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논문> 구용 김영탁 시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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丘庸 金永卓 詩 硏究
-시집 ꡔ詩』를 중심으로-
KuYong Kim, Young-Tak's Poem Study
-The Focus of ꡔPOEMꡕ-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國語國文學科 國文學專攻 張 鍾 權
목 차
Ⅰ. 서론
1. 문제 제기 10
2. 기존 연구 검토 및 연구 방법 10
Ⅱ. 李箱 詩와 金丘庸 詩에 대한 대비 분석
1. 문학사 기술과 대비 연구 10
2. 李箱 詩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 10
3. 李箱 詩 모티프의 계승과 변용 10
4. 李箱-金丘庸 詩 계보의 의미 10
Ⅲ. 金丘庸 詩의 實存主義와 超現實性
1. 金丘庸 詩와 實存主義의 시대 10
2. 휴머니즘과 결합된 實存主義 詩의 양상 10
3. 實存的 각성과 超․現實的 결말 처리 방식 10
Ⅳ. 金丘庸 詩에 나타난 母性的 여인들
1. 金丘庸 詩의 트라우마, 그 개인사적 배경 10
2. 모성 결핍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10
3. 어머니의 宗敎化, ‘觀世音菩薩’의 의미 10
4. ‘어머니’의 변형, 구원으로써의 여성 10
Ⅴ. 결론 10
*참고문헌 10
Ⅰ. 서론
1. 문제 제기
丘庸 金永卓 1922년 2월 5일 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 밑에서 출생하여 2001년 12월28일 서울 동선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20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를 썼으며, 1949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신천지≫를 통해 등단한다(이 때는 가명 김수경을 사용했다).
(이하 金丘庸)은 한국 詩史에 중요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드러지게 다루어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결코 적지 않은 作品 시집 5권: ꡔ詩集⋅1ꡕ(삼애사 1969), ꡔ詩ꡕ(조광출판사 1976), ꡔ九曲ꡕ(어문각 1978), ꡔ頌百八ꡕ(정법문화사, 1982) ꡔ九居ꡕ(솔출판사, 2001) ꡔ九庸日記ꡕ(솔출판사, 2001),ꡔ因緣ꡕ(솔출판사, 2001)
을 남겼고, 그 作品들이 충분히 문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論者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거나, 아니면 회피의 대상이었거나 하여, 훗날의 숙제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이런 결과는 讀者와 論者들만이 아니라 金丘庸 자신의 태도에서도 기인했다. 그는 當代의 평가보다는 後代의 평가를 선택했으며, 詩의 보편적 대중성보다는 詩를 통한 개인세계의 확장이라는 난해한 본질적 세계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문단에 휩쓸린 적도 없으며, 그래서 문단 제자들을 거느린 적도 없으며, 그 많은 문학상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는 제1회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끝내 고사했던 월탄문학상을 2001년에 수상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수상식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시기였으며, 상금 역시 전액 후학들의 장학금으로 쓰였다.
. 그는 마치 은둔자처럼 자신의 세계에 칩거하면서 詩와의 싸움 金丘庸은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웬수를 갚아달라’는 말로 자신의 시적 한계를 토로했다.
만을 계속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머문 山寺 金丘庸은 태어난지 두 달만에 절간으로 들어간다.
에서 隱遁者의 自己省察이라는 소중한 기억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山寺생활 1925년 4세 때에는 철원군 월정역 마을에 유모와 함께 머물렀고,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금강산 마하연에 머물렀다. 대구,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는 1938년 다시 마하연으로 요양을 떠난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1940년에는 동학사로 들어가 이후 모든 짐을 성북동 집으로 옮긴 것이 1962년이므로, 1951년 잠시 묘심사에 머물르는 등, 집과 직장 생활로 틈틈이 오간 것을 포함하여, 그는 거의 10여 년을 동학사에서 머문 셈이 된다.
이 허약한 몸을 위한 휴식처와 徵兵을 피한 피난처 등으로 계속되면서, 평생 그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그것은 결국 자연스럽게 그로 하여금 詩를 통해 精神的 풍요를 추구하게 하였을 것이다.
金丘庸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단편적이다. 체계를 갖춘 論文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나마 수박 겉핥기식의 기본적인 분위기 탐색에 지나지 않는 정도이다. 본고 역시 크게는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詩史에 분명 문제성이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論者들이 金丘庸에게 접근하는 기회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신구문화사는 戰後詩를 정리하는 중요한 사화집 두 권을 간행했다. ꡔ한국전후문제시집ꡕ(1961)과 ꡔ52인 시집ꡕ(1968)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광복 이후 등장한 시인들의 詩, 詩論․詩作 노트, 戰後詩에 대한 몇 편의 評論을 게재하고 있다.
ꡔ한국전후문제시집ꡕ에서 金春洙는 광복 이후 韓國詩를 세 시기로 나누어 槪觀했다 김춘수, 「전후 15년의 한국시―트레이닝의 시대」, 백철 외 편, ꡔ한국전후문제시집ꡕ(신구문화사, 1961).
. 광복으로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기간, 한국전쟁으로부터 1955년 1월 ≪現代文學≫ 창간 이전까지의 기간, ≪現代文學≫ 창간 이후 1960년까지의 기간이 그것이다. 특히 김춘수는 ≪現代文學≫ 창간 이후의 시단을 고유 정서에 관심을 두는 계열, 사회적인 데 관심을 두는 계열, 개인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계열 등으로 조감하고 있었다.
한편 ꡔ52인 시집ꡕ에서 柳宗鎬는 戰後詩 15년의 시적 양상들에 대해 “적어도 새로움과 어려움은 현란한 ‘죽음의 무도’로서 독자를 현혹시켜 온 한 쌍의 불길한 마녀였다.”(426면)라고 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유종호, 「전후시 15년」, 백철 외 편, ꡔ52인 시집ꡕ(신구문화사, 1968).
. 그는 해방 이후 등장한 신인들을 고유 노선의 계승자들, 모더니스트들, 모더니즘과 고유 노선의 중간에서 개인의 내면을 응시하는 그룹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이와 같은 구분과는 별도로 ꡔ52인 시집ꡕ은 전체 편제상 서정파, 언어파, 참여파의 구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화집에서 金柱演, 김현, 趙東一은 각각 「자연과 서정―서정파의 현대적 양상」, 「암시의 미학이 갖는 문제점―언어파의 시학에 관해서」, 「시와 현실 참여―참여파의 시적 가능성」이라는 작가․작품론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金丘庸은 ꡔ한국전후문제시집ꡕ에는 작품이 실리지 않았고, ꡔ52인 시집ꡕ에는 「三曲」 한 편이 게재되는 데 그쳤다. 전자의 경우, 김춘수는 金丘庸을 宋稶, 申東門, 全鳳健 등과 함께 거론하면서 종래의 詩에 대한 개념을 해체했다고 평가하고 개인의 내면에 관심을 두는 부류로 범주화했다. 김춘수, 앞의 글, 312면 참조.
