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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논문> 백석의 민족시인으로서의 가능성 탐색/리토피아사화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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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8,240회 작성일 05-01-14 22:55

본문


* 각주 생략됨

소논문-백석의 민족시인으로서의 가능성 탐색
자조와 체념으로 빚은 정갈한 한국정신

1. 들어가기.
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당대의 다른 시인과 비교 연구하거나 그를 통해 한 민족의 시대적 정신의 변화와 당대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소중하다. 한 시인이 애당초부터 어떤 문학적 세계관을 확고하게 갖추고 그에 입각하여 작품을 써 내려갔을 것이라는 논리에는 숱한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한 시인이 동시대의 일관된 문학사조에 따라 작품을 썼으리라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런 잣대로 그의 작품을 검증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다만 그가 남겨놓은 작품을 분석하고 당대의 흐름과 비교 연구함으로써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문학적 신념을 갖고 작품을 썼던 것인지에 대해 귀납적인 방법을 통해 알아볼 따름이다.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는 백석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백석의 시작품은 모더니즘으로도 낭만주의로도 순수시로도 분명하게 성격이 매겨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카프의 경향적 색채로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백석은 이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활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우리의 현대시사에 매우 개성적인 시적 세계를 창조해 냈다. 오히려 그의 그런 특별한 면이 당대에 모더니스트로 평가를 받은 주요인이었음이 옳은 말일 것이다.
'綠豆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풍채는 나로 하여금 때때로 그 주위를 몽 파르나스로 환각시킨다.' 백석이 꾸며낸 화려하고도 새로운 첫 시집 『사슴』의 출현을 지켜보며 김기림은 경탄하다못해 신비로움까지 느낀 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떤 시류에도 휩쓸리지 않고 독특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말을 가꾸었으며, 시인으로서의 긍지도 오만도 안주도 없었던 백석은 스스로 子夜라 이름 붙인 한 여인을 끔찍이도 사랑했으며, 그녀로 하여금 평생 그리움 속에 살다가, '세상 어떤 남자들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더라'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게 만들었다. 그는 고향과 서울, 함흥, 만주, 신의주 등을 떠돌다가 끝내는 고향인 북에 남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며, 근자에 그곳에서 발표한 몇 편의 작품들로 잠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1962년 이후 다시 그 모습을 감추고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백석의 시와 인생, 사랑과 생몰에 이르기까지의 투박하면서도 감동적인 개인사를 돌아보면서 필자는 그에게서 일종의 신화적인 인물로서의 경배심마저 솟아남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제 그에 대한 해금이 이루어져 많은 논자들에 의해 그의 시세계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본 고는 그 동안 이루어졌던 백석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시의 특질 중의 모더니티를 간략하게 검증하고, 일부 연구가들이 이미 거론한 바 있는 그의 시세계에 있어서의 민족정신 파악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그가 과연 민족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백석의 시작품은 시집 『사슴』을 포함하여 약 100여 편이다. 그 외에 북한에 거주하면서 여러 편의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논자들은 그 작품들이 대부분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띄었음을 들어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데 주저하고 있으므로, 본 고 역시 해방 이전에 발표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백석이 활동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며 동시에 우리의 문학사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시들은 일제의 암흑기를 뛰어넘으며 그대로 해방 후의 시로 연결되었으며 오늘 현대시의 기본적인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정지용,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 계열이 커다란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현실주의 흐름인 카프와 인간 생명의 내면적 문제를 탐구해 들어간 이른 바 '생명파', '청록파'의 시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먼저 백석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는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백용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했고 1924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었으며, 조선일보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4년 졸업후 조선일보에 취직하여 ≪여성≫에서 편집일을 했다. 1935년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후 ≪조광≫의 편집일을 맡기도 했으며, 1936년 1월 20일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했다. 4월에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으나, 1939년 다시 ≪여성≫의 일을 보다가 만주 신경으로 떠나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했다. 1940년 서울에 잠깐 들러 장편 『테스』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이후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생활을 하다가 1942년 만주 안동 세관에서 근무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1947년 시 「적막강산」을 ≪신천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62년 경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걸친 복고주의 비판에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는 그에 관한 서적이 여러 권 출간되었으며 연구논문도 다수 발표되었다.
