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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발가벗은 섬의 춤/세기문학(2000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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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376회 작성일 02-06-1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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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섬의 춤
--섬과 시인들 새 천년 맞이 마라도 시낭송회


일시· : 2000. 2. 22 ∼ 2. 24
참가자 : ·<섬과 시인들>(이생진, 차한수, 송상욱, 김행숙, 배경숙, 백우선, 이 섬, 이혜선, 장종권, 전길자, 정정근), 성산포 시인·채바다, 제주 예술인-홍송월(창), 오미연(창), 최은정(춤), 손노선(사진작가).
글 : 배경숙, 장종권

2000. 2. 22. 수요일. 맑음.
어제까지는 태풍경보로 배가 묶였다. 하지만 오늘의 날씨는 그야말로 쾌청이다. 보통 파도가 3∼4일간 일고 나면 그 다음은 잠잠해지게 마련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의 날짜 선택은 최상인 것 같다. 보통 섬으로의 여행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상 변화에 민감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오늘 아침 7시에 김포공항에 집결하여 8시 출발 비행기에 올랐었다. 비행기는 한 시간 여를 날아 제주공항에 우리를 토해 놓았고, 그곳에는 부산에서 홀로 출발한 차한수 시인, 그리고 성산포의 채바다 시인과 예술인들(홍송월, 오미연, 최은정, 손노선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30분 '마라도'행 배를 타기 위해 우리는 '모슬포'(사계리 배터)에 도착하여 아침 겸 점심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로 나서자 거센 바람을 뚫고 멀리 한라산의 준봉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모슬포'라는 지명은 '못살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현지인이 귀뜸해준다. 바람이 하도 많이 불어서 '못 살 곳'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모슬포' 해안 오른쪽으로 '송악산'이 누워 있다. 한 봉우리가 모자란 99봉이어서 맹수가 전혀 없다는 '송악산'은 그 얘기만큼이나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완만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의 기암절벽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들이 배와 대포를 감추기 위해 인공적으로 파 놓았다는 군사용 동굴이 여러 개 뚫려 있다. 그 동굴들은 낮이나 밤이나 어두운 입구를 쩍쩍 벌리고 있어서, 우리의 아름다운 천혜의 재산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다는 아쉬운 마음이 솟구치게 만든다. 지워지지 않는 지난날의 아픈 역사가 역력하게 서려 있는 곳이다. 또한 4·3사건 당시 이 근처의 '섯알오름'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한꺼번에 묻어 죽였다고 한다.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죽고 죽여야 했던 뼈아픈 상처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모슬포' 앞바다의 '형제섬'은 하나는 엎드리고 또 하나는 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애틋한 형제가 되어 한번쯤 올라보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다.
11시 30분 우리를 실은 '송악산 제2호'는 '마라도'를 향해 출발했다. 배에 오르기도 전에 뱃사람들이 겁을 준다.
"어제까지도 배가 뜨지 못했어요. 만일 날씨가 나빠지면 내일도 배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 여행의 안내자이며 섬에 관한 한 지혜의 보고이자 선구자(?)이신 이생진 시인께서 빙그시 웃으며 말씀하신다.
"어제까지 바람이 불었으니 며칠은 잔잔할 거요. 걱정 말아요."
'마라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마라도'의 넓이는 9만 평 정도, 섬의 둘레는 약 4.2km,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마치 고구마 모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10여 분쯤 나아가자 멀리 '가파도'가 마치 금방이라도 파도에 가라앉아 버릴 듯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 거센 파도가 저 한 올의 부유물 같은 '가파도'를 저대로 놓아둔 것은 아무래도 신의 은총이거나 아니면 기적일 것만 같다. 등대가 솟아 있는 '마라도'가 가까이 다가선다. 가파도의 해변에 늘어선 가옥들처럼 '마라도'에서는 가옥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10여만 평의 버려진 땅에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알고 척박한 자연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곳에 30여 가호, 60여 명이나 살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저 섬에 닿은 지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니라 한다.