후자의 경우, 金丘庸은 김현의 글에서 ‘언어파’로 범주화되어 거론되었다. 김현은 언어파를 다시 ‘反響과 魔力’을 강조하는 부류와 ‘意味와 主張’을 강조하는 부류로 나누는데, 金丘庸은 金春洙, 全鳳健, 金宗三, 申瞳集, 朴喜璡, 金光林, 金榮泰, 馬鐘基 등과 함께 ‘反響과 魔力’을 강조하는 부류로 범주화되었다. 김현은 金丘庸 등의 詩를 ‘暗示의 美學’으로 설명하면서 우연의 효과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자들과 金丘庸 등을 비견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김현은 이들의 시학이 애매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김현, 「암시의 미학이 갖는 문제점」, 백철 외 편, ꡔ52인시집ꡕ, 446~449면 참조.
두 사화집 모두에서 金丘庸은 그가 이룬 독특한 시적 경지에 비해 소홀히 취급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두 사화집의 경우만을 놓고 볼 때 金丘庸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데는, 그가 詩壇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했던 탓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사화집을 내는 등의 의례적인 詩壇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할 의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金丘庸의 詩는 난해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詩의 難解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하기도 했다. “難解性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고 간에 성격은 다르지만 그런 것은 늘 있어 왔다. 우리나라 四家詩나 杜甫나 ꡔ神曲ꡕ이나 ꡔ파우스트ꡕ는 오늘날도 독자가 없기로 유명한 詩다. 그런데도 전 시대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늘날 소위 난해시라는 것도 백년이 못 가서 저절로 쉬운 시가 되고 말 것이다.” 金丘庸, 「시에의 관심」, ꡔ金丘庸 문학전집6: 因緣ꡕ(솔출판사, 2000), 367면.(※이하 ꡔ因緣ꡕ으로 약칭함.)
그러나 金丘庸의 詩는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물론 金丘庸 詩의 난해성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난해성과도 겹치는 것이므로, 난해성 그 자체가 그의 詩에 대한 비판의 준거로 동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金丘庸 詩가 왜 읽기 어려운가에 대한 해명이 있지 않고서는 金丘庸 詩의 개성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최근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1950년대가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정작 金丘庸을 비롯한 개별 시인들의 시 세계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1950년대 시는 ‘모던 지향적 시인들’이 됐든 ‘전통 지향적 시인들’이 됐든, 모두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언어의 유곡에 대한 세련된 탐사가 결여되어 있고, 역사와 현실의 지평을 축소시켰다는 식의 일반론이 설득력을 얻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남호, 「1950년대와 전후세대 시인들의 성격」, 송하춘․이남호 편, ꡔ1950년대의 시인들ꡕ(나남, 1994).
金丘庸 시가 난삽하다는 식의 평가도 어느 면에서는 1950년대 모더니즘 시들을 비판하는 논조를 그대로 同語反覆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疑懼를 떨치기 힘들다.
金丘庸의 詩가 난해하고 다소 난삽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950․60년대 金丘庸 詩가 보여준 새로움의 일부였다는 점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어야 할 시점이다. 金丘庸은 그 詩的 성취를 논하기에 앞서 그 실험 의식만으로도 우리 詩史에서 의미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日帝 때 징용을 피해 入山한 이래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涉獵․體化한 金丘庸은 서구의 초현실주의와 동양의 불교적 상상력을 결합시킨 매우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룩했다. 한 연구자는 金丘庸 詩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畏敬의 뜻으로 “상반된 듯이 보이기도 하는 동서양의 세계를 金丘庸만큼 깊이 있고 다양하게 체화시킨 예도 드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숙예, ꡔ金丘庸 작품집 ꡔ시ꡕ 연구ꡕ(중앙대 문창과 석사학위논문, 2001), 8면 참조.
이것은 金丘庸 詩의 외형만을 본 것이라기보다는 金丘庸 詩의 내면을 매우 날카롭게 포착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金丘庸 詩의 난해성은 시인의 개인적인 현학 취미나 통사 구조의 難澁性만으로 온전하게 설명되어질 수 없으며, 동․서양의 철학․종교를 아우르는 그의 시적 깊이에 의해서도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와 같은 작업을 위한 준비 단계의 성격을 지닌다. 비록 이 글이 金丘庸의 전체 詩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추후 다른 연구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연구하는 데 있어 몇 가지 문제의식을 제공해 줄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기존 연구 검토 및 연구 방향
金丘庸 詩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는 그의 詩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金丘庸 詩에 대한 학위 논문으로써는 세 편의 석사학위논문 이숙예-‘김구용 작품집 ꡔ詩ꡕ 연구’(2001, 중앙대 석사) 강성민-‘김구용 초기시 연구’(2000, 동국대 석사). 이동이-‘ꡔ頌百八ꡕ의 불교적 영향’(1984, 전북대 석사).
이 전부이며, 소논문 및 비평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30편에 미치지 못한다. 2000년 솔출판사에서 ꡔ詩ꡕ․ꡔ九曲ꡕ․ꡔ頌百八ꡕ․ꡔ九居ꡕ를 비롯하여, ꡔ구용일기ꡕ(일기)․ꡔ因緣ꡕ(산문집)을 묶어 전집을 내놓은 이래, 金丘庸 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앞으로는 金丘庸 詩에 대한 밀도 있는 연구가 계속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金丘庸 詩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긍정․부정이 선명하게 엇갈렸다. 김춘수는 金丘庸을 “李箱 이후 산문시에 손을 대어 몇 편의 성공한 작품을 남긴 최초의 시인” 김춘수, ꡔ김춘수 전집2: 시론ꡕ(문장사, 1982). 308면
이라고 호평하는가 하면, 유종호는 金丘庸의 산문시가 “散文에 완전히 항복한” ‘不毛의 圖式’에 불과하다고 혹평 유종호, 「불모의 도식」, ꡔ비순수의 선언ꡕ(민음사, 1995).
