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꿈꾸며 세상과 화해하는 ‘풀잎’(유혜영시집 '풀잎처럼 나는' 작품해설 2009 12 리토피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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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꿈꾸며 세상과 화해하는 ‘풀잎’
치과에 가 사소한 이빨의 통증을 치료해 보라. 이빨 하나의 치료로 세상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참으로 사소한 일로 인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그가 만약 이 사소한 일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면, 그에게 이 사소한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산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면 아무도 더 이상 생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대단한 의미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스스로 어쩔 수 없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는 생이라면 또 그냥 말 수는 없다. 의미도 있었으면 좋겠고, 가치도 있었으면 좋겠다. 남보다 잘 살았으면 좋겠고, 남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 말고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나는 치과에 가는 마음으로 시집을 읽는다. 시집을 읽다보면 막혔던 체증이 뚫리기도 하고, 엉겼던 정신이 시원스럽게 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 온갖 기쁨이 많지만 좋은 시를 읽는 기쁨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시가 대단히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이념적이거나 할 필요는 없다. 앓던 이를 치료하듯 그저 일상적이며 사소한 일이어도 기쁨은 샘솟듯 솟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유혜영의 첫 시집 풀잎처럼 나는 역시 나에겐 치과이고, 유 시인은 치과의사인 셈이다. 분명 나는 환자이니까 의사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치과병원 역시 내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이빨을 치료하기 위해 치과에 간다. 나는 고통스러운 치통 환자이다. 병원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당연히 날듯이 가벼울 것이다.
유혜영 시인의 시력은 작은 세월이 아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연마해 왔으며, 포기하거나 적당히 안주하는 일이 없는 분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세상의 대소사에 대한 경험이 많은 것으로 짐작이 되어, 사람 대하는 일이나 살아가는 폼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넉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유 시인의 안에는 숱하게 부서진 흔적과 함께 그 흔적들이 바람에 쓸려 부드럽게 다듬어진 결들로 채워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그 부서진 흔적들이 이 시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유년의 아름다운 꽃들이 현실의 별들로 나타난 작품들과, 자신은 물론 신성과 꿈의 산실인 가족 관계가 상실과 소멸로 이어져가는 사이 갖게 되는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1. 섬이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다
전후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고향과 유년시절은 창조적인 삶과 생명 에너지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오늘의 발전된 한국사회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후의 젊은 세대들이 가지지 못한, 못 살던 시대의 고루하고 진부한 유물로만 버릴 수는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우리의 미래를 무엇으로 열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지만 누구도 쉽사리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향이 있어서 그래도 살만한 사람들이 있고, 아름다운 유년시절이 있어 인생 또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수없이 많다. 그들로 인해 건강하고 축복받은 시는 별처럼 쏟아지고, 세상은 아직도 그 변함없는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릴 적 백족산 기슭에 있는
과수원에 자주 갔는데요.
징검다리가 있는 작은 시냇물을
건너가야 했는데요.
군침 도는 복숭아가 익고 있어
땅금 같은 물을 건너고 있었는데요.
발 디딜 때마다 송사리 떼
화들짝 놀라 달아났는데요.
더러 미끄러져 빠져도
물살은 내 종아리를 간질러 주었는데요.
징검다리 띄워놓은 시냇물은
어디로 흘러갔는지요.
나는 지금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는데요.
저 깊이도 모를 강물은
물고기를 몽땅 감춰 놓고서
육중한 다리를 띄워놓고 있는데요.
새가슴처럼 팔딱이는 내 심장소리도
거센 물살 위에서 부서져버리고요.
내가 밀고 있는 말도 금을 넘지 못하고
자꾸 물에 빠져버리는데요.
―「사방치기」
시는 리듬도 중요하다. 시에는 감동도 있어야 한다. 시에는 의미도 담겨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는 쉬울 필요도 있다. 그렇다고 어려워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살아있는 생물이면 된다. 시가 살아있지 못하면 글자 그대로 죽은 시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존재에는 법칙이 따로 없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생명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생명력은 그대로 삶의 에너지가 된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길을 가지 않는다.
그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꿈처럼 떠올리며 부조리하고 흔들리는 현실에 아파한다. 못마땅한 현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유년의 ‘징검다리가 있는 작은 시냇물’은 ‘송사리’가 놀고 ‘물살이 종아리를 간질이던’ 곳이다. 그러나 현실의 ‘한강다리’와 ‘강물’은 ‘팔딱이는 내 심장소리’가 여지없이 ‘부서져 버리’는 곳이며, ‘자꾸 물에 빠져 버리’는 곳이다.
제부도 가는 길은 날마다 달아나는
섬을 움키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육지로 가는 길을 바라보며
사막을 해매는 섬마을로
게들은 아닌 척 슬금슬금 옆으로 기어가고,
낙지는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날밤을 새워 한사코 흐물거리는
갯벌과 몸을 둥글린 달이
알밴 바다를 쏟아 내면,
엉겨 붙다가 들켜버린 갯지렁이의
숨소리를 바닷물이 쓸어간다.
조개를 캐어든 손에 어떤 문고리가 잡혔는지
밀려드는 달빛에 밝아지는 얼굴들.
섬 구석구석 청솔가지 심어놓고
망우레 망우레,
달을 부르며
저를 태워 빙빙 돌아가는 파도는
붉은 거품으로 갯내를 삭히는데.
갯벌을 뒤져대는 사람들
불 위에 지글거리는 조개 냄새만
따라간다.
―「보름밤」
‘섬’도 이제는 ‘사막’이다. 가만 두지 않는 사람들 탓이다. ‘몸을 둥글린 달이/알밴 바다를 쏟아 내면,/엉겨 붙다가 들켜버린 갯지렁이의/숨소리를 바닷물이 쓸어’가는 섬이었으나 언제부턴가 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망망대해에 꿈처럼 떠 있던 섬은 한때는 충분히 때 묻지 않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뭍에서 삶에 찌들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을 펴기 위해 섬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섬도 물이 들었다. ‘제부도 가는 길은 날마다 달아나는/섬을 움키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갯벌을 뒤져대는 사람들/불 위에 지글거리는 조개 냄새만/따라간다.’ 그들은 더 이상 섬의 고요와 평화와 자연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섬은 이제 달아나기도 힘이 든다.
길을 건널 때는 붕어눈이 된다.
이 쪽 저 쪽 물살을 살핀다.
토끼눈을 하고 뛸 거리도 잰다.