'가파도'와 '마라도'를 두고 생긴 전설 한 토막이 전한다. 옛날 옛날에 '마라도'엔 한 홀아비가 살았고, '가파도'엔 한 과부가 살았단다. 예로부터 '홀아비가 죽으면 이가 서 말, 과부가 죽으면 깨가 서 말'이라고 했는데, '마라도' 홀아비도 이 말을 비켜서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마라도'의 홀아비가 양식이 떨어져 '가파도'의 과부에게 좁쌀 말이라도 꾸어 보려고 배를 저어 갔단다. 양식은 빌렸으나 해는 저물고 뱃길은 험해 어쩔 수 없이 과부네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이튿날 아침 여장을 꾸리는 홀아비에게 넌지시 과부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단다.
"빌려 가는 양식이야 갚아도 좋고 말아도 좋으니 자주만 들러 주세요."
그후부터 두 섬의 이름이 '가파도'와 '마라도'가 되었다고 한다.
'마라도'가 가까워지자 파도가 거세어지며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친다. 이 섬만 그냥 지나친다면 그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것이다. 12시에 '마라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섬에조차도 개발의 흔적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다. 세우다 만 교회당 건물이 우선 그 잔해를 맨 먼저 드러내고 있다. 주변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최남단의 섬이 무색할 정도로 물들어 있다. 피곤에 지친 몇 필의 말이 영양실조를 호소하며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으며, 개발의 흔적들은 바람의 방향으로 비단같이 드러누웠을 법한 들풀들을 들어내고 군데군데 파헤쳐진 채로 자빠져 있다. 억새는 모조리 바람에 부러진 채로 그저 황량한 분위기를 풍겨준다. 그러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한 우리는 어디라도 가고 싶어한다. 그곳이 이 땅의 끝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마라도'의 끝자락에 서 보는 감회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바람과 파도와 '마라도'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며 유혹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그 꽤 넓은 억새밭으로 들어서기 전에 우측으로 '마라 분교'가 있다. 이 학교에는 교사 1명에 관리인이 1명이며 학생은 2명이라 한다. 이곳의 전기는 자가발전이었으며 물은 빗물을 정수하여 나누어 먹고 있었는데, 이 작은 섬에도 트럭은 여러 대가 눈에 띄었다. 섬 일주에는 30여 분이 소요되므로 여행객들이 섬을 일주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여객선은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이 한 떼의 관광객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다시 섬은 밤새도록 거센 바람과 파도를 견뎌야 한다. 관광객들의 바쁜 걸음들을 지켜보며 '마라도'는 그 지극한 인내심으로 그들이 무언가를 얻어가 주길 바라는 듯하다.
'본향'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자, 주인 김진석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마라도'에 이 쓸만한 숙박시설을 짓는 데 무려 4 년의 세월에 1억 5천 여만 원을 쏟아 부었다 한다. 마라 분교의 관리인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마라도 지킴이'라 한다.
