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돈과 트리펑을 선택한 옹이(김영희 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 작품해설) 미네르바 201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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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돈과 트리펑을 선택한 옹이
-김영희 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2009년 8월 31일 리토피아 발간)를 읽고
생명이 무한한 존재는 그 무한성으로 인해 사랑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생명이 유한한 존재는 그 유한성으로 인해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고 또한 깊을 수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을 무한한 생명으로 유지시키려는 본능이 그들에게 사랑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한한 존재들에게는 사랑이 그들의 본성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랑이 지극할수록 그의 생명에 대한 신념은 강한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생명체는 그 종의 존재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희의 첫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의 ‘냄시’는 그 생명 추구 신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의 ‘냄시’는 후각적인 언어이지만 동시에 시각적이기도 하고 감각적이기도 하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는 ‘꽃’의 ‘향기’라는 속성이 보다 더 에로틱하고 보다 더 강렬한 언어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의 꾸밈이 없는 소박함과 생에 대한 진지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가져온 시어이며, 생명체의 본성에 확실한 접근이 이루어져 있다는 징후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참는 성격이 아니고, 내지르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감추는 성격이 아니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성격이나 자세는 일찍이 그의 본성 속에 숨겨져 있었을 뿐이며, 그가 시를 시작하기 전에는 별 다른 표출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자세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그의 삶은 그에게 무한한 인내와 고통을 주었다는 흔적이 시집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제보다 진통제가 더 잘 나간다는 민약국
골목에 줄줄이 앉아있는 아낙들
절이고 말린 보따리 봉지봉지 펼쳐놓았다.
촌두부 이천 원 청국장 이천 원,
무말랭이 시래기 깻잎장아찌 삼천 원,
어디에선가 본 듯
손대중으로 담은 삶의 무게들이 고만고만하다.
속내 다 꺼내놓고
명태처럼 덕장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빈 생을 살아온 여인들
굴묵허리 내걸린 시래기 같이
한 줌 햇살에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생
사리돈이 필요하다.
-「사리돈이 필요하다」
사리돈이 늘상 필요한 그의 고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이야 상황이 달라지기는 하였으나 강원도 홍천은 외진 곳이다. 예전 시절에는 아마 더 심했을 것이다. 도시 사람들이 ‘영양제’로 보다 나은 건강한 인생을 꿈꾸고 있을 때, 이곳 사람들은 ‘진통제’로 삶의 고통을 다스려야 했다. ‘삶의 무게’가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무게’는 대단히 가볍다. ‘시래기’처럼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빈 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우리네 삶의 문화, 여성들의 생존방식과 사회적 인식에 대해 불만이 많다. 그러나 그가 그런 점이 불만이어서 탈출하자거나 바꾸어보자고 소리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삶 속에서 사리돈이 필요한 욕구불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그에게 그만의 생명성을 재창조해내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이런 시골의 정서는 모두가 돌아가고자 하는 한국적 고향의 정서이다. 그런데 그는 그 고향에서 사리돈이 없으면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사리돈이 필요한 가슴이 그의 변화의 진원지이며 시가 쓰여지는 원천이다. 사리돈으로 치유하려는 그의 두통이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생명 에너지를 불러오는 신호가 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사리돈을 먹어야 사는 이유는 다음 시에도 나타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874번지.
증조할아버지 지게를 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아들인 번지.
아버지 삼촌 고모 우리 자매 줄줄이 탯줄을 묻고
걸음마를 배운, 지금은 없는 번지.
문설주마다 메주 냄새 쌓여가던 묵은 기와집
그을은 구들장으로 묻힌 번지.
묵은 고추장 된장처럼 맵고 짠 세상
아버지에게 일러준 번지.
비탈밭으로 남은 뒤안길
아린 아픔으로 남아있던 지금은 사라진 번지.
아들 같은 윤씨 농협대출 보증 서주고
아버지 한밤중 문밖으로 나앉던 번지.
제삿상에 오르던 시루편처럼 칼금 그어
낯선 이름 달아준 지금은 없는 874번지.
평생 호미질로 닳아버린 어머니 지문처럼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번지.
옹이진 가슴 불 속에 태워 한 줌 가루로 남은 아버지
물 위 한 걸음 내딛다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 번지.