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관념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듯한 산문지향적 시 쓰기, 추상어의 적극적인 활용, 플롯을 갖춘 長詩의 실험 등은 그와 같은 엇갈린 평가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고, 또한 오늘날까지 金丘庸 詩의 난해성에 대한 통념을 부추긴 면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金丘庸 詩에 대한 연구는 크게 여섯 가지 방향에서 검토되어 왔다. 전쟁 체험 및 전후 황폐한 현실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 관점, 산문시라는 양식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관점, 자기 정체성 탐색이라는 주제 의식이 지닌 의미를 천착하는 관점, 金丘庸의 사조적 관심과 세계관을 초현실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관점, 불교 정신으로 金丘庸의 詩 세계를 조망하려는 관점, 金丘庸의 詩에서 초현실주의와 동양사상의 접맥을 찾아보고자 하는 관점 등이 그것이다.
첫째, 金丘庸의 詩를 전쟁 체험 및 전후 황폐한 현실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해명하고자 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윤병로, 조해옥 등이 있다. 윤병로, 「인간애로 감화시키는 중후한 시」, 구용김영탁교수 정년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ꡔ구용김영탁교수 정년기념문집ꡕ(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7). 조해옥, 「전후 인간의 파괴적 자화상」, ≪리토피아≫(2002, 여름).
윤병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金丘庸의 詩가 민족의 엄청난 비극을 시인의 정직한 시각으로 관조하며 한 맺힌 소리로 절규한 것들이라고 전제하고, 金丘庸 詩의 본령이 전후의 불안한 세태 속에서 뜨거운 인간애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조해옥은 金丘庸 詩에 나타난 전후의 황폐한 현실에 좀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조해옥은 金丘庸의 反이성중심주의의 연원을 전쟁 체험의 비정성에서 추출하고, 전후의 황폐한 현실을 극복하는 계기를 매춘부의 모습에서 관음을 발견하는 ‘차별 없음’에 대한 불교적 깨달음에서 찾고 있다.
둘째, 金丘庸 詩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산문시라는 양식의 의미를 천착한 대표적 연구자로는 홍신선과 강성민 등이 있다. 홍신선, 「한 초월론자의 꿈」, 구용김영탁교수 정년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ꡔ구용김영탁교수 정년기념문집ꡕ. 강성민, ꡔ金丘庸 초기시 연구ꡕ(동국대 석사학위논문, 1999).
홍신선은 金丘庸 詩의 형태적 변모를 통시적으로 살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943년 무렵의 시조 형태, 해방 이후의 산문시 형태, ꡔ九曲ꡕ으로 집성된 長詩 형태, ꡔ頌百八ꡕ의 이어쓰기 형태 중에서 홍신선은 특히 해방 이후 金丘庸 산문시의 실험성에 문학사적 의미를 두고 있다. 강성민의 학위 논문은 ‘자아 탐구’라는 주제 의식이 지닌 모더니즘적 성격을 해명하는 데 초점이 있는 듯하나, ‘자아 탐구’를 상징주의와 연관시켜 논함으로써 논점이 다소 흐려진 면이 있다. 반면 현실 반영 및 전통과의 단절 의식에서 비롯된 金丘庸 詩의 산문지향성이 시어 층위에서 추상어로, 통사론적 층위에서 환유로, 담화 층위에서 극적 구성으로 나타난다는 강성민의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金丘庸 詩의 주제 의식인 ‘자아 탐구’와 산문시라는 양식 사이의 관련성일 텐데, 강성민의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셋째, 金丘庸 詩의 주제 의식을 자기 정체성의 탐색에서 찾는 연구자로는 강성민을 비롯하여 배인환, 조연정, 박선영 등이 있다 배인환, 「金丘庸의 ꡔ아리랑ꡕ」, ≪리토피아≫(2002 여름호). 조연정, 「金丘庸의 ꡔ시ꡕ에 나타난 ‘자기(self)’ 실현의 의미」, ꡔ관악어문연구ꡕ(제27집, 2002.12). 박선영, 「생성의 축제, 무한 생명을 향한 길」 ≪현대시학≫(2004년 10월호)
. 강성민은 “金丘庸은 항상 자신이 쓰는 글에 반영되는 자신을 응시한다. 그의 글은 그에게 그 자신의 모습, 자신의 정신 또는 의식의 변화를 비추어준다.” 강성민, ꡔ金丘庸 초기시 연구ꡕ(동국대 석사학위논문, 1999). 25면.
라고 하여 金丘庸 詩의 자의식에 주목한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상징주의 詩의 자기애적 경향을 金丘庸 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점이 강성민의 글이 지닌 결점으로 보인다. 배인환은 金丘庸 詩 「아리랑」의 주제를 ‘나의 발견’으로 보고, 이를 ꡔ九曲ꡕ․ꡔ頌百八ꡕ․ꡔ九居ꡕ에까지 확장시키고자 했지만 논의가 불충분한 것이 흠이다. 조연정은 金丘庸의 禪的 思惟와 그의 詩에 나타난 ‘자기(self)’ 실현이 맺는 관련 양상에 주목했다. 그런데 조연정은 ‘자기’를 ‘全一的 存在’로 전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조연정은 金丘庸 詩에 나타나는 ‘눈[目]’의 문제를 인식론, 자기 인식의 문제로 집약시키지 못하고 ‘視力’의 문제와 혼동하는 듯하다. 가령 金丘庸 詩의 내향성을 ‘視線의 喪失’이라는 메타포로 제시하고 있지만, 내향성 역시 하나의 ‘視線’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박선영은 金丘庸 詩를 ‘카오스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한 질서의 가닥을 뽑아 올려 더욱 풍요롭고 입체적인 세계를 도래시키는’ 생성의 몸부림이라는 존재론적 입장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金丘庸 詩의 기본적인 분위기 파악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넷째, 金丘庸의 사조적 관심과 세계관을 초현실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대표적 연구자로는 김현이 있다 김현, 「현대시와 존재의 깊이」, ≪세대≫(1965. 3).
. 김현은 金丘庸의 장시 「三曲」을 텍스트로 하여, 金丘庸 詩의 난삽성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非在의 言語化’”로 합리화한 바 있다. 그러면서 김현은 두 개의 동떨어진 레알리테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경험의 언어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金丘庸의 표현 양식을 초현실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김현의 연구는 그 대상이 한정된 것이어서 金丘庸 詩의 초현실주의적 특성을 본격적으로 구명하지는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丘庸의 詩를 초현실주의와 관련하여 연구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김현의 연구는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다섯째, 불교 정신으로 金丘庸의 詩 세계를 조망하려는 연구자로는 임중빈, 김진수, 이동이 등이 있다 임중빈, 「蓮花心의 詩道」, 구용 김영탁 교수 정년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ꡔ구용김영탁교수 정년기념문집ꡕ. 김진수, 「불이의 세계와 상생의 노래」, ꡔ구곡―金丘庸문학전집2ꡕ(솔출판사, 2000). 이동이, ꡔ頌百八ꡕ의 불교적 영향ꡕ(전북대 석사학위논문, 1984).