장종권 시인이 옆집 마당에 늘어서 있는 이 섬에만 자란다는 '손바닥 선인장'에서 붉은 열매를 하나 따고 있다. 맨손으로 열매를 어루만지는 그를 발견한 제주 신용균 시인의 부인이 질겁을 하며 막는다. 그 열매에 군데군데 자라는 가시는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 가시가 한번 살 속에 박히면 절대 빠지지 않고 살 속으로 스며들어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돌게 된다는 것이다. 섬사람들도 두려워하여 고무장갑을 낀 후에야 열매를 만진다는 것이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그 말을 들은 장 시인은 몇 번이고 손을 털어 대고 옷깃에 문지르며 혹시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 가시를 제거하려 애를 쓰고 있다. 그녀가 손수 가시를 제거한 후 열매를 돌려주자 그는 손톱으로 껍질을 벗긴 후에 피처럼 붉은 속살을 뜯어 입 속에 집어넣는다. 무슨 맛이냐 물으니 '떱떱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오후 2시, 일행은 '대한민국 최남단' 표지석 앞에서 압록강 '마안도'까지의 하나 되기 기원 시낭송회를 준비한다. 현수막을 설치하는데 채바다 시인이 보통 곤욕을 치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너무 거세기 때문이다. 제주시인 신용균, 신제균 형제가 내 일처럼 나서주어 고맙다. 앞바다에는 여러 척의 고깃배들이 여유 있게 흔들거리며 우리의 거사(?)를 지켜보고 있다. 눈을 들면 산지사방 푸르른 바다와 하늘뿐이다. 햇볕이 온몸 가득 내려앉고 있었으며, 바람은 쉴 사이 없이 불어대고 있다. 삼삼오오 마른 잔디밭에 퍼지르고 앉아서 주제에 대한 흥분이나 도취보다는 이 섬에서의 이런 낭송회라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감동적인 눈빛이다. 낭송하는 중간중간 시야를 돌려 섬 곳곳의 풍광을 살피며 평온함과 게으름에 젖고 있는 분위기이다. 멀리 한라산은 여기까지 좇아와 머리에 하얀 만년설을 이고 있는 듯 그 신비로운 자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선명하게 한라산의 자태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일년 중에 기껏해야 며칠이라고 한다.
꽹과리 장구 소리와 함께 '이어도 예술단'의 단장인 홍송월 씨의 '회심곡'이 울려 퍼지고, 최은정 씨의 '살풀이춤'의 몸놀림이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이라도 한 듯 눈이 부시다. 오미연 씨의 흥부가 중 '돈타령'의 구성진 노랫가락도 우리와 '마라도'를 온통 출렁이게 만든다.
"용왕님께 치성 드리오니, 춤사위 곡사위 바치오니, 이 몸 다 바쳐 하늘에 기대고……."
이어서 일행들의 시 낭송이 차례로 펼쳐진다. '마라도'와 '마안도'가 하나가 되어 만나듯이,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어 만나고, 억새벌과 봄볕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파도와 바람도 하나가 되어 손을 맞잡고 출렁인다.
남쪽 바다를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본열도(대마도, 오끼나와)라 한다. 섬의 뒤편으로는 한반도가 버티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중국땅이 머지 않을 것이니, 우리의 시와 노랫가락과 춤사위는 울려 퍼지면서 '마안도'에 이를 것이고, 그 날개를 멈추지 않고 계속 날아서 일본땅으로 중국땅으로 날아가게 될 것이다. 면적이 0.3㎢인 '마안도'는 일명 '비단섬'으로 평안북도 남서쪽 압록강 하구에 있는데, 신기하게도 '마라도'와 면적이 꼭 같다.
우리가 시와 노래와 춤과 바람과 파도와 '마라도'에 취해 있는 동안에도 관광객들은 모이고 흩어지기를 거듭한다. 돌아가야 하는 배 시간에 맞추어 자리를 뜨는 것이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만 여전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으며, 변함없는 바람과 파도 소리는 줄기차게 귓전을 울리고 있다. 이생진 시인께서 기타 연주를 아주 잘 하는 송상욱 시인과 함께 마이크 앞에 선다. '남자는 죽어도 여자가 필요한 법이다.'