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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杏巢'와 나의 大學시절/'행소' 동인지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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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612회 작성일 02-06-1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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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巢>와 나의 大學시절


시는 시인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시를 읽는 사회에 무엇을 의미할까. 더 분명하고 솔직한 질문을 던진다면 시는 시인 자신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으며 시를 읽는 사회에 어떤 유익함이 있을까.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가 왜 시를 쓰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시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영혼이 좋든 싫든 시를 원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비논리적 합리화에 어느 정도 내 시작업의 의미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의 본질 문제를 떠나서 정작 시를 쓰는 나의 생활에 있어서만의 시의 역할을 따진다면 나는 자주 감동하게 된다. 내가 시와 만나면서부터의 그 치열했던 정신과 우정과 교류는 충분히 나를 감상적 어린아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시의 성패를 떠나서 비록 시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감추었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 셈이 되었지만, 그 대신 시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감동적이고 때로는 감상적이기도 한, 한 시절의 의기가 투합된 치열성과 우정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왜 사느냐라는 본질적 질문에 접하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한다. 그것은 내가 시를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별로 당혹해지지 않는 점과 비교하여 어떤 면에서 나는 시를 쓰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내게 살아남아 있는 <杏巢>가 좋든 싫든 내게 너무도 소중한 힘으로 작용하여 왔고, 현재 역시도 그 이상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데 주로 이 지면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내 시의 본질적 문제조차도 경멸하듯 압도하고 있는 이 <杏巢>는 내게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말하기 위하여 나는 두서없는 서두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2년째의 대학생활을 마악 시작하려던 76년 초쯤이었다. 나는 이미 지난 해 한 학기의 중요한 6개월을 휴학으로 소모시켜 버리고,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다시 학교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도 황당하게 흘러가던 시간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어서 휴학이라는 비상수단으로 몇 개월을 벌어보고 싶었었지만, 반년 내내 머물렀던 전라도 내 고향의 외갓집 뜰은 나같은 덜 떨어진 존재에게는 어떤 아픔도 어떤 깨우침도 손에 쥐어주지를 않았다. 반년간의 방황 끝에 남은 건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뿐이었다. 그 참담함을 극복하지 못한 3류의 감상적인 절망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캠퍼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감지 않은 장발과 아무리 씻어도 빠지지 않는 손금 사이의 흙가루를 주머니 속에 감추고서 大成路를 오르던 어느 날, 나는 당시 불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오랜 벗 吳錫晩 兄을 만났다. 그는 반갑게 내 손을 붙잡아 주었으며 진심으로 나의 귀환을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야말로 내가 가장 솔깃해할 이야깃거리를 들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杏巢>와 나의 첫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그는 나와 <杏巢>의 결정적인 메신저였던 것이다.
그는 본교 국문학과생을 주축으로 한 몇 사람이 문학동인을 구성하려 하는데 그가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나의 특별한 벗이다. 저 아래 전라도땅의 손바닥만큼 작았던 金堤읍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고등학교 역시 裡里(現 益山)市의 같은 학교에 함께 진학했고, 이제 대학생활마저도 같은 캠퍼스에서 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별난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는 순해빠져 욕심이 없기로는 누구 당할 자가 없는 진짜배기 인간이었다. 입학하자마자부터 문학수업을 선언하고 그러한 사실을 거창한 슬로건으로 내걸다시피 한 나보다도 먼저 그는 그 해에 成大文學賞(시 부문)을 수상하였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런 제의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나를 먼저 그들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나는 75년 입학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당시 본 대학의 문학부문에는 모임다운 모임이 없었던지라, 궁색하게나마 科友를 중심으로 한 작은 동호인 모임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문집 <邂逅>를 2호째 발간하였고 그곳에 부끄러운 몇 편의 詩와 서툰 童話에 불과한두 편의 短篇을 실어볼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때 吳兄을 통하여 평생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杏巢>의 귀한 벗들을 만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杏巢> 詩同人의 첫 구상은 당시 국문과의 金泰鎰(당시 전역 後 국문2, 후에 경제과로 전과, 현재 삼성전자 부장), 李元雨(당시 국문2, 현재 천안 거주), 朴榮基(당시 신방2, 현재 중앙일보 경제부 기자), 이 세 兄의 하숙집 술자리에서 있었으며, 이후 전반적인 진행은 金泰鎰 兄이 주도했다고 한다.
며칠 후, 그러니까 그 해 4월이었다. 학생회관의 약속 장소인 '벽송헌'에는 위의 세 사람 외에 같은 국문과의 鄭址瑢(당시 전역 후 국문1, 현재 홍익고), 南仁福(당시 신방2,), 金孝任(당시 한교2, 인천 제물포고 근무, 2001년 현재 신학공부하며 목회 활동중), 李明姬(당시 불문1, 불란서 유학 후 현재 불명), 金愛英(당시 국문1, 민중가요 운동, 2001년 현재 민요마당 교육), 吳錫晩(당시 불문2, 2001년 현재 국민은행 차장) 兄 등과 내(총 10명)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 그 자리에서 몇 가지의 합의를 보았다. 이미 사전 이해가 되어있는 터라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첫째는 공동체적 詩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등록된 문학서클이 아닌 자생적 동인 형식의 독자적 형태로 문학활동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거추장스러운 일들을 배제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로지 치열한 창작 수업에만 전념하자는 의도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첫 회장에 李元雨, 부회장에 鄭址瑢, 金孝任, 그리고 총무에 朴榮基 兄이 선출되었다. 후에 작성한 회칙의 목적 부분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본 회는 문학에 대한 토론과 창작활동을 통해서 문학을 이해하고 나아가 대학문학의 실천과 성균문학의 중흥을 그 목적으로 한다.'
모두가 진지한 자세로 참여했다. 비록 공식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화요일 오후 5시 30분)이었고 써클룸이 없는 탓에, 빈 강의실(주로 문과대 강의실 1109를 사용했다)을 전전해야 했지만, 그 틈바구니에서도 부지런히 읽고 틈날 때마다 쓰고 치열하게 토론하였다. 기성 시인의 작품 연구는 尹東柱와 金洙英 시인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만나야만 그래서 술이라도 한 잔씩 기울여야만 직성이 풀리던 시기였다. 막걸리와 몇 점의 안주를 들고 옥류정을 찾기도 하고, 때로는 수유리나 근교의 한적한 숲 속을 찾기도 하며, 마치 고전적인 文學의 향수에 완전히 도취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초창기를 보냈다. 이에는 회장과 더불어 <杏巢>의 대부라 할 수 있는 金泰鎰 兄의 깔끔하고 정간한 리더가 크게 작용했다.
金泰鎰 兄의 자필체인 <열편시모음>이 간간이 제작되면서, 대내는 물론 대외적인 행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특히 <열편시모음>은 金泰鎰 兄 특유의 빼어난 글씨체가 작품의 신선도뿐만이 나니라 책자의 무게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훗날 金泰鎰 兄은 이 정간하고 빼어난 글씨로 반려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백년해로할 것을 약속 받았다 하니, 가히 그 붓글씨(세필)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76년 5월 28일 만들어진 <열편시모음> 제1집의 참가자 명단을 보면 金泰鎰, 李元雨, 朴榮基, 鄭址瑢, 張鐘權, 吳錫晩, 南仁福, 金孝任, 李明姬, 金愛英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이 바로 <杏巢>의 창립멤버들이다.
金泰鎰 兄의 <杏巢>에 대한 정성은 어디에서나 나타났다. 밤새워 작품을 쓰고, 계획안을 작성하고, 항상 앞전인 것처럼 뒷전인 것처럼, 별로 생색을 내는 일 없이도 모임을 잘 이끌어 갔다. 그것은 예나 벌써 20여 년이 지난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우선 자체 행사로 마련된 우리의 첫 번째 나들이는 空超 선생의 묘소 참배였다. 76년 6월 5일 우리는 삼양동의 수유리 산1번지 속칭 '빨래골'에 자리잡은 空超 오상순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초행길이 아닌 내가 길을 안내했다. 당시 미아리에 거주하던 나는 이미 몇 번 들렀던 터였다. 미아리 그 옛날의 버스 종점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서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혹은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한참만에 나타난 空超 선생의 묘소에는 그러나 일말의 적막감 같은 것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魂.' 시비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에 뵙지는 못한 분이었지만, 우리는 그 분의 詩를 읽었고, 그리고 우리도 그 분처럼 詩를 선택하고자 하기에,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우리는 우선 묵념을 드렸다. 그리고는 한잔의 술과 몇 개피의 담배를 권해 드렸다. 여쭙잖은 空超文學論도 잊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참여했던 7인(金泰鎰, 李元雨, 鄭址瑢, 朴榮基, 張鐘權, 金孝任, 吳錫晩)의 連作詩 '空超와 우리'가 아직 남아 있다.

