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암의 개구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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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의 금개구리 1
자장암의 금개구리를 보셨나요? 전설 속에서 문득 살아 돌아와 신령스럽게 앉아 있는 그 영물을 보셨나요? 보기만 하면 운수가 대통한다는 금개구리가 지금 자장암의 작은 암벽 구멍 속에서 천 년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금개구리가 아무에게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금개구리는 꼭꼭 숨어서 그가 바라는 누군가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지금 행운이 다가서고 있는 바로 당신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금개구리를 보고 나서 어쩌면 후회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금개구리가 그대에게 선물하는 행운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겠지만, 그 대신 그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아픔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신령스러운 금개구리와의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그녀의 전화를 받았지요. 그녀는 다짜고짜 당장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며, 만사 제쳐놓고 즉시 사무실로 와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장거리 운전을 부탁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까지도 종종 그렇게 해 왔던 그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답답해진 나는 물었죠.
“무슨 일인데 그렇게 다급해?”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올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만약 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전화통이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갈게.”
언제나 그녀는 마음 편하게 나의 도움을 청하고, 그 일로 인해 발생하는 내 문제는 내가 따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죠.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중요한 일로 목포에 내려가 있었을 때였지요. 물론 토요일이기는 하였으나 미리 그런 저런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꼭두새벽부터 핸드폰 번호를 열나게 두드렸나 봅니다.
잠결에 눈을 뜬 나는 거의 죽어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뒤이어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한 기세에 놀라 기차역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용무는 무슨 빌어먹을 용무입니까. 그녀가 금방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오전 중에 만나기로 해 두었던 약속을 피치 못할 사정을 들어 올라가는 열차 속에서 취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해서 그녀에게로 달려간 나는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습니다. 웬 걸요, 말짱하더란 말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당장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더라는 것이었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했습니다.
내가 가겠다고 대답을 하자 그제야 그녀가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부산에 사는 송 화백과의 출판계약 일자가 오늘로 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나는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그녀의 사무실에 들르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입니다. 그녀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얼마 전부터 송 화백의 인기 만화를 소설화시켜 보자는 기획안이 추진되고 있었지요.
요즘 소설 출판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웬 무협지가 줄줄이 등장하는가 하면, PC통신에 떠오르는 기묘한 작품들이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메우더니, 급기야는 인기 만화가 다시 소설화되어 짭짤한 재미를 주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선은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고, 독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어쩌면 작가들의 역할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작가들이야 죽을 맛이겠지요.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고, 고상하게 놀자니 먹고살기도 힘이 드는 판이 아닙니까?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도 아무 이상 없이 굴러가고 있는데요.
아마도 그 계획이 이제 결실을 맺어 가는 중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사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기획안이 질이나 량을 막론하고 그녀가 사운을 걸다시피 하며 추진했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좋은 책을 만들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곤 했지요. 그게 그녀가 출판 사업을 시작한 동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몇 년 사이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나라의 경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다보니까, 대형 출판물 유통업체들이 무너지고, 대형 출판사들이 무너지고, 군소 서점들이 무너지는 판이니, 그녀의 출판사라고 온전할 리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뽑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 동안 강 선배와의 줄다리기 협상이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결과일 것입니다. 강 선배는 부산의 송 화백이 만사를 위임한 대리인이지요.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조건을 따져 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원고를 자신이 쓰도록 해 달라며 협상을 마쳤습니다. 이미 그녀도 쓸 만한 작가를 물색해 둔 터라 난감하기는 하였으나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하여 충분히 명성을 얻고 있는 중견 소설가였으며 잘 나가는 방송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지요.
그가 송 화백이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산행을 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산이 가까운 이웃 동네는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말쯤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을 턱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차피 운전은 내가 해야 할 것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 선배가 돌연 주말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말의 계획은 변경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조퇴를 신청하고 곧장 출판사로 향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분명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이 생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너무도 가벼웠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뻔한 일이지요. 그녀와 이틀간을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꿈같은 사실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는 여태껏 열심히 써오던 시의 길을 버리고 소설가를 꿈꾸며 벌써 여러 차례의 여행 계획을 세웠으나 좌절된 판이었습니다. 그러니 뜬금없이 그녀와 떠나는 이 느닷없는 여행에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습니까? 또한 부산에서의 용무야 계약서에 날인만 하면 끝나는 것이므로, 나머지는 그야말로 신나는 관광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곧장 내려간다 하더라도 분명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출근은 불가능한 것이죠. 나는 결근을 해 버리기로 마음을 굳힌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잊고 다녀오자. 내 머리 속은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교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가 삼 년도 채 안 되는 햇병아리 교사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간덩이가 부어도 보통 부은 게 아닙니다. 아이들을 놓아두고 여자에 미쳐서 도대체 어디를 간다는 것입니까.
