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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崔陟傳]의 특질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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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598회 작성일 02-06-1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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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陟傳]의 특질 소고


1. 들어가기
[崔陟傳]은 [奇遇錄]으로도 불리는 懸谷 趙緯韓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광해군 30년인 1621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후금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하여 남녀간의 애정문제와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周生傳]·[韋敬天傳] 등과 같은 전기소설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논자들은 이 작품이 다른 전기작품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그 다른 점으로 남녀 주인공의 적극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남녀애정에 있어서의 갈등과 현실적 제약을 구체적으로 담아냈다는 점과, 전쟁 모티브에 있어서의 전쟁의 형상화나 민중들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민영대는 [崔陟傳]에 관심을 갖은 이유에 대해, 첫째, 소설사를 통해 볼 때 초기계열에 속한 작품을 창작했던 인물로 다른 소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꽤 수준 높은 작품을 남겼다는 점. 둘째, 뚜렷한 작가의식을 가지고 창작했다는 점. 셋째, 소설 창작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시기에 작자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고, 제작 연대까지 정확히 표기했다는 점. 넷째, 사대부들이 흔히 금기시 했던 사랑을 중심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특히 一夫一妻의 건전한 사랑을 기술했다는 점. 다섯째, 현실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 문제를 소설화했으며 근대소설적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남겼다는 점. 여섯째, 특히 작품 속에 작자가 일생을 통해 겪은 풍부한 삶의 체험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들었다.
박희병은 傳奇小說의 미적 특질을 규정짓고자 하는 '서사문법'으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스스로 짝을 찾아 나서야 할만큼의 '외로움'과, 둘째, 감상성과 센티멘탈리즘으로 흐르기도 하는 '내면성'과,. 셋째, 소심한 면모와 나약한 인간상으로서의 '소극성'과,. 넷째, 순결하고 고결하며 강한 '문예취향'이 그것이다. 傳奇小說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애정전기이며, [崔陟傳]이 傳奇小說임은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崔陟傳]에는 동시대의 작품인 [周生傳], [雲英傳], [英英傳], [위경천전] 등과는 다소간 구별되어지는 요소가 발견되고 있다. 본 고는 기존 논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崔陟傳]이 갖는 傳奇小說이라는 틀 안에서의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도전적인 여성 주인공
[崔陟傳]의 여성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기 실현 요구형의 인물이다.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여성 주인공 玉英의 성격이 가장 복잡하게 묘사되며, 그녀의 행위가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인 崔陟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사소한 예절에는 구애를 받지 않았'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피리에도 능한 인물이었며, 또한 매사에 긍정적이며 이치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다.

굽었다가 펴지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는 것이 천도의 항상된 이치지요. 길흉과 회한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당연히 겪을 일일 것이오. 만약 불행히 하늘에서 부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어떻게 슬픈 처지를 한탄하면서 몸과 마음을 게을리할 수가 있겠오. 근심과 고민으로 즐거운 마음을 해칠 필요는 없소.

