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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의 금개구리 1(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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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503회 작성일 02-06-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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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의 금개구리를 보셨나요? 전설 속에서 문득 살아 돌아와 신령스럽게 앉아 있는 그 영물을 보셨나요? 보기만 하면 운수가 대통한다는 금개구리가 지금 자장암의 작은 암벽 구멍 속에서 천 년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금개구리가 아무에게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금개구리는 꼭꼭 숨어서 그가 바라는 누군가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지금 행운이 다가서고 있는 바로 당신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금개구리를 보고 나서 어쩌면 후회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금개구리가 그대에게 선물하는 행운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겠지만, 그 대신 그대의 가장 소중한 다른 것을 잃어버리는 커다란 아픔도 동시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신령스러운 금개구리와의 만남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그녀의 전화를 받았지요. 그녀는 다짜고짜 당장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며, 만사 제쳐놓고 즉시 사무실로 와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장거리 운전을 부탁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까지도 종종 그렇게 해 왔던 그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물었죠.
“무슨 일인데 그렇게 다급해?”
그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올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만약 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전화통이 부서질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갈게.”
언제나 그녀는 마음 편하게 나의 도움을 청하고, 그 일로 인해 발생하는 내 문제는 내가 따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죠.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중요한 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을 때였지요. 물론 토요일이기는 하였으나 미리 그런 저런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꼭두새벽부터 핸드폰 번호를 열나게 두드렸나 봅니다.
잠결에 눈을 뜬 나는 거의 죽어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뒤이어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한 기세에 놀라 고속도로를 달려야 했습니다. 용무는 무슨 빌어먹을 용무입니까. 그녀가 금방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오전 중에 만나기로 해 두었던 약속을 피치 못할 사정을 들어 올라가는 승용차 안에서 취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해서 그녀에게로 달려간 나는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습니다. 웬 걸요, 말짱하더란 말입니다.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당장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더라는 것이었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했습니다.
내가 가겠다고 대답을 하자 그제야 그녀가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부산에 사는 송 화백과의 출판계약 일자가 오늘로 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나는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그녀의 사무실에 들르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입니다. 그녀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얼마 전부터 송 화백의 인기 만화를 소설화시켜 보자는 기획안이 추진되고 있었지요.
요즘 소설 출판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웬 무협지가 줄줄이 등장하는가 하면, PC통신에 떠오르는 기묘한 작품들이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메우더니, 급기야는 인기 만화가 다시 소설화되어 짭짤한 재미를 주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선은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고, 독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어쩌면 작가들의 역할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작가들이야 죽을 맛이겠지요.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고, 고상하게 놀자니 먹고살기도 힘이 드는 판이 아닙니까?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도 아무 이상 없이 굴러가고 있는데요.
아마도 그 계획이 이제 결실을 맺어 가는 중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사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기획안이 질이나 량을 막론하고 그녀가 사운을 걸다시피 하며 추진했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처음에는 좋은 책을 만들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곤 했지요. 그게 그녀가 출판 사업을 시작한 동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몇 년 사이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나라의 경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다보니까, 대형 출판물 유통업체들이 무너지고, 대형 출판사들이 무너지고, 군소 서점들이 무너지는 판이니, 그녀의 출판사라고 온전할 리는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카드를 뽑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 동안 강 선배와의 줄다리기 협상이 서로 좋은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결과일 것입니다. 강 선배는 부산의 송 화백이 만사를 위임한 대리인이지요.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조건을 따져 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원고를 자신이 쓰도록 해 달라며 협상을 마쳤습니다. 이미 그녀도 쓸 만한 작가를 물색해 둔 터라 난감하기는 하였으나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하여 충분히 명성을 얻고 있는 중견 소설가였으며 잘 나가는 방송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지요.