한 줄기 연기속 머리 숙여 감겨드는 詩心에
술잔을 들듯이 우리들 쓰는 것이
슬픈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맑은 하늘 아래
서 있는 우리
흐름 위에 돌아누운 외로운 魂과 우리
왔다가 가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는 것일까
골골이 빨래하는 아낙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데
남은 빛은 어둠을 어루만지는데

우리는 그해 여름이 가기 전 6월, 드디어 丘庸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다. 약속 장소는 비원 앞의 고급 중국 음식전인 '靑宮'이었다. 丘庸 선생님은 독특하신 풍모와는 달리 소탈하신 편이었다. 우리는 사실 선생님을 뵙기 전 선생님의 성격이 괴팍하다는 소문 때문에 어느 정도 긴장해 있던 판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자상하신 대화로 우리들의 얼어붙은 말문을 열어주려 무척이나 애를 쓰셨다. 술이 거나해지자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벼루와 붓을 내밀었다. 신이 나신 선생님께서는 수십 장의 화선지에 일필을 휘두르셨다. 우리는 이 신들린 휘호를 나누어 가졌다. 비록 낙관이 없기는 하나 선생님의 정신과 호기가 유감없이 담겨 있으리라 굳게 믿는 우리는 이 휘호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첫 만남에서부터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술주정의 미학을 선보이셨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선생님의 말씀과 몸짓 하나하나는 모두가 신기한 세계였고, 대단한 정신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음식값을 자신이 계산하시는 깔끔한(?) 매너까지도 보여주셨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값은 단돈 몇백 원이었다.
<杏巢>의 명칭은 이 날 이후 丘庸 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힌트를 얻은 金泰鎰 兄이 지어 붙였다. 아무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따로 거론된 명칭도 아예 없었다. 어쩌면 <杏巢>는 成大 문학도들의 운명적 둥지로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웃자란 들풀을 뜯는다
바다는 끝마다 빛으로 고여
다 타버린 나락도 흘러
바람도 함께 흘러
시들어야 더욱 깊게 만나는 것을