그러나 崔陟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감상적일 뿐만이 아니라 충동적인 면모도 갖고 있으며, 위기 관리와 극복의 능력에 있어 玉英처럼 적극적이거나 도전적이지를 못 했다. 대체적으로 체념이 빠르며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그는 연곡사에서 가족이 왜적에게 모두 끌려갔음에도 다른 방도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중국으로 도피하여 산수간에 유람이나 할 생각을 가질 뿐이었으며, 그가 오랑캐의 수중에서 피해 돌아온 후에도 두고 온 중국의 玉英과 몽석을 다시 찾으러갈 방도를 뚜렷하게 강구하지 않은 채로 기다리다가 결국 玉英이 스스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16세 정도의 나이로 머릿결은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얼굴은 꽃처럼 고왔'던 여성 주인공 玉英은-그녀는 본래 서울에 사는 양반가의 자제였으나 부친을 일찍 잃고, 전쟁이 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로 피란을 했다가 뒤에 거처를 나주 땅 회진으로 옮겼으며, 다시 친척이 살고 있는 城南으로 흘러왔는데, 일찍 죽은 그녀의 언니(得英) 덕으로 漢文을 깨친 여성이다-사내가 공부하는 글방 창가에서 몰래 글 읽는 소리를 엿듣다가 마음을 정한 후, 그에게 과감하게 쪽지를 던져 넣을 수 있으며, 계집종을 보내 화답시를 요구할 정도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남존여비의 유교적 질서가 사회 전반을 억누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배필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여자의 백년고락은 실로 남자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교목처럼 훌륭한 남자가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결혼할 마음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가까운 곳에서 낭군을 뵈오니 말씀이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며 성실하고 진솔한 빛이 얼굴에 넘쳐흐르고 우아한 기품이 보통 사람보다 한결 빼어났습니다. 만약 제가 어진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면 낭군 외에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용렬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군자의 첩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남성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란 어느 정도 특별한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워 일반적인 윤리질서가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며, 또한 일반 백성이나 몰락한 양반가에서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엄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왜적이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나, '안씨가 결혼을 요청하고, 서매가 스스로 낭군을 선택한 것을 본받아야 할 때입니다.'라는 그녀의 말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기소설은 대부분 충동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관습이나 제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공통적인 의식이 존재한다. 이들이 이처럼 과감하게 중세적 인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전기적 인간의 특징인 '외로움'과 '충동성' 때문이라는 설명이 타당한 셈이다. 玉英은 상황이 자신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자 그것을 과감하게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 어머니 심씨를 설득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것은 선비의 본분이요, 떳떳하지 못한 재물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청컨대 최생으로 마음을 정하시어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은 처녀가 제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제 일생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끄러움을 꺼려하여 침묵을 지킨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용렬한 사람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그르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항상 불안한 심리상태로 조심성이 많으며 항상 미래에 다가올 불행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현실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항상 옥이 난리에 깨지거나 구슬이 강포한 무리에게 더럽혀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인생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인생이란 인간의 뜻대로 되어주지는 않는 것임을 알고 있는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는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급격한 사회 변동과 양대 전란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깨닫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

인간 세상에는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고, 좋은 일은 귀신이 시기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날 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항상 이것이 근심스러워 마음이 절로 슬퍼지곤 합니다.

그녀는 상황이 불리하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결을 시도하는 단호한 성격이기도 했으며, 마지막 조선으로 향할 때에는 조선옷과 일본옷을 준비하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의 말을 가르치고, 견고한 노와 촘촘한 돛대, 그리고 지남석까지 철저하게 준비하는 주도면밀한 성격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여성 주인공인 紅桃 역시 玉英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인인 그녀도 전란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일찍 여읜 바람에 이모 밑에서 자란 불우한 신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전사한 것으로 간주되는 조선으로 가서 아버지의 혼백이라도 거두어 오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적극성을 보인다. 이를 위해 자신의 배필을 조선인으로 정하고, 조선인인 몽석과 혼인하기 위해 스스로 남에게 몽선과의 중매를 부탁하는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다.

제 평생의 소원은 최씨의 아내가 되어 한번 조선에 가서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푸는 것입니다.

그녀가 玉英의 조선행을 만류하는 남편 몽석에게 하는 말은 무척 단호하다. 남성의 소극적인 방어와 현실안주에 비해, 여성 주인공들의 인생의 의미나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도전의식은 그녀들을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도록 놓아두지를 않았다.

낭군이시여, 낭군이시여, 막지 마오. 막지 마오. 이치가 진실로 당연한 것이라면 외환을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어머님께서 단단히 마음을 정하셨는데 어찌 물과 불이 두렵겠습니까.

