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건강한 화해의 시인, 정승렬/내항 1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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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화해의 시인, 정승렬
내가 누군가의 옆자리에 편안하게 앉거나, 또는 누군가를 옆자리에 편안하게 앉게 할 때에, 그가 누구든 간에 나는 우선 그와의 적당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물론 아무하고나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나의 폐쇄적인 성격 탓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 나이까지의 반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체득한 인생의 경험 탓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경우에는 그 관계가 설령 부부라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의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첫 대면에서의 첫인상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첫인상이 평생을 좌지우지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서로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의 축적이나, 또는 특수한 개성의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제야 서로간에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힐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논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세월의 때는 무엇으로도 얻어낼 수 없는 신성하기조차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승렬 형은 그런 존재이다. 아니, 그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는 나에게 그런 옆자리를 허락해준 따뜻한 큰형이며, 그런 세월을 지내온 선배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훌륭한 교사이다. 그는 나보다 한참이나 연상이다. 그러나 아득하거나 까마득하지는 않다. 만일 아득하거나 까마득하다면 우리 사이에 이 만큼 정도라도의 자연스러운 교감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넉넉잡아 십 년 연상으로 본다(실제는 8년이지만). 그러니 내가 그 십 년만큼 한 수 굽혀 들어가기만 하면, 크게 실수를 하지 않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당연히 그 십 년만큼의 한 수라는 것의 크기는 생각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좀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 밖으로 뱉어낸 적은 없으나, 나는 승렬 형에게 언제나 '원죄'를 주장한다.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까닭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그의 '원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내가 평생 발붙일 곳인 줄도 모르고 인천땅에 불쑥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2년이다. 그 후 85년까지 네 해 정도를 나는 가장 힘겨운 상태에서 척박한 인천의 짠물이 백인 땅바닥에 사지를 납작 처박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시단에 얼굴을 내밀면서 그와 만났고, 그 다음부터 팔다리를 조금씩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문협의 사무국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내 일생일대의 가장 뼈아픈 화를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런 자리를 맡을 만한 덕이 없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나는 내가 그 자리를 맡게 된 상황에 승렬 형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는 나의 배타적이고 불같이 단순한 성미를 알고 그런 봉사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심성을 다스려 나가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원죄' 있음을 오늘까지 주장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의 죄를 드러내어 내 곁으로부터 결코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너무나 큰 숲이며 너무나 큰 그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그늘 밑에서 편안하게 쉬기를 원한다. 그 그늘이 자리를 옮기면 나 역시 부리나케 그늘을 따라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 내가 정 시인에게 진 빚은 아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번도 그 빚에 대해 나로 하여금 알게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추측만 할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며, 그 빚은 오랜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려 그 보답의 공소유지기간이 이미 끝나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척 황당해 하곤 했던 것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나를 아끼고 믿어주었던 향토의 여러 문인들께 이 자리를 빌어 한 마디 하고 싶다. 오해라는 것이 생길 때에는 대부분 오해가 생길 만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오해라는 것은 바로 그 오해 발생의 상황적 가능성 때문에 활발하게 살아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황적 가능성을 없애지 않고서야 오해더러 입 닥치고 조용히 주무시라는 말은 아무래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 오해 발생의 상황적 가능 지역은 이 땅 어디에나 산재해 있고, 반면에 지금 이 순간도 결코 그 영역을 축소시키지는 못할 형편으로 보이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찌할 수 없이 여러분의 따뜻한 이해가 있어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나는 승렬 형을 참으로 알쏭달쏭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는 누구와도 다투는 법이 없다. 그는 누구도 미워하는 법이 없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오히려 보는 사람이 답답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아 금방 풀어져 버리곤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언변 때문이다. 그의 말은 전혀 어렵지가 않다. 어렵지 않으면서 듣는 사람은 그의 말에 결국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그는 절대로 도중에 포기하는 법이 없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머리를 끄덕일 때까지 그의 합리적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상대방이 아무리 과격하다해도 같이 과격해지는 법이 없다. 오히려 더 유연한 자세로 상대방의 말을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득해 나간다. 그의 그런 언변과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그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는 그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끝내는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승렬 형이 가장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한 가지 하고 싶다. 