颱風은
아침에 살아 불씨를 다져

풀잎을 뿌리며
촉촉히 내 방안을 적시고
먼산도 가까이 흘러

'32'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李元雨 兄의 78년도 작품으로 <杏巢>일지에 남아있는 것을 옮겨보았다.
李元雨 兄의 달변과 해학성은 무시로 생길 수 있는 회원들 간의 알력을 봄눈 녹이듯 풀어주었다. 그의 장광설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는 어린 시절 불의의 화재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천형의 시인이었다. 충분히 정형시술을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이나 벗들의 권유를 끝내 뿌리쳤다. 그의 정신 속에는 그쯤은 견뎌낼 수 있는 거대한 뿌리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23일의 일이다. 우리는 시인 金洙英의 시비를 찾았다. 그리고 그 저녁, 숲 속에 자리한 우리는 어김없이 술판을 벌였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투욱 건드리고 말았다. 아, 백일하에 드러난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할 말을 잃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는 뜻밖에도 가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의 가발을 다시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특유의 장광설로 모두의 가슴을 덮어주고 쓸어주고 있었다. 다시는 그 일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내가 79년에 그를 위하여 써두었던 <영웅>이라는 詩 한 편을 옮겨본다.

새벽
종소리를 따라가니
어둠이었다
어둠
그 속에 곤죽이 된
그대
영웅
붉은 혀를
적시고 있다

그럴 수 있을까 저리
놀라운
피의 세월
엽전 한 푼 없이도
곧잘
불잘 타는 도깨비춤
승리로다
이름하기 곤란한
숙명이여

나는 아직껏 이 시를 본인에게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작품을 받으면 받자마자 너털거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무슨 영웅여-? 피의 세월은 또 뭐디여? 영웅은 당신 아닌감? 당신이나 가지라구.'
그 해 가을(9월 23일 부터 9월 25일 까지)에는 명륜당에서 처음으로 시화전이 있었다. 吳錫晩, 張鐘權, 金愛英, 朴榮基, 李元雨, 金孝任, 金泰鎰, 鄭址瑢, 南仁福 兄 등 9명이 각기 3편씩의 작품을 만들었다. 丘庸 선생님께서 흔쾌히 題字를 써주신 작품집 중에서 金愛英의 프롤로그를 소개해 본다.

-나의 詩는 나의 오해일지도 모른다. 잠깐 놓치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저녁 노을을 보며 그저 한숨짓는 어설픈 감상일지라도 손끝에 와 닿는 것이라면 모두 나의 가슴엔 아프게 새겨져야만 한다. 그런데도 매일 밤 엎어져 자지도 못하고 어둠 속 가을 벌레 소리만 멍청하니 듣고 있다. 정말 나의 귀는 밖으로만 열린 것일까-

