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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강우식 시인론/ 영원한 생명의 찬송인 思春, 그 우주적인 힘(정년기념논문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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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347회 작성일 07-01-20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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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의 찬송인 思春, 그 우주적인 힘
-시집 『바보산수』를 읽고
장종권(시인)


1. 생명은 하나, 우주도 하나, 하나의 원리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다. 거대 자본의 폭력적 위력은 머지않아 인간마저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말 태세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머지않아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죽지 못해 살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죽은 자본의 살아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산 인간의 에너지를 얼마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비관적 예측이 빗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흐름 자체가 자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세상 또한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죽음이나 소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죽음이나 소멸이라는 결과를 알면서도 그 길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의 비극적인 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어서 비극적인 존재들은 이 슬픔을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 중 하나가 우주의 섭리 안에 소속되어 영원하고자하는 윤회이고, 살아있는 동안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생명감의 극대화이다. 살아있는 자,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전자로 해서 위안을 삼고, 후자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높인다.
윤회는 일종의 순환이며 이동이다. 전생과 현생의 순환, 이승과 저승의 순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순환, 거기에 순환의 범위를 조금 확대하다보면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적 변화도 순환이다. 오늘과 내일, 밤과 낮의 변화도 일종의 순환이다. 인간은 이런 우주와 자연의 질서 있는 순환 고리에 끼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순환하는 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존재이며 인간 자체가 순환열차일 수도 있다. 하나(一)는 태극이다. 둘(二)은 음양으로 하늘과 땅이다. 하나가 둘로 분리되면서 그 둘에서 다시 삼(三)이라는 생명체가 탄생한다. 이때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 魂이고, 땅으로부터 받는 것이 魄이다. 그 생명체는 유한하다. 그래서 생명이 다하면 다시 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 둘(二)은 언젠가는 다시 하나(一)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사고 역시 일종의 순환과 이동의 원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순환과 이동의 원리는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문제와 너와 나,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까지로도 확대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이건 죽어있는 존재이건 모든 존재는 하나이다. 순환하는 하나이다. 개개의 특성을 갖고 있는 이 별개의 존재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존재로서 그 안에서 수직적 관계나 수평적 관계로 상호 순환하고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체는 그 안에서 서로 교감하며 평화를 얻는다.
존재는 개개의 존재가 독립적으로 우뚝 서서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더 나은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개별적인 존재는 주변 존재의 특성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자신의 특성과 어울리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 주변의 존재들과 서로 어울리고 교감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얻어낸다. 나라는 존재를 상대 존재에 저항 없이 이입시키기를 원하며 상대의 존재가 자신의 세계로 부드럽게 녹아들어오기를 원한다. 상호 교감이다. 하나가 되기 위한 본능적인 자세다.
이런 상호 순환과 이동의 원리가 강우식 시가 갖고 있는 특질 중의 하나이다.

한 그루 사과나무 곁을 지나며
사과나무에 달려있는
몇 백 개의 우주를 보았다.

그것은 내 눈동자가
우주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동자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다.(「사과나무 곁을 지나며」)

담배연기로
만들은 동그라미는
ㅇ 〮ㅇ 〮ㅇ 모음을 보여주며 떠난다.

눈물방울도, 눈동자도, 세계도, 우주도
이제 고리를 풀 때다.(「풀밭에서」)

내 그대 그리움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
내 그리움 어느덧 잠자고
또 누가 있어 날 떠올리며
그리웁다 잠 못 이루리(「윤회」)

위 시들은 그의 ‘우주는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생각이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하나인 우주는 개개의 작은 우주들로 분화되어 상호 관계 속에서 복잡한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서로 붙잡고 매달리거나 엉켜있는 우주들이 서로를 자유스럽게 놓아주게 되면 세상은 다시 평화로운 하나의 우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개개의 작은 우주들이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융화될 때, 그래서 우주와 우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평화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강우식의 시에는 툭툭 튀거나 상대 존재를 밀어내는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로 끌어안거나 교류하며 어루만진다. 용서와 넉넉함이 하나인 우주로의 완성의 길을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걸어간다. 어떤 형태이든 순환과 상호 이동은 자연적인 흐름이다. 이 자연적인 흐름이 어떤 힘에 의해 막히게 될 때에 인간은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고독함에 빠져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서 이탈된 더 이상 길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이기 위한 의지는 생명과 사랑으로 나타난다. 분리로 가는 저항적 자세는 이별과 죽음이 그 한 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자식의자식의자식’에게로 그 생명을 넘겨준다. 일종의 수직적 이동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다. 전생과 이생의 윤회라고 하는 이동과 다를 것이 없다.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꽃은 꽃이라는 종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도 그렇고, 새도 그렇다. 그들이 수직적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하나이듯이 인간도 수직적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존재는 제각기 같은 종 안에서의 이 수직적 이동을 본능으로 갖는다. 그 본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과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을 버릴 수 없는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원을 꿈꾸는 각 존재들의 꿈은 자신의 종만이 아닌 타 종과의 관계 역시도 관리를 해야만 그 꿈이 더 빛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본능이 더 나아가 다른 종과의 순환과 이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꽃과의 대화를 꿈꾸고, 나무나 숲과의 대화를 꿈꾸며, 기타 어떤 존재와도 상호 수평적 이동을 꿈꾼다.
다음 작품은 독특하다. 상호 수평적 이동이 확장되어 만물은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매는 사육되지 않는 인간을 사육키 위해 날며
물고기들은 인간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조개들은 통째로 인간을 삼키고 있었다.
그날 다른 세상에서도 먹는 데는 종교가 없었다.(「그날 다른 세상에선」 )

