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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수첩> 매창을 사랑한 이질적인 두 남자/리토피아(200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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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860회 작성일 05-01-1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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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생략됨

기행수첩-부안연가-강남시문학회편
매창을 사랑한 이질적인 두 남자
-<리토피아> 2001년 겨울호 화보


시는 과연 언제까지 그 존재가치가 계속될 수 있을까. 시 역시 역사적인 존재가 분명하다면 언젠가 시작이 있었듯이 소멸하는 것 또한 당연할 지도 모른다. 과거 시가 누렸던 신명나는 황금기가 있었다면 소멸기의 고통과 안타까움 역시 당연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시는 영원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시는 과연 어떤 가치로 얼마만한 생존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시대의 시는 과거의 빛나는 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서서히 가을이 다가서는 9월 햇살을 뚫으며 김제평야의 황금들판으로 들어섰다. 의젓하게 앉아있는 모악이 어머니처럼 따뜻한 손을 흔들며 뒤쪽으로 멀어져간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우선 금산사에 들렀다. 간단히 대적광전, 적멸보궁을 둘러본 후에 서둘러 발길을 부안으로 향했다. 삼한 시대부터 존재한 부안은 백제 때에는 개화현皆火顯, 흔량매현欣良買縣이라 나뉘어 불렸다. 통일신라 때에는 부령현扶寧縣 계발戒發, 또는 낭주현浪州縣 희안喜安이라 불리며 이웃 고부현에 속했다. 고려 시대에는 부령현과 보안현(희안현)으로 나뉘어졌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부령현의 부扶자와 보안현의 안安자를 따 부안扶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과 함께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황진이와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던 절세의 여류시인 매창이 이 부안에 묻혀 있다. 당대의 유교적 율법을 무릅쓰고 때와 시를 가리지 않고 기생을 가까이하기로 유명했던, 그리하여 그것이 탄핵의 주요 사안이 되어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허균조차도 정신적 우정으로나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던 매창. 여자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대에 당당한 이름(계생癸生, 계랑癸娘, 향금香今)을 가졌으며, 당호堂號밖에 없던 시대에 당당하게 자字(천향天香)를 가졌던 매창. 기생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뜬 후에도 만인들의 사랑을 받아 시집이 발간되고, 시비가 세워져 지켜지고, 근 사백여 년이나 향토인들로부터 무덤이 가꾸어지는 영광을 한몸에 받았던 매창. 부안의 진산 성황산 초입에 바로 그녀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평생 떠돌며 밥 얻어먹는 법이라곤 배우지 못하고

오직 매화나무 창가에 비치는 달빛이나 사랑했어라.

세상 사람들 내 고요하고 한가로운 뜻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헛된 꿈이라 하며 손가락질만 하는구나.

-「기첩(妓妾)」



술에 취해 유혹하는 손님에게 건넨 한 편의 시 속에서 우리는 그녀의 인생관이 어떤 것인지 그 일말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매창梅窓은 글자 그대로 그녀의 집이며, 그녀의 호일 뿐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기도 하다. 고결하고 품위있는 매화는 찬바람과 눈밭에서 더욱 화사한 꽃을 피운다.

한 지방 아전의 서녀로 태어난 그녀는 모친의 신분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기적에 몸을 담고, 그리고 활짝 피어오르던 십팔 세의 나이에 너무나도 대단한 당대 문단의 한 거목을 만나 곧바로 사랑에 빠지게 되며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과 고통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게 된다. 그가 바로 전라도 땅에 들렀다가 그녀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미 마흔 중반의 유희경이다. 후대의 신석정 시인은 이 매창과 유희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이라 이름했다

.

유희경이 그녀를 찾아가자 그녀는 먼저 그가 유희경 백대붕 중 누구인지를 물었으며, 이 날 그는 처음으로 외간 여자를 안았다는 기록이 촌은집에 전한다. 유희경은 그녀를 만난 날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남도 계랑의 이름 이미 널리 알려져