한 시간쯤 뒤 사무실에서 그녀와 합류한 나는 곧 바로 출발했습니다. 강 선배와 강남 지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이 코앞에 있었지요. 강 선배와 나는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스스럼없이 선배라고 부릅니다. 알고 보니까 그의 고향이 바로 내 고향이더라구요. 우리 사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친근해질 수가 있었거든요.
처음 이 협상이 벌어지면서 내가 그를 만나 보기 전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만나고 온 그녀가 내게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가서 취지를 설명했더니 그가 대뜸 사주를 묻더군요.”
그래서 별일도 다 있다 싶은 내가 물었죠.
“처음 만나는 사람 사이에 사주는 왜 물었을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송 화백과 사주가 맞아야 계약이 가능하대나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어 버렸습니다. 별 희한한 사람도 다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쨌든 역학에 일가견이 있다는 강 선배는 그녀의 사주를 받아 검토해 본 다음에야 선뜻 작업에 응하더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녀와 송 화백의 사주는 서로가 대단히 어울리는 사주이며, 잘하면 얼마든지 한 건 터트릴 수도 있는 기가 막힌 사주라는 것이었죠.
내가 나중에 그녀와 함께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저 사람이 바로 당신의 사주를 받아 간 인물이오, 하고 물었지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나는 다시 실없이 웃었습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약간의 비웃음이었지요. 사주를 받아보고서 출판계약을 결정하다니 도무지 어느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그녀 역시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의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녀의 웃음은 오히려 나를 비웃는 웃음이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곧 내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녀가 왜 나를 비웃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입니다. 매사가 다 그렇습니다만, 철저하게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지요. 그녀는 하루 종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생활을 해왔습니다. 크건 작건 그 일들은 모두 그녀에게는 그날 하루의 운수를 체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러누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이 정확하게 오늘 하루의 일들을 지배하거나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겁니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이해하기는 합니다. 이해를 못할 것도 없지요.
내가 어렸을 때의 시골 생활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구석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거든요. 그 시절 시골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여자를 먼저 보기만 해도 그 날은 재수가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시험이 있는 날에는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봐 허리가 구부러진 새우나 멸치조차도 먹지를 않았죠. 미역국은 더더욱 금해야할 음식이었잖아요? 학교에 가다가 논두렁길에서 뱀을 만나면 그 날은 반드시 비가 왔습니다. 겨울 들판에 까마귀가 날면 금방이라도 누가 죽어 나갈 것만 같았고요. 그래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내가 문지방을 발로 밟고 넘을 때마다 혀를 찼습니다. 그냥 건너뛰라는 말씀을 나는 자주 잊곤 했거든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런 금기사항들을 어기고 나면 하루 종일 심기가 불편하고 꺼림칙했으니 안 지킬래야 안 지킬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내가 자라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는 나는 그런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이미 멀리감치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로 하루의 운수를 예상하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한 마디로 일을 하기도 전에 김부터 빠진다는 이야깁니다. 그 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침부터 이미 재수가 있다 없다로 결론이 나 있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박력 있게 일을 추진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죠.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벌써 여러 번이나 그런 점에 대해 충고를 했습니다. 그래도 대학물을 먹은 출판사의 사장님인데, 아직도 그런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애당초 사업 키우기는 다 틀린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 날 그녀에게 벌어진 어그러진 일은 모두가 내 탓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날 그녀의 재수는 내가 모조리 깨트려 놓은 것이죠. 그런 사람이라서 그녀는 나를 비웃었던 겁니다.
그러나 내가 강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척 고상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체구는 비록 작아서 여려 보였으나, 적당하게 주름살이 잡힌 얼굴은 하얗고 부드러웠지요. 누구로부터도 얼마든지 호감을 받을 만한 대단히 편안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요즘 날씨에 비해 무척 더워 보이는 감색 사파리를 걸치고 있어서 아직 반 팔 윗도리를 입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답답해 보였는데, 나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죠. 그는 그 사파리 잠바의 곳곳에 달려 있는 주머니들 속에 여행과 취재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등의 제작으로 인해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도 자주 여행을 다니곤 한다는데, 그 잦은 여행이 그로 하여금 좀 무리가 따른다 하더라도 편리한 방식을 선택하도록 해 주었던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섣부른 역학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진행할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 대한 최초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 수정해야만 한다고 느끼던 참이었죠.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상호간에 적어도 기본적인 신뢰감만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는 나의 차에 오르자마자 부산까지의 장거리 운전을 맡아 준 점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죠. 보통 때 같으면 그녀는 분명 앞좌석, 그러니까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겠지만, 뭐 오늘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죠. 강 선배는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에게 나를 그녀의 출판사에서 책을 발간하는 저자의 하나쯤으로 소개를 했겠지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나를 출판사 직원의 하나쯤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그녀에게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죠. 느닷없이 연인 끼리나 쓰는 말이 튀어나오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개는 그녀와 송 화백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가끔은 그가 외국에서 취재 도중에 겪었던 이야기들도 섞여있기는 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나라에 들어가 취재할 때의 그 아슬아슬한 체험담은 사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이야기는 역시 그녀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허약한 상태임을 금방 알 수가 있었거든요. 키는 비록 여자로서는 큰 키라고 할 수가 있었으나, 그 큰 키에 비해서 몸무게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절반이나 될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죠. 게다가 조금만 많이 걷거나 힘든 일을 하게 되면 금방 헉헉거리며 힘에 겨워했죠.