2. 연구사
동시대의 김기림은 그의 작품에서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하여 백석의 시가 모더니즘군에 합류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주로 백석의 방언사용에 대해 평가한 박용철은 그의 작품이 '해득하기 어려운 약간의 어휘를 그냥 포함한 채로 그 전체를 감미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모어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장환은 '백석은 시인이 아니라 시를 장난하는 한 모던 청년에 그쳐버린다', '백석씨의 회상시는 가진 사투리와 옛니야기의 년중행사의 묵은 추억 등을 그것도 질서 없이 그저 곳간에 볏섬 쌋듯키 그져 구겨넣은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혹평했다.
백철은 백석의 시를 '서투른 솜씨의 민속적인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고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속은 그의 시학의 출발점이요, 다시 그 결론'이라고 해석했다. 유종호는 백석의 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逢方」을 들어 ''落魄한 영혼이 펼쳐보이는 비관론의 절창으로 한국 최상의 시의 하나'이며, '한국인의 생활철학과 인생관이 집약된 대표적인 사상시'라고 평가했다. 김윤식과 김현은 백석의 시세계를 '샤머니즘적 세계에의 탐닉이 숙명론으로 이끌어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단을 건져내지 못하고 체념, 수락의 수동적 세계관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김종철은 백석의 시를 '고향 상실과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는 시점을 제공해 주었다.
백석의 본격적인 연구는 고형진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는데, 그는 백석의 시를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서 검토했으며, 백석시의 특징을 시어와 시양식상의 특질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그의 시는 대부분이 평북방언들로 되어 있으며 이런 노골적인 표출은 다분히 시작상의 의도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양식의 미적 구조에서 일탈하여 서사양식의 미적 구조를 수용하는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백석시의 세계를 유년의 화해로운 세계와 공동체적 삶의 모습과 민족적 연대감, 그리고 표랑의식과 자족적 삶의 세계로 파악했다.
백석을 민족시인으로 규정한 이동순은 그 외에 '백석시의 기법은 다분히 현장적 생동감을 중시하면서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을 다채롭고도 능란하게 구사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짧은 토막말로 된 형태가 많은데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짧은 형태를 좋아했다기보다는 매우 긴 사설조의 초고에 최대한의 자기 억제를 가한 정련 끝에 이루어진 모습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해석했다. 윤지관은 백석의 시를 순수시로 규정하고 이 시들이 표출하고 있는 정치적 무의식을 읽으면서 '백석은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순수한 연민의 아픔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기저에는 굳건한 리얼리즘 정신이 흐르고 있다'고 보았다. 이숭원은 백석시의 표현방법의 특징으로 대구적 방법과 단순하고 소박한 직유를 많이 사용하는 점, 생생한 현장감을 위해 의성어·의태어·토착어를 폭넓게 구사한 점 등을 들어 '訥辯의 美學'으로 규정했다. 결론적으로 풍속과 인정과 말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삶의 복원을 백석시의 지향점으로 파악한 것이다. 최두석은 백석의 시세계를 떠받치는 축으로서 모더니즘 시의 세례, 고향의 재현, 유랑과 운명론적 세계관의 세 가지를 설정했다.
정효구는 백석의 문학세계를 시기적으로 삼등분하여서 초기문학세계(1930-1936)는 토속적인 서민정신, 객관주의자의 정신(센티멘털리즘이나 과장된 감정의 분출이 거의 보이지 않음), 일상적인 감정과 의식세계, 열거식 병렬법과 모더니즘의 방법, 어린이의 시점과 서사적 문제로 파악했고, 중기문학세계(1936-재북 이전)는 주관주의자의 정신, 이방인의 비일상적 감정과 의식세계, 낭만주의적 방법으로 파악했으며, 나머지 후기문학세계는 재북시부터 1961년까지의 시기로 분류하여 그의 작품을 비교적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결국 백석시의 연구 방법에 있어서의 기준은 시기적으로 시집 『사슴』 발간 이전과 이후, 그리고 재북기간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짙으며, 작품세계로는 내용면(정신사적인 면)과 형식면(표현상의 특징)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대체적이다. 내용상의 고향에 집착하는 전통적 양식과 형식상의 이미지즘에 근접한 모더니티가 그의 개괄적인 특질로 파악되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 그의 모더니티와 방언 문제, 형태상의 서사구조와 고향 탐구, 그리고 민족 시인으로서의 가능성과 리얼리티, 낭만성 등이 검토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3. 반모더니즘의 모더니티
백석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우선 그의 작품 속에 배어 있는 향토적 서정에 무작정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그의 독특한 언어와 문장의 구사에 있어, 그리고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에 있어 무서울 정도의 여유와 이해하기 힘든 당대 현실에 대한 무심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한시도 떠나지 않고 우리를 강렬하게 압박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소월과 같은 한이나 서정주와 같은 신명도 보이지 않는다. 눈꼽만한 저항 의지도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탈출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느 정도는 이미지스트로서의 극단적 감정의 절제를 추구한 데서 빚어진 소산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는 자신이 포착한 장면들을 어떤 감동적인 수식도 없이 그저 선명하고 정확하게 보여줌으로써, 우회하여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감이나 분위기를 독자 스스로가 이끌어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별많은밤
하누바람이불어서
푸른감이떨어진다 개가즞는다(「靑枾」)

