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익흥 시인과 나/내항 2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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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흥 시인과 나
내항문학에 박 시인의 특집이 마련되었음을 축하드린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쓰고 싶었던 글 중의 하나임을 먼저 적어둔다. 혹자는 나의 이 글을 읽고 개인적 감정에 너무 깊이 빠진 것이 아닌가 꼬집기도 할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알만큼은 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강조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내항에 있어 박 시인의 기여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것 이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혹시라도 그의 작품이 우리가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폄하할 수준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두리뭉실하게 만들어지는 작품이 결코 아니며, 작품과 사람이 따로따로 돌아가는 이상하거나 들뜬 작품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 특집 속에 박 시인에 대한 나의 글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나는 꽤나 섭섭해했을 것이고, 박 시인 역시 조금은 섭섭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 속에 그 동안 내가 박 시인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이 은근하게, 그러면서 변함없이 유혹적으로 담겨지기를 우선 희망한다. 나는 오늘까지도 박 시인을 무수히 유혹해 왔으며, 그 유혹에 박 시인은 숱하게 넘어갔음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는 나의 유혹에 반드시 넘어갈 것임도 확신한다.
나는 주로 내가 인천에 흘러와 오늘까지 살아온 과정을 되살려 적어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박 시인과 인연을 맺고 또 쌓아온 주된 과정이 바로 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문단의 경력으로 따지자면야 내가 박 시인보다는 조금 앞서기는 하다. 그러나 인천, 또는 인천문단에 있어서만은 박 시인의 역사 속에 내가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 시인은 1988년이던가, 내가 인천문협 살림살이를 맡았던 그 해나, 아니면 다음해에 인천문단 신인상을 수상했다. 인천문단 신인상은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 인천문협 지부장이었던 이석인 시인이 오래 전부터 숙원사업으로 꿈꾸어 오던 이전 집행부의 뜻을 이어받아, 인천문단의 활성화를 위해 내어놓은 대단한 사업 중의 하나였다. 우리 인천문단은 이 인천문단신인상으로 해서 전혀 부족할 거 없이 한국문단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해냈다. 돌아보면 이만큼 성공적인 성과가 드러난 사업도 없을 것이다. 그 해 시부문에 박 시인과 류제희 시인의 작품이 결선에 올라왔다. 그런데 도무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작들이었다. 노심초사한 끝에 두 분 모두에게 수상의 영광이 주어졌다. 대한민국 문단에 좀체로 보기 드문, 상금을 받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당당한 신예였다. 아무리 지방문단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출발은 역시 기분 좋은 출발임이 분명하다. 박 시인의 첫 번째 단추는 이렇게 끼워졌다.
박 시인은 이를 계기로 하여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는 문협 집행부에 협조자를 주문했고 그 협조자로 박 시인을 거명했다. 이로부터 박 시인과 나의 인연은 끈질기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충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만날까말까한 그런 사이가 아니다. 한 달에 몇 번씩, 아니면 한 주일에도 두어 번씩 얼굴을 맞대고 앉아 매사를 상의했다. 박 시인이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나는 박 시인과 함께라면 어떤 일도 과감하게 기획할 수 있었고, 겁없이 진행시킬 수 있었다. 십여 년 이상을 내리 그래왔던 것이다. 내 못난 이름 옆에 과감하게 이름을 붙여둘 수 있는 사람. 항간에 떠도는 무슨 소리를 듣던 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끝까지 믿어주었던 사람. 처음 만나서부터 오늘까지 한번도 내 옆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 그가 바로 박 시인이다. 작은 지역문단에도 언제나 시끄러운 잡음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것은 어디든 같을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내가 가까이하고 신뢰했던 사람들 중에서 돌발적이든, 그 동안 잠재해 왔던 이유로 해서든,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고 등을 돌리는 상황도 적지 아니 보아왔다.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그 때마다 나는 나를 반성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사실 내가 먼저 그들을 가슴아프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반성으로 다시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릇의 차이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시인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박 시인의 두 번째 단추는 시집 발간이다. 박 시인은 모두 두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첫 번째 시집은 도서출판 인화에서 발간한 『꼴값하기』이며, 두 번째 시집 역시 인화에서 발간한 따뜻한 시집 『사랑 알레르기 』이다. 두 시집 모두 내가 편집위원으로 있던 출판사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에, 알게든 모르게든 나와 전혀 무관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시집이 발간되고 난 후 박 시인의 다른 작품을 일독한 출판사 대표가 그의 두 번째 시집을 기획출판으로 발간하자 먼저 의견을 내었으니, 박 시인의 작품이 갖고 있는 독자에의 근접성은 다른 말을 더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박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넉넉한 세계와 따뜻한 가슴이면 언제 독자들에게 내어놓아도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의 시심을 신뢰한다. 말도 안 되는 글의 조합이나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의 난무도 없고, 불필요한 강조나 과장도 없는 그의 시는 언제나 넉넉하고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무겁게 흐르는 강물 같은 힘이 존재한다.