. 임중빈은 金丘庸의 詩 세계를 妙法蓮花의 세계로 설명한다. 그러나 임중빈은 金丘庸의 詩가 현실의 衆生苦와는 별도의 자족적인 시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음을 비판하기 위해 金丘庸 詩의 종교적 성향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김진수는 ‘참된 자아’ 찾기의 도정으로 金丘庸의 詩를 보고자 했으되, 그 과정이 불교의 구도자적 자세와 일치함을 적시하고 있다. 김진수는 金丘庸 詩의 구도적 탐색이 결국 ‘어머님의 가슴’으로 귀착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金丘庸이 6․25 때 어머니와 헤어진 뒤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던 그 개인사를 참조할 때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동이의 학위 논문은 ꡔ頌百八ꡕ을 대상으로 그 불교적 영향 관계를 논한 글이다. 그러나 金丘庸의 詩를 지나치게 불교적 교리에 꿰어 맞추려고 한 점이 부자연스럽다.
여섯째, 金丘庸의 詩에서 초현실주의와 동양 사상의 접맥을 찾아보고자 하는 연구자로는 하현식을 필두로 이건제, 고명수, 김동호 등이 있다. 하현식, 「金丘庸론―선적 인식과 초현실의식」, ꡔ한국시인론ꡕ(백산출판사, 1990). 이건제, 「空의 명상과 산문시의 정신」, 송하춘․이남호 편, ꡔ1950년대의 시인들ꡕ(나남, 1994). 고명수, 「존재의 질곡과 영원에의 꿈」, ≪리토피아≫(2001, 봄). 김동호, 「난해시의 풍미―一切의 詩學」, ꡔ풍미-金丘庸 시집ꡕ(솔출판사, 2001).
이 방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이 단편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아직 체계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지는 않고 있다. 이건제는 金丘庸 詩에 나타나는 시적 자아의 욕망이 ‘투명화’에 대한 욕망이며, 그 욕망을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空의 명상’을 내세운다. 그러나 金丘庸 詩의 불교적 색채를 ‘空사상’으로만 부르는 것이 우선 온당하지 않을 뿐더러 연구자가 불교에서 말하는 ‘空’을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면이 있다. 고명수는 金丘庸 詩를 한국적 초현실주의로 설명한다. 고명수는 金丘庸 詩에서 서구 초현실주의보다는 동양사상의 비중이 더 큰 것으로 파악하고, 漢詩의 영향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金丘庸의 장시들에도 이러한 논리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김동호는 불교적 인식을 중심으로 실존주의, 기독교, 엘리엇의 모더니즘 전통 등이 金丘庸 詩에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외에 金丘庸 詩의 창작 방법론을 역설의 활용, 환유의 활용, 비관습적 언어 표현의 항목으로 해명하고자 한 이숙예의 학위 논문이 의미 있는 연구 성과로 여겨진다. 이숙예, ꡔ金丘庸 작품집 ꡔ시ꡕ 연구ꡕ(중앙대 문창과 석사학위논문, 2001).
이숙예의 연구는 金丘庸 詩의 표현상 특징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목록화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비관습적인 언어 표현을 바로 잡는 대차대조표 상에서 다분히 자의적으로 金丘庸 詩의 문맥을 해석하고 있는 부분은 온당하지 않다. 이숙예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金丘庸 詩에 나타나는 비문, 비관습적 표현을 모두 시인의 의도적 실험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과 같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金丘庸 詩의 超現實性을 詩史的인 맥락에서 검토해 보도록 할 것이다. 그 첫 단계는 우리 詩史에서 金丘庸의 詩 세계에 영향을 준 선배 시인을 찾는 계보학적 작업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은 우리 詩史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金丘庸 詩 세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간과하고 넘어간 부분이다.
이 글에서는 1930년대의 李箱과 1950년대의 金丘庸 간의 영향 관계에 주목하면서, 李箱에서 金丘庸으로 이어지는 시적 계보의 문학사적 의미를 정리해 보도록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해롤드 블룸의 ‘시적 영향에 관한 불안’을 연구 방법론으로 적용시켜 보고자 한다. 해롤드 블룸은 ‘시적 영향’을 한편으로는 지성적 수정주의의 한 현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병적인 자의식 현상으로 파악했다.
강력하고 권위 있는 두 시인에 관계될 때 시적 영향은 선배 시인의 시에 대한 誤讀, 다시 말하면 사실상 필수적으로 잘못된 해석인 창조적 수정행위에 의해서 언제나 계속되어 왔다. 文藝復興 이래 서구시의 핵심 전통을 말하게 되는 실속 있는 시적 영향의 역사는 불안 및 자구책에서 비롯되는 풍자의 역사, 왜곡의 역사, 그것 없이는 그러한 근대시가 존재할 수 없었던 예상 밖의 意圖的인 修正主義의 역사이다. 해롤드 블룸, 윤호병 편역, 「궤도 이탈 또는 시적 기만 행위」, ꡔ詩的 影響에 대한 不安ꡕ(고려원, 1991), 38면.
해롤드 블룸은 이 ‘의도적인 수정주의’를 ‘수정 비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수정비율이란 개별 시인이 자신의 선배 시인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방어 메커니즘이 우리들 정신생활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과 동일한 기능을 가지며 시의 본질적 관계를 규정짓는다. 윤호병, 「해롤드 블룸의 해체 비평」, ꡔ비교문학ꡕ(민음사, 1994), 424~425면 참조.