이건 참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전혀 웃기지 못하고 오히려 울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오래 전의 일이다. 서너 명의 동료 시인들과 함께 우리는 주안 어디쯤의 성인용 나이트클럽에 들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마 나이트클럽인 줄은 모르고 들어섰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맹추들이었므로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을 알고 갔을 리가 절대로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다시 돌아 나오지 못하고 발이 묶여서 자리를 잡기는 잡았는데, 머지 않아 곧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한 잔의 술도 채 마시기 전에, 한참 춤을 추며 땀을 빼던 무희가 무대에서 내려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녀는 날렵하고 아담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한국 여성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여성의 두어 배는 족히 될만한 몸집의 참말이지 대단한 거구의 당당한 서양여자였다. 반나의 그녀가 요염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성큼성큼 걸어 우리의 좌석으로 다가서더니, 다짜고짜로 승렬 형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 곧장 무대로 끌고 가버린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라서 아무도 손을 쓸 틈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선택되지 않은 사실에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척 황당해하는 승렬 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별일이야 있겠느냐 싶은 여유와 장난끼마저 발동하여서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만한 힘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머지않아 무대에서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달아날 수 없는 그녀의 품에 안겨 잠시 춤을 추는가 싶을 때는 부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돌연 그녀가 어린아이 같은 승렬 형의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사내답지 못하게 버럭 화를 낼 수도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더 이상은 참담하여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런닝셔츠를 손쉽게 벗기더니, 드디어 바지를 사정없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어떻게 말려볼까 싶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설마 전부야 벗기겠느냐 싶어 우리는 그냥 곁눈질만 하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바지가 홀라당 벗겨지고 그의 마지막 팬티가 아찔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저 팬티마저 벗겨질 것인가, 말 것인가. 불시에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독자 여러분, 뭇 술꾼들의 폭소와 미친 듯한 아우성을 들으며 거대한 무희의 노리개가 되어 있는 무대 위의 벌거벗은 향토시인 정승렬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에게도 그런 치가 떨리는 순간이 있었다.
승렬 형은 척박한 향토문단을 한결같은 인내심으로 이끌어온 인천의 소중한 시인이다. 승렬 형 세대의 몇몇 향토문인들은 아예 불모지였던 인천문단에 정성스러운 문학의 씨앗을 뿌렸으며, 머지않아 아름답게 꽃피기를 고대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중견들이다. 그들은 현재 인천문단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국문단에서도 대단히 눈부신 활약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모두가 인천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보물들이다. 보물이 보물로서의 가치를 발하는 것은 보물 자체의 문제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자들의 안목이 과연 어떤 것이냐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승렬 형의 깊이가 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는 세계와, 명쾌하면서도 칼처럼 무섭지 않은 정신을 존경한다. 결코 이기려고 대들지 않으면서도 끈질기게 화해를 도모하는 그 인간 존중의 바다 같은 인격을 존경한다.
끝으로 그의 [詩墓] 한 수를 감상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가 살다 살다 / 멋대로 흘러가는 세월에 / 허우적대며 살다가 / 간이 썩어 가고 / 뼈마저 삭아 / 마침내 오징어처럼 / 문드러져 살다가 // 여자를 만나 / 사랑의 단물을 마시며 / 흥청망청 살다가 / 7월 가뭄의 우물처럼 / 더 퍼낼 향기마저 마르고 / 두레박 끈까지 형편없이 삭아서 / 뙤약볕 아래 누운 숭어처럼 / 할딱이며 살다가 // 허허 벌판에 눈 쏟아지는 날 / 혼자 걸으며 / 혼자 소리지르며 / 혼자 죽어가는 날 / 육신은 검불처럼 바람에 다 날아가고 / 마지막 남아서 눈에 묻히는 / 진하디 진한 / 눈물 한 방울.
그는 시인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시인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시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물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향한 그의 끝없는 욕망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힘이 든다. 작품 [詩墓]에는 시인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끝내는 시를 쓰다가 죽기를 원하는 그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살다 살다가', '흥청망청 살다가', '할딱이며 살다가', '혼자 죽어가는 날'에 '마지막 눈썹에 묻힐', 그 '진하디 진한 눈물 한 방울', 그것이 그의 시이다. 그는 겉보기에는 분명 열정적인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시를 향한 열정은 이토록 그 자신의 목숨과 같은 것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한 뜨거운 목소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누구나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특히 시인이라면 그 질문에 대한 갈등으로 왼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리라. 그런데 그 극렬한 갈등과 번민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결국 어디에도 답은 없다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아니하는가. 그 허무한 결론의 빈자리에 그는 바로 시를 가져다 두고 있는 것이다. 시는 비록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한 인간이 무섭게 추구하는 그 속에는 이토록 강렬한 생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육신은 검불처럼 바람에 다 날려가도, 그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그가 머물렀던 이 땅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다만 한 왜소하지만 견고한 시인으로서의 간절한 기도이며 바람일 뿐이다.
--<내항 19집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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