그가 송 화백이 계약서에 직접 사인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산행을 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산이 가까운 이웃 동네는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말쯤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을 턱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어차피 운전은 내가 해야 할 것으로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 선배가 돌연 주말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말의 계획은 변경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곧장 출판사로 향했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분명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이 생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너무도 가벼웠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뻔한 일이지요. 그녀와 이틀간을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꿈같은 사실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는 여태껏 열심히 써오던 시의 길을 버리고 소설가를 꿈꾸며 벌써 여러 차례의 여행 계획을 세웠으나 좌절된 판이었습니다. 그러니 뜬금없이 그녀와 떠나는 이 느닷없는 여행에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습니까? 또한 부산에서의 용무야 계약서에 날인만 하면 끝나는 것이므로, 나머지는 그야말로 신나는 여행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곧장 내려간다 하더라도 분명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출근은 불가능한 것이죠. 나는 결근을 해 버리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다녀오자. 내 머리 속은 정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 사무실에서 그녀와 합류한 나는 곧 바로 출발했습니다. 강 선배와 강남 지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이 코앞에 있었지요. 강 선배와 나는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스스럼없이 선배라고 부릅니다. 알고 보니까 그의 고향이 바로 내 고향이더라구요. 우리 사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친근해질 수가 있었거든요.
처음 이 협상이 벌어지면서 내가 그를 만나 보기 전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만나고 온 그녀가 내게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가서 취지를 설명했더니 그가 대뜸 사주를 묻더군요.”
그래서 별일도 다 있다 싶은 내가 물었죠.
“처음 만나는 사람 사이에 사주는 왜 물었을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송 화백과 사주가 맞아야 계약이 가능하대나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어 버렸습니다. 별 희한한 사람도 다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어쨌든 역학에 일가견이 있다는 강 선배는 그녀의 사주를 받아 검토해 본 다음에야 선뜻 작업에 응하더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녀와 송 화백의 사주는 서로가 대단히 어울리는 사주이며, 잘하면 얼마든지 한 건 터트릴 수도 있는 기가 막힌 사주라는 것이었죠.
내가 나중에 그녀와 함께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저 사람이 바로 당신의 사주를 받아 간 인물이오, 하고 물었지요.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나는 다시 실없이 웃었습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약간의 비웃음이었지요. 사주를 받아보고서 출판계약을 결정하다니 도무지 어느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그녀 역시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의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녀의 웃음은 오히려 나를 비웃는 웃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곧 내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녀가 왜 나를 비웃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입니다. 매사가 다 그렇습니다만, 철저하게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지요. 그녀는 하루 종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생활을 해왔습니다. 크건 작건 그 일들은 모두 그녀에게는 그날 하루의 운수를 체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밤늦게 잠자리에 드러누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이 정확하게 오늘 하루의 일들을 지배하거나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겁니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이해하기는 합니다. 이해를 못할 것도 없지요.
내가 어렸을 때의 시골 생활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구석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거든요. 그 시절 시골에서는 아침에 집을 나서서 맨 먼저 여자를 먼저 보기만 해도 그 날은 재수가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시험이 있는 날에는 혹시 부정이라도 탈까봐 허리가 구부러진 새우나 멸치조차도 먹지를 않았죠. 미역국은 더더욱 금해야할 음식이었잖아요? 학교에 가다가 논두렁길에서 뱀을 만나면 그 날은 반드시 비가 왔습니다. 겨울 들판에 까마귀가 날면 금방이라도 누가 죽어 나갈 것만 같았고요. 그래요, 우리 어머니께서는 내가 문지방을 발로 밟고 넘을 때마다 혀를 찼습니다. 그냥 건너뛰라는 말씀을 나는 자주 잊곤 했거든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런 금기사항들을 어기고 나면 하루 종일 심기가 불편하고 꺼림칙했으니 안 지킬래야 안 지킬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내가 자라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는 나는 그런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이미 멀리감치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들로 하루의 운수를 예상하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한 마디로 일을 하기도 전에 김부터 빠진다는 이야깁니다. 그 날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침부터 이미 재수가 있다 없다로 결론이 나 있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박력 있게 일을 추진하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죠. 아무리 열심히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벌써 여러 번이나 그런 점에 대해 충고를 했습니다. 그래도 대학물을 먹은 출판사의 사장님인데, 아직도 그런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애당초 사업 키우기는 다 틀린 거 아니냐고요.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 날 그녀에게 벌어진 어그러진 일은 모두가 내 탓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날 그녀의 재수는 내가 모조리 깨트려 놓은 것이죠. 그런 사람이라서 그녀는 나를 비웃었던 겁니다.