당시 우리들의 전반적인 文學수업의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듯 하여 인용해본 것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詩와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커피와 담배와 술과 우정과, 그리고 詩는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나는 당시 복학생으로 나보다 두세 살이 위였던 鄭址瑢 兄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술을 좋아했고, 나를 아껴주었으며, 거기에 흘러간 옛노래를 잘 부를 줄 알았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고, 서로의 어깨를 끼고 갈짓자로 걸으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그가 종권아 하고 부르면 나는 지용아 하고 대답했다. 거기에다가 그는 그 와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착실한 선배였고, 그 수입은 우리들의 술값으로 자주 전용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杏巢>의 羅英玉 兄과 결혼식을 올려 첫 번째 동인 커플로 탄생한다. 그리고는 <杏巢>와는 한동안 소원한 관계로 변하게 된다. 시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보다 나은 방법이요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그보다 나는 그렇게 된 원인을 거의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그들의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그들을 머뭇거리게 하였으며, 그들을 결과적으로 <杏巢>로부터 무심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들을 더 깊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오늘까지도 갖고 있다. 나는 당시 그들에게 전혀 너그럽지도 못했고, 나는 지극히 가난하여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풍요로움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캠퍼스에 와서야 비로소 사춘기를 맞은 나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랑과 호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낭만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오늘 다시 돌아보면 오히려 기쁘다. 행복하다. 金孝任 兄은 이러한 나의 분별없고 줏대 없는 캠퍼스 생활이 탈없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무던히도 애써준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해와 용서, 그리고 끝없는 인내는 아마도 내가 겪은 인간관계 중의 가장 아름답고 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그녀는 나보다도 더 심한 번민과 갈등으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안스러운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토닥여 주었다. 입영 기간 중에도 나는 많은 편지와 시를 그녀에게 적어 보냈다. 훗날 그녀는 그 시들을 모아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나의 아픔을 함께 느껴주고 겪어주면서 변함없고 가감 없는 우정으로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세 명의 동인이 늘어났다. 羅英玉(당시 국문2,) 李美玲(당시 한교2), 曺大鉉(당시 藥學4, 현재 보건연구소 근무) 兄이 그 사람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립멤버 10명을 포함한 이 세 사람까지가 바로 제1기 멤버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곧 <杏巢>의 창립멤버나 거의 다름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특히 曺大鉉 兄은 모임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어 그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과 꾸밈없는 입담으로 늘상 우리를 웃음의 세계 속에 이끌어 넣었다. 李元雨 兄과는 너무도 죽이 잘 맞았던 것이다.
77년에 들어서면서 <杏巢>는 정식 교내써클로 등록을 하게 된다. 그리고 4월 丘庸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空超 묘소를 찾아 선생님과 함께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는다. 곧 이어 새 회원을 받게 되는데, 李順東(당시 유학과,현재 여강출판사 대표), 康盛徹(당시 經濟2, 시인,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洪淳柱, 金元洙(당시 2부 經營2), 金鐘宰, 李漢瑛, 趙基旭, 金留美, 安貞硏, 姜斗永, 하창수, 鄭明淑, 盧在星(당시 국문1, 현재 한국문예진흥원), 申硏浩(당시 生美3, 최근 진로 홍보실, 화가활동 중) 兄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후 文正在(당시 佛文4), 李東熙(당시 國文2), 權純肯(당시 國文3, 현재 세명대 교수) 兄 등이 자의든 타의든 <杏巢>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이 <행소>의 제2기 멤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李順東 兄은 년배로도 나보다 위였지만, 뚜렷한 정통이조 양반의 후예라서인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자긍심과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의 처소를 방문하다보면 우선 즐비하게 늘어선 책장과 그 속에 꽂힌 장서의 무게에 압도되어 버린다. 그는 결국 책과 책 속에 담긴 정신을 쫓아 출판사의 문을 열었다.
또한 아름다운 마스크와 고운 심성으로 우리 가슴에 늘 젖어있는 申硏浩 兄은, 얼마 전까지도 진로주식회사의 홍보부에 근무하면서 작품(포스타그래픽)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근자에 연락이 끊겨 현재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생력 강한 들꽃처럼 돌보는 이 없어도 능히 세파를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두가 열심히 참여하였으나, 불행히도 나는 이 해에 입대해버림으로써 많은 사람들과의 깊은 인연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굳이 <杏巢>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언제든 만날 수가 있는 사람들이긴 하다. 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나 따스함이 가득한 한 마디 한 마디,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진실로 <杏巢>의 전부였으며, <杏巢>의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해 4월 22일로 예정된 논산 훈련소로의 입소를 기다리며, 감격스럽게도 成大文學賞(詩부문)을 수상하였다. 수상작은 <금붕어>, <밤>, <육교 근처> 등 5편이었다. 金愛英 兄이 詩부문 장려를 수상한 이 해의 成大文學賞 소설부문은 당시 <杏巢> 멤버는 아니었으나 <杏巢>와 자주 어울렸던 國文科 3년의 서향아 兄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예 절필하였는지 아직 어느 지면을 통하여서도 이름을 들을 수가 없다. 당선이 발표되던 날 명륜다방 메모판에 꽂혀진 '장종건 형, 당선을 축하해요.' 한 구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나의 이름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다.