시 솜씨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네

오늘 그녀의 참모습 이리 대하고 보니

문득 하늘의 선녀 아닌가 의심되어라

-「贈癸娘」



유희경은 서자로 태어났으나 유교적 전통에 순응하면서 시대적 변화에 잘 적응하여 신분 상승의 뜻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균은 『성수시화惺搜詩話』에서 그를 천인 신분으로서 한시에 능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는 부친 무덤 앞에서 삼년상을 치른 효성으로 남언경南彦經의 눈에 들어 주자가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상장례에 정통하여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늘 문의를 받았으나, 비천한 신분 탓으로 일생을 상가의 역부가 되어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사대부들과의 잦은 교류로 시를 즐겨 지었고, 시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다시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를 배워 시의 경지를 터득하는 행운을 얻게된다. 그는 같은 천민인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평민문학모임인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임란 후 백대붕이 죽고 그마저 신분이 상승되어 떠나버리자 '풍월향도'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삼청시사'로 이어지며 이 땅에 '여항문학'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과 싸운 공을 인정받아 면천의 포상을 받았다. 만년에 침류대를 짓고 여러 인사들과 술을 마시며 시를 읊어 '침류대의 문인'이라 불리었다. 그는 말년에는 명목상이긴 하나 종2품의 벼슬에까지 오르고, 92세에 이르도록 천수를 누린 행운아였다. 유교적 전통 정신을 지향하며 양반 사대부들과의 줄기찬 교류, 그리고 모나지 않는 인품으로 궁극적인 신분상승에 성공한 특별한 경우의 인물이다.

이런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어린 매창으로 하여금 그녀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유희경은 서울로 돌아가고 곧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그를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이후 쓰인 그녀의 시 속에는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있다.



아직도 차가운 봄날 엷은 옷을 기우는데

따사로운 햇살 한 점 사창을 비추는구나

머리 수그리며 손 가는 곳 바라보노니

구슬같은 눈물 떨어져 실 바늘 적시는구나

-「自恨」



술 취한 손님 명주저고리 옷소매 붙잡으니

거친 손길에 옷자락 소리내며 찢어졌어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으나

님 주신 정 찢겨졌을까 그것이 두려웁구나

-「贈醉客」



유희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대의 집은 부안

나의 집은 서울

사무치게 그리워도 보지 못하고

오동나무에 비 떨어질 때 애간장만 타는구나

-「懷癸娘」



1607년 유희경이 매창과 다시 만났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오랜 세월을 달리 정 주는 사람이 없이 지냈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녀는 관기라는 숙명적인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을 줄 수밖에 없었다. 기녀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되어 세습되었고, 일단 기적에 오르면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늙고 병이 들어 제구실을 못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하여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 수가 있었다. 열다섯 살이 되어 기생 명부에 오르면 음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기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십팔 세가 되어야 비로소 남자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매창에게 유희경은 어쩌면 첫 남자였을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이귀 역시 글재주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정을 주었다는 사실이 허균의 기록에 남아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 전라도의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이귀가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려 객사에 머무르는데 고홍달이 찾아왔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주고받았으며 시로 화답했다. 저녁이 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주었는데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다.

-『조관기행』 중



허균은 당대의 명유 허엽을 아버지로 둔 적손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분방하고 독특한 성품으로 불교를 신봉하고 불행한 서얼들과 어울리다가 마침내는 참형을 불러 멸문지화를 당한 인물이다. 그는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부터 그의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조정의 기대주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십 평생 세 번이나 유배를 가고 여섯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나는 비운의 인물이 된다.

허균이 매창을 만났을 때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이었으며 매창은 허균보다 네 살이 아래였다. 당시 허균은 출장을 온 관리였고 매창은 그의 수청을 들어야하는 기생이었다. 그런데 매창은 허균과의 잠자리를 피한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십여 년 이상을 정신적 연인으로 남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해 12월 허균은 부안을 떠났다가 유희경이 두 번 째로 잠시 들러간 뒤인 1608년 재차 파직을 당하여 부안으로 내려온다.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허균이 머물던 곳이 정사암靜思庵이다. 아마도 그는 이곳에서 유명한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보이며, 이른 바 '칠서의 난'(1613년)을 주동하여 결국 잡혀 죽은 여러 서얼들과 어울리기도 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허균은 잠시 매창과 어울리다가 그 해 겨울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이듬해인 1610년 여름,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허균이 이를 슬퍼하여 지은 시가 있다.