그러나 내가 강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척 고상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체구는 비록 작아서 여려 보였으나, 적당하게 주름살이 잡힌 얼굴은 하얗고 부드러웠지요. 누구로부터도 얼마든지 호감을 받을 만한 대단히 편안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요즘 날씨에 비해 무척 더워 보이는 감색 사파리를 걸치고 있어서 아직 반 팔 윗도리를 입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답답해 보였는데, 나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죠. 그는 그 사파리 잠바의 곳곳에 달려 있는 주머니들 속에 여행과 취재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등의 제작으로 인해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도 자주 여행을 다니곤 한다는데, 그 잦은 여행이 그로 하여금 좀 무리가 따른다 하더라도 편리한 방식을 선택하도록 해 주었던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섣부른 역학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하거나 진행할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 대한 최초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 수정해야만 한다고 느끼던 참이었죠.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상호간에 적어도 기본적인 신뢰감만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는 나의 차에 오르자마자 부산까지의 장거리 운전을 맡아 준 점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죠. 보통 때 같으면 그녀는 분명 앞좌석, 그러니까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겠지만, 뭐 오늘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죠. 강 선배는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에게 나를 그녀의 출판사에서 책을 발간하는 저자의 하나쯤으로 소개를 했겠지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나를 출판사 직원의 하나쯤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나는 그녀에게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죠. 느닷없이 연인 끼리나 쓰는 말이 튀어나오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개는 그녀와 송 화백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가끔은 그가 외국에서 취재 도중에 겪었던 이야기들도 섞여있기는 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나라에 들어가 취재할 때의 그 아슬아슬한 체험담은 사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역시 그녀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허약한 상태임을 금방 알 수가 있었거든요. 키는 비록 여자로서는 큰 키라고 할 수가 있었으나, 그 큰 키에 비해서 몸무게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절반이나 될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죠. 게다가 조금만 많이 걷거나 힘든 일을 하게 되면 금방 헉헉거리며 힘에 겨워했죠.
나는 평소에도 그녀의 그 허약한 건강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그녀는 느닷없이 난리법석을 떤 적이 있었죠. 사무실 경리 아가씨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사장님이 여태 출근을 못하시는데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죠. 그 경리 아가씨야 이미 우리 사이를 절반 이상은 눈치를 채고 있었고, 그래서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죠.
나는 곧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작은 아파트를 구입해서 혼자 살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도무지 힘이 들어서 내 말에 대꾸하기조차 어려워 보였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득달같이 달려갔습니다. 조금만 더 늦으면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누워 있었습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가슴을 움켜쥐며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는데 아무래도 정말 심상치 않아 보였지요. 나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그녀를 들쳐 업었습니다. 그녀를 업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승용차의 뒷좌석에 밀어 넣은 후에 내가 운전석에 앉자마자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님에게로 가요.”
나는 갑자기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돼요. 스님에게로 가요.”
그녀가 찾는 스님이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그 분은 서울이 아니라 한참이나 차를 달려야 하는 충청도의 깊은 산 속의 암자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곳에 암자를 세우기 전에 오랫동안 도봉산 부근의 작은 암자에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녀와 각별한 인연이 생겼던 것이죠. 아마도 시초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니던 암자의 스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온 식구가 그 스님을 마치 집안의 큰 어르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 것이겠지요.
그녀의 스님에 대한 신뢰는 가히 신앙이라 할 만큼 두터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부처님의 세계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스님을 향해 있으니 내게 좀 이상해 보이긴 했었지요. 어쨌거나 그녀는 병원으로 가는 것보다 스님에게 가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결국 충청도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녀의 주장이 너무 강력해서 거부하기가 힘이 들었던 겁니다. 가다가 만일 상태가 더 나빠지면 가까운 병원 응급실이라도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나는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뒷좌석에 드러누운 채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울먹였습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속도로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지요. 내 머리 속에는 어서 빨리 스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시원스러운 국도로 접어들자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하던 날 밤 꿈에 말예요, 동자 스님이 나타났어요. 어찌나 귀엽게 놀던지 예뻐서 꼭 껴안아 줬지요. 아침에 일어나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 자기 얼굴이 그 동자 스님과 너무 닮았던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동자라니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스님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네. 난 스님과는 인연이 멀잖아.”