해롤드 블룸은 ‘수정 비율’을 ‘궤도 이탈(Clinamen)’, ‘깨진 조각(Tessera)’, ‘자기 비하(Kenosis)’, ‘악마화(Daemonization)’, ‘금욕적 고행(Askesis)’, ‘환생(Apophrads)’ 등 여섯 단계로 나누어 검토했다. 이 여섯 단계는 범박하게 말해서 개별 시인이 습작기를 거쳐 大家 詩人이 되는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하는 것은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작업으로 여겨지지만, 일면 도식성에 함몰될 우려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연구의 도식성을 피하기 위해 시적 영향 관계를 단계별로 정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金丘庸의 詩 세계는 李箱 詩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으면서 형성되었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세계로 자리 잡아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金丘庸의 詩 세계는 전후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 글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金丘庸 詩에 미친 실존주의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金丘庸은 戰中에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의 비정성을 비판하면서 아군․적군의 구별이 없는 인간애에 기반한 휴머니즘적인 詩들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金丘庸의 詩들은 다소 난해해지고 점점 길어졌는데, 이와 같은 경향은 전후에도 지속되는 면이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戰後 인간 소외의 부조리한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거니와, 金丘庸은 난해한 현실을 제대로 재현하기에 적당한 시적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金丘庸의 詩들이 난해해지고 점점 길어지는 것은 전후 각박한 현실 탓도 있겠지만, 개인사적으로는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은 원체험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金丘庸 詩에 나타난 원체험으로써의 어머니 상실 문제를 검토해 보도록 할 것이다. 이 문제는 金丘庸 詩의 여성 형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金丘庸은 이상적인 여성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끝없이 찾아 헤매는가 하면, 어머니를 관음보살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을 모색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 때 헤어진 어머니를 찾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험난한 道程은 그대로 金丘庸 詩의 난해성과 장형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金丘庸의 詩 세계는 어머니에게서 구원을 찾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道程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견 이와 같은 측면은 金丘庸의 詩를 求道的인 것으로도 볼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以上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金丘庸 詩 세계의 중핵을 이루는 超現實性의 계보학적 기원의 문제, 시대․역사적 당위성의 문제, 시인 개인의 내적 필연성의 문제 등이 해명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연작의 형태가 아닌 독립된 자유시와 산문시들을 묶은 시집 ꡔ詩ꡕ 텍스트는 1976년 조광출판사에서 발행한 초판본 ꡔ詩ꡕ로 한다. 2001년 솔출판사에서 발행한 ꡔ金丘庸문학전집ꡕ 속의 ꡔ詩ꡕ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대부분의 한자가 사라졌다. 또한 초판본과 비교하여 부호가 이동되었거나, 문장이 약간 다듬어졌거나, 어순이 뒤바뀌었거나 하는 등의 다소 손질이 가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金丘庸이 말년에 스스로 작품에 손질을 가했기 때문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사소한 변화 이상의 수정은 없어보여 굳이 한자가 포함된 초판본을 선택했다. 예를 들면, ‘나는 綠빛 외투 여자는 무엇인지 모른다. 영원히 모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偶然의 役割을 한다 하여, 욕하거나 同情할 수는 없다.’(초판본)라는 문장이 ‘나는 녹빛 외투 여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영원히 모른다. 우연의 역할을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여, 욕하거나 동정할 수는 없다.’(솔출판사 간행본)로 수정되는 등의 이해가 어려운 변화가 있다는 점도 작용했으며, 당대적 질감을 위해서였다는 점도 밝혀둔다.
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처럼 연구 대상을 한정하는 데는 ꡔ詩ꡕ가 金丘庸 初期詩의 여러 국면을 다양하게 아우르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ꡔ九曲ꡕ, ꡔ頌百八ꡕ, ꡔ九居ꡕ 등의 연작시들은 ꡔ詩ꡕ와는 별개로, 연작의 형태를 취하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다고 본 때문임을 밝혀둔다.
Ⅱ. 李箱 詩와 金丘庸 詩에 대한 대비 분석
1. 문학사 기술과 대비 연구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은 “文學 傳統은 참신한 저자가 선배 저자의 형식과 존재에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투쟁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 이전에 발생했던 것에 비추어 선배 저자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의미도 동시에 인식하게 될 때 시작된다.” 해롤드 블룸, 윤호병 편역, 「시 전통의 변증법」, ꡔ詩的 影響에 대한 不安ꡕ(고려원, 1991), 186면.
고 말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선배 시인과 그 선배 시인을 따르는 후배 시인 간의 ‘대조’를 통한 文學 批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해롤드 블룸의 ‘詩的 影響’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시인들 사이의 類似性을 해명하는 데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詩를 어떻게 수정주의적으로 계승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게 여겼다. 이와 같은 연구 경향은 시인의 창의성을 다소 과소평가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시인을 둘러싼 문학사적 배경을 강조하는 하나의 문학관으로써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해롤드 블룸의 시적 영향에 관한 연구는 문학사의 특정한 흐름 속에서 한 시인을 살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文學史의 통시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金丘庸의 詩는 여러 모로 李箱의 詩를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면이 있다. 이 점에 관해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언급하기는 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金丘庸 詩의 문학사적 의의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李箱 詩와 金丘庸 詩 사이의 대비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金丘庸은 李箱 詩의 모티프를 자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잠재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듯한 詩想의 전개 방식 면에서도 李箱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金丘庸은 연구 논문을 별로 남기고 있지 않지만, 李箱에 대한 논문만은 제법 분량이 긴 글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장의 목적은 李箱에서 金丘庸으로 이어지는 우리 詩史의 한 흐름을 살핌으로써 그 계보가 지닌 詩史的 意味를 짚어보고자 하는 데 있다. 이 장에서는 金丘庸의 李箱論인 「‘레몽’에 도달한 길」 金丘庸, 「‘레몽’에 도달한 길」, ꡔ因緣ꡕ, 600면.
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뒤 金丘庸 詩에 반복되는 李箱 詩의 모티프들에 대해 살펴나가는 순서를 취하기로 한다.
2. 李箱 詩에 대한 수정주의적 접근:金丘庸의 李箱論
「‘레몽’에 도달한 길」에서 金丘庸은 李箱 詩가 발표된 1930년대의 시대 상황, 李箱 詩의 형태 실험, 李箱 詩에 대한 당대 독자들의 반응을 비롯하여, 李箱 詩에 드러난 죽음과의 대결 의식을 주로 논했다. 金丘庸은 李箱을 우리 시문학사에서 ‘현대시를 이루어놓은 최초의 공로자’로 평가하면서, 李箱을 초현실주의 시인으로만 한정하여 논하는 시각의 부당성에 대해 언급했다. 金丘庸은 초현실주의 이론이 퇴조하여도 소멸하지 않을 李箱 詩의 특색을 1930년대의 시대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李箱의 시대 의식에서 찾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金丘庸은 “미와 창조와 sex는 그(李箱―인용자)에게 가능과 미래를 제시하였고 그만큼 그를 배반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한계를 거부하는 분열을 볼 수 있다. 썩어가는 전신으로 그는 지상을 고발하였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李箱의 詩 精神을 ‘檢診의 정신’으로 평했다. 金丘庸, 앞의 글, ꡔ因緣ꡕ, 600면.
여기서 金丘庸이 李箱의 詩를 유희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진지하고 윤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李箱의 「오감도」에 대한 金丘庸의 평가에서도 재확인된다.