물론 매와 물고기와 조개들은 인간과 하나가 되지 않고 상대적인 관계로 나타나 있다. 장자의 胡蝶之夢이 나비와 나와의 관계가 동질인 관계로의 물아일치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위 작품의 매와 물고기와 조개들과 그리고 인간이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다만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동질의 관계를 갖는다. 하나인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상호 관계에 대한 치열한 반성의 표출이다. 생명은 하나다. 어떤 존재의 생명도 모두 소중하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은 이미 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 욕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2. 생명의 어머니, 고향과 유년의 서정
우리에게 고향과 어머니는 거의 동일한 존재이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종교적인 면을 떠나서 우리는 그 해답을 고향과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 고향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이다. 가야할 곳이 어디인 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우리가 온 곳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현대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교통수단이 달라지고 통신수단이 달라져서 예전의 지역 간의 거리감이 사라졌다. 이 거리감의 단축은 그대로 지역 간의 신비감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점차 줄어들고 따라서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의 요소도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현실의 고향마을이 아무리 척박해진다고 해도 마음속에 존재하는 근원인 고향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변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향수는 그대로 생명에 대한 소중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과거의 회상에 빠져 애상적인 분위기를 즐기자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유년의 터전인 고향과 내 생명의 본질인 어머니의 줄기찬 그리움 속에서 풋풋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공기돌만한 게 한 마리가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쌍시옷의 집게발을 들고
글씨를 쓰는

외할머니댁 여름 바다의
꿈을, 선생님 몰래 꾸며
숙이가 자면

느티나무 초록에 있던 매미가
공부시간에 낮잠자지 말아라

매앰 맴 매애애 매앰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우는
칠월
(「매미 소리」)

그녀의 팔베게에 머리를 누이면
오히려 텅 빈 넉넉함으로
깊고 아늑한 잠은 잠은 스며들고
어머니의 젖을 만지던
내 유년의 꿈같은 겨울로
눈보라가 데려가 주나니
나에게 이 세상의 다른 낮과 밤이
더 있어 무엇하랴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겨울꿈」)

동화적 분위기도 없지 않은 작품 「매미 소리」의 시어는 ‘공기돌’, ‘게’,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외할머니댁’, ‘여름바다’, ‘느티나무’, ‘공부시간’, ‘낮잠’, ‘선생님’, ‘꿈’, ‘숙이’, ‘매미’가 거의 전부이다. 고향과 유년의 기억, 그리고 ‘외할머니댁’을 통한 어머니의 존재, 이것이 이 작품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숙이’는 시인 자신이나 다름이 없다. 생명의 존엄성은 법이나 사회적 규범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항상 기억하는 일, 그리고 그 기억들을 소중하게 키워내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 「겨울꿈」에는 ‘그녀’로 짐작할 수 있는 아내와 어머니가 나란히 등장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부여한 존재요, 아내는 나의 생명을 연장해 줄 존재이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만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생명이고 나의 존재 의미이다. ‘팔베게’로 강화된 아내의 편안한 이미지와 눈보라가 있는 겨울날의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가 주는 평화는 상대적으로 더 강화되어 있다.

이 가을이
터엉텅, 울리도록
어머니의 관에 못질을 한다

한 마장쯤
작은 구릉을 넘어간
교회 묘지엔
기도해줄 목사도 없이
들꽃만이
천지를 휘덮고 있었다.

오십 평생 처음으로
수천 송이의 들꽃만큼
그저 어머니, 어머니라고
간절히 불러보고

탯줄마저 말라버린
가을장 어귀에서
이제야 나는 어머니 이름으로
눈물 몇 방울을 보탠다(「어머니 이름으로」)

이 시를 읽어가다 마지막 연에 다다르면 문득 누구나 기억하는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정지상의 「送人」이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기다란 둑에는 풀빛이 푸르른데,
그대를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소리만 가득하구나.
도도히 흐르는 대동강물은 결코 마를 날이 없으리.
봄마다봄마다 흘리는 나의 슬픈 눈물이 저 물결 위에 넘치리니.)