金愛英 兄의 방황도 알아주는 방황이었다. <杏巢>의 모든 여학생들이 다 그랬지만 그녀는 적어도 술에 있어서는 남자에게 지는 법이 없었다. 캠퍼스를 떠난 후 그녀는 문학을 버리고 연극과 소리(민중가요)에 빠져들어 한 경지를 개척하게 된다. 몇 년 전 돈암동의 청노루라는 주점에서 丘庸선생님을 모시고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녀가 '엉겅퀴야, 엉겅퀴야....'를 열창하자 칸막이로 가려진 주점 안의 이 방 저 방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가 터졌다. 그녀는 손님들의 앵콜을 외면하지 못하고 한두 곡의 노래를 더 불렀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成大文學賞 수상을 기뻐해 주었다. 그러나 특히 당시 成大新聞社 편집장이었던 權純肯 兄은 나의 당선을 마치 자신이 당선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소설을 썼었지만 지금은 평론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술을 마신 후의 그는 퍽 인상적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는 특히 술을 마시면 기분이 이태백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호인으로 둔갑해버린다. 술 마시지 않아도 호인인데 술 마셔 호인이라면 아마도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모두가 그렇지만 그도 가슴의 열병으로 이만저만 고생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 오라기의 털끝만큼도 내보이지 않는 속알머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 해에 또한 金澤賢(당시 史學4, 현재 成大 사학과), 權純肯(현재 세명대 국문과), 李憲洙(당시 약학4, 중외제약 이후 불명) 兄과 함께 四人詩小說集 <三幕七場>을 출간했다. 金澤賢 兄은 이미 75년도에 비탈文學同人會를 통하여 개인 詩集 <線>을 출간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해 숙대新聞社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학생 논문 현상모집에 당당히 당선되었었다. 모두가 나의 입대를 아쉬워했던지 촌급을 다투어 책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李永石(당시 사학4, 광주대 사학과수) 兄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보며 삶의 진실, 인생의 虛와 實을 배웠다. 따뜻한 가슴으로도 넉넉한 가슴으로도 얼마든지 냉철하고 비판적인 지성을 갖을 수 있었으며, 합리적인 이성을 가질 수가 있었고, 그것은 결국 인생에 무한한 용기와 힘으로 나타난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동시에 나는 金澤賢 兄의 도움을 받아 개인 시화전을 준비했다. 자신이 없어 하는 나의 등을 떠밀고 그는 자신이 직접 원고를 들고 다니며 그림을 부탁하여 작품을 완성하여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시를 끝내고 내가 서둘러 입소한 얼마쯤 뒤, 학내에 투입된 군부대는 교내에 보관하여 두었던 나의 소중한 詩畵 모두를 짓밟아 버렸다.
내가 입소한 바로 다음 달 5월 27일, <杏巢>는 10년 만에 '成均文學의 밤'을 부활시켰다. 참가자는 1기와 2기 멤버들이었다. 논산 훈련소의 황토 흙밭에서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전신을 굴리던 내게 어느 날 우송되어 온 이 文學의 밤 작품집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 주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결코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훈련장에서도, 내무반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잘 때에도 나는 항상 그 작품집을 가슴 깊이 안고 있었다. 그 뜨거운 이름들이 그리고 그 치열한 가슴들이 몽땅 내 가슴속에 안겨 있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서서히 연필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아니 이후로는 한 순간도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입영기간 동안 내뱉은, 작품이랄 수도 없는 작품들을 그러나 나는 소중하게 소책자로 묶었다. 고맙게도 타이핑은 행정반의 선임자(박해광 병장)가 직접 해주었다. 두고두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표지명은 <들풀>, 아마도 나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성격적 자학이 깊숙이 배여 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 내겐 나름대로의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있었다. 나는 나의 이 아픈 인연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신뢰받아야할 인간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진실로 서로에게 너그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광주 포병학교를 거쳐, 다시 전곡 백의리에 자대 배치를 받은 내게 가을 소식과 함께 날라 온 것이 77년 9월에 발행된 <杏巢> 제2회 詩畵展 작품집이다. 이미 7월에 있은 과천 영보수녀원으로의 시작여행 중에 새 집행부가 구성이 되어 있었다. 새 회장은 金泰鎰 兄이었고 부회장에 康盛徹, 李美玲, 총무에 金元洙, 洪淳柱, 서기에 羅英玉, 회계에 安貞硏 兄이 포진했다고 하였다. 그 작품집 속에는 본교 출신 문인으로 姜桂順, 姜禹植, 金丘庸, 金女貞, 金益培, 成春福, 尹泰洙, 朱文敦 선배님들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내 작품도 모처럼 실려 나는 행복하게도 행사 당일 외박을 얻어 참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알게 모르게 부대장 앞으로 보낸 金泰鎰 兄의 간곡한 편지가 부대장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해인 78년 3월 <杏巢>는 제3기를 이끌어갈 새 집행부를 구성한다. 회장에 鄭址溶, 부회장에 金鐘宰, 鄭明淑 兄이 등장한다.
그 해 5월 25일 진행된 文學의 밤 작품집에는 김영호(당시 國文2), 金鎭鎬(당시 國文2, 2001년 현재 인도네시아 한국학교 근무)의 새 이름이 보인다. 이들을 <杏巢>의 제3기 멤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金鎭鎬 兄은 이후 <杏巢>의 창립 멤버들과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는 항도 부산의 딸부잣집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란 듯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다른 외동아들과는 성격이나 생활자세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얼굴색이 적어도 나만큼은 새까맸는데, 모임의 막내로서 궂은 일 마다 않고 해내면서도, 항상 어른스러운 품위를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거진 20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누구하고도 부대낌 한번 없는 그였으니, 무난하고 넉넉한 심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나의 결혼식에 <원을 그리며>라는 제목의 祝詩를 보내왔고, 세월이 흐른 86년 설날 아침 정성어린 그림 엽서에 그 詩를 다시 적어보내 주었다.