나는 그 동안 인천의 몇 시인들의 시집을 발간하는데 간여를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시집을 낼 수 있고, 시인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생각이 그렇게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에 나는 둔감했던 것이다. 이런 둔감한 나를 둔감한 대로 더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음으로 양으로 애를 써준 사람 또한 박 시인이다.
인천문협에서 맺은 박 시인과 나의 인연은 내항문학으로 계속 이어졌다. 이 부분이 아마도 박 시인의 세 번째 단추가 될 성싶다. 사실 나는 등단하기 전부터 내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1985년 문단에 뒤늦게 얼굴을 내밀고, 인천문협의 살림살이를 맡은 이후에도 내항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오랜 동안 향토문단을 지켜온 그들만의 문학세계에 가치가 있었고, 나는 내 나름대로 어떤 동인에도 가입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천문단에 학산문학이라는 암초는 나를 어쩔 수 없이 내항 동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전쟁의 양상이었다. 몇몇 인천문단의 핵심들이 거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나는 문협 살림살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나서 일시에 텅 빈 내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준 곳이 바로 내항이었다. 그러니까 내항은 내가 가입한 최초의 동인이며 지금까지는 마지막 동인인 셈이다. 거기에 정승렬 시인과 박 시인, 그리고 잊지 못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내항은 나에게는 변함없이 따뜻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가 내항에 등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내항이 유약해지거나 만일 하릴없이 어정거리는 상황에 빠진다면 당연히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내항을 책임진 기간이 두 해이고, 박 시인이 끌어준 기간이 삼 년이었다. 거기에 우리 둘 사이에는 인천문협을 끌어오던 팔 년의 긴 세월이 보태어져 있었다. 이처럼 긴 세월을 거치며 익숙해진 두 사람의 확고한 시스템으로도 최근 내항의 변화를 더 이상 견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 못내 가슴이 아프다. 내 자신의 능력에 있어 엉성하고 부족한 점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회원들의 가능성 있는 다양한 의견들이 비민주적인 풍토 하에서 모조리 묵살되어 왔다는 점도 결코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두 사람은 적절히 물러서야 하는 시점을 놓쳐버렸다는 인식에 똑같이 도달했으며,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린 뒤였다. 그래서 나는 박 시인에게 미안하다.
문학에 있어 치열한 정신은 여유 있는 문학적 낭만과는 분명 다르다. 생활은 비록 견디기 힘이 들고 빡빡하여도, 윤택한 삶의 질은 그 바쁜 가운데에서도 문학을 향한 끈질긴 도전과 반항과 혁명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리라 믿는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가 쓴 글의 작품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작품성으로 문인으로서의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있어서나, 동료관계에 있어서는 작품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인간적 성품이다.