라는 시구가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두 분의 신파극은 이른바 요즈음의 '퍼포먼스'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홍송월과 오미연의 우리 가락이 계속 이어지자 여행객인 아주머니들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백우선 시인이 급기야 춤판에 끼어들고 채바다 시인도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 시만으로는 저처럼 사람들을 신명나게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애당초부터 시는 춤처럼 소리처럼 사람들을 즉흥적으로 신명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미술이 그러하듯이, 조각품이 그러하듯이, 시도 역시 음유시처럼 가락을 집어넣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얼마든지 감동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낭송하는데 부득이 다른 예술 장르의 힘을 빌려야 한다면 그것은 종합예술의 새로운 맛을 살리자는 의도보다 오히려 시의 영역을 스스로 위축시켜 버리는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예술적 감동과 시적 감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예술이 모두 시적 감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인즉 시적 감동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맛은 도대체 무엇일까. 예술적 감동보다 시적인 세계를 추구하자는 생각은 어쩌면 그것이 바로 시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말에는 특히 서반아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음악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줄줄이 읽어대는 낭송을 기피한다. 아무리 낭송에 특별한 음악성을 주어도 낭송에는 별다른 감동이 일지 않는다. 외국의 음유시처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해도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 있다. 물론 시를 가사로 한 노래가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불리는 것들이 한둘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로서가 아니라 대중음악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시적 세계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일부 시인들이 시적 세계를 다양하게 탐색하고 있다. 다른 장르의 힘을 단순하게 빌리는 것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보다 새롭고 보다 종합예술적인 자세로 시적 세계에의 접근에 대해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시를 독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도 시인들의 임무이다. 독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노력보다 독자들을 향한 자세로 시를 쓴다면 그 길은 멀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동행한 이생진 시인이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을 지금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본향'으로 돌아왔다. '본향'의 작은 마당에는 '땅채송화'와 '쑥부쟁이'와 '해국'이 여기저기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자라고 있었다. 남제주에 산다는 박진우(선장이라고 한다) 씨가 팔뚝보다 큰 방어를 들고 와 접대한다. 제주의 사진작가 손노선의 파도를 주제로 한 사진을 감상하기도 하다가 일행은 하나둘 달맞이를 위해 밖으로 나선다. '마라도'의 밤은 숱한 별들이 쏟아지는 아득한 호수 속 물빛이다. 일행은 밤하늘의 별이 죽은깨만큼이나 많은 등대 아래에서 유난히 밝은 달빛에 흠뻑 취해본다. '마라도'의 등대는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국 해도마다 반드시 표시되어 있는 중요한 등대라 한다.

2000. 2. 23. 수요일. 맑음.
새벽 '마라도'의 넓은 대지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그것은 마음놓고 뛰어 다니는 몇 마리의 개들이다. 그들은 하루종일 섬을 돌아다니며 저들끼리 으르렁대고 싸운다고 한다. 한 마리의 어린 개를 여러 마리의 큰 개들이 집중공격을 하고 있다. 소리를 치며 말리자 겨우 장소를 다른 데로 옮긴다. 견디다 못한 어린 개가 사정의 불리함을 깨닫고 죽기살기로 줄행랑을 친다. 불쌍한 생각이 든다. 너는 결국 이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그리고 늘 저처럼 큰 개들의 공격을 받으며 살다가 끝내 이 메마른 땅에 묻힐 것이다. 누군가가 배에 실어 뭍으로 데려가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개를 배에 태우기 위해서는 모험을 시도해야 한다고 한다. 선장은 여객의 선장이므로 개의 선장은 절대로 사양한다는 것이다.