생명의 이전을 몰라도
동그라미의 출발점은 하나
원을 따라 끝간데서 만난
처음은 끝이더니

맺을 때 맺어두는
튼튼한 매듭처럼
이처럼 빛나게 힘차게
어디서든 시작되는 원이 완성되고

이것은 달이기를
달 중에도 정월 대보름같이
따습고 환한 빛이기를
기러기 한 쌍을 하늘에 심어 본다
--丙寅(1986) 元旦에 빚 갚음으로 鎭鎬가

그 보답으로 나는 그의 결혼식에서도 祝詩 <탄생>을 읽었다. 아름다운 그날의 신부는 익히 보아온 같은 국문과의 후배 아가씨였다.

당신은 이뻐서 자연이라
당신의 당신은
자연이라 그저 이뻐라

자연은 자연에서 나와
자연이 되나니
자연으로 만난 자연은
지극한 하늘이시라

자연은 자연으로
사랑의 매듭을 짓고
매듭은 자연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나니
그 꽃에서 당신은
천도 같은
자연을 따리라

-별과 별의 만남으로
이제 비로소
또 하나의 우주는 탄생하였네

79년 봄 제4기가 될 새 이름들은 김진원(당시 국문2), 박종문(당시 국문2), 김성엽(철학), 鄭蕙瑗(당시 국문1), 고선희(당시 국문1), 김병국, 이희경(당시 도서관2, 성균문학상 소설부문 가작 수상), 고경곤, 왕영방, 이인석(당시 불문1, 현대문학 소설 1회 추천) 兄 등이다.
그 해 5월 23일의 文學의 밤은 당시 회장인 盧在星 兄과 이 제4기 멤버들로 치러진다. 그러나 작품집에는 김갑수(당시 國文2, 시인), 여기현(당시 國文3, 현재 광운대 국문과), 남근우(당시 國文3), 이진일(당시 哲學2), 고희일(당시 國文2, 현재 KBS방송국 PD) 등의 이름도 보이고 있다.
79년 9월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는 전역식을 갖고 복학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내버린 29개월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돌아온 대성로에는 찬바람이 일었다. <杏巢>는 그야말로 이름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내 개인적인 신상 문제 하나조차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여 그저 안절부절못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말 너무 무능했던 것이다. 복학한 처음 <杏巢>의 낯익은 얼굴들이 졸업으로 또는 다른 마당으로 하나 둘 떠나버린 빈 공간에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낯선 얼굴뿐이었다.
이어 80년도까지 朴鐘文 兄의 주도로, 김완성, 嚴炳顥, 이상진, 權文學, 강병호, 임성숙, 이용웅, 구재헌, 이성호, 박기철, 최 동, 현원일, 홍성준, 최무섭, 이명재, 황보열 등이 주로 <杏巢>를 꾸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杏巢>의 제5기 멤버들일 것이다. 朴鐘文 兄의 고군분투는 두고두고 내게 빚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나는 주로 이미 복학한 張俊榮(경제), 李永石(사학), 박주기(한교), 權純肯, 李崇來(국문), 당시 成大新聞社 편집장이었던 林奎燦(당시 독문, 후에 국문과 대학원, 현재 成大 강의,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그리고 같은 독문과의 禹孝子, <杏巢>의 鄭蕙瑗 兄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80년 4월 조태일, 박태순, 신경림 님 등을 초빙하여 '4.19 기념 文學講演會'를 열었다. 서슬 퍼런 캠퍼스 주변의 분위기에 스스로 얼어붙는 듯한 이 강연회에 연사들은 고맙게도 강연료를 한 푼도 받아가지 않았다. 이것을 계기로 학내에 '범성균문학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杏巢>의 배타적 울타리는 결코 남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타협을 수용하지도 못했다. 한동안 진행되던 이 작업은 결국 유야무야로 우리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詩에 관심이 많았던 張俊榮, 李永石 兄은 실제로 詩 창작을 하기도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학내의 문학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현실 참여에 깊숙히 개입해 있던 그들은 그러나 우리들의 만남에 있어서만은 캠퍼스의 낭만과 지성적 교사로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은 서툰 문학도들보다 오히려 더 뜨거웠고, 그 뜨거움을 더 치열하고 더 순수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李崇來 兄과의 만남은 자못 기연이었다. 당시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발단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국문과에서 발간하던 <成大文學>지에 관한 토론이 일었다. <成大文學>지는 과거 본 교를 이끌어가던 文學人(윤병로, 성춘복 교수님 등)들이 창간한 것이므로 당연히 文學 단체인 <杏巢>에 그 발간을 양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사이 나의 주장이 되어 있었고, 국문과의 대표처럼 나선 그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발끈하고 나섰던 것이다.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결과야 어떻든 간에 그는 그 일로 인하여 우리와 자주 술자리를 갖게 되었고, 나와는 남다른 의기가 투합 되어 좋은 친구가 되어 있다. 나는 캠퍼스 커플인 그들의 결혼식에 주례인 丘庸 선생님을 모시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신부는 그와 같은 국문과의 全容順 兄이었다.
<杏巢>의 변두리에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항상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초창기에는 박재화(國文科,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근무), 郭貞禮(당시 國文科, 시인) 兄 등이 그랬었다. 그들은 <杏巢> 회원보다도 오히려 더 <杏巢>를 아끼고 사랑했다. 특히 학생회 간부였던 박재화 兄은 초기의 비등록 단체인 <杏巢>의 학내 활동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곤 하였다.
<杏巢>의 변두리에서 다부지고 똑똑한 면모를 과시하여 사람들을 놀래키던 禹孝子 兄은 81년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참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떠나기 전 학교 근처의 명륜다방에 앉아 그녀를 붙잡아 줄 마지막 봉홧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참담한 슬픔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그녀를 잃은 나와 우리 모두의 아픔이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놀라워라 어느새 말렸다 풀어지는
한 오리의 희미한 실구름같이
흐르던 피 뚝 끊어지고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어려운 한고비를
숨결 넘어가면은 사랑도 원수래도 살뜰히 잃어버려 삶이란 한참
스쳐간 소나기비 선잠 깨인 꿈자리 그게 아니면 서거픈 쓰디쓴 우음이로다
구을러 흐터지는 풀이슬같이

