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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東問)에 대한 서답(西答).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시평 2007,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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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672회 작성일 07-03-2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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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東問)에 대한 서답(西答). 우문(愚問)에 대한 현답(賢答)
-고은의 선술집을 읽고


선술집
고은


기원전 2천년 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쉬’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어쩌냐


죽음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이다. 유한한 존재들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 죽음이다. 그래서 지구상에 생명체로 태어난 적이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이 죽음을 극복하는 문제는 가장 절실하면서도 풀 수 없는 숙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영생을 갈구하던 그들 모두 하나같이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라졌으며, 오직 그들이 그렇게 갈구했던 치열한 염원만이 여기저기 안타까운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죽음의 극복에 대한 노력이 지순한 경지에까지 다다른 다양한 모습의 작품을 통해 스스로 인간의 위대함을 만끽한다. 그러나 간혹 불사의 집념에 빠졌던 자들의 무모한 모습을 돌아보면 그것이 항상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고은 시인의 작품 「선술집」(창작과 비평, 2007 봄호)을 읽으면 일차적으로 이 죽음과 생명의 문제가 먼저 무게 있게 다가온다.
이 시의 전반적인 골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세계 最古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수메르의 「길가메쉬(Gilgamesh) 서사시」이다. 약간이지만 중대한 변용이 생긴 후반부 5, 6연을 제외하면 전체가 이 신화적 이야기로 전개가 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메르의 신화적인 존재 길가메쉬는 본래 폭압적 군주로서 3분지 2는 신이고 3분지 1은 인간이다. 그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요청으로 신들은 엔키두라는 야성의 사나이를 만들어 길가메쉬를 무너뜨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두 영웅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함께 일련의 모험을 시작한다. 도중에 한 여성 이슈타르가 길가메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유혹을 거부한다. 분노한 이슈타르는 신들에게 하늘의 황소로 하여금 복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 황소 역시 두 영웅에게 죽음을 당한다. 신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져 결국 엔키두가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엔키두를 잃은 슬픔과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거부하는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찾아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간다. 그를 찾아가는 도중 이슈타르의 변신인 씨두리가 나타나 유혹한다. 인간은 어차피 죽어야 하는 존재이니 술이나 마시자.
여기까지의 줄거리는 이 시의 1연부터 4연까지로 대충 압축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후반부, 5연의 ‘정작 그 땅끝에서/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되고 있었다’는 다르다. 다음 이어지는 서사시의 줄거리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서사시 속의 이야기는 더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가메시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불사의 해답을 갖고 있는 우트나피슈팀이 죽음의 바다 건너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갔으나 우트나피슈팀 역시 길가메시에게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불사의 풀’에 걸고 우여곡절 끝에 풀을 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한 마리의 뱀에게 ‘불사의 풀’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시의 신화적 내용과는 달리 「선술집」은 땅끝에서 그마저도 건너버린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인간적인 절망과 우주적인 깨달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바다’를 만난다. ‘불사의 비결’을 찾아 ‘사자’도 때려잡고,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도착했지만 ‘불사의 비결’은 만나지 못하고 ‘선술집’ 하나 서 있다. 지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선술집’에 들어서자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주모’가 유혹한다.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비결은 무슨 비결’
그 순간 절망한 그에게 어처구니없는 ‘바다’가 열린 것이다. 얼굴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안개와도 같이 신비로운 ‘아령칙한 바다’를 만난 것이다. 불사의 비결에 대한 해답으로서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바다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자마자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그저 기가 막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절체절명의 절망적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오묘한 인생의 깨달음 뒤에 오는 감동적인 탄성 같기도 하다. ‘어쩌냐’라는 이 탄성을 불러오는 단 두 줄의 시행으로 하여 「선술집」은 의도된 신화 속의 판타지로부터 현재 속의 리얼리티를 회복하고 있다.
결국 ‘선술집’은 신화적 환타지에서 벗어나 현재성을 획득하는 중요한 장치로 보인다. ‘선술집’에서부터 돌아온 현재성은 ‘바다’를 통하여 더욱 강렬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불사의 비결’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겸손한 이해이며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경이로운 진입이다.
우리 정서의 선술집은 선 채로 마시는 술집이다. 목로에 깍두기 한 그릇 올려놓고 막걸리 한 사발 들고 마시면서 먼 길의 허기진 배를 채우거나 지친 마음을 푸는 공간이다. 주로 갈 길이 바쁘거나 사람이 많은 장터 주변에서 손님을 맞이했을 법도 하다. 지금이라면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근처 버스를 내리면 어쩔 수 없는 유혹으로 발길을 잡곤 하는 텁텁한 목로주점 정도일 것이다. 선술집은 세상 흐름에 관한 스스럼없는 정보교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온갖 세상 이야기들이 흘러들고 흘러나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발 없는 소문은 선술집을 통해 팔도로 달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리따운 주모는 마음에 드는 남정네를 만나면 기꺼이 방술로 앉히고 날밤을 새우면서 새롭고 풋풋한 인연의 시간도 만들었을 법하다. 그래서 선술집의 또 다른 속성은 유혹의 공간이다. 작품 속의 ‘선술집’은 질문과 해답, 환타지와 현재성, 과거와 미래의 접점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이 시의 현재성은 무엇인가. 참혹하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치열했던 신념과 고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반성은 아닌가. 그리고 그 열렬했던 꿈과 희망은 어쨌거나 현재에도 도달하지 못한 숙제임을 확인하는 것은 아닌가. 힘들게 진군하던 그가 선술집에 들른다. 지친 몸을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한잔 술 마시며 주모와 수작을 부리다보니 문득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 순간 그는 그를 지배했던 신성에서 벗어나 더 지순한 인간성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불사의 비결’에 대해 ‘바다’는 동문에 대한 서답이며 동시에 우문에 대한 현답이다. 이것이 보일 듯 말 듯 ‘아령칙한 바다’의 얼굴이 아닐까싶다. 한가로운 선술집에서 인생의 의미를 짚어내는 시인의 풍모가 대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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