한반도 유사 이래 최고의 시인인 비운의 정지상은 과연 누구와 어떤 이별을 하며 이 절창을 쏟아냈을까. 친구였을까. 연인이었을까. 그런데 이 「送人」이 절창이기 위해서는 ‘送人’은 절대적 상황이어야 한다. ‘人’이 친구이건, 가족이건, 연인이건 간에 죽어 꽃배를 타고 大同江을 내려가거나, 아니면 형장으로 실려 가는 비극적 인물이어야만 마지막 행이 본연의 맛을 내게 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사람과의 마지막 이별이어야 한다.
「送人」과 「어머니 이름으로」의 차이는 「送人」의 ‘人’이 「어머니 이름으로」에서는 ‘어머니’라는 점과, 계절에 있어 ‘봄’이 ‘가을’이라는 점과, 「送人」에 있어서는 사건의 구체적 정황이 안 보이지만, 「어머니 이름으로」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이 드러나 있다는 점, 그리고 감정에 있어 과장의 극대화와 절제가 다르다는 점이다. 「어머니 이름으로」에서는 「送人」과는 달리 눈물 몇 방울의 절제된 슬픔이 이 작품을 역시 절창으로 만들고 있다.

3. 思春의 역동적인 에너지
봄은 생명이요, 소생이며 역동하는 힘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렬한 힘이다. 살려고 하는 의지보다 더 큰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봄의 그리움, 봄의 사랑, 봄을 향한 열망과 열정, 영원한 思春은 우주적인 에너지이다. 春은 그대로 性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성적인 사람은 오히려 생명의지에 있어서는 탁월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생명체에게 性은 그대로 생명이며 존재가치이다. 외면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고, 경멸한다고 해서 위대해질 이유도 없다.

산과 산 사이
구름이 폭포처럼 흐르고
계곡의 물소리도
천차만별이다.
가슴의 고동이 하도 뛰어서
옆의 여자에게
내가 물었다.
그대도 북처럼 둥둥 울리는
여자인가요.
그거야 때리기 나름이지요.
(「북」)

생명체에게 性적인 욕망은 존재 유지의 첫 번째 요소여야 맞다. 어떤 생명체이든 性적이지 않으면 그 종은 존재할 수 없다. 결코 수 천, 혹은 수 만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올 수 없다. 이것은 그대로 인간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말이다. 더 性적인 존재가 더 많은 개체수를 늘릴 수 있고, 그것이 다른 종으로부터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性적일 필요가 있다. 북은 심장이고 고동 소리이다. 생명체는 누구나 이성을 만나면 일차적으로 성적인 기운을 먼저 느낀다. 그 고동 소리가 크면 클수록 인간은 더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본능적인 생명의지는 항상 당당하고 아름답다.
강우식 시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문장 속의 비유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열댓살 소녀애들
소피보듯 흐르는 개울물 소리(-「청개구리」)

첫사랑의 떨리는 포옹처럼
솟구치는 밤파도소리(-「二泊三日의 바다」)

무등산 수박같은
이 놈의 가슴(-「전라도 길」)

가슴을 원시의 드럼으로
쿵쿵 쳐대는 파도소리「(바다 생맥주 애인」)

은빛 메스를 대어도 찢어지지 않는
저 막막한 처녀막(-「안개속으로」)

기름치듯 굴러떨어지는
영롱한 빗방울을 떠올려도(-「단비」)

‘소녀애들 소피 보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것도 ‘열댓살’의 소녀애. 그런 소리처럼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는 언제나 봄이기 마련이다. ‘밤파도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첫사랑의 떨리는 포옹처럼 솟구친’다. ‘이 놈의 가슴’은 ‘무등산 수박’ 같고, 또 다른 ‘파도소리’는 ‘원시의 드럼으로 쿵쿵 쳐대’는 것처럼 요란하다. ‘처녀막’은 ‘은빛 메스를 대어도 찢어지지 않’을만큼 강력하다. ‘빗방울 소리’는 마치 ‘기름치듯 영롱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곳곳에서 그의 건강하고 따뜻하며 당찬 생명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봄은 봄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일 필요가 없다. 인간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아무리 변하고 사회가 아무리 아수라장이 된다 해도, 그리고 언뜻 인간성이 본성에서 멀어져 그 성품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본능적인 생명의지가 소멸되지 않는 한 영원을 추구하는 인간의 꿈은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는 강우식의 시에서 맞이하는 감동이며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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