산뽕닢에 비ㅅ방울이친다
멧비들기가날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들었다 멧비들기켠을본다(「山비」)

그의 시선은 마치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러나 그가 잡은 순간은 장황한 수식어가 붙거나 미사여구가 없이 그대로 글로 옮겨진다. 독자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이다. 푸른 감이 느닷없이 떨어짐으로 해서 놀라는 개나, 산뽕닢에 들이치는 빗방울 소리에 놀란 멧비들기가 날고 그 소리에 놀라 바짝 경계심을 돋구고 고개를 치켜드는 자벌기의 모습.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전혀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은 채 묘사해내고 있는 점이 백석시의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다.
김기림은 백석의 모더니티에 대한 해석으로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 그것 속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라고 했다. 백석의 모더니티는 바로 이런 '애상적인 주제를 애상적이지 않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거론되어지는 듯하다.

어두어오는 성문밖의거리
도야지를몰고가는 사람이있다

엿방앞에 엿궤가없다

양철통을 절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끝에서 강원도로간다는길로든다

술집문창에 그느슥한그림자는 머리를얹헜다(「城外」)

그의 작품 「城外」이다. 백석은 성문 밖의 풍경을 냉철한 묘사적 어구로만 그려내고 있다. 마치 감정이 사라진 한 폭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애상적인 고향의 향수라든지 식민지 백성이 느낄만한 절망 같은 것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시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감정을 완전히 삭혀버린 상태에서 철저하게 이성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도무지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사리 감동에 빠져들 수가 없다.
그러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의 언어가 끌어가는 심연으로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이 시 속에 내재한 동적인 분주함과 그 동적인 분주함을 말없이 수용하며 지켜보는 한 중년의 고요한 조선여인을 만날 수가 있다. 도야지를 몰고 가는 시골길 성문 앞의 한 남자의 입에서 연거푸 터져 나올만한 소리와 도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 엿방 앞에는 보이지 않는 엿궤를 메고 어딘가에서 열심히 가위질을 하고 있을 엿장수의 소리, 양철통을 싣고 강원도로 간다는 길로 덜거덕거리며 떠나고 있는 한 촌부의 하루 일정 등이 백석이 숨기고 있는 동적인 분주함이 될 것이다.
백석의 모더니티는 '이미지스트로서의 절제와 무수한 작품 손질'에서도 기인한다. 1935년 11월 ≪조광≫(1권1호)에 발표했던 「산지」는 7연 14행의 시였다. 그러나 시집 『사슴』(1936년 1월)에 재수록하는 과정에서 제목이 바뀌고 축약이 가해져 결국 3연 3행의 「삼방」으로 나타났다.

갈부던같은 藥水터의山거리
旅人宿이 다레나무지팽이와같이 많다

시내ㅅ물이 버러지소리를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山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욼다

소와말은 도로 山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오면 山개울에놓인다리를건너 人家근처로 뛰여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츰이면
부헝이가 무거웁게 날러온다
낮이되면 더무거웁게 날러가버린다

산넘어十五里서 나무뒝치차고 싸리신신고 山비에촉촉이 젖어서 藥물을 받으러오는 山아이도있다

아비가 앓는가부다
다래먹고 앓른가부다

아래ㅅ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하는때가 많다(「山地」)


갈부던같은 藥水터의山거리엔 나무그릇과 다래나무짚팽이가 많다

산넘어十五里서 나무뒝치차고 싸리신신고 山비에촉촉이젖어서 藥물을 받으러오는 두멧아이들도있다

아래ㅅ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타며 굿을하는때가 많다(「三防」)