많은 사람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온 「오감도」 ‘시제 4호’, ‘시제 5호’ 등은 죽음과 싸우는 이상의 자화상이었다. <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어뱉었더냐> 내뱉은 것은 그의 전 작품이다. 喀血이었다. 대개의 경우 현대 시론에 의한 시인들의 초기 작품들이란 이유야 여하튼 간에 대개가 경박한 기지나 서투른 색채나 어색한 조립 때문에 그 원래의 가치마저 희박케 한 경우가 많다. 당시 일본의 초현실파란 사람들도 거개가 원숭이 같은 손장난만 하다가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氣象圖」가 대담한 실패를 한 예다.
畵虎不成에 反類狗子格인 실패 없이 이상이 일약 현대 시론을 극복한 독특한 자기 예술을 완성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엄숙한 불행과 비극에서 싹텄다. 이상의 비극과 불행이 어째서 우리의 문제가 되며 오늘날 허다한 공감을 불러일으킬까. 그 비극과 불행은 이상만의 불행과 비극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불안, 반항, 분열, 자조, 공포, 방탕, 위기, 집요, 빈곤, 갈등, 오만, 위장이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것이요, 세계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중략) 그의 예술의 난해성은 <貞操는 禁制가 아니요 良心이다. 이 境遇의 良心이란 道德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絶對의 愛情’ 그것이라.>고 한 ‘금제가 아닌’ ‘양심’ 즉 ‘절대의 애정’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禁制가 아닌> <良心>, 즉 <絶對의 愛情>을 찾는 절규가 현대에서는 난해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에의 갈구가 괴상한 몸부림을 친다. 위의 글, 611~613면.
金丘庸은 「오감도」를 ‘경박한 기지나 서투른 색채나 어색한 조립’ 이상의 진실성을 갖춘 詩로 보았던 것 같다. 주목할 점은 金丘庸이 일본의 초현실파와 李箱을 견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교는 李箱이 활동했던 1930년대 일본 시단에서 초현실주의가 유행했던 시대적 맥락이 개재해 있는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李箱의 詩 형태 실험이 초현실주의의 기존 詩 형식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金丘庸은 다른 글에서도 “잠재의식과 夢幻으로 인상적 효과를 노린 초현실주의자들의 현란한 손재주가 얼마나 위대한 낭비였던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초현실주의를 맹종한 일본 시인들의 작품에서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한갓 나의 독단일까.” 金丘庸, 「눈은 자아의 窓이다―시를 위한 노트」, ꡔ因緣ꡕ, 430면.
라고 하여 초현실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金丘庸이 초현실주의를 비판하는 지점이 모두 ‘손장난’, ‘손재주’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기교적인 면에 모아지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金丘庸은 李箱의 詩를 技巧만의 초현실주의 詩와는 달리 세계관의 차원에서도 깊이가 있는 詩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金丘庸의 견해가 초현실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金丘庸은 어디까지나 기교 중심으로 편중된 일본 초현실주의에 대해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金丘庸은 李箱 詩의 성공 요인을 논하면서 식민치하의 시대 상황을 거론했다. 그리고 李箱의 비극과 불행이 李箱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金丘庸은 戰後의 각박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金丘庸은 李箱의 시대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겹쳐 보면서 李箱에 자기 자신을 投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불안, 반항, 분열, 자조, 공포, 방탕, 위기, 집요, 빈곤, 갈등, 오만, 위장’과 같은 것들은 李箱 詩의 주제 의식이면서 동시에 그대로 金丘庸 詩의 주제 의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한 金丘庸이 李箱 詩의 難解性을 ‘진실에의 갈구’, ‘절대의 애정’인 양심의 소산 등 전폭적으로 긍정한 裏面에 자기 자신의 詩作에 대한 辯解도 개재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다음으로 金丘庸이 李箱 詩의 基底로 말하는 ‘절대의 애정’이 무엇에 대한 애정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 金丘庸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金丘庸은 「현대문학과 체험」(1959)에서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문학은 인간을 귀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휴머니즘적인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어서, 이 점을 참고할 때 金丘庸이 말하는 ‘절대의 애정’이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말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金丘庸, 「현대문학과 체험」, ꡔ因緣ꡕ, 396~397면 참조.
그런데 「‘레몽’에 도달한 길」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언급이 특별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 대신 金丘庸은 李箱의 분열증적 詩想 전개 방식을 현대인의 자아 탐구와 관련지었다.
정신과 육신의 전쟁은 치열하였다. 주체와 객체, 내부와 대상이 각각 군웅으로 할거하였다. 처절한 현대인의 의식 분열이었다. 분열한 의식들은 연합이란 말을 모른다. 자기가 세상인지 세상이 자기인지 누가 자기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 金丘庸, 「‘레몽’에 도달한 길」, 616면.
金丘庸은 李箱 詩의 자아 탐구에서 휴머니즘을 보아내려고 노력했다. 金丘庸이 보기에 李箱 詩의 분열증적 양상은 李箱 개인의 분열증이 아닌 현대인의 분열증이었다. 李箱은 자신의 분열증과 대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고 金丘庸은 생각했다. 그런데 金丘庸의 해석에는 매우 독특한 점이 있다. 金丘庸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육신의 전쟁’으로서의 의식 분열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李箱 詩의 분열증적 양상을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金丘庸은 李箱 詩의 난해성을 ‘진실에의 갈구’, ‘절대의 애정’으로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이 李箱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인의 자기 정체성 탐색으로 그 내포를 확대했을 때, 金丘庸은 ‘양심’이라는 말을 李箱의 詩를 논하는 데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자아 탐구가 휴머니즘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李箱 詩 모티프의 계승과 변용
李箱 詩에 대한 金丘庸의 평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金丘庸이 李箱 詩를 얼마나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게 분석했는가 하는 문제보다 金丘庸이 李箱 詩를 어떻게 수정주의적으로 계승․발전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해롤드 블룸은 이와 같은 수정주의적 계승․발전을 ‘창조적 誤讀(creative misreading)’의 과정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해롤드 블룸에 따르면 시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선배 시인을 추종하는 후배 시인의 ‘병든 자의식’이지 선배 시인의 詩史上․詩批評上 객관적 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해롤드 블룸, 앞의 책, 34~39면 참조.)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金丘庸의 李箱論을 살피는 데서 더 나아가 金丘庸 詩에서 李箱 詩의 영향을 찾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金丘庸 詩에 드러나는 李箱 詩의 영향을 크게 거울 모티프, 여성상 등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거울 모티프가 李箱 詩의 주요 모티프였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金丘庸은 그의 詩 「室內」, 「神話」, 「散在」 등에서 李箱 詩를 연상시키는 거울 모티프를 사용했다. 단순히 ‘거울’을 모티프로 사용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金丘庸의 ‘거울 모티프’가 李箱 詩의 제재 처리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神話」는 李箱의 「거울」과 그 시상 전개 양상이 매우 흡사한 詩로 보인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잘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握手를받을줄모르는―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李箱, 「거울」 全文
내가 볼 적마다, 놈은 흘끔흘끔 나를 보기에, 무슨 할 말이 있다면 시원히 들어보려고 가니까, 놈도 긴한 일이나 있는 듯이, 내게로 온다. 우리 인사 합세다 하니까, 놈은 음흉스레 입술만 들먹일 뿐 대답을 않는다. 내가 수상한 놈임을 알았지만 선심으로 악수를 청해도, 내 손끝에다, 놈은 싸늘한 제 손끝만 살짝 들이댄다. 놈의 소행이 괘씸하나, 나로서는 기왕 내민 손을 옴칠 수도 없어서 정답게 잡으려는데, 놈은 기를 쓰며 그 이상 응하지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니까, 그제는 따라 웃는다. 하 밉살스러워서 뺨을 쳤더니, 거울은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놈은 깨끗이 없어졌다.