그녀가 힘겹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보기에 좋았어요. 그 뒤부터는 일도 잘 풀렸구요…….”
국도를 벗어나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로 한 십 리쯤 들어가면 스님의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지요. 내리자마자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법당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그 모습은 마치 부처님이 그녀를 법당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불상을 향해 한동안 연거푸 절을 하고 난 그녀는 법당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외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가 도착할 때부터 지그시 지켜보던 한 노스님이 아무 말 없이 다시 들어가 문을 닫은 방이었습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무작정 기다렸죠. 내게는 다섯 시간보다 더 길어 보였지만 아마 두어 시간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방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어요. 그녀의 뒤에 나이가 드신 스님의 평화로운 얼굴도 보이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모습이 달라져 있는 겁니다. 걷기조차 힘겨워 하던 그녀가 아장아장 잘도 걷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녀가 거의 정상적인 자세로 스님에게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이자 스님이 말하더군요.
“괜찮다. 괜찮다. 걱정 안 해도 괜찮다. 곧 나아질 거야.”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나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했었으나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다 죽어가던 사람이 어떻게 두어 시간 만에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 활보를 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자리에 드러눕지 않았습니다. 아주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올 때처럼 다급하고 불안한 상황은 아니었죠. 내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어?”
그녀가 대답하더군요.
“나도 몰라요. 스님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픈 몸도 나아요.”
나는 그 며칠 후에 그녀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도 끝까지 거부하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나 진찰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합검진을 실시한 결과는 대단히 비관적이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환자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는지 의심스럽다고 하더군요. 몸이 한두 군데가 망가진 게 아니라더군요. 특히 허파 같은 장기는 이미 노쇠해져서 그 기능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아침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죠.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서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검사를 해야 할 게 아직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입원 치료가 뭡니까? 그녀는 병원에서 조제해준 약들조차도 하루 이틀 이상은 복용하지를 않더군요. 그녀는 병원을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정밀검사를 받아도 병원마다 결과는 달랐으며, 입원하여 누워있는 동안 의사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각종의 검사와, 동시에 받아야 하는 일종의 인간적인 모멸감 같은 것을 버거워하는 듯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약한 그녀이니 강 선배 역시 첫눈에도 불안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내가 저간의 사정과 그녀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는 말을 몇 마디 해 주었죠.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면서 그녀의 사주가 결코 병으로 쓰러질 사주는 아니라고 여러 차례나 강조를 하더군요. 앞으로 건강도 얼마든지 좋아질 것이고 사업도 번창할 것이니, 마음 놓고 잠도 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라고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을 하더군요. 그는 이번 송 화백의 책을 만드는 일이 그 시작이 될 것이라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고 말했습니다.
나도 강 선배의 그런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동안 그녀에게 그 두 가지를 가장 신경 써 왔지요. 그녀는 도무지 밥을 먹지를 않았던 겁니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일상이었으며,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먹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러니 그녀에게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일 수밖에요.
또 하나는 잠을 제대로 자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감을 아예 집으로 들고 들어가서는 밤새 작업을 하는 것을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하여 예정된 일들을 하는 거지요. 도무지 언제 잠을 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건강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무너지게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랬으므로 나는 강 선배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또한 그녀는 자그마치 오륙 년 동안 이 사업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부었지만 아직 그녀가 바라던 결과는 보지 못 하고 해매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별 자본도 없이 몸으로 뛰어든 사업이었지요.