단 3개월 사이에 도대체 왜 이런 생략과 축약이 이루어졌으며 제목이 바뀌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하기는 힘이 든다. 어쨌든 산지 약수터 주변의 여러 가지 묘사와 약숫물을 뜨러오는 두멧아이의 사연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백석은 분명 이 3연으로도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三防」은 약수터 주변의 묘사로 1연, 약수물을 뜨러 오는 아이의 묘사로 1연, 그리고 느닷없이 아랫마을에서 굿을 하는 애기무당의 이야기로 1연을 잡았을 뿐이다. 아기자기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백석 시에 있어서 매번 돌출하는 3연과 같은 부분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손질과 칼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 행간에 생략되었을 지도 모르는 많은 부분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내며 읽어야할지도 모른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평북 사투리의 사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지막까지 작품을 손질하는 그의 시작 태도와 언어의 절제는 역시 의도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석의 모더니티는 '냉정을 유지하려는 객관주의적 정신'에서도 기인한다. 정효구는 그의 「백석의 삶과 문학」에서 그의 작품의 특질 중의 하나로 바로 이 점을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백석은 객관주의의 정신으로, 첫째는 화자가 언제나 묘사하고 전달하는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주관적 감정을 표출하고 전달하는 것보다 외부의 대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점, 셋째는 센티멘털리즘이나 과장된 감정의 분출이 거의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 점을 들었다.

토방에 승냥이같은 강아지가 앉은집
부엌으로부터 무럭무럭 하이얀김이 난다
자정도 훨씬 지났는데
닭을잡고 모밀국수를 눌은다고한다
어늬 산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夜半-산중음」)

그의 작품 「夜半」이다. 그는 처음부터 산속 어느 집의 한밤중의 모습을 그저 묘사만 하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 일관되게 끌어나가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한낱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나 이 객관적인 묘사 속에도 주도면밀하게 의도된 논리가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한다.) 그는 분명 이 산속 어느 집 사람들이 어찌하여 자정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모밀국수를 눌러 먹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짐작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이다. 그는 다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반적인 사항을 가능한 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백석의 모더니티는 '모더니스트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에서도 기인한다. 모더니즘의 도시적 경향에 반발하여 반도시적 자세를 견지한 것은 민족 주체성을 가진 인물로서 외래사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나름대로 조선적인 새로운 기법을 찾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최두석은 백석 모더니티의 단초를 김기림의 평가에서 제공받아, 그가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분되는 특징은 철저히 도시문명을 외면한다는 점이며, 백석은 세계관으로서보다는 창작방법으로서의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백석의 문학세계는 이미지즘 창작 방법을 극복함으로써 가능했으며, 외래적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장 주체적인 입장에서 소화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 보인 점이 백석이 다른 모더니스트와 다른 점이라고 파악했다.

4. 가마귓골의 갈매나무 시인
백석에게 있어 식민지 백성의 슬픔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에게는 절망적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고통도, 약자의 현실 인식에서 오는 꿈의 좌절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서 충분히 비롯될 수 있는 반항적인 정서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어떤 것도 독자로 하여금 민족적 수치심이나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작품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전통적 정한과 체념의 정서를 통해 심연으로부터 상처받은 아픔을 건드리고 있으며 그 안에서 민족적 순수함과 자존심이라는 고기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강력하게 저항하지는 않으나 결코 무릎을 꿇지는 않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혹은 도적놈 같은 그들의 횡포를 무시하고 경멸해 버리는 방법을 통해 민족적인 자존심을 잃지 않고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저항시인은 민족시인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시인이 모두 저항시인인 것은 아니다.
박용철은 그의 방언 사용에 대해 그것은 '현재의 우리가 전반적으로 침식 받고 있는 혼혈작용에 대해서 그 순수를 지키려는 의식적 반발을 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동순은 백석의 시가 '누구의 시보다도 더욱 진한 민족주체의 정신적 토양을 확고히 끌어안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작업은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곧 외래적 형식을 빌려 신뢰하는 원형을 유지하려는 강렬한 몸부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백석의 시는 독특한 문체를 갖고 있다. 그의 이른 바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은 결코 단순한 시도가 아니다. 그 어법은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가장 짙게 풍기는 것이었고 이러한 어법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식민 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길항해갈 수 있는 독자적 방언이 되었다. (중략) 백석은 모국어의 심각한 위기를 우려하면서 모국어의 질서가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곳은 궁벽한 시골로 보았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에 의하면 '민족문학이란 민족의 주체적 자아가 살아 있거나 그것을 압살하려는 외압에 능동적으로 拮抗하면서 더욱 그것을 살리기 위해 다각적으로 애쓰는 문학이다. 우리가 전집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백석의 외세에 대한 대응방법은 몸으로써의 행동이 아니라 언어로써의 길항이다. 민족언어의 뿌리조차 말살하고자 획책했던 일제의 간교한 광적 파쇼적 불법성 앞에서 그는 끝끝내 모국어 정신(어쩌면 방언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으로 버티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숭원은 백석의 시를 정신사적인 측면에서는 '민속의 복원을 통한 민족적 일체감의 회복'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대부분 백석시의 형식상 어법, 또는 문체 등에서 발견한 관점들이다. 필자는 감히 감상적 작품평 수준임을 전제하고 백석시의 내용과 그의 잘 드러나지 않는 의도 등을 파악하여 그의 시가 당대 우리의 민족적 정서를 뿌리 깊이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는 백석의 시에서 집요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는 향토 정서와 방언 사용 등을 통한 주제적 자아 복원과, 자조와 체념 속에서도 정갈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민족 정서의 시정신은, 그것이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한민족 특유의 정서라는 점에서 반드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城門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러올 것이다(「정주성」)