시험지 같은 길바닥을 한 발 내디디며
오답처럼 지우개로 싹 지울 수도 있다.
우선멈춤 표지판도 없는
한 길 속도 모르는 너.
나도 말리지 못하는 나.
거미줄 같은 허공이다.
건너지 못하면 길이 아니다.
구르고 자맥질하며, 어느 순간
비끗해 함정이 되는 길 위에서
요리조리 눈치 빠르게 생을 건너가는,
나는 기상천외한 재주꾼이다.
―집 앞 3번국도」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우선멈춤 표지판’도 없는 ‘거미줄 같은 허공’이다. ‘어느 순간 비끗해 함정이 되는 길 위에서/요리조리 눈치 빠르게 생을 건너’는 그는 ‘기상천외한 재주꾼’이다. 적어도 그녀는 절망과 상실 속에서도 아직은 잘 살아내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니 아예 세상을 포기하거나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 일은 없다. 이쯤 되면 그녀는 오히려 기가 막힌 세상을 즐기는 수준이다.
이래저래 열 받아 한 판 붙어 볼랬더니, 요즘 싸움은 단추싸움이란다. 눌렀다 하면 지구가 한순간에 불바다란다. 단추에 재바르게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아는 병법 중에 제일은 삼십육계 줄행랑, 도약을 꿈꾸는 내 나라를 떠메고 어느 별로 튈까. 날마다 하늘을 바라본다.
―「삼십육계」 일부
그녀도 싸우고 싶을 때가 있기는 있다. 화가 나면 견디기 어려우니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그녀는 일찌감치 싸움을 포기해 버린다. 잘못하다간 오히려 큰 일로 번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삼십육계다. 달아나는 것만이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길이다. 이런 소극적인 심성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적극적으로 싸울 수 없는 문약한 사람들이 찾는 다음 수순은 결국 화해와 용서일 수밖에 없다. 강한 것만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강한 것은 약한 것에 상처를 준다. 강한 자의 주변에는 약한 자들의 슬픔이 늘 숨겨져 있다.
2. 달아난 ‘별’을 찾아 헤매다
그에게 세상은 왜 이렇게 알 수 없고 험하기만 한 곳으로 변해 버렸을까. 그 답이 ‘별’의 상실이다. 모든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꿈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오늘날의 물질절 욕망이 ‘별’의 상실을 재촉했다. 그에게 ‘별’의 의미는 대단히 상식적이며 소박하다. 쉽사리 손에 잡히는 일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별’이 단일화된 하나의 의미로 잡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마음처럼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그에게 ‘별’은 꿈이고 희망이면서 그만큼 절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처와 상실과 고독으로 그녀는 치유하기 어려운 현실을 홀로 걷는다. 그에게 아름다운 꿈의 ‘별’들은 도처에 깔려 있지만 그 ‘별’들은 모두 절망적인 종말로 치닫는다. 살아올 수 없다. 진정으로 가치 있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절대 선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이성적이지 못하며 불합리하다. 그는 꿈을 꾸듯 ‘별’을 찾아 헤맨다.
눈앞이 깜깜할 때 빤짝, 별 하나 창문을 연다.
그대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설핏 골목길 보인다.
목숨줄에 걸린 운명이 서서히 고삐를 늦춘다.
명징한 매미채 속으로 낮은 매미소리가 길을 튼다.
발목의 족쇄를 풀고 문득 꿈의 여행을 떠난다.
풀잎은 일어서는 바람을 따라 누웠다 다시 일어난다.
―「덜 사랑하기」
그와 ‘별’의 관계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눈 앞이 캄캄할 때 빤짝,’ 창문을 열어주는 존재가 그의 ‘별’이다. 그가 힘이 들고 외로울 때, 그가 더 이상 혼자 힘으로 버티기 어려울 때, 꼭 나타나 그로 하여금 생의 의욕을 갖도록 해주는 존재가 ‘별’이다. 그리고 그 ‘별’은 유리창에 비치는 바로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별’을 꿈꾸며 ‘별’을 기다리다가 스스로 ‘별’이 된다. 그는 ‘별’을 따라 ‘발목에 족쇄를 풀고 문득 먼 꿈의 여행을 떠난다.’ 그제야 ‘이제 풀잎은 바람 따라 누웠다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힘겨운 운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별’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또 있다.
그를 버린 세상을 세어본다.
2홉들이 참이슬 1, 2, 3, 4, 5…….
지구가 휘청거리더니
길이 일어서서 박치기를 한다.
직립한 것들이 돌려차기를 하고
시간이 빙빙 돌리다가 패대기친다.
산다는 것은 도리깨질 속에서 콩알로 튀는 거다.
별을 띄우는 공정이다.
―「환승하는 별」 일부
‘별’이 꿈과 희망의 상징이거나 그리운 이와의 대화 창구가 아니다. 그의 ‘별’은 그가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비논리적인 그 무엇이다. 어쩌면 그에게 ‘별’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야하는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다. 「악어, 별을 먹다」에서는 ‘별’이 ‘일생을 두고 일군 우리의’ 그 무엇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다시 「별을 달다」에서는 ‘구멍 난 팔꿈치’의 ‘노란 헝겊’이 ‘별’이 된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살아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별’이다. 「머리카락 보인다」에서는 대훈이 어머니의 ‘양단치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별’이고, 대훈이의 ‘은빛 스케트날에’서 반짝반짝 날아오르는 것이 ‘별’이다. 「달아난 별을 찾습니다」에서는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내 안에 잠자’다가 ‘일제히 눈을 뜨는’ 것이 ‘별’이다. 그 ‘별’은 ‘나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지구를 박살내버리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는 그 ‘별’을 찾아 헤맨다. 「별, 뜨다」에서는 현대 과학문명의 상징인 인공위성이 ‘별’이 된다. 그는 이 ‘별’의 능력을 ‘신비롭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별’의 의미는 이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년의 평화가 중요한 가닥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그렇다면 이제 그는 대부분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답이 가능해진다. 그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길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으면 달아나게 되어 있다. 잃은 사랑을 더 이상 곁에서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영원한 불평불만자라는 이형기 시인의 말은 맞다. 시인은 사실은 더 사랑하지 못해서 안달인 존재이다. 시인은 더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이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미쳐버리는 존재이다. 아무도 인간 세계와 우주의 섭리를 다 읽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이것을 읽을 수 있다면 그는 언제나 종말론에 시달리며 장송곡이나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잃은 자의 가슴에서 사랑은 용광로처럼 꿈틀거린다. 우리는 사랑을 갖고 있던 상실했던 간에 사랑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획득한 사랑에 대한 황홀한 축복의 노래는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우리들 가슴은 언제나 비어있으며, 비어있는 구석을 사랑으로 채우고자 열망한다. 가득 차 있어도 빈 곳을 만들어 마저 채우고자 열망한다. 그 열망으로 우리는 산다. 그 열망이 사라지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가치를 잃게 되며 생의 의욕마저 점차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 자체가 생명에너지인 것이다.