대구쯤을 지나면서 강 선배는 송 화백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가 우리가 도착할 때쯤 송 화백이 송도의 카페 카오스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약간 불안해졌습니다. 오늘의 계약이 만약 이 마지막 시점에서 빗나가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거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며, 영락없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곤 합니다. 이것은 역시 지나친 기우였지요. 인생은 참으로 합리적이면서 상식적인 자세로 잘 흘러가고 있으며, 누구도 나 자신보다는 더 인간적이고, 더 상식적이고, 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이미 강 선배와 충분한 합의를 이루었으며, 오늘은 단지 송 화백 본인의 자필 사인을 받겠다는 것뿐인 터였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 역시 조금은 불안한 기색이더군요. 나는 그것이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녀도 역시 나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신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하는 말이려니 여기고 아직은 온갖 충성을 다하는 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잘난 생각도 무너지는 날이 있으리라 믿었지요. 아직 나는 그리 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내 입장도 어느 정도 감안이 된 결과입니다. 나는 당장 결혼을 해서 살림을 차릴 만한 여건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나는 분명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나를 믿고 의지하라고 수십 번을 부탁해도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면 으레 나를 제쳐두고 역술가나 언제나처럼 그녀의 스님을 찾아가곤 합니다. 스스로를 믿고 합리적으로 일을 풀어가면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안 되는 일을 귀신의 힘으로 되게 만들 수는 없는 거라고 열 번 스무 번 설명을 해 주어도 그야말로 우이독경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 결국 큰일을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골백번 강조를 해도 그녀는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역술가를 만나고 온 날이면 그때마다 무슨 좋은 말을 듣고 왔는지 싱글벙글입니다. 일이 풀어지는 걸 보면 내 보기에는 별로 좋은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된 일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지요. 그래도 나는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건강은 잘 먹고 잘 자면 되는 것이고, 일은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될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죠.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놈이 되어 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송 화백의 문하생으로 보이는 두어 명의 사내들이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카오스가 들어선 이 건물은 송 화백의 소유이며 문하생들이 수련하는 연구실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강 선배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대단하군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내가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송 화백은 무척 평범하고 소탈한 인상이었지요. 그는 놀랄 만한 거구였으나 말할 때나 웃을 때에는 어린애와 같은 천진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쓸 만한 부산 촌놈이었습니다.
그가 안내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상견례를 끝내고 편안하게 앉았습니다. 그가 곧 우리에게 바다를 상기시켰지요. 그제야 나는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등지고 창가에 앉아 있었지요. 그것 역시 우리를 위한 그의 세밀한 배려였습니다.
송 화백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몇 푼이면 즐길 수 있는 바다를 혼자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한적한 해변에 환경을 망가뜨려가면서 그 값비싼 별장을 짓지요.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 선배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툭 하면 그런 사치성 별장이나 농장을 마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들도 머지않아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궁금한 내가 물었습니다.
“그건 왜죠?”
강 선배가 대답했습니다.
“아주 골치가 아파요. 요즘 시골 사람들도 보통내기들이 아니고요. 건물을 짓는 데서부터 관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문제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런 별장 하나쯤 갖고 싶었던 내 꿈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기기 전에 그녀는 서둘러 계약서를 꺼냈습니다. 이미 강 선배를 통해 모든 것이 전달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 화백은 그저 건성으로 계약서를 그냥 훑어보기만 했습니다. 강 선배가 나서더군요.
“아주 잘 된 계약서입니다.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송 화백이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하더군요.
“예, 그래 보이네요.”
그가 사인을 끝내자 그녀는 준비한 계약금을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솔직한 자세로 봉투 속의 수표를 꺼내 헤아리고 난 후에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계약은 탈 없이 끝났습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홀가분해졌습니다. 계약서를 접어 가방 속에 집어넣는 그녀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습니다.
횟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부터는 강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먼저 송 화백이 자신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그를 칭찬했지요. 그녀가 그 말을 받아 송 화백에게 조금도 누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신하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송 화백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그가 잘 메워 주고 있다고 다시 힘주어 말했지요.