그것은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목숨을 던져서라도 이루어 내겠다는 동물적 본능이 남성보다 여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 [崔陟傳]은 전반적으로 이런 강인한 정신력의 여성에 의해 주도적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어 간다. 玉英의 적극적인 자세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또한 그녀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행동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대적 변화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는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은 그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든지 극복해 보려는 단호하고 처절한 의식으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3. 체험에 근거한 사실적 묘사
전기 애정소설의 장애요소로 주로 등장하는 전란이 이 작품에서도 역시 주인공들의 애정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 전란은 소설의 중요한 시대적 장치로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의미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전란을 통한 당대 민중들의 참상이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엮어가면서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350여 년이 흐른 후에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을 겪었다. 이 작품 속에 묘사되고 있는 전쟁과 민중의 참상은 그대로 금시대의 전란과 비교하여도 별로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체험에 입각한 사실적 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자 趙緯韓의 생애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자 趙緯韓은 26세에 壬辰倭亂을 만나 경기 연천, 토산, 외가가 있는 남원으로 피란 생활을 했다. 이 때 잠시 김덕령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이 전란으로 모친과 아내, 딸 등을 모두 잃어 버린 아픔을 당했다. 그는 35세에 겨우 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43세에 增廣試 문과에 급제했다. 이 후 예조정랑·지제교 등을 역임했으나 모친의 묘를 이장하는데 지나치게 사치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 당했다. 47세에는 정협의 무고로 癸丑獄事에 연루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한 후에 정치현실에 실망하고 남원의 周浦로 이사했다. 여기에서 그는 權 , 李安訥, 許筠 등과 어울렸으며 이 때 [崔陟傳]을 지었다.
작자가 몸으로 경험한 전란의 참혹한 모습과 정황은 [崔陟傳]에 그대로 묘사가 된다. 작자 趙緯韓은 자신의 체험을 십분 발휘하여 전쟁의 다양한 양상과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혹한 고초를 과장이나 위장이 없이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병력의 징발에서부터 출전, 전투, 패퇴, 포로, 피란 생활, 노예생활, 귀화, 기타 참혹한 참상 등이 작자의 체험적 근거에 입각하여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함께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선비를 좇아 과거 공부를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할지라도 등에 화살을 지고 군대에 종사하는 일은 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분은 당시 양반 자제들은 일반 백성의 자제들과는 달리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머지 않아 崔陟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의병에 뽑혀 참전'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다시 재주가 있고 용맹하다는 이유로 서기로 천거되어 다시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다. 또한 왜적 돈우는 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징발이 되어 조선에 나왔으며, 늙은 오랑캐는 본래 조선인이었으나 목사의 학정을 못 이겨 오랑캐 땅으로 들어갔다가 참전하게 된다. 이런 부분들은 등장인물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상황이다. 작자는 주인공에만 집착하지 않고 기타 주변 인물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崔陟이 변사정의 의병에 참가하여 왜병과 싸운 것이나, 금과의 전투에서 패퇴하였을 때 조선인임을 내세워 강홍립의 조선 군대로 달아나 결국 목숨을 부지했던 사실, 또 그런 정황들은 실제의 체험이나 체험에 가까운 접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남원 연곡사로 피신 갔다가 결국 가족 모두를 잃게 되면서 경험하게 되는 전쟁의 참상 또한 지극히 사실적이다. 거기에 옥영이 왜적에게 끌려가 당하는 노예로서의 고초와, 각종 해적들에 대한 묘사, 그녀가 배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다가 풍랑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하는 등의 사건은 전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 현실감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체험적인 사실묘사는 곧 꾸밈없는 휴머니티와 연결이 된다. 전쟁이 모티브인 전기소설은 [萬福寺樗蒲記]와 [李生窺墻傳], [周生傳], [韋敬天傳]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전쟁이 다만 주인공들의 애정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로만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崔陟傳]은 중국인·왜적·오랑캐·해적 등 모두에게 따뜻한 인간적 모습을 사실대로 부여하여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모습들을 묘사하고 있다. 비록 전투 중에는 극악하기 짝이 없는 적병이지만, 전투가 끝난 평상시에는 일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비록 동맹군이기는 하지만 중국 장수는 崔陟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그를 애석하게 여겨 군중에 받아들인 후에 중국으로 데려간다. 다음은 玉英을 포로로 한 왜장 頓于에 대한 묘사다.

돈우는 인자한 사람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 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인 평행장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

우연히 강가의 정박한 배에서 읊조리는 한시와 피리 소리로 인해 崔陟이 玉英을 만나 후에, 주우가 돈우를 만나 백금 세 덩이를 주고 옥영을 사서 데려오려 하자, 돈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오히려 은자 10냥을 꺼내어 전별금으로 주고 있다.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4년 되었는데 그의 단정하고 고운 마음씨를 사랑하여 친자식처럼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침식을 함께 하는 등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나 지금까지 그가 아낙네인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보니 천지신명도 오히려 감동할 일입니다. 내가 비록 어리석고 무디기는 하지만 진실로 목석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팔아서 먹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랑캐 병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투에 참가했다가 무모한 공격으로 패퇴하여 사로잡힌 崔陟이 그곳에서 아들 몽석을 만난 후에 기쁨에 겨워 통곡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늙은 오랑캐는 그들의 사연을 묻고는 감동하며 그들을 풀어준다.