시집가던 해 마당 가득 분꽃을 심었지요.
어두워지면 화장을 고치는 분꽃들로
저녁 내내 마당에는 분내가 진동했지요.
그 눈길 따라가면 반짝, 별들이 눈을 맞추는데요.
바람 불면 파도가 일어 뙤약볕에 김을 매는
어머니 마을 떠나 낯선 우주로 나가볼 참인가요.
별빛 감아 몇 억 광년 드나들며 무엇을 찾았나요.
밤이 하얗도록 옥양목 버선에 볼받아주며
별빛 모아도모아도 까만 슬픔으로 여물었지요.
아파트 앞마당에도 누가 심은 별빛인지
밤마다 분내 풍기며 나를 부르네요.
―「분꽃」
마침내 그의 ‘별’은 밤마다 그를 부르는 생명에너지 ‘분내 풍기는’ 분꽃으로까지 번진다. 그러나 ‘어머니 마을을 떠나 낯선 우주로 나가’ ‘몇 억 광년 드나들며’ 찾아보는 ‘별’이지만 끝내 ‘별’을 찾지는 못한다. ‘모아도모아도 까만 슬픔으로 여물’ 뿐이다.
3. ‘뱀굴’ 드나들며 관능의 꽃씨 뿌리다
그는 ‘뱀굴’ 근처에 꽃씨를 뿌린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의식이 필요하고, 이 성스러운 의식을 위해 몸 달구는 갈증이 존재한다.
이 동물의 우리 앞에서는 오래 서있게 됩니다.
눈이 마주치면 묘한 신비감과 두려움이 혼돈되는 사이, 은밀히
무언가를 도모하는 흐름이 서로의 시공을 공유하지요.
이 짐승과의 동거로 나는 풍성해집니다.
웅크린 나를 기다란 혀가 날름거리면
후닥닥, 도망칠 통로 하나 뚫어놓지요.
이 짐승의 혀로 나는 또 쇠잔해가는데요.
풍요와 쇠잔 속에서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요.
―「뱀굴 드나들기」 일부
뱀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닿아있다. 성경에서 뱀을 유혹하는 자로 묘사한 것도 이미 이전부터 갖고 있는 인간의 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 때문이다. 뱀은 징그럽다. 그래서 징그러움의 이름이 되고 얼굴이 되었다. 이 징그러움이 아마도 성의 초입을 여는 인간의 영리한 비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죄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저질러야 한다. 죄는 어쨌거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운 짓이다. 이와 기묘하게 같은 꼴을 보이는 것이 성일 것이다. 그도 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묘한 신비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며, ‘무언가’ 알 수 없는 ‘서로의 시공을 공유’해 버린다.
이 ‘뱀굴’은 동물원의 뱀우리이다. 인간은 뱀을 실제로 바라보지 않아도 그저 생각만 하여도 뱀과 만나 얼마든지 교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인간 스스로 수천 년을 훈련시켜 왔다. 성은 변함없이 극대화 상태이고 인류의 생명은 아직 존재 중이다.
순이 아버지는,
밤마다 아들이 군에 간 사이
새 며느리의 방을 찾았단다.
늑대는 달이 떠오르면
달 하나 잡아먹고
어둠 속에서 울부짖고는 했는데,
달이 몇 번 몸을 바꿔치기 하던 어느 날,
요강에 농약을 토해놓은 며느리는
땅속 깊이 숨어버렸단다.
순이 아버지는 날마다
며느리 찾아 산으로 가고,
대낮에도 날뛰는 늑대 한 마리
동네 사람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만 그녀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단다.
어릴 적 들리던 그 늑대의 울음
달밤이면 가끔 내 머릿속에서 살아나곤 해.
―「늑대의 울음소리」 일부
‘늑대는 달이 떠오르면/달 하나 잡아먹’는다. 늑대에게 이것은 본능이고 자연이다. 그러나 늑대가 인간으로 바뀌는 순간 곧 바로 파렴치한이나 불륜으로 둔갑해 버린다. 인간도 근본적으로는 늑대와 같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점이 가끔은 인간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남몰래 늑대를 만난다. ‘달밤이면’ 가끔 아무도 보지 않는 들판으로 나가 늑대를 기다린다. ‘성’의 얼굴을 ‘뱀’이나 ‘늑대’의 얼굴로 만들어버린 인간의 저의가 무엇이건 간에 결과는 잘 된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잘 되어가는 중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미칠 일 몇 가지쯤 품고 사는 세상.
좀 더 가슴을 열고 바람을 맞다가,
깊이도 모를 물속을 좀 더 오래 들여다보다가,
물속에 비치는 산속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다가,
산자락에 곱게 핀 꽃 한 송이 머리에 꽂고
폭포처럼 악 소리 지르며 뛰어내릴 수도 없어,
그냥 허공에 대고 눈길 손길 마구 꽂아대고 있는 거야.
바람 불어 헝클어진 꽃잎 길가에 구른다.
―「광녀」
‘광녀’는 비정상인이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본능이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을 빌릴 필요도 있다. 묘한 것은 ‘광녀’라 해도 죽음은 두렵다는 것이다. 그녀도 폭포에서 뛰어내리지는 않는다. 죽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벗어내고 싶은 껍질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불어’ ‘길가에 구’르는 ‘헝클어진 꽃잎’ 신세가 될 뻔한 운명을 알고 있다. 다시 인간적인 질서 속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4. ‘풀잎’이 되어 혁명적 봄을 꿈꾸다
외줄에 목숨 걸고 빙벽을 오르는 일이
발 푹푹 빠지는 눈밭인 줄도 알지만,
몸도 마음도 만년설 같이
얼어붙을 수 있는 줄도 알지만,
왜 가느냐고 물으면,
길이 있어 가는 거지.
―「완주」 일부
빙벽과 눈밭에서 만년설 같이 얼어붙을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길을 간다. 살아있으니 가는 것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 가는 것이다. 그에게 인생의 길은 춥고 배고픈 저승길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순종하는 착한 자세로 대응한다.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그가 만들어낸 ‘별’은 다시 ‘풀잎’으로 모습을 바꾼다.