나는 평소에도 그녀의 그 허약한 건강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그녀는 느닷없이 난리법석을 떤 적이 있었죠. 사무실 직원 아가씨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사장님이 여태 출근을 못하시는데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죠. 나는 곧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작은 아파트를 구입해서 혼자 살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역시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꾸 숨이 넘어가는 듯 힘이 들어서 내 말에 대꾸하기조차 어려워 보였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득달같이 달려갔습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가슴을 움켜쥐며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는데 아무래도 정말 심상치 않아 보였지요. 나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그녀를 들쳐 업었습니다. 그녀를 업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승용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은 후에 내가 운전석에 앉자마자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님에게로 가요.”
나는 갑자기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돼요. 스님에게로 가 줘요.”
그녀가 찾는 스님이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그 분은 서울이 아니라 한참이나 차를 달려야 하는 충청도의 깊은 산 속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곳에 암자를 세우기 전에 오랫동안 서울 근교에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녀와 각별한 인연이 생겼던 거죠. 그녀의 스님에 대한 신뢰도는 가히 신앙이라 할 만큼 두터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병원으로 가는 것보다 스님에게 가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결국 충청도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녀의 주장이 너무 강력해서 거부하기가 힘이 들었던 겁니다. 가다가 만일 상태가 더 나빠지면 근처의 병원 응급실이라도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나는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뒷좌석에 드러누운 채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울먹였습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속도로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지요. 내 머리 속에는 어서 빨리 스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시원스러운 국도로 접어들자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하던 날 밤 꿈에 말예요, 동자 스님이 나타났어요. 어찌나 귀엽게 놀던지 예뻐서 꼭 껴안아 줬지요. 아침에 일어나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 자기의 얼굴이 그 동자 스님과 너무 닮았던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동자라니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스님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네. 난 스님과는 인연이 멀잖아.”
그녀가 힘겹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보기에 좋았어요. 그 뒤부터는 일도 잘 풀렸구요…….”
국도를 벗어나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로 한 십 리쯤 들어가면 스님의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내리자마자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그 모습은 마치 부처님이 그녀를 법당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불상을 향해 한동안 연거푸 절을 하고 난 그녀는 법당을 나와 마당을 가로지르더니 외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무작정 기다렸죠. 내게는 다섯 시간보다 더 길어 보였지만 아마 두어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겁니다.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어요. 그녀의 뒤에 나이가 드신 스님의 평화로운 얼굴도 보이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모습이 달라져 있는 겁니다. 걷기조차 힘겨워 하던 그녀가 아장아장 잘도 걷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녀가 거의 정상적인 자세로 스님에게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자 스님이 말하더군요.
“괜찮다. 괜찮다. 걱정 안 해도 괜찮다. 곧 나아질 거야.”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했었으나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다 죽어가던 사람이 어떻게 두어 시간 만에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 활보를 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자리에 드러눕지 않았습니다. 아주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올 때처럼 다급하고 불안한 상황은 아니었죠. 내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어?”
그녀가 대답하더군요.
“나도 몰라요. 스님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픈 몸도 나아요.”
나는 그 며칠 후에 그녀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도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나 진찰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합검진을 실시한 결과는 비관적이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는지 의심스럽다고 하더군요. 몸이 한두 군데가 망가진 게 아니라더군요. 특히 허파 같은 장기는 이미 노쇠해져서 그 기능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아침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죠.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서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검사를 해야 할 게 아직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입원 치료가 뭡니까? 그녀는 병원에서 조제해준 약들조차도 하루 이틀 이상은 복용하지를 않더군요. 그녀는 병원을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정밀검사를 받아도 병원마다 결과는 달랐으며, 입원하여 누워있는 동안 의사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각종의 검사와, 동시에 받아야 하는 일종의 인간적인 모멸감 같은 것을 버거워하는 듯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약한 그녀이니 강 선배 역시 첫눈에도 불안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내가 저간의 사정과 그녀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는 말을 몇 마디 해 주었죠.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면서 그녀의 사주가 결코 병으로 쓰러질 사주는 아니라고 여러 차례나 강조를 하더군요. 앞으로 건강도 얼마든지 좋아질 것이고 사업도 번창할 것이니, 마음 놓고 잠도 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라고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을 하더군요. 그는 이번 송 화백의 책을 만드는 일이 그 시작이 될 것이라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말했습니다.