꿈길에도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없는 번지.
내 안에 옹이 많은 비목으로 남아있는 번지.
-「군업리 874번지」
그의 가족사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픔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정도의 시골생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시골의 농경생활은 누구에게나 힘이 들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빚보증으로 집도 땅도 잃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모내기 시절이면 다 닳아 없어진 어머니 손톱 훔쳐보며 가슴 아프지 않았던 사람이 없다. 가을이면 나락 훑느라 여기저기 갈라져 피가 흐르는 어머니 손바닥이나 손가락 사이를 훔쳐보며 애틋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게다가 그의 집은 ‘문설주마다 메주 냄새 쌓여가던 묵은 기와집’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부유한 형편임이 엿보이는 구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은 ‘없는 번지’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의 아프거나 행복했던 모든 기억들이 이 집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점이다. 농협대출 보증 서주고 집을 내어주었던 아버지도 사라지고, 평생 호미질로 지문이 사라진 어머니 역시 지금은 안 계시다는 점이다. 이 ‘사라짐’으로 하여 그에게 유년의 모든 기억들이 아프게 되살아난 것이고, 가슴 속에 묻어둔 이 아픔들이 뭉쳐서 ‘옹이’로 변해버렸다.
이 ‘옹이’ 또한 그녀에게 사리돈이 필요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선에 걸려든 모든 것에 그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보다 더 나은 삶과 인생을 추구하려는 그의 꿈과 맞물려 아픔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 아픔이 끝내는 옹이가 되고, 그가 또는 그들이 사리돈을 먹어야만 살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산 조상보다 죽은 조상 대하는 날이 더 많은’ ‘나는 지금 나를 지우고 있는 중, 서서히 얽힌 감정이 풀린다.(「얼룩」)’ 그의 시선은 사람들과 가족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보다 주변 사람들의 생을 더 챙기며 살았거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워야만 세상이 더 아름다웠으며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가장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겪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삶을 다독여왔다. 그러자 그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옹이가 아니고, 세상의 옹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와 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궁극적으로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며,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치료약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말들도 소화가 필요하다. 거르지 않은 자싯물들이 수챗구멍을 막듯 말들도 망으로 걸러 내보내야 하는 걸. 늘 흘려버리던 말들이 생선가시처럼 내 목을 막았다. 꼭꼭 씹어 삼킬수록 역류해 올라오는 말들. 흘려보냈다고 생각한 것들이 내 안에 고여 썩어가고 있었던 것을. 어디쯤에서 막혔을까. 막힌 곳이 어디일까. 무슨 말이 막혔을까. 웬만한 것들은 그대로 흘려버린 것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앙금으로 가라앉아 명치끝에 걸려있는지 모른다. 걸린 곳을 찾자면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흩어진 기억들을 더듬어야 할까. 닦고 기름 치면 원래대로 조립될까. 괜한 일거리만 늘어나겠지. 막힌 곳은 무엇이든 해결한다는 과장 광고. 믿기지는 않지만 한껏 벌린 입속에 트리펑을 부어본다.
-「변기」
하고 싶은 말, 그러나 할 수 없는 말, 그는 그의 고통의 진원지를 통제하면서 말을 삼킨다. 아무리 뱉어내도 다시 역류하여 올라온다. 그러나 뱉어내야 한다. 뱉어내지 않으면 어딘가에 고이고 막혀서 썩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는 항상 뱉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그의 본능에 가깝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화불량, 막힌 곳을 알 수 없는 체기, 아무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아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결국 소화불량의 말들을 토해내기 위해 그는 입 속에 서슴없이 ‘트리펑’을 부어넣는다. 일종의 사리돈이며 극약처방이다.
이것이 그의 시를 쓰는 자세이다. 그래서 시를 쓰면서도 그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옹이를 도려낸다 해도 그것은 생 살점을 도려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살점을 도려낸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시적 용기는 대단하다. 큰 시를 쓰기 위해서 작은 아픔을 감내하는 그의 시적 정신에 아직은 찬사를 보낸다.
문 닫은 이발소 앞
정류장 이정표 아래 민들레가 피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완행인지 직행인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며,
앉았다 일어섰다 서성이다가 이정표에 기대어
민들레처럼 앉았다.