일행은 고대하던 해맞이는 결국 보지 못하고 아침식사를 위해 '본향'으로 돌아왔다. '본향' 곁채의 지붕은 시멘트로 덧칠해져 있었다. 머지 않아 저 시멘트는 금이 가 갈라지고 그러면 새어드는 빗물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주인인 김진석이 빙긋이 웃으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언덕 위 두 대의 콘테이너 박스를 손으로 가리킨다. 그곳에는 모두 네 필의 말이 있어서 여행객들에게 승마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하는데, 거리가 아무리 못해도 200여 미터는 실해 보인다. 그런데 지난 태풍에 3톤이나 족히 나간다는 그 콘테이너 박스가 바람에 날려 이 '본향' 곁채를 덮쳤다는 것이다. 지붕은 박살이 나고 뒷편 언덕과 지붕에 걸쳐 콘테이너 박스가 주저앉았다는데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아무리 바람이 세기로 어떻게 3톤이나 되는 콘테이너 박스가 저 돌들을 넘어 200여 미터나 날려올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마라도'의 바람이었다. 사람조차도 휘어 감아 하늘로 날려버릴 만한 바람, 그 바람 속에서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 후 배터로 향하는 길에 '마라도'를 한 바퀴 돌며 '애기업개' 전설이 서려 있는 '할망당'에 이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가파도'에 이씨가 살았는데 가산을 탕진하여 '애기업개(애기 보는 여자 아이)'를 데리고 '마라도'에 건너 왔단다. 이씨 가족들은 '마라도'의 풀숲을 불태우고 개간 작업을 벌였다. 불 탄 수풀이 이 다음 해에 거름이 될 만하면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가려는데 그날 밤 꿈에 처녀 한 사람을 두고 가지 않으면 풍랑을 만날 것이라는 현시가 있었단다. 그러자 배를 타기 직전 이씨는 '애기업개'에게 부러 심부름을 시키고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 버렸다. 그들이 다시 '마라도'에 돌아 왔을 때는 이 '할망당'이 있는 자리에 '애기업개'의 처연한 유골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씨네는 이때부터 그녀를 위해 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할망당'에는 그 가련한 '애기업개'의 혼을 기리기 위해 재를 지내는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생진 시인은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해녀 10여 명이 풍랑으로 인해 본래 '禁島'였던 '마라도'에 어쩔 수 없이 올랐다고 한다. 바람이 잔잔해져 배가 출발하면 다시 풍랑이 세어지기를 거듭하여 '마라도'에서 여러 날을 머물던 중이었다. 한 해녀의 꿈에 처녀를 바치면 풍랑이 가라앉는다 하여, 그들은 동행한 '애기업개'를 해변에서 머물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배를 출발해 버렸다. 그리고 풍랑이 가라앉고 보름여 정도가 지난 후에 다시 돌아왔으나 '애기업개'는 이미 굶어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다.
'마라도'의 해안은 기암 절벽을 이루고 있다. 모래밭이 전혀 없고 배를 안전하게 댈 만한 곳도 없으며, 사시사철 주변을 몰아치는 파도 때문에 '금섬(禁島)'이라 불렸다 한다. 어쩌면 이처럼 신성시되었던, 금지된 섬에 오르는 대가로 처녀를 바쳤는지 모르겠다. 기다림과 굶주림에 애가 타다가 목숨이 끊긴 '애기업개'의 전설을 안고 우리 일행은 '할망당'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이 영험으로 무사히 마라도를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왕복 배표를 끊었는데 돌아갈 배표를 미처 찾지 못한 일행 중의 일부는 또 하나의 '당처녀(당할망)'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며 서둘러 배터로 향한다.
10시 30분 경 다시 '송악산 2호'를 타고 '마라도'를 출발한다. '가파도'를 왼쪽으로 두고 돌아오는 뱃전에서 바라보는 '삼방산'과 '형제도', '용머리 바위'는 또 다른 맛의 풍광을 안겨 준다. 폭풍은 잠이 든 채 아직도 고요하다. 돌아가는 아침 첫배인지라 여객은 섬과 시인들이 전부이다. 채바다 시인은 다시 선장실의 마이크를 잡고 일장 연설이다. 선장실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라나, 그런 영광스러운 곳에 들어와 마이크를 잡고 시를 낭송하라 성화다. 신령스러운 한라산이 가는 곳마다 너무도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주인들도 아무 때나 볼 수 없다는 눈 쌓인 한라산의 위용이다.