나도 강 선배의 그런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동안 그녀에게 그 두 가지를 가장 신경 써 왔지요. 그녀는 도무지 밥을 먹지를 않았던 겁니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일상적이었으며,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먹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러니 그녀에게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일 수밖에요.
또 하나는 잠을 제대로 자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감을 아예 집으로 들고 들어가서는 밤새 작업을 하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하여 예정된 일들을 하는 거지요. 도무지 언제 잠을 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건강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무너지게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랬으므로 나는 강 선배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또한 그녀는 자그마치 오륙 년 동안 이 사업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아직 그녀가 바라던 결과는 보지 못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별 자본도 없이 몸으로 뛰어든 사업이었지요.
대구쯤을 지나면서 강 선배는 송 화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가 우리가 도착할 때쯤 송 화백이 송도의 카페 카오스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약간 불안해졌습니다. 오늘의 계약이 만약 이 마지막 시점에서 빗나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거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며, 영락없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곤 합니다. 이것은 역시 지나친 기우였지요. 인생은 참으로 합리적이면서 상식적인 자세로 잘 흘러가고 있으며, 누구도 나 자신보다는 더 인간적이고, 더 상식적이고, 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이미 강 선배와 충분한 합의를 이루었으며, 오늘은 단지 송 화백 본인의 자필 사인을 받겠다는 것뿐인 터였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 역시 조금은 불안한 기색이더군요. 나는 그것이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녀도 역시 나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신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하는 말이려니 여기고 아직은 온갖 충성을 다하는 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잘난 생각도 무너지는 날이 있으리라 믿었지요. 아직 나는 그리 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내 입장도 어느 정도 감안이 된 결과입니다. 나는 당장 결혼을 해서 살림을 차릴 만한 여건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나는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나를 믿고 의지하라고 수십 번을 부탁해도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면 으레 나를 제쳐두고 철학관이나 그녀의 스님을 찾아갑니다. 스스로를 믿고 합리적으로 일을 풀어가면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안 되는 일을 귀신의 힘으로 되게 만들 수는 없는 거라고 열 번 스무 번 설명을 해 주어도 그야말로 우이독경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결국 큰일을 일구어낼 수 있다고 골백번 강조를 해도 그녀는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철학관엘 다녀오는 날이면 그때마다 무슨 좋은 말을 듣고 왔는지 싱글벙글입니다. 일이 풀어지는 걸 보면 내 보기에는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된 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지요. 그래도 나는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건강은 잘 먹고 잘 자면 되는 것이고, 일은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될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죠.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놈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약속 장소인 카페 카오스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송 화백의 문하생으로 보이는 두어 명의 사내들이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카오스가 들어선 이 건물은 송 화백의 소유이며 문하생들이 수련하는 연구실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강 선배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송 화백은 무척 평범하고 소탈한 인상이었지요. 그는 놀랄 만한 거구였으나 말할 때나 웃을 때에는 어린애와 같은 천진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쓸 만한 부산 촌놈이었습니다. 그가 안내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상견례를 끝내고 편안하게 앉았습니다. 그가 곧 우리에게 바다를 상기시켰지요. 그제야 나는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등지고 창가에 앉아 있었지요. 그것 역시 우리를 위한 그의 세밀한 배려였습니다.
송 화백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몇 푼이면 즐길 수 있는 바다를 혼자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한적한 해변에 그 값비싼 별장을 짓지요.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 선배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툭 하면 그런 사치성 별장이나 농장을 마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들도 머지않아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궁금한 내가 물었습니다.
“그건 왜죠?”
강 선배가 대답했습니다.
“아주 골치가 아파요. 요즘 시골 사람들도 보통내기들이 아니고요. 건물을 짓는 데서부터 관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문제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런 별장 하나쯤 갖고 싶었던 내 꿈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기기 전에 그녀는 서둘러 계약서를 꺼냈습니다. 이미 강 선배를 통해 모든 것이 전달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 화백은 그저 건성으로 계약서를 그냥 훑어보기만 했습니다. 강 선배가 나서더군요.
“아주 잘 된 계약서입니다.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송 화백이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하더군요.
“예, 그래 보이네요.”
그가 사인을 끝내자 그녀는 준비한 계약금을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솔직한 자세로 봉투 속의 수표를 꺼내 헤아리고 난 후에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계약은 탈 없이 끝났습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녀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습니다.
횟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부터는 강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먼저 송 화백이 자신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그를 칭찬했지요. 그녀가 그 말을 받아 송 화백에게 조금도 누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신하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송 화백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그가 잘 메워 주고 있다고 다시 힘주어 말했지요.