나는 차라리 풀잎처럼 땅 위에 누워 버리고 싶어. 풀잎은 바람이 사나워도 쉽게 넘어지지 않지. 산을 몽땅 밀어낸다 해도 풀잎은 풀잎으로 남아있지. 누구라도 나를 손쉽게 건넜으면 해. 그래서 산보다 더 가파른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면, 풀잎처럼 나는.
―「풀잎처럼 나는」 일부
‘풀잎’ 같은 자애와 용서로 벼랑 같은 사람들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벼랑에 서는 일은 너무도 무섭다. 도저히 땅과 직각으로 서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은 오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풀잎’으로 바꾸어 버린다. ‘풀잎’이 되면 고통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지고 바다 같은 넉넉함이 그를 기다린다고 믿는다. 오를 수 없는 산이라면 그 산이 스스로 내게 오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는 밤낮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의 평화는 여성성의 전통적인 고양에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힘으로는 열등한 존재이지만 그 여성의 여성성이 제 자리를 잡을 때에야 비로소 만물의 운행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반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구름 위로 삼만 개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솟아난다는 계림에 가보았는데요.
산이 아니었어요.
여인네 젖무덤 같은 봉우리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어요.
저렇게 크고 탐스런 젖
하늘이 아니면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서방을 잘 둔 계림은 날마다 젖이 퉁퉁 불어 있는데요.
구름이 젖꼭지를 물었다 놨다 하면서,
이강의 물소리로 잦아들고 있는데요.
가마우지들도 이강에서 잘도 고기를 잡던데요.
아이를 몇이나 낳으면 저런 젖을 갖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하늘 서방 한 번 얻어 볼까요.
퉁퉁 불은 젖을 구름에 흠씬 물려볼까요.
―「계림」
서방이 ‘하늘’이어야 비로소 ‘여인네 젖무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낳고, 하늘 서방이나 얻어야 여성이 진정한 여성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늘 서방이 존재나 하겠는가. 하늘 서방이 없으면 ‘구름이 젖꼭지를 물었다 놨다’도 할 수 없고, ‘이강의 물소리가 잦아들’ 수도 없다. 그러니 그런 꿈의 세상도 그에게는 별 세상에 지나지 않는다.
간밤
어떤 바람이 지나간 것일까.
장미나무 아래 선혈이 낭자하다.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는
붉은 입술.
가지 못한 길에 대하여 묻고 있다.
떨어져 내린
꽃잎 속에 갇힌 바람은
비상구가 없다.
―「상처」
그의 현실적 상처, 특히 여성성의 상실은 ‘비상구가 없’을만큼 절대적이다. 꽃은 한껏 피었다가 시들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긴다. 그것이 꽃의 운명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그러나 바람은 꽃이 한껏 피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항상 바람이라는 적대적 존재와 떨어질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꽃이 꽃으로 피지 못하고 떨어질 때에 그 절망과 슬픔은 극에 달한다. 그 슬픔을 슬픔답게 노래하여 시가 되었다. 우리의 시가, 동시에 그의 「상처」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이다.
그는 꽃의 의미 상실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꽃들은 어떻게 향기를 뿜어낼까.
입술을 붉게 칠해놓아도
말은 검게 쏟아지고,
단단히 비끄러맬 수도
놓아버릴 수도 없어
번번이 들키고 마는,
―「나」 일부
건너편 꽃집 향기나라로 달려간다.
저 날개 무슨 꽃에 앉았을까,
떨어뜨리고 간 나비가루에 눈이 쓰리다.
―「바쁘다 바뻐」 일부
꽃 봐라 꽃 봐라.
산에 들에 서답이 펄럭이고요.
독한 향기에 쏘인 사람들
휘청거리는데,
둥둥 떠가는 꽃잎들의 바다에서
나는 자맥질하고.
―「봄날」 일부
온갖 씨앗을 뿌려 꺼내보곤 하시던
마당 한 켠 꽃밭은 무지갯빛이었다.
나는 어떤 빛깔 어떤 향기였을까.
늘 서열 뒤로 밀리던 백일홍이
이제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아버지의 마당」 일부
꽃은 당당하게 피어야 아름답다. 한껏 피어야 비로소 꽃이다. 어떤 꽃이든 꽃은 자신의 운명대로 한껏 피었다가 시든다. 그러고 나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겨울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한껏 피기도 전에 바람에 날린 꽃이 있다면, 그 꽃이 바로 당신이라면, 그 슬픔의 깊이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이 와도 다른 사람의 봄이요. 향기로운 세상도 나 아닌 누군가의 잔치판이라면 나는 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이른 바 잔인한 4월이 도처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혁명을 꿈꾼다. 그에게 남아있는 희망은 곧 혁명적 봄으로 상승한다. 모든 이들에게 봄은 어떤 의미일까. 봄의 의미가 혁명적이라면 그가 느끼고 있는 겨울의 상대적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엿볼 수 있다. 혁명적인 봄과 폭염 천둥 속의 침몰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이며 평화이며 승리이다.
솜이불을 덮고 있어도
돌아누운 사람의 등은 엄동설한.
뒤척이는 잎새마다 바스락대는
이불깃 소리도 얼어붙는 곳.
그래, 겨우내 별일 없다고 춥지 않다고,
성감대도 움츠러든 가지 위로
풀솜 같은 눈은 내려,
자꾸자꾸 내려
눈부시게 하얀 눈꽃이 활짝.
무엇을 위한 봄이냐고?
저 새싹들
들이댄 송곳으로,
쨍그렁, 깨진 햇살을 골라
그리운 빛깔로 꽃물 들이면,
세상은 볼거리로 가득하고
젖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열매들로
더욱 풍성하겠지.
폭염의 천둥에
팔 하나 다리 하나 내준다 해도,
아플 것이 없는 이 침몰.
―「혁명」
어머니의 꽃밭에 대한 유 시인의 기억은 남다르다. 그래서 그 꽃의 향기는 더욱 강렬하다. 살아있는 한 꽃은 언제든지 보란 듯이 피게 될 것이다. 죽는다 해도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시인들은 시를 쓴다. 절망과 죽음의 노래라 할지라도 뒤집으면 희망과 생명의 노래가 된다. 아무쪼록 유혜영 시인의 꽃이 이 땅에 강력하고 아름다운 시의 꽃으로 활짝 피기를 바란다.