國破山河在라. 나라는 비록 망하여 사라졌어도 산과 들은 옛날 그대로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있으며, 황량한 세계에 생명감으로 넘치는 4월의 진군은 잔인하기만 하다. 주인공인 내가 존재하지 않는 땅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름다울수록 더욱 처연하기만 하다. 결국에는 그림과 같은 기억으로 삽화와 같은 서운함으로 고향의 산과 들은 백석의 가슴에 와 쳐박히기만 할 뿐이다. 백석의 등단작이나 마찬가지인 이 「정주성」의 정주성은 대표적으로 홍경래난만을 관련지어 볼 때에도 그곳 사람들의 끊임없는 저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혹자는 그러나 이 작품 속의 정서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백석의 향토 정서에 치우쳐 있는 초기시들이 대부분 그러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의 대표적 언론인 조선일보에 실렸다는 점이나, 백석이 이미 그런 점을 얼마든지 의식할 수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만의 하나에라도 의도성이 숨어 있는지 아닌지를 두고두고 다시 거론해야만 할 작품으로 보여진다. 이 작품 속에는 신기하게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산허리의 원두막도 비어 있으며 불빛만이 외롭게 깜박이고 있다. 아주까리 기름이 타들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듯 말듯한 그저 고요한 적막강산이다. 낮에는 잠자리나 졸다가 날아가는 무너진 성터에는 밤이 되면 반딧불만 가득할 것이다. 그 반딧불은 마치 죽은 사람들의 혼령만 같다. 그러니 헐리다 만 성문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서있는 것이다. 평화롭고 안온한 고향의 산하가 아니라 한 마디로 살아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버려진 땅인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골짜기엔가는 마을이 있을 것이고 그 마을에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겠으나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빈 공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버려져 죽어 있는 땅에 그놈의 철없는 메기수염을 한 늙은이는 속도 없이 청배를 팔러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참담한 상황하에서도 우선은 먹고살아야 한다는 비극적 운명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백석은 어디론가 달아나 숨어 버리고 싶은 자신을 전혀 다른 모습의 청배장수로 변형시켜 등장시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녯성의돌담에 달이올랐다
묵은초가집웅에 박이
또하나달같이 하이얗게빛난다
언젠가마을에서 수절과부하나가 목을메여죽은밤도 이러한밤이었다(「힌밤」)

백석은 고향 돌담에 떠오르는 하얀 달을 바라보다가 곧장 지붕 위의 하이얀 박덩어리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는 이내 옛날 목을 메어 죽은 수절과부를 떠올리고 있다. 옛성의 돌담에, 묵은 초가지붕 위에, 떠오르는 하이얀 달과 하이얗게 빛나는 박덩어리. 그리고 목을 메어 죽은 수절과부. 그런 수절과부의 이야기는 이 땅에 부지기수로 떠돌던 이야기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수절하는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은 외적인 강압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강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맨다. 그러나 그 밤에도 달은 밝고 박덩어리도 둥두렷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또 한 편의 이야기처럼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겠지만 그녀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스스로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음을 가슴아파하던 백석은 본능적으로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그 죽음이 별로 이 땅에 소중하게 작용하지 못하고 하찮은 목숨으로 가치 없이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백석은 이 땅의 빈 공간에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숱한 고향의 기억으로 채워 넣으면서 그 속에 결정적인 주체인 나를 삽입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상징화시키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잃어버린 땅의 설움을 더욱 실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간다
귀밋이 재릿재릿하니 볏이 담복 따사로운거리다

재ㅅ덤이에 까치올으고 아이올으고 아지랑이올으고

해바라기 하기조흘 벼ㅅ곡간마당에
벼ㅅ집가티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늬눈오신날 눈을츠고 생긴듯한 말다툼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三千浦-남행시초4」)