金冠植 詩人의 詩 <풀이슬같이>를 유서처럼 던져두고, 한 방울 눈물 뚜욱 떨어뜨리고, 마치 서러운 듯이 마치 화난 듯이 마침내 떠났던 그녀는 머나먼 독일 땅에 사랑의 둥지를 틀고, 결국 이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떠난 사람은 그저 떠난 사람으로만 잊혀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녀가 자주 들러 술을 마셨던 학교 입구의 쌍과부집도 그녀와 함께 기억이 되고, 그녀와 자주 어울렸던 張俊榮, 박주기, 李永石 兄도 아쉬운 과거처럼 추억처럼 그녀를 가끔 떠올리지 않겠는가.
그 시기의 鄭蕙瑗은 분명 <杏巢>의 주역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녀는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웠고, 호감이 가는 용모에 귀염성이 가득했으며, 어느 정도 조숙하다는 느낌을 주는 깜찍한 작은 소녀였다. 항상 우리들의 술자리에서 청순한 꽃의 이미지를 주었던 그녀도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杏巢>에 관한 애틋한 감정은 보통 이상이었던 듯 하다. 그녀가 훗날 보내온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적는다.

억수로 내리는 비 속을
죽음의 피울음에
숨 죽여본 일도 없는

온몸에 내리는 햇살 속을
향기로운 狂氣로
고함쳐 본 일도 없는

그래도
어느 가슴에 소중한 사람
狂氣처럼 소중한 사람
죽음처럼 소중한 사람들
<이하 생략>

金泰鎰 兄이 화촉을 밝히던 82년 겨울, 우리(李元雨, 鄭址瑢, 吳錫晩, 張鐘權, 金鎭鎬, 金孝任은 현지 합류, 박재화 兄도 동참)는 주례를 맡아보실 丘庸 선생님을 모시고 부산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靑馬 시비 등을 거치면서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피난 시절의 향수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또한 이제는 볼 수 없는 황홀한 을숙도의 추억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하랴. 나는 오늘도 믿고 있다.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에는 사랑과 우정과 믿음에 몰입되는 것 외에 어느 것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날 결혼식장에서 <夫婦>라는 제목의 祝詩를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했었다.

당신과 당신은
전생의 부부였습니다
당신의 속깊은 눈썹뿌리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은
이승의 부부입니다
다대포에 가라앉는
구포동 따스한 바람이
그렇게 말해줍니다

당신과 당신은
저승에서도 부부입니다
당신이 믿는 당신의 눈
당신의 미래가
그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현실은 부부
당신의 현실은 과거나
미래 아,끝간 데 없는
섭리입니다