송 화백은 자신이 특히 금전 관리에 있어 너무 취약한 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인간적으로 처신하다 보니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그 결과 여러 출판사와의 출판계약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게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런 점으로 인해 이번 계약에 있어서 아마도 그의 대리인인 강 선배가 여간 깐깐하게 굴지 않았을 거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대충대충으로 인한 송 화백의 취약점을 강 선배는 충분히 보완해 주고도 남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그는 우리와의 협상 때에 보통 깐깐한 자세가 아니었지요. 계약서의 문구 하나까지도 정확성을 기하려 애를 썼으며, 우리가 피곤해 하는 기색이 보일 때에는 언제든지 사과의 말과 함께 이것은 송 화백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송 화백은 강 선배가 자신의 운세 관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강 선배가 송 화백의 대운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지요. 그는 송 화백이 현재 대운을 만나 기세 좋은 바람을 타고 상승하고 있다고 추켜세웠습니다. 또한 그의 사주팔자를 짚어 보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만한 보기 드문 제왕격의 운세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운세니 제왕격이니 하는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런 대로 대충은 알아들을 듯도 했으므로 그저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송 화백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더군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왕격을 가질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대운조차도 갖지 못한 사람이 절반이 넘지요. 그들은 평생 운명적으로 대운 한번 잡아 보지 못하고 절망 속에 살다가 이승을 뜨게 됩니다.”
나는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운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살다가 가게 될 사람들 중에 바로 내가 끼어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대운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강 선배가 대답했죠.
“간단하게 말하면 한번 터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다는 의미에 해당하겠죠.”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왕격이란 엄청난 사주겠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죠. 터져도 왕창 터지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제왕이 될 수 있는 사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에야 대단한 성공을 이룰 사람의 사주를 말한다고 보아야겠죠.”
그러니 당연히 제왕격의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 많을 수는 없는 이치였습니다. 그런 제왕격의 대단한 사주를 타고난 송 화백이니 젊어서는 비록 고생을 했다지만 오늘날의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송 화백은 만화계의 거물입니다. 지금 그의 주가는 국내 단독 일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각종 스포츠지에는 그의 만화가 판을 치고 있었으며, 문하생만 해도 서울과 부산을 합해 그룹별로 10여 개가 넘는 엄청난 사단을 구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는 가히 전설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 선배가 말을 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탈옥수는 아마 잡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도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절대로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 아까운 대운을 기껏해야 달아나는데 쓰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일 뿐이죠.”
그 탈옥수는 벌써 일 년 이상이나 잡히지 않고 신출귀몰하게 탈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말도 무성하죠. 아마도 그는 이미 외국으로 밀항을 했을지도 모른다거나, 아니면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아니면 아직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숨어 있을 것이라거나, 하는 말들인데,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긴 합니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흔적조차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까? 하기야 오래 전에 끔찍한 고문 기술자로 수배를 받아온 어떤 인물도 그 흔적이 오리무중이잖습니까? 그렇다면 그도 사주 하나는 쓸만한 것을 타고났기 때문에 잡히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강 선배가 다시 말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풀어 보니 대운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그런데 그들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 감옥에 갇힘으로 해서 그 대운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들 중 현재 대운을 맞이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감옥에서 누군가의 사식을 받으며 그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아까운 대운을 소진시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차츰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갔습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운수나 사주 같은 것을 믿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뭐 별거냐는 것이었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다 가는데 거기에 무슨 논리적인 인생이 있겠느냐 싶었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은 정해진 사주팔자 대로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어쩔 수 없는 변화에 의할 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었죠.
어쨌든 평생 한 번도 사주팔자에 관심조차 없었던 나로서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까부터 대운이 없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송 화백의 말에 상당히 기운이 빠져 있었잖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날까지 한 번도 나에게 대운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 알량한 글재주로 겨우겨우 벌어먹고 살 것이라는 이야기나 두어 번 들어왔던 터이죠.
어쩌면 이것은 나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운명이 만약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 운명은 썩 좋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나도 손금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재미 삼아 나의 손바닥을 내밀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내 손금에 담겨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의 운명을 선뜻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손금에 담긴 내 운명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들이 말로 뱉어낼 수가 없었던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죠. 얼마나 좋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나와 함께 손금을 내미는 다른 사람들의 손금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곤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나는 서서히 네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운명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거나 아니면 운명론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방향으로 돌아섰던 지도 모르죠.