백석이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애틋한 연민의 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햇볕이 따사로운 거리를 통해 시골 마을로 들어서면 어느 집 어귀의 잿더미에는 한가롭게 까치가 앉아 있기도 하다가 아이들이 오르내리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모두가 돌아가고 아지랑이만이 피어오른다. 마당에는 볏집처럼 누런 사람들이 둘러 서 있다. 그들은 가끔씩 말다툼도 하곤 하지만 그 다툼이사 어느 눈오는 날 눈을 치우다가 생길 법한 사소한 말다툼이다. 그래서 그런 말다툼조차도 따사롭기 그지없다. 사람과 가축과 자연이 어우러져 한결같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따사로운 이곳이야말로 백석이 기억하는 고향이요 백석이 추구하는 꿈의 세계이며 이 땅에 대한 부족함이 없는 애정이었다. 그 따사로운 동네를 도야지 새끼들 몇 마리가 졸레졸레 무엇인가를 따라가며 구경하고 있다. 이 도야지들은 전체 풍경 묘사 중의 한 삽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도야지들에게 시선을 존재시킨다면 그 시선은 바로 백석의 시선일 수 있다.

(생략)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없어 히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없다
그리고 누구하나 부럽지도않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같은건 밖에나도 좋을것같다(「膳友辭-함주시초5」 일부)

우리는 너무도 착하디 착해서 결국 이런 신세가 되었다. 욕심 없이 원망 없이 정갈하기만 해서 결국 이렇게 허약하고 병든 신세가 되었다. 현실에 대한 그의 체념은 그 이전에 나약한 반성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현실에 대한 강력한 대항 의지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무한한 도전의식은 이미 포기하고 접어둔 상태이다. 고향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그의 조선적 정신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꿈꿀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고향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뿐이었다. 백석의 정신 속에는 항상 '그러나'로 가득 차 있다. 우리들은 가난하다. 그러나 서럽지는 않다. 우리들은 외롭다. 그러나 외로워할 까닭은 없다. 우리들은 부끄럽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부럽지는 않다. 그것은 극단적인 자조와 체념에서 벗어나려는 나약한 자의 고집스러운 자존심일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결국 세상을 포기한다. 그는 가장 좁은 울타리를 지키는 것으로 너른 세상의 도도한 물결에서 자꾸만 시선을 거두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조선인의 한민족적 정신으로 겨우겨우 현실의 창피함에서 벗어나 살아있음에 대한 체면만이라도 유지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신배벽 들망에
내가 좋아하는 꼴두기가 들었다
갓쓰고 사는 마음이 어진데
새끼 그물에 걸리는건 어인일인가

갈매기 날어온다

입으로 먹을 뿜는건
몇십년 도를 닦어 퓌는 조환가
압뒤로 가기를 마음대로 하는건
손자의 병서도 읽은것이다
갈매기 쭝얼댄다

그러나 시방 꼴두기는 배창에 너불어져 새새끼 같은 울음을 우는 곁에서
뱃사람들의 언젠가 아홉이서 회를 쳐먹고도 남어 한 깃씩 나눠 가지고 갔다는 크디큰 꼴두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슬프다
갈매기 날어난다(「꼴두기-물닭의소리」)

갓을 쓰고 사는 어진 마음의 소유자, 신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터에 나서는 아름다운 존재, 몇 십 년 도를 닦아 먹물을 마음대로 뿜어낼 줄 아는 존재, 손자의 병법도 익히 알아 나아가고 물러서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 그러나 시방은 여지없이 새끼그물에 걸려들어서 배 밑창에 널브러져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아홉이서 회를 쳐먹고도 남을만한 대어가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새새끼처럼 울음이나 울고 있는 불쌍한 존재, 그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백석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런 존재에 대해 백석은 한없이 슬프다. 갈매기는 비웃듯 내려다보며 자유로운 하늘을 날고 있다. 상대적 슬픔은 절정을 이루고 있다.