치과에 가 사소한 이빨의 통증을 치료해 보라. 이빨 하나의 치료로 세상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참으로 사소한 일로 인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그가 만약 이 사소한 일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면, 그에게 이 사소한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산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면 아무도 더 이상 생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대단한 의미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스스로 어쩔 수 없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는 생이라면 또 그냥 말 수는 없다. 의미도 있었으면 좋겠고, 가치도 있었으면 좋겠다. 남보다 잘 살았으면 좋겠고, 남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 말고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나는 치과에 가는 마음으로 시집을 읽는다. 시집을 읽다보면 막혔던 체증이 뚫리기도 하고, 엉겼던 정신이 시원스럽게 풀어지기도 한다. 세상에 온갖 기쁨이 많지만 좋은 시를 읽는 기쁨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시가 대단히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이념적이거나 할 필요는 없다. 앓던 이를 치료하듯 그저 일상적이며 사소한 일이어도 기쁨은 샘솟듯 솟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유혜영의 첫 시집 풀잎처럼 나는 역시 나에겐 치과이고, 유 시인은 치과의사인 셈이다. 분명 나는 환자이니까 의사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치과병원 역시 내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이빨을 치료하기 위해 치과에 간다. 나는 고통스러운 치통 환자이다. 병원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당연히 날듯이 가벼울 것이다.
유혜영 시인의 시력은 작은 세월이 아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연마해 왔으며, 포기하거나 적당히 안주하는 일이 없는 분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세상의 대소사에 대한 경험이 많은 것으로 짐작이 되어, 사람 대하는 일이나 살아가는 폼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넉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유 시인의 안에는 숱하게 부서진 흔적과 함께 그 흔적들이 바람에 쓸려 부드럽게 다듬어진 결들로 채워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그 부서진 흔적들이 이 시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유년의 아름다운 꽃들이 현실의 별들로 나타난 작품들과, 자신은 물론 신성과 꿈의 산실인 가족 관계가 상실과 소멸로 이어져가는 사이 갖게 되는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1. 섬이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다
전후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고향과 유년시절은 창조적인 삶과 생명 에너지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오늘의 발전된 한국사회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후의 젊은 세대들이 가지지 못한, 못 살던 시대의 고루하고 진부한 유물로만 버릴 수는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우리의 미래를 무엇으로 열 것인가. 중요한 질문이지만 누구도 쉽사리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향이 있어서 그래도 살만한 사람들이 있고, 아름다운 유년시절이 있어 인생 또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수없이 많다. 그들로 인해 건강하고 축복받은 시는 별처럼 쏟아지고, 세상은 아직도 그 변함없는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릴 적 백족산 기슭에 있는
과수원에 자주 갔는데요.
징검다리가 있는 작은 시냇물을
건너가야 했는데요.
군침 도는 복숭아가 익고 있어
땅금 같은 물을 건너고 있었는데요.
발 디딜 때마다 송사리 떼
화들짝 놀라 달아났는데요.
더러 미끄러져 빠져도
물살은 내 종아리를 간질러 주었는데요.
징검다리 띄워놓은 시냇물은
어디로 흘러갔는지요.
나는 지금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는데요.
저 깊이도 모를 강물은
물고기를 몽땅 감춰 놓고서
육중한 다리를 띄워놓고 있는데요.
새가슴처럼 팔딱이는 내 심장소리도
거센 물살 위에서 부서져버리고요.
내가 밀고 있는 말도 금을 넘지 못하고
자꾸 물에 빠져버리는데요.
―「사방치기」
시는 리듬도 중요하다. 시에는 감동도 있어야 한다. 시에는 의미도 담겨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는 쉬울 필요도 있다. 그렇다고 어려워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살아있는 생물이면 된다. 시가 살아있지 못하면 글자 그대로 죽은 시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존재에는 법칙이 따로 없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생명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생명력은 그대로 삶의 에너지가 된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길을 가지 않는다.
그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꿈처럼 떠올리며 부조리하고 흔들리는 현실에 아파한다. 못마땅한 현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유년의 ‘징검다리가 있는 작은 시냇물’은 ‘송사리’가 놀고 ‘물살이 종아리를 간질이던’ 곳이다. 그러나 현실의 ‘한강다리’와 ‘강물’은 ‘팔딱이는 내 심장소리’가 여지없이 ‘부서져 버리’는 곳이며, ‘자꾸 물에 빠져 버리’는 곳이다.
제부도 가는 길은 날마다 달아나는
섬을 움키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육지로 가는 길을 바라보며
사막을 해매는 섬마을로
게들은 아닌 척 슬금슬금 옆으로 기어가고,
낙지는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날밤을 새워 한사코 흐물거리는
갯벌과 몸을 둥글린 달이
알밴 바다를 쏟아 내면,
엉겨 붙다가 들켜버린 갯지렁이의
숨소리를 바닷물이 쓸어간다.
조개를 캐어든 손에 어떤 문고리가 잡혔는지
밀려드는 달빛에 밝아지는 얼굴들.
섬 구석구석 청솔가지 심어놓고
망우레 망우레,
달을 부르며
저를 태워 빙빙 돌아가는 파도는
붉은 거품으로 갯내를 삭히는데.
갯벌을 뒤져대는 사람들
불 위에 지글거리는 조개 냄새만
따라간다.
―「보름밤」
‘섬’도 이제는 ‘사막’이다. 가만 두지 않는 사람들 탓이다. ‘몸을 둥글린 달이/알밴 바다를 쏟아 내면,/엉겨 붙다가 들켜버린 갯지렁이의/숨소리를 바닷물이 쓸어’가는 섬이었으나 언제부턴가 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망망대해에 꿈처럼 떠 있던 섬은 한때는 충분히 때 묻지 않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뭍에서 삶에 찌들었던 사람들은 그 마음을 펴기 위해 섬을 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섬도 물이 들었다. ‘제부도 가는 길은 날마다 달아나는/섬을 움키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갯벌을 뒤져대는 사람들/불 위에 지글거리는 조개 냄새만/따라간다.’ 그들은 더 이상 섬의 고요와 평화와 자연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섬은 이제 달아나기도 힘이 든다.
길을 건널 때는 붕어눈이 된다.
이 쪽 저 쪽 물살을 살핀다.
토끼눈을 하고 뛸 거리도 잰다.
시험지 같은 길바닥을 한 발 내디디며
오답처럼 지우개로 싹 지울 수도 있다.
우선멈춤 표지판도 없는
한 길 속도 모르는 너.