오랑캐 사람들은 성격이 진솔하며 가혹하게 수탈하는 일도 없소. (중략) 당신들 말을 들어보니 대단히 기이한 일인 듯했소. 내가 비록 죄를 얻더라도 어떻게 차마 당신들을 보내지 아니 하겠소.

玉英이 바다에서 만난 해적들 역시 수시로 출몰하나 사람을 해치지는 않고 재물만 약탈하여 간다는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적병과 해적을 좋은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현실감이 있는 자세로 글을 엮어나갔다는 것이다.

4. 장편적 요소의 등장
[崔陟傳]은 물론 짤막한 한문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내용적으로 분석하면 충분히 장편적 요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런 내용상의 요소가 훗날 장편소설의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서사구조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崔陟傳]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왜란이 진행 중인 시기에 남원의 崔陟이 城南의 鄭上舍에게 공부하러 감.
2) 玉英이 글 읽는 소리를 엿듣다가 쪽지를 던지고 화답시를 원하면서 두 사람이 만남.
3) 부친 최숙이 玉英 모친에게 통혼을 요청하나 집안이 가난하다 하여 거절당함.
4) 玉英이 모친에게 청혼을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여 그 해 9월에 혼례하기로 약속함.
5) 崔陟이 의병으로 참전하여 혼례일에 의병장에 휴가 소장을 올리나 거절당함.
6) 남원의 부유한 양생이 등장하여 정공의 아내와 결탁하여 심씨를 회유함.
7) 심씨가 양생과 10월중 혼인할 것을 결정하자 玉英은 밤에 자살을 기도함.
8) 휴가를 얻어 11월 혼례를 치르고 만복사에 올라가 후사를 위해 불공을 드림.
9) 갑오년(1594-선조27, 임진왜란 발발 2년 뒤) 불공 중에 부처가 나타나고 몽석을 얻음.
10) 3년 뒤 정유년(1597-선조30), 왜구에 의해 남원이 함락되어 지리산 연곡사로 피난함.
11) 崔陟이 식량을 구하러 하산하다 적병과 조우했으나 달아남.
12) 왜병은 연곡사를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끌고 가고 몽석 구하려다 춘생 숨짐.
13) 崔陟 체념하고 자살하려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고향집도 불탐.
14) 崔陟 명군을 따라 전투와 삼군의 장부를 담당하며 중국으로 가 소흥부에 정착함.
15) 최숙과 심씨는 연곡사로 돌아와 몽석을 발견하여 고향으로 돌아옴.
16) 玉英은 왜병에게 붙들려 노예생활을 하면서 민광, 琉球 등으로 장사하러 다님.
17) 체념하고 자살 기도하나 장육금불이 꿈에 나타나 말림.
18) 소흥부의 崔陟은 재혼 포기하고 선술을 배우기 위해 촉땅으로 가려함.
19) 崔陟이 경자년(1600년-선조33년) 늦봄에 지금의 베트남 지역인 安南에 이름.
20) 4월 보름 강 어구에서 崔陟과 玉英 해후함.(한시와 피리 소리로 서로를 알게 됨)
21) 돈우에게 옥영의 몸값을 지불하려하나 돈우는 거절하고 전별금을 줌.
22) 이국땅에서 둘째 아이 몽선을 얻음. 장육금불이 다시 나타남.
23) 장성한 몽선과 부친이 조선 전쟁 중 행방불명된 紅桃와 혼인을 함.
24) 무오년(1618년-광해군 10)에 오랑캐(후금의 누루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함.
25) 오세영이 출전하며 崔陟을 부르자 玉英은 崔陟을 위해 자살을 기도함.
26) 요양에서 조선군과 연합하여 우미새에 진을 쳤으나 대패하고 崔陟 포로가 됨.
27) 조선군으로 출전한 몽석도 이곳에서 포로가 되어 감옥에서 부자가 상봉함.
28) 늙은 오랑캐의 도움으로 부자가 탈출하다 병에 걸렸으나 중국인에 의해 살아남.
29) 고향으로 돌아와 최숙, 최척, 몽석 삼대가 만남.
30) 玉英은 자살하려 하나 장육금불이 나타나 말리자 뱃길로 조선에 갈 것을 결심함.
31) 경신년(1620 광해군 12)2월 조선을 향해 출항했으나 무인도에 표류함.
32) 해적들에게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玉英 자살 기도하나 장육금불이 다시 나타남.
33) 조선인 돛단배에 구조되어 경신년 4월 순천에 내려 남원으로 향함.
34) 모든 가족이 만나 만복사로 가 부처님께 재를 지냄.
35) 남원부윤이 상소하여 왕으로부터 상이 내림.