첨아끝에 明太를 말린다
明太는 꽁꽁 얼었다
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明太다
門턱에 공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멧새소리」)

명태 역시 꼴뚜기에 다름 아니다.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을 매달고 있는데 한낮에도 녹지를 못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남은 햇빛은 오히려 차갑다. 희망이 없는 세계에 얼어붙은 가슴을 홀로 싸안고 또 하룻밤을 지새야 한다. 문턱에 서서 언젠가 찾아올 지도 모르는 봄을 기다리고는 있으나 가슴에 매달린 고드름은 시간이 흐를수록 길다랗게 자라기만 한다. 명태와 고드름이 핵심어인데 문턱이 실낱같은 기다림으로 별 희망도 없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백석은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내려는 시작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작품의 초고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동기술법에 의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후에 그 작품을 냉철한 자세로 바로잡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석이 구사하는 언어와 시의 논리에 시인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사항까지도 충분히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토방에 승냥이같은 강아지가 앉은집
부엌으로부터 무럭무럭 하이얀김이 난다
자정도 훨씬 지났는데
닭을잡고 모밀국수를 눌은다고한다
어늬 산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夜半-산중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시이다. 백석이 다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황묘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를 간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가족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이 집은 전형적인 조선의 서민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정의 이런 단란함도 '승냥이' 같은 강아지로 인해 문득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 승냥이 같은 강아지는 아무래도 주인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집을 무시로 감시하는 강아지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선가 캥캥 울어대는 여우의 울음소리는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니라 바로 1930년대 우리가 직면했던 상황이라고 미루어 믿을 법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살벌하고 불안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끼리 웃으며 천진하게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조선인으로서의 설움을 백석은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백석의 시에 이 승냥이와 여우의 울음소리는 도처에 산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사용이 의도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새끼오리도 헌씬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짖도 개털억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우리할아버지가 어미아비없는 서러운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된 슳븐력사가있다(「모닥불」)

이 땅의 모든 것들을 태워서 따뜻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가에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석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나 감상적인 추억이 아니라, 아무쪼록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마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따뜻하고 오붓한 마당에 문득 어미아비 없이 자라 몽둥발이가 되었던 슬픈 할아버지의 역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고향은 분명히 백석의 피난처였음에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가 추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세계는 일제에 의한 근대화나 서구적인 문명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제 나라를 가진 당당한 자유인으로서의 면모를 가꿀 수 없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능한 한 내 나라 내 땅 내 이웃들의 세계로 빠져들었으며, 그것이 그나마 조선적 정신을 잃지 않는 최소한의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백석에게는 최선보다도 최소한의 자세가 더 절실했다고 보여진다. 그의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끈질기게 추구하는 고향과 방언과 우리 것에 대한 숱한 명사들로 그 판단이 가능해진다. 그는 절제와 정제를 시작상의 주요한 방법으로 하고 있음에도 우리 것에 대한 나열에 있어서만은 그 절제를 무제한으로 풀어놓았던 것이다.

아배는타관가서오지않고 산비탈외따른집에 엄매와나와단둘이서 누가죽이는듯이 무서운밤 집뒤로는 어늬山곬작이에서 소를잡아먹는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걸이며다닌다 (후략)(「古夜」 일부)

「古夜」의 첫 연이다.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엣날 이야기의 서두와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는 벌써 자신의 가슴에서 야릇한 두려움에 빠져들며 떠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할머니와 나만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집 밖으로 그 노나리꾼들이 접근할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히며 할머니의 무릎 쪽으로 더욱 다가서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떠나고 없는 외딴 집에 힘에 있어서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밤을 지내는데 밤새도록 집 주변을 떠나지 않는 도적놈들의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면 어린아이는 과연 어떤 감정을 갖게 될 것인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는 사랑스러운 손주가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당연히 의도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할머니는 작은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백석이 어린 시절에 이와 똑같은 경험을 했든 하지 않았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백석은 고향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또는 그것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하여 가장 절실한 당대의 상황 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는 뒤이어 불쌍한 어린아이의 등허리를 토닥이며 그를 편안한 잠 속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잠이라도 들어야 그 공포에서 헤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백석의 자조와 체념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진다.

거적장사하나 山뒤ㅅ녚비탈을올은다
아-딸으는 사람도없시 쓸쓸한 쓸쓸한길이다
山가마귀만 울며날고
도적개ㄴ가 개하나 어정어정따러간다
이스라치전이드나 머루전이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복이 서러웁다
뚜물같이흐린날 東風이설렌다(「쓸쓸한길」)