나도 말리지 못하는 나.
거미줄 같은 허공이다.
건너지 못하면 길이 아니다.
구르고 자맥질하며, 어느 순간
비끗해 함정이 되는 길 위에서
요리조리 눈치 빠르게 생을 건너가는,
나는 기상천외한 재주꾼이다.
―집 앞 3번국도」
그녀에게 있어 세상은 ‘우선멈춤 표지판’도 없는 ‘거미줄 같은 허공’이다. ‘어느 순간 비끗해 함정이 되는 길 위에서/요리조리 눈치 빠르게 생을 건너’는 그는 ‘기상천외한 재주꾼’이다. 적어도 그녀는 절망과 상실 속에서도 아직은 잘 살아내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니 아예 세상을 포기하거나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 일은 없다. 이쯤 되면 그녀는 오히려 기가 막힌 세상을 즐기는 수준이다.
이래저래 열 받아 한 판 붙어 볼랬더니, 요즘 싸움은 단추싸움이란다. 눌렀다 하면 지구가 한순간에 불바다란다. 단추에 재바르게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아는 병법 중에 제일은 삼십육계 줄행랑, 도약을 꿈꾸는 내 나라를 떠메고 어느 별로 튈까. 날마다 하늘을 바라본다.
―「삼십육계」 일부
그녀도 싸우고 싶을 때가 있기는 있다. 화가 나면 견디기 어려우니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그녀는 일찌감치 싸움을 포기해 버린다. 잘못하다간 오히려 큰 일로 번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삼십육계다. 달아나는 것만이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길이다. 이런 소극적인 심성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적극적으로 싸울 수 없는 문약한 사람들이 찾는 다음 수순은 결국 화해와 용서일 수밖에 없다. 강한 것만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강한 것은 약한 것에 상처를 준다. 강한 자의 주변에는 약한 자들의 슬픔이 늘 숨겨져 있다.
2. 달아난 ‘별’을 찾아 헤매다
그에게 세상은 왜 이렇게 알 수 없고 험하기만 한 곳으로 변해 버렸을까. 그 답이 ‘별’의 상실이다. 모든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꿈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오늘날의 물질절 욕망이 ‘별’의 상실을 재촉했다. 그에게 ‘별’의 의미는 대단히 상식적이며 소박하다. 쉽사리 손에 잡히는 일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별’이 단일화된 하나의 의미로 잡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마음처럼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그에게 ‘별’은 꿈이고 희망이면서 그만큼 절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처와 상실과 고독으로 그녀는 치유하기 어려운 현실을 홀로 걷는다. 그에게 아름다운 꿈의 ‘별’들은 도처에 깔려 있지만 그 ‘별’들은 모두 절망적인 종말로 치닫는다. 살아올 수 없다. 진정으로 가치 있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절대 선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이성적이지 못하며 불합리하다. 그는 꿈을 꾸듯 ‘별’을 찾아 헤맨다.
눈앞이 깜깜할 때 빤짝, 별 하나 창문을 연다.
그대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설핏 골목길 보인다.
목숨줄에 걸린 운명이 서서히 고삐를 늦춘다.
명징한 매미채 속으로 낮은 매미소리가 길을 튼다.
발목의 족쇄를 풀고 문득 꿈의 여행을 떠난다.
풀잎은 일어서는 바람을 따라 누웠다 다시 일어난다.
―「덜 사랑하기」
그와 ‘별’의 관계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눈 앞이 캄캄할 때 빤짝,’ 창문을 열어주는 존재가 그의 ‘별’이다. 그가 힘이 들고 외로울 때, 그가 더 이상 혼자 힘으로 버티기 어려울 때, 꼭 나타나 그로 하여금 생의 의욕을 갖도록 해주는 존재가 ‘별’이다. 그리고 그 ‘별’은 유리창에 비치는 바로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별’을 꿈꾸며 ‘별’을 기다리다가 스스로 ‘별’이 된다. 그는 ‘별’을 따라 ‘발목에 족쇄를 풀고 문득 먼 꿈의 여행을 떠난다.’ 그제야 ‘이제 풀잎은 바람 따라 누웠다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힘겨운 운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별’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또 있다.
그를 버린 세상을 세어본다.
2홉들이 참이슬 1, 2, 3, 4, 5…….
지구가 휘청거리더니
길이 일어서서 박치기를 한다.
직립한 것들이 돌려차기를 하고
시간이 빙빙 돌리다가 패대기친다.
산다는 것은 도리깨질 속에서 콩알로 튀는 거다.
별을 띄우는 공정이다.
―「환승하는 별」 일부
‘별’이 꿈과 희망의 상징이거나 그리운 이와의 대화 창구가 아니다. 그의 ‘별’은 그가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비논리적인 그 무엇이다. 어쩌면 그에게 ‘별’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야하는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다. 「악어, 별을 먹다」에서는 ‘별’이 ‘일생을 두고 일군 우리의’ 그 무엇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다시 「별을 달다」에서는 ‘구멍 난 팔꿈치’의 ‘노란 헝겊’이 ‘별’이 된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살아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별’이다. 「머리카락 보인다」에서는 대훈이 어머니의 ‘양단치마’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별’이고, 대훈이의 ‘은빛 스케트날에’서 반짝반짝 날아오르는 것이 ‘별’이다. 「달아난 별을 찾습니다」에서는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내 안에 잠자’다가 ‘일제히 눈을 뜨는’ 것이 ‘별’이다. 그 ‘별’은 ‘나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지구를 박살내버리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는 그 ‘별’을 찾아 헤맨다. 「별, 뜨다」에서는 현대 과학문명의 상징인 인공위성이 ‘별’이 된다. 그는 이 ‘별’의 능력을 ‘신비롭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별’의 의미는 이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년의 평화가 중요한 가닥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그렇다면 이제 그는 대부분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답이 가능해진다. 그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길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으면 달아나게 되어 있다. 잃은 사랑을 더 이상 곁에서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영원한 불평불만자라는 이형기 시인의 말은 맞다. 시인은 사실은 더 사랑하지 못해서 안달인 존재이다. 시인은 더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이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미쳐버리는 존재이다. 아무도 인간 세계와 우주의 섭리를 다 읽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이것을 읽을 수 있다면 그는 언제나 종말론에 시달리며 장송곡이나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잃은 자의 가슴에서 사랑은 용광로처럼 꿈틀거린다. 우리는 사랑을 갖고 있던 상실했던 간에 사랑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획득한 사랑에 대한 황홀한 축복의 노래는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우리들 가슴은 언제나 비어있으며, 비어있는 구석을 사랑으로 채우고자 열망한다. 가득 차 있어도 빈 곳을 만들어 마저 채우고자 열망한다. 그 열망으로 우리는 산다. 그 열망이 사라지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가치를 잃게 되며 생의 의욕마저 점차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 자체가 생명에너지인 것이다.
