. 고비만 넘기면 괜찮아질거라고…….”
“태호도 들었는가?”
“예, 형도 들었어요.”
“…….”
“그 동안 애써주신 거 고마워요. 평생 미안한 일이지요. 형수님한테나 인구 형한테나……. 그 동안 형의 생명은 주변 몇몇 분들 덕분에 연장되어 왔던 걸 거예요.”
인구는 머리를 저으며 일어섰다.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건 체념이고 핑계에 불과해. 모두 우리들 때문이야. 우리 모두가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 그는 홀로 무작정 그 추운 철길을 걸으며 원망했을 것이다. 세상은 왜 나를 버렸을까. 왜 나는 이렇게 약하기만 한 것일까.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인구는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저만큼 눈보라 속에서 혜숙이 엎드려 미친 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누군가 혜숙으로부터 둘러멘 어린애를 떼어냈다.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자꾸 찢어져 가고 있었다. 인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오, 하느님!

며칠 후, 인구는 문호의 인사차인 전화를 받고 물었다. 입관 시에 부탁해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잘 집어넣었는가?”
“예.”
“아무도 본 사람은 없고?”
“전 보았지요. 형이었어요. 완전히 형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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