거적 장사 하나 쓸쓸한 산비탈을 오르고 있다. 산가마귀 을씨년스럽게 울고 도둑개나 어정거리며 따라오는 길이다.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오히려 서럽기 그지없다. 여기에서도 백석은 거적장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시키고 있다. 다른 장사도 아니고 어찌하여 거적장사인가. 백석은 어쩌면 자신의 시조차도 못내 부끄럽고 양에 차지 않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뜸물같이 흐린 날 동풍은 설레지만 그 동풍도 희망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가도가도 절망이고 설움이다. 가도가도 가마귀 하늘을 날고 도적개는 졸레졸레 따라다닌다. 그것이 백석을 자조와 체념 속에 빠지게 한 조선의 현실이었다.
이제 백석의 절창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잠시 들여다 보자.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범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니,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일견하면 이 작품은 백석이 만주를 떠돌며 숱한 고난을 겪다가 신의주로 돌아와 잠시 거처를 정한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것쯤으로 간단하게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백석에 대한 몇 가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비록 긴 방랑의 끝머리에서 돌아와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고 있으나, '가슴이 꽉 메어올 적'에나,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나,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연약한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은 항상 견고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고난을 타개할 때만 위대한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슬픔을 가감 없이 그려낼 때에 오히려 안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르는 더욱 무서운 힘을 끌어낼 수도 있으며, 그 힘은 각종의 찬사와 수식과 그리고 변절과 절필이 없을 때에 더욱 빛을 발한다.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 있었던 숱한 변절을 보아왔다. 뿐만 아니라 저항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몇몇 시인들의 그 저항적 작품을 분석하자면 고작해야 다행스러움이나 느끼고 말 정도가 아닌가.
'그러나 잠시 뒤에'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을 쳐다보'면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임을 깨닫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던 것이다. 백석에게 '더 크고 더 높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백석은 고향에 살 때부터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산고보가 기독교 학교이며, 그가 유학을 했던 청산학원도 기독교 계통이어서 그는 여기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그에게 기독교의 유일신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백석은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끊임없이 기도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백석은 그런 종교적인 신에게 귀의하기를 거부하고 갈매나무를 끌어들이고 있다. 먼산 바위 옆 어둠 속에서 하이얗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굳세게 자란다는 갈매나무가 백석의 마지막 귀향처이며 꿈의 표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개인적인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에 종교적인 세계로 빠지지 않고 갈매나무와 같은 상징적 사물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백석은 개인적인 좌절과 슬픔을 궁극적으로는 민족적인 입장에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그것은 그의 시작 태도가 결코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5. 나가기
백석은 근본적으로 일제의 근대화에 반발하여 전통적 고향에 탐닉해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외래적인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향과 방언에 관심을 갖게 된 듯하다. 또한 도시적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시골풍 체념의 미학으로 빠져든 듯하다. 그것은 곧 민족 본연의 동질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로 파악이 되지만, 결국 그것이 즉각적 대안이 아닌 고요한 반발이었으므로 운명론적인 체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부 문인들처럼 일제의 황국화 정책에 동조하여 친일시를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백석이 민족시인으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의 시가 반성과 자조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으며, 그것이 결국 체념의 미학으로밖에 이해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백석은 미래에 도래할 유토피아를 믿을 수 없었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뛰어들 용기도 없었다. 그는 운명에 도전하지 않았으며 운명에 대한 도전의지가 아니라 체념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태도를 보였다. 체념을 주조로한 운명론적 세계관을 체득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구체적이며 생생한 파악이 포기되었을 때 구체적인 삶을 탐구하는 서사 지향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게 독자는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스스로의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서러움과 패배감과 아픔 같은 것을 스스로의 문제로만 인식했으며 그곳에 그의 한계가 놓여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백석은 불행하게도 소월처럼 단명하지도 못했으며, 월북작가, 또는 재북작가로서 시대적 불운까지 겹쳐 제대로의 평가를 유보 내지는 거부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석이 불편한 안정보다는 결혼과 사랑이 그랬고, 거처와 직장이 그랬듯이 편안한 고난의 길을 선택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당한 민족시인으로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하게 나약함을 인정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으로 시를 썼음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1. 텍스트
정효구 편저 {백석}, 문학세계사 1996

2. 저서
고형진편 『백석』 새미 1996
김재용엮음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8

3. 논문.
김기림 [사슴]을 안고
박용철 백석시집 [사슴]평
고형진 「백석시연구」
김명인 「백석시고」
이숭원 「풍속의 시화와 눌변의 미학-백석론」
최두석 「백석의 시세계와 창작방법」
이동순 「민족시인 백석의 주체적 시정신」
김재홍 「민족적 삶의 원형성과 운명애의 진실미, 백석」
김윤식 「백석론-허무의 늪 건너기」
박태일 「백석 시의 공간 형상학」
김용직 「토속성과 모더니티-백석론」
김은자 「생명의 시학-백석시에 나타난 동물상징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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