목(首)을 잃은 나는, 방안에 우뚝 선 놈의 胴體를 보았다.
―金丘庸, 「神話」 全文
흔히 ‘거울’은 자기 성찰의 장치로 알려져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李箱의 「거울」에서도 거울 모티프는 자기 성찰의 장치로 쓰였다. 李箱의 「거울」에 사용된 거울 모티프의 특징은 시적 자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이미지가 아닌 ‘他者’로 인식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거울」의 시적 자아는 ‘거울 속의 나’와 ‘나’(거울 밖의 나)를 구분한다. 그리고 시적 자아는 “잘은모르지만외로된事業에골몰할께요”(「거울」 제5연 中)와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거울 속의 나’ 역시 현실계의 사람처럼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리라 생각된다. 「거울」의 시적 자아 ‘나’는 ‘거울 속의 나’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바란다. 그러나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다. 李箱은 이와 같은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握手’의 불가능성을 통해 암시하고자 했다. 「거울」의 제3연에서 시적 자아는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握手를받을줄모르는―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라고 진술한다. 하지만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실패는 본질적으로 ‘거울 속의 나’가 ‘왼손잡이’라는 육체적 조건 때문이 아니다. ‘거울 속의 나’는 본래 육체를 지닌 실체가 아닌 이미지, 幻影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握手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李箱은 바로 이 점을 끝까지 은폐하면서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기 성찰은 매번 실패하고 만다(“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 中). ‘거울’은 ‘나’로 하여금 ‘거울 속의 나’를 만날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나’와 ‘거울 속의 나’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단절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적 자아의 자기 성찰은 매번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지식인의 자의식을 나타내는 듯한 李箱의 ‘거울’은 金丘庸의 「神話」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李箱이 ‘거울 속의 나’와 ‘나’를 구분하면서 거울 속의 ‘나의 幻影’을 분신(double)과 같은 육체를 지닌 他者로 간주했다면, 金丘庸은 ‘거울 속의 나’를 ‘놈’의 3인칭적 존재, 他者로 파악한다. 李箱이 ‘거울’의 존재를 명확히 전제하면서 詩想을 전개한 데 대해, 金丘庸은 ‘거울’의 존재를 감추면서 詩想을 풀어나간다. 李箱도, 金丘庸도 이 他者․幻影에 대해 위화감을 품고 있다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幻影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 ‘놈’ 사이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神話」의 시적 자아는 ‘놈’을 음흉하다고 하고 ‘수상한 놈’이라고 치부한다. 金丘庸 역시 李箱처럼 ‘握手’의 불가능성을 통해 시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거울 속 幻影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나타내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것은 金丘庸의 李箱에 대한 분명한 오마주(hommage)로 보이기 때문이다. 金丘庸이 이 詩의 제목을 ‘神話’라고 붙인 것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金丘庸의 「神話」는 韓國詩史上 李箱이 발견한 거울 모티프를 기념하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金丘庸은 「神話」에서 거울을 깨면서 거울을 인지한다. 거울이 깨지면서 시적 자아의 거울 속 환영인 ‘놈’도 깨끗이 없어진다. 그러나 ‘놈’은 오히려 거울에서 벗어나 “방안에 우뚝 서” 있게 된다. 그것을 ‘나’는 깨진 거울 속에서 알아챈다. 일종의 ‘轉位’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轉位를 통해서도 ‘나’와 ‘놈’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점은 李箱의 거울 모티프보다 한층 극심한 분열처럼 보인다. 이것은 「神話」의 시적 자아가 거울을 부수는 데에서 기인한 현상이다. 「神話」의 제2연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이 ‘목’을 잃었으며 ‘놈의 동체’를 보았다고 逆說的인 진술을 한다. 목을 잃었다는 것은 머리까지를 잃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거울 속 幻影인 방안에 선 ‘놈’의 형상이 동체, 즉 몸통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金丘庸은 이와 같은 逆說을 통해 자의식의 혼란에 빠진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놈의 동체’를 보았다는 것은 視力에 의한 감각적 인지를 의미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깨진 거울에 비친 목 없는 동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자의식의 분열상을 깨달았다는 의미의 ‘보다=이해하다’로의 의미의 확장을 보인다. 이처럼 분열된 자의식을 直覺한 것이 金丘庸 詩 쓰기의 원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神話’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李箱의 거울 모티프로부터 示唆 받은 것이라고 할 때, 바로 그 지점에 詩史的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金丘庸이 李箱 詩로부터 이어받은 주요 모티프 중 두 번째는 여성상과 관련된 것이다. 李箱이 여러 소설에서 ‘기생’, ‘매음녀’를 주요 인물로 다루었던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서도 李箱은 ‘매음녀 모티프’를 즐겨 사용했다. 「狂女의 告白」, 「興行物天使」, 「I WED A TOY BRIDE」 등의 작품들은 매음녀를 모티프로 한 李箱의 대표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I WED A TOY BRIDE」에서 李箱은 매음녀를 ‘인형’으로 취급하는데, 이와 같은 면은 金丘庸의 詩 「消印」 등에서도 나타난다. 金丘庸 詩에 등장하는 탕녀 계열의 여성들은 李箱 詩와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李箱 詩에 나타나는 매음녀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하나의 표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李箱 혹은 그의 시적 자아들은 매음녀의 행위를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자각해 가게 된다. 한편 金丘庸 詩에 나타나는 매음녀들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그려져 있지만은 않다. 가령 「消印」에 등장하는 매음녀 역시 생활고로 인해 매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金丘庸 역시 매음녀를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李箱과 상통하는 면에 있다. 다만 李箱의 경우 매음녀의 부정성을 부각시키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훼손성을 드러낸 반면, 金丘庸의 경우 그 깨달음이 사회 구조의 층위라기보다 다분히 순수 관념의 층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심층 의식으로서 순수 관념의 秘意를 캐내는 열쇠로 金丘庸이 ‘매음녀’와 같은 여성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은 어떤 면에서 초현실주의에 있어서의 여성관을 연상시킨다.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매음녀’를 비롯한 金丘庸 詩의 다른 여성 인물들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우선 초현실주의에서 여성의 존재 의의에 대해 해명한 다음 글을 참고삼아 살펴보는 것도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프로이트는 여자를 뮤즈로 이해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인식에 계시의 역할을 부가했다. 그 발상은 빌헬름 옌젠의 단편소설 「그라디바: 폼페이의 환상」을 분석한 그의 글에서 유래했다. 소설에서 젊은 고고학자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그리스 부조에 새겨진 소녀 그라디바에 사로잡혀 있다. 하놀트는 부조에 묘사된 그라디바의 걷는 모습에 매혹되어, 그녀를 ‘걸음걸이가 눈부신’ 소녀라고 부른다. 하놀트는 그라디바가 폼페이 파멸 때 산 채로 매장되는 꿈을 꾸고, 그녀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폼페이 여행에 나선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걸음걸이가 눈부신’ 한 소녀를 만나고, 그녀가 그라디바이거나 그 화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오래 전에 그가 버린 어린 시절의 연인 초에 베르트강이다. 하놀트가 이것을 깨닫자마자 그리스 부조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이 치유되고, 그는 초에와 정상적인 삶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프로이트는 ‘Bertgang’이 독일어로 ‘걸음걸이가 눈부신’이란 뜻임을 지적한다. 그는 하놀트가 본래 초에에게 빠져 있었고, 그녀와의 만남이 그의 억압된 욕망을 해방시켰다고 결론짓는다.