이하 81년도 이후 멤버들의 명단을 후배님들이 보내주신 住所錄과 <杏巢>日誌에 근거하여 작성하여 보았다. 81년도의 嚴炳顥 회장을 비롯한 제6기 멤버는 朴文燮, 鄭世煥, 李一洙, 황혜현, 金恩珠, 朴惠善, 김양미, 김화임, 金學心, 구혜모, 남덕현, 양석현, 이재환, 전현표, 김연수, 김성관, 이상익, 金永夏, 황보열, 한기형, 김경희, 김금자, 권정혜, 민화식, 이재환, 장민호, 이재훈, 변재현, 김순용, 곽병진, 전용근, 노창현, 신용성, 한호수, 정영기, 오태정, 여관주(김주필, 이정우, 등은 5월 文學의 밤 작품집 수록자 명단에 들어있다) 등이다.
이들 중의 대부분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친근한 얼굴들이다. 특히 朴文燮, 金경희 兄은 <杏巢>의 두 번 째 커플이다. 고난을 헤쳐가면서 열심히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그들과 김영하, 김양미, 김화임, 김은주 등은 내가 캠퍼스를 떠난 후에도 가끔 나를 찾아주곤 하였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다년간 과일주를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곤 했었다. 지금도 그 기다림에는 변함이 없다.
82년도의 제7기 멤버는 박종권, 송종원, 김현묵, 이진경, 김현철, 김재근, 사나미, 최승우, 손수경, 전성순, 장상준, 허광봉, 권정혜, 민화식, 이종찬, 안미주, 변재현, 이수철, 김순용, 이제훈, 정영기, 제갈훈, 김재성, 강원식, 전용근, 유재철, 최원식, 변혜은, 임우정, 한광마, 김인규, 김창섭, 조위제, 서길헌, 황태환(김수찬, 박경석, 윤희진, 김성관, 임희동, 김민정, 이필선, 엄기희 등은 5월의 제6회 文學의 밤 작품집에 등장한 이름이다. 회장은 양석현.) 등이다.
83년도의 제8기의 멤버는 최혜영, 최승운, 배재선, 최순이, 한상재, 권혜진, 윤숙경, 서은숙, 최승우, 김현묵, 박찬임 등이고, 회장은 손수경, 산문부장은 김현철, 시부장은 장상준, 회계는 최승운, 서기는 박찬임이었고,
84년도의 제9기의 멤버는 조영옥, 배성원, 김성곤, 최희옥, 이숭인, 송종원, 조영선, 김종두, 방대진, 유청수 등이고, 이 해의 회장은 최혜영, 편집부장은 최승운이었다.
85년도의 제10기 멤버로는 김정선, 한상복, 강소희, 김재근, 김상범, 선판우, 장미숙, 이창수, 명정희, 이승재, 윤성택, 강태욱, 김한수, 이은지 등이다.
이상이 <杏巢> 10년을 채워준 얼굴들이다. 그러나 내가 입대해 있었던 2년 6개월 여의 공백은 기술에 자신이 없으며, 또한 내가 졸업한 후의 멤버에 대하여는 사실 부정확하기 짝이 없음을 실토한다. 더구나 학번이나 학년, 나이와는 전혀 서열이 맞지 않는 겅우가 허다함으로 읽는 이의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다만 한 번이라도 더 눈 속에 넣어두고싶은 마음 하나로 적어본 것이다.
이후 10년은 나로서는 명단조차도 갖고있지 않다. 언젠가, 사실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杏巢>의 얼굴들이 한 자리에 모여질 수 있다면 하는 헛된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杏巢>가 해가 묵어감에도 그리고 가족이 갈수록 늘어감에도, 그에 맞추어 멤버들끼리 돈독한 우정을 가질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결국 <杏巢>창립멤버의 차별주의에서 기인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중반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심심산곡처럼 눈덮힌 도봉산 계곡의 산장에서 우리는 모처럼 丘庸 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하룻밤을 보냈다.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연로하신 선생님 내외분을 새벽녘 근처의 모텔에 모셨으나 이튿날 아침인사 올리는 우리 앞에 두 분은 꽁꽁 얼어붙은 모습이셨다. 냉방에서 주무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꺼지지 않는 <杏巢>의 불을, 그리고 文學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를 재차 확인했다. 과연 文學이 무엇이길래, 과연 詩가 무엇이길래, 사람이 사람끼리 이렇게 뜨거울 수가 있는가.
90년대에 들어서서도 이삼년 전 우리는 고요한 산사 수덕사에서 다시 모임을 가졌다. 金泰鎰, 李元雨, 曺大鉉, 吳錫晩, 康盛徹 兄, 그리고 나, 사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참석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曺大鉉 兄의 사람좋은 너털웃음과 李元雨 兄의 장광설이 변함없이 터져나왔다. 끝내 우리는 주변 투숙객들로부터 몰매를 맞기 일보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잠을 청했었다.
내가 <杏巢>로부터 얻은 것은 우선 인간적인 신뢰와 애정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詩였다. 비록 <杏巢>는 대학 시절의 아마추어 문학동인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나름대로 갖고 있었던 끝없는 흡인력과 문학열, 그리고 바다 같은 용서는 나로 하여금 평생의 <杏巢>병에 걸리도록 만들어버렸다.
또 하나 나는 그곳에서 丘庸 선생님을 만났다. 나뿐만이 아니라, <杏巢>자체도 선생님과의 만남은 대단한 행운이라 믿는다. 아마도 선생님의 역할이 없으셨더라면, <杏巢>는 오늘까지 우리에게 살아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의 선생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杏巢> 창립 또는 1기 멤버 중의 대부분은 선생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2세들의 이름도 대부분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들이다.
초창기 멤버로는 <文學과 批評>으로 등단한 康盛徹 兄과 얼마 전 시집을 출간한 吳錫晩 兄, <現代詩學>으로 등단한 내가 시단에 이름을 내밀고 있고, 金鎭鎬 兄이 <文學>지의 편집장으로 그리고 權純肯, 林奎燦 兄이 평단에 거목으로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 <現代詩學>으로 등단한 金甲洙 兄을 비롯한 몇 분의 등단 회원이 있는 걸로 알고 있으나 자세히 아는 바 없어 적지는 못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문학도들에게 쏟아주신 선생님의 정성이 과연 얼마나 열매를 맺을지는 앞으로도 두고 볼 일이지만, 우리는 풋풋한 열매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올해가 96년, 벌써 <杏巢>는 20기를 넘어선 것 같다. 나는 후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미안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간 몇 년 전 가끔씩의 교류가 있었을 때에도 나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초창기의 <杏巢>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동안은 詩에 있어서의 현실인식이라는 문제로 <杏巢>가 몸살을 앓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 사회가 뱉어내는 시대적 아픔을 느꼈다. 나는 <杏巢>의 멤버였던 최동 兄과 그 부친의 비보에 내가 슬퍼하고 절망할 자격도 없으며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음을 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杏巢>는 영원히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꼭 詩가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詩가 그 무엇도 아니다 라는 얘기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가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詩로부터도 現實로부터도, 그리고 인간으로부터도, 결코 달아날 생각은 없다.
이런 점에서 후배님들께서도 여러 선배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더불어 앞으로는 가능한 한 연락을 자주 주시어 서로의 문학수업과 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글은 마치 <杏巢>의 십 년 역사처럼 보이나 사실은 내 개인의 杏巢病的 타액에 지나지 않는다. 너그러이 읽어주시기 바란다.

--<성균관대 '행소' 동인지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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