사실 나는 요즘 들어 새로운 고민거리를 풀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걸어왔던 시의 길은 결국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던가. 나는 시에 내 소중한 십여 년의 세월을 투자하며 다부지게 부딪쳐 왔지만, 시는 나에게 아직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독자나 평자들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어서도 시는 아직 아무런 의미도 던져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만 같았습니다. 구역질나는 시단의 풍토는 학연과 지연과 기타 무수한 인연들로 분명하게 줄을 서고 있는 것만 같았죠. 그러나 똥개의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그런 일부 시단의 풍토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기실 나 자신이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지요. 나는 분명 똥개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교직 사회는 어떤가요? 혹시 가장 전근대적인 교육 자세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말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교육개혁을 시도해 보라 이겁니다. 교육계는 꿈쩍도 하지 않을 자세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무언지 아십니까? 교육자들이 나라의 경제를 이 꼴로 만들었나요? 교사들에게 건네는 촌지가 나라를 망치는 뇌물이었나요? 교사의 사기를 떨어트리면 교육개혁이 되는 겁니까? 일선 교사들이 참교육을 부르짖을 때는 그들을 교단에서 몰아내고 감옥에 처박아 넣었으면서 당신들이 참교육을 부르짖으면 따라갈 교사들이 있으리라고 믿었나요? 교사들이 학생입니까? 어린애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익힌 방식대로 그냥 살아가겠다 이겁니다. 나라가 이 꼴이 된 책임은 책임질 인사들에게 당당하게 물어라 이겁니다. 그러니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가고 있었어요. 개혁은 밑으로부터 충분히 모가지가 잡혀 있는 셈이죠. 당연한 일입니다. 교사의 창의적인 능력과 발전적인 자세가 빨갱이나 운동권으로 비쳐지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으니까요. 국어나 영어, 수학 등의 주지 과목이 아니면 학생들조차 열과 성이 떨어지고 마는 세상입니다. 세칭 기타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의 입장을 들어 보셨나요?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교단에 서 있어야 할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민족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나라의 형편이 이상해지더니 급기야 공무원들의 봉급이 삭감이 되고 정년이 단축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봉급을 줄인다느니 말도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가라는 소리이니 더 붙잡고 아옹다옹해 봐야 스스로 비참할 뿐인 냉혹한 현실이 바로 오늘이 아닙니까? 나는 하루라도 빨리 교단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부모님과 형제들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많다 보면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기엔 너무 벅찼지요. 내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고, 부모님께서도 아직은 그리 연세가 많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집을 줄여서라도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집을 구입할 때 얻었던 대출금의 이자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약간의 고통을 감수하자는 이런 내 의견에 그러나 형제들은 모조리 반기를 들었습니다. 부모님에 한해서는 그것도 예외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님께 충격을 주거나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말이야 옳은 말이고 효성도 지극했죠. 어떻게 늙으신 부모님께 자식이 당분간일지라도 고통을 감내해 달라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결국 매사에 있어 생겨나는 문제는 역시 돈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무언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내가 무언가를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직장을 미련 없이 때려치우고 그 새로운 세계에 얼마든지 도전해 보고 싶었지요. 교직 생활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소설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승부가 확실하게 나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보다도 말입니다.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든지 그녀를 내 곁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녀가 나를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나는 그녀에게 최선의 배려와 충성을 아끼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머지않은 날에 그녀와의 결혼에 골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송 화백에게 물었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인간은 너무도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운명적으로 대운이 기다리고 있어서 펑펑 놀아도 기회가 오게 되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대운이 없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비실대며 살다 가야 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깁니까?”
송 화백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돈이나 명성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성공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그렇지요.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평범하게 가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다시 물었습니다.
“어쨌든 사주가 좋지 않은 사람이 대운을 잡는 경우는 없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아마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하지만 어딘가 빠져나갈 구멍은 있지 않을까요? 무슨 문제든 처방이란 반드시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방법이 있기는 있지요.”
나는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게 무엇이죠?”
“생일을 다시 받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사주를 다시 받는 것이니 대운을 잡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주는 반드시 신이 내린 사람으로부터 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곧 죽어도 살아날 방법은 있다 하지 않았는가. 내 사주가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이제 그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내린 사람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듣고 있던 강 선배가 말했습니다.