대정읍 사무소를 지나는데 입구의 '돌하르방'을 가리키며 채바다 시인이 말해준다. 저 '돌하르방'은 제주인의 상이 아니라 관청을 지키는 근엄한 군인의 상이란다. 우리는 '대정 향교'로 향했다. 남제주군 안덕면에 있는 '대정 향교'에는 봄이 가득 모여 있다. '광대나물꽃', '봄까치꽃'이 한창이고 해묵은 노송과 팽나무가 그 위엄 있는 고풍을 침묵으로 얘기하고 있다. 길가의 마늘밭과 노란 유채꽃이 평원을 이룬다. 동으로 '삼방산'의 절경이, 남으로 태평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단산' 아래 단아하게 자리잡은 고옥은 세월을 견디며 유교의 견고한 맥을 잇고 있다. 이곳의 '의문당'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남긴 유품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향교 서쪽의 '샘이물'에는 지금 당장 마셔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물물이 찰랑거린다.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되려면 물은 필수적이었으니, '이 샘이물은 향교의 석전대제 시는 상단수를 일절 금하고 대제가 필한 후에 일반인의 음료수로 이용하였으며 서기 1963년도 후로는 사계리 자연 상수도로 사용하였다'라는 안내문이 이채롭다. 이 봄을 '대정 향교' 뜰에서 몽땅 안아오는 느낌으로 봄을 즈려 밟고 11시쯤 남제주군 대정읍의 '추사 적거지'로 향한다.
중국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추사체'를 완성한 곳이 바로 여기다. 위엄과 해학의 수호신 '돌하르방' 등이 보존되어 있고 전시관에는 진한 묵향의 추사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동백꽃 몇 송이만이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동백나무에는 전에 본 그 많던 동박새조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주인 잃은 마당에 서 있는 것처럼 서운하다. 동박새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들락거려서 아예 먼 곳으로 이사를 가 버린 모양이다. 노오란 '금잔옥대(수선화)' 한 송이가 담 모퉁이쯤에서 부끄럽게 웃고 있다. '민들레', '양지꽃'이 띄엄띄엄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담 밑에는 또한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참새의 혀와 같다하여 '작설'이라 하던가. 백우선 시인이 '작설'을 어루만지며 향기를 맡는다. 추사는 이곳에서 1840년에서 1848년까지, 약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국보 제 180호인 그의 '세한도'도 바로 이 곳에서 그린 것이다.
전 같지 않게 쓸쓸한 기분으로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강정계곡'으로 발을 옮긴다. 한라산 물은 마를 날이 없이 바다로 바다로 내달리다가 흘러 우선 이곳에 다다른다. 바위들이 앉은 듯 누운 듯 계곡을 온통 차지하고, 가슴마다에 띠를 두르고 소금기를 건넨다. 그 앞으로 '범섬'이 보이고 한라산의 빙설이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난 숲길을 걸으며 산책의 한 때를 즐긴다.
베스트 드라이버인 채바다 시인은 우리를 이곳저곳 가능한 한 많은 곳으로 안내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우리는 '정낭갈비'라는 음식점에서 살코기로 행복한 식사를 마친 후에, 서귀포시 서흥동의 '천지연폭포'로 향한다. 이동 중 차한수 시인께서 '물빛 같은 시'를 이야기하자, 문득 박수소리가 터진다. '천지연폭포'에 도착하여 산책길을 따라 난대림 우거진 숲을 통과한다. 기암 절벽 위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하얀 물기둥이 시원스럽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 거대함에 압도당한다. 입구에는 채바다 시인이 1997년 11일간의 일본 해로 탐험 시 대한해협을 용감무쌍하게 건널 때 사용한 '떼배'가 전시되어 있다. 그 계곡의 건너에는 김광협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떼배'의 돛폭에 쓰인 이생진 시인의 시 한 수를 읽어본다.
"실컷들 사랑하라 / 가슴이 있을 때 / 죽은 뒤에도 / 네 사랑 간직할 / 가슴 있겠니."
오후 세시 반, 서귀포시 정방동의 '이중섭 거리'에는 터질 듯한 목련 봉오리만 돌담길을 내다보고 있다. 백매와 수선화 향기에 취하고 해초같이 맑아지는 남덕군의 눈빛도 밟힌다. 한국 화단의 빛나는 별이자 불운한 천재화가 이중섭(1961∼1956)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가족과 함께 피란을 와 1년쯤을 머물다 간 집과 기념관을 둘러본다. 그는 1평 남짓한 방에 네 식구가 살면서 '서귀포 환상', '게와 어린이', '물고기'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특별한 호구지책이나 거처의 마련도 없이 용케도 1년간이나 버티면서 저만큼 작품을 남겼다'라는 구상 시인의 절규 같은 말을 뒤로하며 우리는 발길을 옮긴다.