송 화백은 자신이 특히 금전 관리에 있어 너무 취약한 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인간적으로 처신하다 보니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그 결과 여러 출판사와의 출판계약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게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런 점으로 인해 이번 계약에 있어서 아마도 그의 대리인인 강 선배가 여간 깐깐하게 굴지 않았을 거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이 대충대충으로 인한 송 화백의 취약점을 강 선배는 충분히 보완해 주고도 남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그는 우리와의 협상 때에 보통 깐깐한 자세가 아니었지요. 계약서의 문구 하나까지도 정확성을 기하려 애를 썼으며, 우리가 피곤해 하는 기색이 보일 때에는 언제든지 사과의 말과 함께 이것은 송 화백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송 화백은 강 선배가 자신의 운세 관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강 선배가 송 화백의 대운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지요. 그는 송 화백이 현재 대운을 만나 기세 좋은 바람을 타고 상승하고 있다고 추켜세웠습니다. 또한 그의 사주팔자를 짚어 보면 누구라도 깜짝 놀랄 만한 보기 드문 제왕격의 운세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운세니 제왕격이니 하는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런 대로 대충은 알아들을 듯도 했으므로 그저 들어보기로 하고 고개를 자주 끄덕거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송 화백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더군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제왕격을 가질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대운조차도 갖지 못한 사람이 절반이 넘지요. 그들은 평생 운명적으로 대운 한번 잡아 보지 못하고 절망 속에 살다가 이승을 뜨게 됩니다.”
나는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운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살다가 가게 될 사람들 중에 바로 내가 끼어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대운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강 선배가 대답했죠.
“간단하게 말하면 한번 터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다는 의미에 해당하겠죠.”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왕격이란 엄청난 사주겠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죠. 터져도 왕창 터지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제왕이 될 수 있는 사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에야 대단한 성공을 이룰 사람의 사주를 말한다고 보아야겠죠.”
그러니 당연히 제왕격의 사주를 타고난 사람이 많을 수는 없는 이치였습니다. 그런 제왕격의 대단한 사주를 타고난 송 화백이니 젊어서는 비록 고생을 했다지만 오늘날의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송 화백은 만화계의 거물입니다. 지금 그의 주가는 국내 단독 일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각종 스포츠지에는 그의 만화가 판을 치고 있었으며, 문하생만 해도 서울과 부산을 합해 그룹별로 10여 개가 넘는 엄청난 사단을 구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는 가히 전설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 선배가 말을 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탈옥수는 아마 잡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도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절대로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 아까운 대운을 기껏해야 달아나는데 쓰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죠.”
그 탈옥수는 벌써 일 년 이상이나 잡히지 않고 신출귀몰하게 탈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말도 무성하죠. 아마도 그는 이미 외국으로 밀항했을지도 모른다거나, 아니면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아니면 아직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숨어 있을 것이라거나 하는 말들인데,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긴 합니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기에 흔적조차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까? 하기야 오래 전에 끔찍한 고문 기술자로 수배를 받아온 어떤 인물도 그 흔적이 오리무중이라 분노한 세인들의 애를 태운 적도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도 사주 하나는 쓸 만한 것을 타고났기 때문에 잡히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강 선배가 다시 말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풀어 보니 대운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그런데 그들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러 감옥에 갇힘으로 해서 그 대운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들 중 현재 대운을 맞이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감옥에서 누군가의 사식을 받으며 그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아까운 대운을 소진시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차츰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갔습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운수나 사주 같은 것을 믿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뭐 별거냐는 것이었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살다 가는데 거기에 무슨 별다른 논리의 인생이 있겠느냐 싶었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은 정해진 사주팔자 대로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어쩔 수 없는 변화에 의할 뿐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었죠.
어쨌든 평생 한 번도 사주팔자에 관심조차 없었던 나로서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까부터 대운이 없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송 화백의 말에 상당히 기운이 빠져 있었잖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날까지 한 번도 나에게 대운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 알량한 글재주로 겨우겨우 벌어먹고 살 것이라는 이야기나 두어 번 들어왔던 터이죠.
어쩌면 이것은 나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운명이 만약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 운명은 썩 좋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나도 손금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재미 삼아 나의 손바닥을 내밀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내 손금에 담겨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의 운명을 선뜻 이야기해 주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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