시집가던 해 마당 가득 분꽃을 심었지요.
어두워지면 화장을 고치는 분꽃들로
저녁 내내 마당에는 분내가 진동했지요.
그 눈길 따라가면 반짝, 별들이 눈을 맞추는데요.
바람 불면 파도가 일어 뙤약볕에 김을 매는
어머니 마을 떠나 낯선 우주로 나가볼 참인가요.
별빛 감아 몇 억 광년 드나들며 무엇을 찾았나요.
밤이 하얗도록 옥양목 버선에 볼받아주며
별빛 모아도모아도 까만 슬픔으로 여물었지요.
아파트 앞마당에도 누가 심은 별빛인지
밤마다 분내 풍기며 나를 부르네요.
―「분꽃」
마침내 그의 ‘별’은 밤마다 그를 부르는 생명에너지 ‘분내 풍기는’ 분꽃으로까지 번진다. 그러나 ‘어머니 마을을 떠나 낯선 우주로 나가’ ‘몇 억 광년 드나들며’ 찾아보는 ‘별’이지만 끝내 ‘별’을 찾지는 못한다. ‘모아도모아도 까만 슬픔으로 여물’ 뿐이다.
3. ‘뱀굴’ 드나들며 관능의 꽃씨 뿌리다
그는 ‘뱀굴’ 근처에 꽃씨를 뿌린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의식이 필요하고, 이 성스러운 의식을 위해 몸 달구는 갈증이 존재한다.
이 동물의 우리 앞에서는 오래 서있게 됩니다.
눈이 마주치면 묘한 신비감과 두려움이 혼돈되는 사이, 은밀히
무언가를 도모하는 흐름이 서로의 시공을 공유하지요.
이 짐승과의 동거로 나는 풍성해집니다.
웅크린 나를 기다란 혀가 날름거리면
후닥닥, 도망칠 통로 하나 뚫어놓지요.
이 짐승의 혀로 나는 또 쇠잔해가는데요.
풍요와 쇠잔 속에서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요.
―「뱀굴 드나들기」 일부
뱀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닿아있다. 성경에서 뱀을 유혹하는 자로 묘사한 것도 이미 이전부터 갖고 있는 인간의 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 때문이다. 뱀은 징그럽다. 그래서 징그러움의 이름이 되고 얼굴이 되었다. 이 징그러움이 아마도 성의 초입을 여는 인간의 영리한 비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죄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저질러야 한다. 죄는 어쨌거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운 짓이다. 이와 기묘하게 같은 꼴을 보이는 것이 성일 것이다. 그도 뱀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묘한 신비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며, ‘무언가’ 알 수 없는 ‘서로의 시공을 공유’해 버린다.
이 ‘뱀굴’은 동물원의 뱀우리이다. 인간은 뱀을 실제로 바라보지 않아도 그저 생각만 하여도 뱀과 만나 얼마든지 교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도록 인간 스스로 수천 년을 훈련시켜 왔다. 성은 변함없이 극대화 상태이고 인류의 생명은 아직 존재 중이다.
순이 아버지는,
밤마다 아들이 군에 간 사이
새 며느리의 방을 찾았단다.
늑대는 달이 떠오르면
달 하나 잡아먹고
어둠 속에서 울부짖고는 했는데,
달이 몇 번 몸을 바꿔치기 하던 어느 날,
요강에 농약을 토해놓은 며느리는
땅속 깊이 숨어버렸단다.
순이 아버지는 날마다
며느리 찾아 산으로 가고,
대낮에도 날뛰는 늑대 한 마리
동네 사람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만 그녀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고 말았단다.
어릴 적 들리던 그 늑대의 울음
달밤이면 가끔 내 머릿속에서 살아나곤 해.
―「늑대의 울음소리」 일부
‘늑대는 달이 떠오르면/달 하나 잡아먹’는다. 늑대에게 이것은 본능이고 자연이다. 그러나 늑대가 인간으로 바뀌는 순간 곧 바로 파렴치한이나 불륜으로 둔갑해 버린다. 인간도 근본적으로는 늑대와 같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점이 가끔은 인간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남몰래 늑대를 만난다. ‘달밤이면’ 가끔 아무도 보지 않는 들판으로 나가 늑대를 기다린다. ‘성’의 얼굴을 ‘뱀’이나 ‘늑대’의 얼굴로 만들어버린 인간의 저의가 무엇이건 간에 결과는 잘 된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잘 되어가는 중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미칠 일 몇 가지쯤 품고 사는 세상.
좀 더 가슴을 열고 바람을 맞다가,
깊이도 모를 물속을 좀 더 오래 들여다보다가,
물속에 비치는 산속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다가,
산자락에 곱게 핀 꽃 한 송이 머리에 꽂고
폭포처럼 악 소리 지르며 뛰어내릴 수도 없어,
그냥 허공에 대고 눈길 손길 마구 꽂아대고 있는 거야.
바람 불어 헝클어진 꽃잎 길가에 구른다.
―「광녀」
‘광녀’는 비정상인이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본능이 가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을 빌릴 필요도 있다. 묘한 것은 ‘광녀’라 해도 죽음은 두렵다는 것이다. 그녀도 폭포에서 뛰어내리지는 않는다. 죽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벗어내고 싶은 껍질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불어’ ‘길가에 구’르는 ‘헝클어진 꽃잎’ 신세가 될 뻔한 운명을 알고 있다. 다시 인간적인 질서 속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4. ‘풀잎’이 되어 혁명적 봄을 꿈꾸다
외줄에 목숨 걸고 빙벽을 오르는 일이
발 푹푹 빠지는 눈밭인 줄도 알지만,
몸도 마음도 만년설 같이
얼어붙을 수 있는 줄도 알지만,
왜 가느냐고 물으면,
길이 있어 가는 거지.
―「완주」 일부
빙벽과 눈밭에서 만년설 같이 얼어붙을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길을 간다. 살아있으니 가는 것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 가는 것이다. 그에게 인생의 길은 춥고 배고픈 저승길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마저도 순종하는 착한 자세로 대응한다.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그가 만들어낸 ‘별’은 다시 ‘풀잎’으로 모습을 바꾼다.