저녁 무렵, 성산포 '일출봉' 근처 채바다 시인의 찻집 '시인과 사람들'에서 제주 시인들과 함께 또 한 차례 한풀이 흥풀이 겸 시낭송회를 가졌다. 윤석산·김순이·고훈식 시인 외 여러 분이 참석해 주었다. 제주도는 우리에게 늘 깨어 있게 하고 도취하게 하는 묘한 기운을 안겨 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오조리 '해녀의 집'으로 이동하여 숙박하기로 했다. 이곳은 여러 어촌계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관리도 순번대로 하고 있다고 한다.(2인 1실 2만원, 1인 추가당 7,000원). 방은 뜨거웠고, '일출봉'이 보였으며, 옥상에는 '일출봉'을 위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느지막이 필자의 방에 모인 몇 명은 이틀간의 기행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문제점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채바다 시인의 리드에 일행 전체가 움직이다 보니 본래 계획된 여행 목적에서 벗어나는 점이 일부 드러나고 있었다. 토론 후에는 편갈이 윷놀이를 시작한다. 윤석산 시인과 함께 떠났던 차한수, 송상욱, 이혜선 시인 등이 돌아오자 윷놀이는 끝났다.

2000. 2. 24. 목요일. 맑음.
오늘의 첫 행선지는 아름다운 성산 '일출봉'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섭지코지'이다. 해안선에서 바다로 나가 우뚝 솟은 일출봉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섭지코지'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 나와서 마치 잘룩한 여인의 허리 모습 같기도 하고 자루 꼭지가 묶인 것 같은 모습을 한 곳이다. 오름에는 선조들이 비상시 불을 피워 위급함을 알리던 '봉수대(연대)'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바다에는 송이버섯 모양을 한 '선바위'가 의연히 서 있다. 해의 정기를 한껏 받아 언제까지나 힘차게 버틸 모양이다. 드러누워 뒹굴고 싶은 초원에는 바람이 온몸으로 들이친다. 이곳 바람은 사정을 봐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 바람 사이사이 '엉겅퀴꽃'과 보라빛의 '갯쑥부쟁이꽃'이 여전히 빛깔을 보태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바닷바람이 물결 무늬를 펼치고 물빛은 시시각각 다르게 파문을 만든다. 가슴속에 풍선 같은 부풀음을 실컷 불어넣을 모양이다. 일출을 향한 '선바위'의 정기 또한 한껏 속내의 심지를 밝힐 만하다고 한 마디씩들 하고야 만다. 바다로 향한 끝없는 길이 가슴을 마구 열어 젖힌다. 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유채꽃밭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섭지코지'를 뒤로하고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인 '용눈이오름'을 찾는다. 남제주군 상도리에 위치한 '용눈이오름'은 마른 잔디로 뒤덮여 있는 부드러운 곡선의 높다란 봉우리다. 정오 무렵, 숱한 오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사이로 뚫려 있는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용눈이오름' 앞에 이르러 샛길로 접어든다. 돌담에 둘러 쌓인 여러 기의 무덤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중의 한 무덤 앞에 모여 앉아 잠시 후의 짧은 등반을 준비한다. 채바다 시인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늘어놓는다. 입가에 미소가 보이는 것이 십중팔구 성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정상에 올라서면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일어서며 돌담에 손을 집는데 검은 빛 돌이끼가 무성하다. 돌가루가 날려 붙은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가 살아있는 돌이끼라고 말해준다. 이게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말인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미끈하게 솟은 '용눈이오름'의 능선은 마치 잘 손질된 잔디밭처럼 부드럽다. 맨 앞에서 안내를 하던 이생진 시인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봄이 되면 이 능선에는 각종 야생화가 가득 피게 되지. 생각해 보라구. 아름다운 여인의 벗은 몸에 울긋불긋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그런데 그 위를 사뿐사뿐 걷는다는 말이야. 그야말로 비아그라 저리 가라지. 환상적이라구."