“내가 몇 년 전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졌었지요. 평생 모아 두었던 재산이 한꺼번에 모조리 사라져 버렸어요. 어리석게도 사람을 믿은 탓이었지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불쌍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했어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면목도 없었지요. 그래서 집을 떠나 전국을 헤맸어요.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평생 남에게 죄다운 죄 한번 짓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주어졌는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집에 돌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어요. 어딘가에 분명 문제가 있었으므로 이런 결과가 벌어졌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내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려야 하는가.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말인가.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신이 내렸다는 한 영험한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 분이 나를 보더니 단번에 그러더군요.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담벼락이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고요. 나는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바가 있어 순간 다급하게 외쳤지요. 할머니, 정말입니까?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보인단 말입니까?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더군요. 그 담벼락 때문에 당신의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야. 아직 멀었어, 라고 말입니다. 나는 할머니 앞에 무작정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요. 할머니, 제발 그 담벼락을 풀어 주세요. 그걸 알려고 제가 여태껏 헤매고 다녔습니다. 신이 절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할머니를 만났으니 전 이제 살아날 길도 있다고 믿습니다. 할머니가 그러더군요. 당신의 운세는 끝났다구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일어설 수가 없다구요.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결국 할머니는 내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것은 일종의 방생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말대로 어느 해 저물녘에 한강 고수부지로 나갔지요. 여러 가지 제수와 미꾸라지 서른 마리를 들고 말입니다. 적당한 자리에 제사상을 차리고 아홉 번 절을 하고 미꾸라지를 강물에 집어넣은 다음 나는 그분이 시킨 대로 만년 후에 만납시다 하고 외쳤지요. 그리고 나서 막 돌아서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갑자기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어요. 그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지요. 그러자 수십 미터에 이르는 강물이 둔치를 향해 출렁이고 있었어요. 바람도 없었지요. 둔치 밑은 물이 쏟아져 나올 만한 하수구도 보이지 않았구요. 콘크리트로 잘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그곳에 무슨 다른 것이 설치되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하며 탄성을 질렀어요. 참으로 영험한 할머니셨구나. 드디어 나를 둘러싼 담벼락이 허물어지고 있구나. 그리고는 말입니다. 그 뒤부터는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이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강 선배님은 자신의 운세를 방생으로 바꾸어 놓으셨군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중요한 것은 사람은 자신의 운세를 관리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 수는 없는 거지요. 그것은 인체의 바이오리듬과도 비슷한 것인데, 적절히 대응하며 물러서기도 하고 나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운이 물러가고 있는 시점에 무리하게 큰일을 시도하면 당연히 손해를 입거나 몸을 상하게 되지요. 또한 운이 다가서는 시점에 잠자코 앉아서 낮잠이나 잔다면 그 운은 그냥 왔다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겁니다. 나는 그 점을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결국 나는 매일매일 나의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아예 사주 보는 법을 배우기로 했어요. 매번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역학을 잘 아는 선생님을 찾게 되었고, 그 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마저도 제 실력을 인정해 주는 형편이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신이 내린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다만 나의 운세를 관리하기 위해 역학을 배웠을 뿐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이거 역사가 뒤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힘으로는 인생이나 자연이나 우주의 신비를 푸는 데에는 역부족일 것 같군요. 이러다가는 아예 신화의 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요?”
강 선배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요즘은 바야흐로 그 신화의 시대로 진입하는 듯한 인상이 짙습니다. 신들이 추앙 받는 시대가 다시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송 화백의 작품도 제목에 신(神) 자가 들어가는 것은 모조리 뜨고 있단 말입니다.”
송 화백이 응수했습니다.
“그래요. 그게 참 이상하데요. 알고 보니까 문제는 신에 있었어요. 적어도 나한테만은 말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살기가 어려워지고 비전이 사라지다 보니까 그런 현상이 오는 게 아닐까요? 인간은 본래 왜소한 존재잖아요? 자신의 왜소함을 느낄수록 전능한 존재의 힘은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닐까요?”
송 화백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강 선배에게 부탁했지요.
“오늘 밤 제 운세를 보아주시겠습니까?”
나는 강 선배에 대해 서서히 두려운 마음조차 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이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그 동안 내 능력보다는 막무가내의 오기와 치기로 내 주변을 점령하고 군림해왔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보았죠. 그런 나를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을까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군요.
강 선배는 절대로 섣부른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는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안으로는 무서운 치열성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송 화백이 말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운세를 관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열 여덟 나이에 만화가의 길로 뛰어 들었지요. 그리고 짧지 않은 세월을 그 길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주목해 주지 않았어요. 스승님 역시 다른 문하생들보다 발전이 더딘 나를 처음에는 주목하지 않았어요. 내 그림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거든요. 내가 보기에도 전혀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으며, 어딘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그림에 비해 부족한 구석이 많아 보였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까 개선할 부분이 어디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을 겁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절망했어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도 했지요. 이제 다른 길로 방향을 바꿀 만한 여유도 없었으니까요.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그렸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후배들마저 유망주로 떠올라 보란듯이 내 앞을 질주해 나갔어요. 참으로 참기 어려운 시기였어요. 정말 그림을 때려치우고 막노동판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던 때도 있었지요. 보세요. 내 덩치는 막노동판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덩치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포기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간에 나는 내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나는 내가 그림보다는 콘티가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하다보니까 스스로 터득하고 발견한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 뒤부터는 한 장짜리 그림을 열심히 연습하는 일은 제쳐두고,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리며 연출을 시도하곤 했지요. 어느 날 선생님이 이런 나의 그림을 발견하셨어요. 나는 스승님의 눈이 그렇게 커지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나를 콘티 쪽으로 돌려 세웠지요. 그 날부터 나의 대운이 터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건 자화자찬일지는 모르겠지만 대운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필요한 것은 또 있는 겁니다. 그 대운을 붙잡으려면 천재적인 능력과 성실한 노력, 그리고 창의적인 자세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여된다면 결국 그 대운을 붙잡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강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일에나 분명 천재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천재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대운을 만나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일인자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말했죠.