초에-그라디바는 ‘여자-아이’다. 그녀는 여인 시절과 어린 시절의 요소들을 두루 겸비하고 있고, 그 역할은 하놀트가 자기 무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녀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지점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피오나 브래들리, 김금미 역, 「초현실주의와 여성」, ꡔ초현실주의ꡕ(열화당, 2003), 48~49.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여성은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李箱에게 ‘아내’로 일컬어지는 매음녀들이 ‘초에 베르트강’이자 ‘그라디바’일 수 있었다면, 金丘庸 역시 매음녀 등의 탕녀 계열의 여성들과 관세음보살의 현신, 어머니 등 성녀 계열의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의 수수께끼를 풀어갔다고 할 수 있다. 李箱의 여성상이 매음녀로 한정되어 있어서 그 냉소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金丘庸의 여성상은 탕녀와 성녀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출발하여 종국에는 그와 같은 구분의 無化, 圓融에 이른다는 점에서 李箱의 경우보다 관념적․철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金丘庸의 「꿈의 理想」(1958)은 李箱 詩의 탕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金丘庸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시의 주인공인 ‘그’는 미혼여성 좌담회에 나갔다가 여의사, 여선생, 여대생 등 세 명의 여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들 세 명의 여자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그’는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실직자로 전전하던 시절 ‘그’에게 오렌지를 사주었던 ‘흰 옷 차림의 여자’ 때문이었다. ‘그’는 ‘흰 옷 차림의 여자’가 베푼 자선에 강렬한 性慾을 느낀다. ‘흰 옷 차림의 여자’에 비해 미혼여성 좌담회에서 만난 여성들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열심히 ‘초코렛만 빨고 있었던’ 여대생은 李箱 詩에 나오는 ‘興行物天使’를 연상시킨다. 李箱의 詩에서 ‘초코렛’은 남성 상징으로 등장하거니와, 「꿈의 理想」에 등장하는 여대생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초코렛’의 시적 장치를 통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여선생은 거리에 나왔을 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다. ‘그’는 여선생의 그와 같은 허위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다. 또한 여의사에 대해서 ‘그’는 왠지 낙태 수술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거부감을 느낀다.
믿지 못할 일이 있었다. 눈동자가 魔術이라면 그럴 성도 한 일이었다. 흰 옷차림의 여자는 천연스레 오렌지를 들고 있었다. 그를 正面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視線은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실은 그와는 正反對로, 그녀는 거울을 향하고 돌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돌아선 채로 오렌지를 文匣에 놓더니, 蓮꽃을 雨後晴 雲鶴甁에 꽂았다. 여자는 연꽃과 龍이 비친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품었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점점 觀音으로 변하였다. 그는 그녀의 등 뒤에 서서, 正面 거울에 나타난 聖 白衣觀世音菩薩을 보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흰 옷차림의 그녀만이 觀音으로 비쳐 있을 뿐이다. 뒤에 서 있는 그는, 거울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울 속에서 여전히 觀音의 미소를 하였다. 그는 <당신을 만나려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의 음성을 못 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空間은, 그의 앞을 頑强히 가로막았다. 두 사이는 아무것도 없건만, 보이지 않는 透明質이 손바닥에 싸늘하니 느껴졌다. 저편을 볼 수는 있으나, 저편에서는, 그의 形態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琉璃가 두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난 늘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하고, 그는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통하지 않는 空間에 기대어 머리를 숙였다. <난 元來부터 理由가 없어요.> 분명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꿈의 理想」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그’의 꿈 대목 중 일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세음보살로 변한 여자라기보다는 그녀의 거울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흰 옷 차림의 여자’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녀의 거울 속 이미지다. 이 거울은 ‘그’의 무의식이 시각화되는 공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무의식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초현실주의의 재현을 거부하는 화풍을 연상시킨다. 가령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비치는 이상한 거울이 등장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나는 재현되지 않는다」(1937)라는 그림의 화풍과 위 인용된 부분에 깔린 ‘재현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적인 거울에 의해 ‘흰 옷 차림의 여자’는 신비화된다. 이제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自在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관세음보살의 형상으로 시적 자아 앞에 나타난다.
물론 “난 원래 이유가 없어요.”라는 여자의 분명한 음성에 환상이 깨진 시적 자아가 왠지 세상에 속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시적 자아가 ‘흰 옷 차림의 여자’를 관세음보살과 동일시하고 있는 점은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金丘庸 詩에서 관세음보살은 전쟁 때 헤어진 어머니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바라기」(1950), 「觀音讚Ⅱ」(1957) 등에서 이미 자명해진 사실이다. 여기서 시적 자아가 ‘흰 옷 차림의 여자’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모성 결핍’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꿈의 理想」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金丘庸이 전쟁 때 어머니와 헤어진 것으로 인해 정신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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