나는 박 시인의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내항의 '시와 시적 행위'에서 보았다. 그는 나보다도 더 무서운 집념으로 이 행사를 끌어갔으며, 누구보다도 진지한 자세로 무대에 섰다. 박 시인은 그 뜨거운 열정으로 누구도 맡기 어려운 역할을 과감하게 해냈다. 제자들이, 더욱이 여학생들인 제자들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바지를 내리는 연기였다. 그것은 어쩌면 잊혀지지 않는 내항의 전설이 될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의 문학은 과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 곳 인천에서 우리 내항은 어떤 방법으로 지역성을 극복하면서 당당하고 독자성이 있는 문학성을 획득해야 하는가. 박 시인과 나는 그런 내항의 비전으로 '시와 시적 행위'를 삼고 과감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 내항의 유일한 비전이나 힘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 정답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에도 질문에 대한 답은 없으며, 만일 있다고 하여도 아무도 그 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부지런히 시도하고 골백번이라도 시험하는 것으로 우리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시와 시적 행위'는 여섯 해를 거듭하면서 다행스럽게도 시가 다른 제 예술들과 더불어 협력과 조화가 가능하다는 점에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작업은 어느 정도 유치했으며, 대부분 힘에 벅찼다. 시인들의 독특한 개성과 개인적 삶의 복잡한 차이는 일치된 모습으로 강력한 힘을 창출해내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시와 시적 행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책임은 마부였던 나에게 있다. 나는 박 시인이 가슴아파하는 부분이 여기에도 있음을 짐작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항은 변한다. 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내항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꿋꿋하게 잡초처럼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말이 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분명 지기이다. 나의 스승 구용은 평소 30년 지기라는 말로 현대시학 주간이셨던 전봉건 시인과의 각별한 사이를 자주 언급하셨다. 그러나 두 분은 무슨 특별한 대화나 몸짓으로 서로의 의중을 전달하고 전달받지는 아니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그저 신뢰하면서 세상사를 흐르는 대로 받아들이고, 시기와 상황에 따라 침묵만으로도 무리 없이 서로에게 질문하고 또 답변할 수 있는 관계처럼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으며 나는 구용 스승의 이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우정도 스승을 향한 내 존경심의 한 가닥으로 키워왔다. 물론 두 분의 이런 대화법 때문에 나는 현대시학에 추천완료를 받는 데에 무려 9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버티며 기다려야 했다.
박 시인이 내게 베풀었던 그 많은 것을 차마 다 이 지면에 언급할 수는 없다. 그 동안 박 시인이 나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충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마음 고생이 컸을까는 그저 짐작이나 할 정도이다. 나는 종종 이런 벗이 내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박 시인의 변함없는 우정을 존경하며 그의 넉넉한 성품과 따뜻한 우정에 감사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박 시인의 뜨거운 시심이 어느 날 붉은 용암처럼 분출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올해 들어 박 시인과 나는 한 달에 한번이나 만날까말까 한다. 만나보았자 호프나 한 잔씩 나누고 헤어지는 일이 고작이다. 함께 다니던 강남시문학회도 지금은 잠시 그만둔 상태이다. 십 년 넘게 변함없이 맞추어 오던 발이 요즘은 하릴없이 그저 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 없어서일 것이다. 오랜만의 휴식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서로 주고받던 여러 충고와 조언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어쩌면 내심 충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서로를 향한 충고나 조언들이 없다는 사실은 당연히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우리네 인생 행로가 어떻게 전개가 되든 요즘의 편안한 휴식을 우리는 요긴하게 누릴 작정이다. 후회가 없을 만큼 푹 쉬어볼 작정이다. 아, 하지만 그래도 박 시인은 어느 정도는 긴장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대책 없이 벌여놓은 '리토피아' 때문이다. 아주 마음을 놓지는 못하고 나보다 더 전전긍긍해 하며, 어쩌면 노심초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나의 '리토피아'는 무럭무럭 자라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박 시인은 나를 결코 버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십 년이 넘는 우정은 그리 손쉽게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누구 돈으로 십 년 우정을 사보라. 돈으로는 단 일 년의 우정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대단히 이성적이기도 한 박 시인이 바보처럼 그런 우를 범할 리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니 나는 마음놓고 박 시인을 기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아름답다. 보면 볼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그 아름다움은 깊어진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시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서로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다 잘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정도, 직장도, 건강도 아직까지는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이다. 서로를 걱정할 일이 없으니 참으로 편하다. 오직 하나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에 관한 일뿐이다.
박 시인의 다음 단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그러나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여유 있는 자세로, 그리고 부질없이 이름을 탐내는 무모함에 빠지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다음 단추를 끼울 것이라는 점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박 시인의 꼴값하기가 제대로 된 시인의 꼴값으로, 제대로 된 인간의 꼴값으로, 조만간에 우리 앞에 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항, 20집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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