“일인자가 되는 데에 천재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그 일도 일 나름일 것이라는 생각도 버리지는 못 하겠네요. 아직 미개척 분야라면 천재성이 없더라도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구요. 어느 분야에서건 일인자가 반드시 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천재는 비극적인 면도 많이 갖고 있지 않습니까?”
송 화백이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성공은 건강과 명예와 부를 동시에 얻는 것이라고 보아야겠죠.”
우리는 다시 카오스 지하의 단란주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웨이터가 들어왔고 송 화백이 발렌타인을 주문했지요. 웨이터가 약간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알아보겠다며 나갔습니다. 아마도 그 발렌타인이 지금은 없을 수도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가 나가자 송 화백의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들과 카오스 직원들 간의 축구 경기를 매주 벌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거푸 완승을 하다가 지난주에는 이상하게 커다란 점수 차로 패했다는 것입니다. 실력은 월등하게 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연패한 상대편의 우두머리가 패인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유니폼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나요.”
우리는 모두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결국 문하생들이 유니폼을 새로 만들어 입은 그들에게 패하고 말았다니 요절복통할 일이 아닙니까?
웨이터가 발렌타인을 구해들고 들어오자 송 화백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축구 잘합니까?”
그가 이상한 얼굴로 송 화백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대답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강 선배가 말했습니다.
“다음에는 아예 축구 선수를 초빙해 오겠군요.”
송 화백이 말했습니다.
“우리 문하생들 말예요. 공 아주 잘 찹니다. 매일 새벽운동에 거의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있어요. 웬 줄 아세요? 출석률이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푸짐한 상품을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게임에 이기기만 하면 또 다른 상품이 있구요. 작년에는 이 약속을 지키느라고 지출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상품 타려고 부득불 새벽운동에 빠지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요. 기껏해야 한두 명이나 상품을 타갈 줄 알았는데, 웬 걸요. 거의 전원에게 상품을 안겨주어야 했으니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동안 그녀는 말없이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죠.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시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는 것을 애타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먼저 일어서자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지요. 오늘은 우리가 손님이고 송 화백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정성껏 손님을 대접하고 있는 마당에 손님이 자리를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소 주량이 적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전혀 마시지를 못하고 있었죠. 몸의 컨디션이 최악의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강 선배가 역시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연신 그녀의 손을 주무르며 혈액 순환을 돕고 있었죠.
송 화백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얼추 반시간이 지났으리라 여겨 자리에서 일어설까 하고 망설이는데 송 화백이 내 어깨를 잡았습니다.
“모처럼 부산에까지 내려왔는데, 마음 놓고 술을 마셔야지요. 내일은 오전에 좀 쉬셔도 되지 않나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기색을 살폈습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지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강 선배와 나는 그녀를 옆방에 밀어 넣은 후에 간단히 몸을 씻고는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그녀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나와 단둘이서 바닷바람이라도 쏘이고 싶어 했지만, 나는 강 선배로부터 사주를 풀어 보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강 선배는 가방 안에서 작은 역학서적 한 권과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바야흐로 내게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죠. 그가 생년월일을 물었습니다. 서른 둘의 나이에 양띠며 음력 모월 초하룻날 모시. 나는 그에게 이 사주를 대면서 스스로 머리가 쭈삣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동안 내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지 못 했었지요. 다만 당시 시골 부잣집 저녁 개밥 줄 때쯤이라고 다소 낭만적인 방식으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부잣집 개밥 주는 시간이 도대체 몇 시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며칠 전 나는 어머님께 우연히 이 출생 시에 대해 분명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시골에서는 농사일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개밥을 주는 거야.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강 선배가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두 분이셨군요?”
기절초풍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항이 사주에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그의 말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초혼에 실패한 적이 있었지요. 그 큰어머니는 시집온 지 일 년 만에 몹쓸 병을 얻어 운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해마다 그 큰어머니의 제사상을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모를 리가 없지요.
“맞습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님이 두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외할아버지도 두 분이셨습니다. 나는 내 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만하면 그의 솜씨는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었으니까요.
강 선배는 나의 운명에 대해 비교적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교적 희망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나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감격했지요. 나에게도 작지만 희망이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상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하다는 대운이 나에게도 아직 남아 있었으며, 게다가 그것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니 이처럼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나의 운세가 나이가 들수록 좋아진다는 말을 듣고 나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더군요. 운세가 좋은 것이 아니리란 지레짐작 상태에서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던 사주팔자가 그런 대로 괜찮다니 너무나 믿고 싶은 겁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의 노년기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명성과 부가 넘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다가오는 대운일지라도 관리하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들은 나로서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나의 불찰에 의해 다가서던 대운이 방향을 바꾸어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이 무슨 낭패입니까? 그래서 나는 강 선배에게 물었지요.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조심해야할 사항이 있겠지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운 관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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