오묘한 글귀는 비단폭을 펼친 듯 아름답고

청아한 노래는 갈 길 멈춘 구름도 풀어헤치네

천도복숭아 훔쳐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끝내는 불사약 훔쳐 모두를 남기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인 창가엔 등불조차 희미하고

비취빛 치마에선 아직도 향내 일고있는데

내년 어여쁜 복사꽃 필 때쯤에는

그 누가 다시 설도의 무덤 찾아 울으리

-「哀梅娘」



1618년 8월26일 허균 또한 역모죄로 능지처참이 되어 이승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신념과 정신은 여덟 권으로 구성된 『성소부부고』에 고스란히 담겨져 전하고 있다.

매창은 봉덕리 공동묘지에 아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죽은 지 45년 후(1655)에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녀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암송되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겼다. 이것이 개암사에서 간행한 『매창집』이다. 이 작품집은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지경이어서 급기야는 목판을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암사는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이다. 대웅전이 외롭게 골짜기를 지키고 있는 사찰 일대는 유서 깊은 왕궁터였다. 『개암사지開巖寺誌』에 따르면 변한卞韓의 문왕文王이 진한과 마한을 피하여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내분으로 외적이 침입하여 망했다는 것이다. 변한의 유민들은 이때부터 이 산을 변산卞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개암사는 백제 때 묘련왕사妙蓮王師에 의해 변한의 궁전을 고쳐 개암사와 묘암사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는데, 백제 멸망 후 원효와 의상이 이 곳에 와 개암사를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다시 조선시대에 선탄선사禪坦禪師가 이 곳에 와 외도솔과 내도솔을 지었는데, 내도솔이 지금의 개암사라고 전한다.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지나 묘지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이 때까지는 마을의 나뭇꾼들이 벌초를 할 때마다 무덤을 돌보았다. 가극단, 유랑극단이 부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맨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질펀한 굿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앉아있다. 공동묘지의 모든 무덤들을 옮기면서도 이 이중선의 묘만큼은 그대로 두어 매창의 영혼에 벗하게 하고자함만 같았다.

시대의 변화를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아 각고의 노력으로 꿈을 이룬 유희경과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며 자유분방한 자세로 좌충우돌하다가 끝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허균. 우리는 그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인간의 따뜻한 정신과 신념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이 시대에 걸어야할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의 인간을 향한 끝없는 신뢰와 애정이야말로 인류가 인류답게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일 수 있으며, 유희경과 허균의 시대적 대응 방식을 이해할 때에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험난한 우리 시대의 매듭을 풀어 갈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땅의 버림받은 백성들에게는 빛이요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과 우정과 시는 다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서 아직도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볼거리로 반계유적지와 신석정고택, 그리고 청호저수지가 있다.

보안면 우동리에 소재한 반계선생유적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이 20여 년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던 장소로, 우리 나라 실학의 태동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이다. 본래 서울에서 출생한 선생은 병자호란 이 후 여러 곳에 옮겨 살다가 32세 되던 해에 그의 9대조인 유관柳寬의 사패지賜牌地가 있던 이 곳 우반동에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이 곳에서 농촌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저서에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개혁하고 부국富國·부민富民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 건설 방안이 주된 내용으로 담겨 있다.

선은리 560에 자리한 신석정고택은 우리 나라 서정시의 큰 맥을 이룬 신석정 선생이 그의 첫 시집인 『촛불』과 『슬픈목가』등을 쓴 문학의 산실이다. 그는 향리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다 상경하여 석전石顚 박한영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시문학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다. 어머니 부음을 받고 귀향한 후 이 집을 마련하였으며, 스스로 이곳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시누대 등을 심고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하였다. 석정은 전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목가牧歌적인 시를 발표하여 전원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청호저수지는 계화도 간척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된 방대한 저수지로 그 물이 맑아 민물새우, 붕어 등 각종 담수어가 풍부하여 낚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가르며 어부들이 고기잡이 하는 정경과 함께 떠오르는 아침해는 한폭의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바다 같은 물결 위로 한가로이 날고 있는 철새들. 끝없는 물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연잎을 바라보다가 마치 태고의 모습인 양하여 자연의 위대함과 넉넉함에 탄성을 내지르다가 나는 그것이 인공호수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안읍에서 하서면의 청호 저수지까지는 약 8분 정도가 소요된다. 청호매운탕에서 제공하는 붕어찜요리로 미식가들에게도 웬만큼 알려진 곳이다. 이 요리는 붕어 특유의 담백한 맛으로 식욕을 증진시키며, 칼슘과 인 등이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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