나는 차라리 풀잎처럼 땅 위에 누워 버리고 싶어. 풀잎은 바람이 사나워도 쉽게 넘어지지 않지. 산을 몽땅 밀어낸다 해도 풀잎은 풀잎으로 남아있지. 누구라도 나를 손쉽게 건넜으면 해. 그래서 산보다 더 가파른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면, 풀잎처럼 나는.
―「풀잎처럼 나는」 일부
‘풀잎’ 같은 자애와 용서로 벼랑 같은 사람들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벼랑에 서는 일은 너무도 무섭다. 도저히 땅과 직각으로 서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은 오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풀잎’으로 바꾸어 버린다. ‘풀잎’이 되면 고통도 두려움도 모두 사라지고 바다 같은 넉넉함이 그를 기다린다고 믿는다. 오를 수 없는 산이라면 그 산이 스스로 내게 오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는 밤낮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의 평화는 여성성의 전통적인 고양에 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힘으로는 열등한 존재이지만 그 여성의 여성성이 제 자리를 잡을 때에야 비로소 만물의 운행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반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구름 위로 삼만 개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솟아난다는 계림에 가보았는데요.
산이 아니었어요.
여인네 젖무덤 같은 봉우리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어요.
저렇게 크고 탐스런 젖
하늘이 아니면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서방을 잘 둔 계림은 날마다 젖이 퉁퉁 불어 있는데요.
구름이 젖꼭지를 물었다 놨다 하면서,
이강의 물소리로 잦아들고 있는데요.
가마우지들도 이강에서 잘도 고기를 잡던데요.
아이를 몇이나 낳으면 저런 젖을 갖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하늘 서방 한 번 얻어 볼까요.
퉁퉁 불은 젖을 구름에 흠씬 물려볼까요.
―「계림」
서방이 ‘하늘’이어야 비로소 ‘여인네 젖무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낳고, 하늘 서방이나 얻어야 여성이 진정한 여성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늘 서방이 존재나 하겠는가. 하늘 서방이 없으면 ‘구름이 젖꼭지를 물었다 놨다’도 할 수 없고, ‘이강의 물소리가 잦아들’ 수도 없다. 그러니 그런 꿈의 세상도 그에게는 별 세상에 지나지 않는다.
간밤
어떤 바람이 지나간 것일까.
장미나무 아래 선혈이 낭자하다.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는
붉은 입술.
가지 못한 길에 대하여 묻고 있다.
떨어져 내린
꽃잎 속에 갇힌 바람은
비상구가 없다.
―「상처」
그의 현실적 상처, 특히 여성성의 상실은 ‘비상구가 없’을만큼 절대적이다. 꽃은 한껏 피었다가 시들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긴다. 그것이 꽃의 운명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그러나 바람은 꽃이 한껏 피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항상 바람이라는 적대적 존재와 떨어질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꽃이 꽃으로 피지 못하고 떨어질 때에 그 절망과 슬픔은 극에 달한다. 그 슬픔을 슬픔답게 노래하여 시가 되었다. 우리의 시가, 동시에 그의 「상처」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이다.
그는 꽃의 의미 상실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꽃들은 어떻게 향기를 뿜어낼까.
입술을 붉게 칠해놓아도
말은 검게 쏟아지고,
단단히 비끄러맬 수도
놓아버릴 수도 없어
번번이 들키고 마는,
―「나」 일부
건너편 꽃집 향기나라로 달려간다.
저 날개 무슨 꽃에 앉았을까,
떨어뜨리고 간 나비가루에 눈이 쓰리다.
―「바쁘다 바뻐」 일부
꽃 봐라 꽃 봐라.
산에 들에 서답이 펄럭이고요.
독한 향기에 쏘인 사람들
휘청거리는데,
둥둥 떠가는 꽃잎들의 바다에서
나는 자맥질하고.
―「봄날」 일부
온갖 씨앗을 뿌려 꺼내보곤 하시던
마당 한 켠 꽃밭은 무지갯빛이었다.
나는 어떤 빛깔 어떤 향기였을까.
늘 서열 뒤로 밀리던 백일홍이
이제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아버지의 마당」 일부
꽃은 당당하게 피어야 아름답다. 한껏 피어야 비로소 꽃이다. 어떤 꽃이든 꽃은 자신의 운명대로 한껏 피었다가 시든다. 그러고 나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겨울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한껏 피기도 전에 바람에 날린 꽃이 있다면, 그 꽃이 바로 당신이라면, 그 슬픔의 깊이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이 와도 다른 사람의 봄이요. 향기로운 세상도 나 아닌 누군가의 잔치판이라면 나는 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이른 바 잔인한 4월이 도처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혁명을 꿈꾼다. 그에게 남아있는 희망은 곧 혁명적 봄으로 상승한다. 모든 이들에게 봄은 어떤 의미일까. 봄의 의미가 혁명적이라면 그가 느끼고 있는 겨울의 상대적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엿볼 수 있다. 혁명적인 봄과 폭염 천둥 속의 침몰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이며 평화이며 승리이다.
솜이불을 덮고 있어도
돌아누운 사람의 등은 엄동설한.
뒤척이는 잎새마다 바스락대는
이불깃 소리도 얼어붙는 곳.
그래, 겨우내 별일 없다고 춥지 않다고,
성감대도 움츠러든 가지 위로
풀솜 같은 눈은 내려,
자꾸자꾸 내려
눈부시게 하얀 눈꽃이 활짝.
무엇을 위한 봄이냐고?
저 새싹들
들이댄 송곳으로,
쨍그렁, 깨진 햇살을 골라
그리운 빛깔로 꽃물 들이면,
세상은 볼거리로 가득하고
젖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열매들로
더욱 풍성하겠지.
폭염의 천둥에
팔 하나 다리 하나 내준다 해도,
아플 것이 없는 이 침몰.
―「혁명」
어머니의 꽃밭에 대한 유 시인의 기억은 남다르다. 그래서 그 꽃의 향기는 더욱 강렬하다. 살아있는 한 꽃은 언제든지 보란 듯이 피게 될 것이다. 죽는다 해도 사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시인들은 시를 쓴다. 절망과 죽음의 노래라 할지라도 뒤집으면 희망과 생명의 노래가 된다. 아무쪼록 유혜영 시인의 꽃이 이 땅에 강력하고 아름다운 시의 꽃으로 활짝 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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