뒤를 따르던 백우선 시인이 느닷없이 내뱉는다.
"그러니까 이 오름이라는 말은 오르가즘의 준말이군요."
폭소가 터진다. 백우선 시인은 보기와는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그가 무척 맑고 고운 심성을 가졌으면서도 그 속에 무궁무진한 끼와 오해할 수 없는 짖궂음 같은 것이 숨어 있음을 안다.
30여 분이나 걸렸을까. 산책하듯 오른 정상에 바람은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거세다. 숨을 쉬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니 '다랑쉬오름'이 다른 오름과는 달리 거대한 자세로 앉아 있다. '제주 4·3' 때 무고한 양민들이 그곳 굴속에 갇혀 연기에 질식해 숨을 거두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빙 둘러보니 멀리 바닷가의 도시 풍경과는 달리 이 오름들 근처에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세상 이치가 음양의 조화로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연은 음양이 결합된 커다란 모습을 통해 감동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해발 247.8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오름은 동녘을 향해 해의 정기를 받으며 교합하는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특이한 감수성, 화려한 정열을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떠오르는 해와 세상을 생성하는 자궁과 남근의 진솔한 결합, 그 숨결과 행위는 부드러운 물결로 밀려온다. 당기고 끌며 부풀게 하는 생명의 약동은 숨막히게 한다. 압박하거나 넘쳐나지 않으며 항상 내재된 본능은 성장의 근원임을 과시한다. 지고지순한 자연의 섭리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오름의 중심에는 옛 무덤이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봉분을 낮추고 있다. 2∼3백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 후손의 해살궂은(?) 지혜의 깊은 속뜻을 헤아린다. 이것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대단한 혜안으로 왕성한 생산과 집안의 융성을 빌기 위해 이 자리를 선택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명당을 차지한 조상이나 후손들 역시 크게 만족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생산의 상징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수태와 분만의 희열을 맛본다. 오름 위에는 거침없는 바람이 세상을 다 날려버릴 것같이 불어대지만, 이 가운데의 그지없이 안온하고 따뜻하며 완만한 경사는 우리를 부드럽게 받아들였다가 다시 내보내 준다.
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생성 광경은 진화하지 않은 시원의 순결이며 우주의 관능이다. 지속적으로 원초적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본능의 온전한 평화는 이 거대한 궁전을 깊고 아득하게 감싸 돈다. 그 명당을 비켜 아랫녘에도 다른 무덤들이 몇 기 보이는데 이건 훨씬 뒤에 생긴 것으로 명당을 차지하지 못해 아쉽게 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특별한 기운 속에 몸을 담그고 난 일행들은 황홀지경(?)에 빠지며 자연의 오묘한 이치에 가슴이 설레일 수밖에 없다.
일정의 마지막으로 우리는 '비자림'을 찾아가 그곳에서 꿩칼국수로 점심을 마쳤다. '비자림'은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에 위치하고, 45ha의 광대한 면적에 자생하고 있다. '나도풍란', '흑난초', '콩짜개란', '비자란' 등 희귀식물 280여 종이 자라고 있는 곳이다. 비자 열매는 구충제로 많이 쓰이고 때로는 제사상에 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숲속 중앙에 이르러 최고령 비자나무를 만난다. 어른 서넛은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굵기이다. 수령 810여 년으로 천연기념물 제374호인, 이 '비자림'의 조상나무를 둘러보고 돌아 나온다. 녹음이 짙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속의 삼림욕은 여행의 피로를 회복해 주고 들떠있는 인체의 리듬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안개인 듯 물기가 밴 듯 숲속의 비자나무들은 원시의 공간을 구현한 별세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김행숙 시인이 사준 비자열매를 열심히 까먹으며 제주일보에 보도된 우리의 마라도 시낭송 기사를 돌려보면서 이제 각자의 귀가를 위해 마음도 몸도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세기문학, 2000년 여름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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