일반적 傳奇小說에서는 대체적으로 8)의 상황에서 결말을 맺게 된다. 이미 감상적 충동심에 의해 하나가 된 두 청춘남녀에게 3)모친의 반대와 5)곁으로 다가온 전란, 그리고 6)양생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장애 요소는 충분하며 그것을 자결의 형식을 통한 다부진 모습으로 극복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崔陟傳]은 여기까지는 서막에 불과하다.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던 그들에게 3년 뒤 두 번째 장애요소인 10)정유재란이 터져 남원은 순식간에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위기가 찾아와 이들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있다. 崔陟은 중국으로 떠돌고, 玉英은 일본으로 끌려가고, 부친과 장모만이 어린 몽석을 데리고 남원에 머물게 된다. 이로부터 3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 중국 천지를 떠돌던 崔陟과 장사꾼이 되어 일본과 중국의 뱃길을 오가던 玉英은 우연히 안남의 한 강 어구에서 해후한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반전은 아니다. 이곳에서 머물며 둘째 몽선을 얻은 이들 부부는 장성한 몽선을 홍도와 혼인시킨다. 벌써 10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들에게 세 번째 장애요소가 등장한다. 후금의 등장으로 명나라 전체가 전운에 휩싸인 것이다. 이 전쟁에 참가한 崔陟은 포로가 되었으나 조선인이어서 목숨을 건진 그는 우연히 조선군으로 출전한 아들 몽석을 만난다. 이후 오랑캐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崔陟은 부친과 장모와 해후한다. 이제 玉英이 남았다. 중궁에 남은 玉英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예의 장육금불의 만류로 마음을 고쳐먹고 아예 뱃길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녀에게 장애요소는 마지막으로 해적과 풍랑이다. 이것을 모두 극복한 그녀는 남원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상봉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요약된 장편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반복되는 위기와 반전으로 작품 전체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또한 꿈의 형식을 빌린 흔적이 없으며, 귀신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아 근대적 소설로서의 변화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
한두 번의 위기와 반전으로 소설이 마무리가 되는 여타의 전기적 작품에 비해, [崔陟傳]은 서너 번 이상의 위기와 반전이 연속적으로 설정되어 단순한 단편적 성격에서 복잡한 장편적 성격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비롯하여 보조적 인물들로서 다양한 인물상을 만들어 냈으며, 전기 연애소설로써 崔陟과 玉英의 청춘시절만이 주요 줄거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1593년부터 1620년까지의 대략 27년간이라는 인생 전반에 걸친 시간적 거리에 최숙, 최척, 몽석 등 삼대의 인생 역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으며, 공간적 배경으로도 조선의 남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중국, 일본, 안남, 유구 등의 광대한 장소가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변화 무쌍한 장소의 이동으로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동아시아 전체를 활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의 시간적 거리와 공간적 지역이 삼대와 국제적인 세계로 확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무대가 바다와 무인도에까지 미치고 있다.

5. 나가기
[崔陟傳]은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그와 동시에 계속되는 전란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가족이라는 동질성을 잃지 않으며,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견디어내면 훗날에는 뜻하지 않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는 한 가정의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전란의 참혹함과 민중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으며, 그런 중에도 변하지 않는 휴머니티와 동시에 조선 여인의 적극적인 면모가 민족의 수난시대를 헤쳐나가는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거시적인 안목으로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체적 운명에 대해 확대된 안목을 열고 진지하게 관심을 보인 근대소설적 조짐이 엿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崔陟傳]이 전기적 소설을 벗어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도 간과할 수는 없다. 작품 중 위기관리에 있어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주인공들의 자살 기도와 그에 대한 극복을 장육금불이라는 초현실적인 신통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우연적 상황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점.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참혹한 전란에도 주인공의 가족은 대체적으로 비극적이거나 커다란 손실이 없이 헤피 엔딩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유몽인의 {於于野談}에 [홍도이야기]가 담겨있는 바, 줄거리가 [崔陟傳]과 유사성이 있어 논의가 되고 있다. 두 작품의 창작 시기나 주인공에 대한 비교와 두 작품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각주는 생략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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