민들레 속으로 노을이 지고,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땅거미 끌고 오는 어둠 속에
불이 켜지지 않은 이발소의 간판이 되어,
어두워진다.
민들레는 어두워진 이정표 아래
기다림의 한 끝을 보여주고 있다.
길의 한 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길의 저편으로 달려간 곳.
불빛 들어오지 않는 이발소 간판 아래
나를 추켜세운 민들레처럼 앉아
언제 올지 모를 막차를 기다린다.
-「정류장에서」
‘문 닫은 이발소 앞’의 ‘정류장 이정표 아래’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를 기다리며’ 피어있는 민들레. 이런 모습도 그의 것이다. ‘솔방울들 매단 늙은 소나무/생가지 부러진 자리 송진이 흐른다./상처는 겉으로 드러내면 아물지 않는다고,/긴 세월 많은 부대낌들 옹이로 굳으면/다져진 상처 관솔이 될 거라고,/앙다문 네 삶 한 번쯤은 타오를 거라고,(「탯줄」)’ 굳게 이를 악물면서 그의 관솔불 활활 타오르기를 고대한다.
-김영희 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2009년 8월 31일 리토피아 발간)를 읽고
생명이 무한한 존재는 그 무한성으로 인해 사랑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생명이 유한한 존재는 그 유한성으로 인해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고 또한 깊을 수밖에 없다. 유한한 생명을 무한한 생명으로 유지시키려는 본능이 그들에게 사랑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한한 존재들에게는 사랑이 그들의 본성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랑이 지극할수록 그의 생명에 대한 신념은 강한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생명체는 그 종의 존재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영희의 첫시집 저 징헌 놈의 냄시의 ‘냄시’는 그 생명 추구 신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의 ‘냄시’는 후각적인 언어이지만 동시에 시각적이기도 하고 감각적이기도 하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는 ‘꽃’의 ‘향기’라는 속성이 보다 더 에로틱하고 보다 더 강렬한 언어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의 꾸밈이 없는 소박함과 생에 대한 진지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가져온 시어이며, 생명체의 본성에 확실한 접근이 이루어져 있다는 징후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참는 성격이 아니고, 내지르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감추는 성격이 아니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성격이나 자세는 일찍이 그의 본성 속에 숨겨져 있었을 뿐이며, 그가 시를 시작하기 전에는 별 다른 표출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자세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그의 삶은 그에게 무한한 인내와 고통을 주었다는 흔적이 시집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제보다 진통제가 더 잘 나간다는 민약국
골목에 줄줄이 앉아있는 아낙들
절이고 말린 보따리 봉지봉지 펼쳐놓았다.
촌두부 이천 원 청국장 이천 원,
무말랭이 시래기 깻잎장아찌 삼천 원,
어디에선가 본 듯
손대중으로 담은 삶의 무게들이 고만고만하다.
속내 다 꺼내놓고
명태처럼 덕장에 매달려 얼었다 녹았다.
빈 생을 살아온 여인들
굴묵허리 내걸린 시래기 같이
한 줌 햇살에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생
사리돈이 필요하다.
-「사리돈이 필요하다」
사리돈이 늘상 필요한 그의 고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이야 상황이 달라지기는 하였으나 강원도 홍천은 외진 곳이다. 예전 시절에는 아마 더 심했을 것이다. 도시 사람들이 ‘영양제’로 보다 나은 건강한 인생을 꿈꾸고 있을 때, 이곳 사람들은 ‘진통제’로 삶의 고통을 다스려야 했다. ‘삶의 무게’가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무게’는 대단히 가볍다. ‘시래기’처럼 ‘물기 빠지며’ ‘말라가는’ ‘빈 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우리네 삶의 문화, 여성들의 생존방식과 사회적 인식에 대해 불만이 많다. 그러나 그가 그런 점이 불만이어서 탈출하자거나 바꾸어보자고 소리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삶 속에서 사리돈이 필요한 욕구불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그에게 그만의 생명성을 재창조해내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이런 시골의 정서는 모두가 돌아가고자 하는 한국적 고향의 정서이다. 그런데 그는 그 고향에서 사리돈이 없으면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사리돈이 필요한 가슴이 그의 변화의 진원지이며 시가 쓰여지는 원천이다. 사리돈으로 치유하려는 그의 두통이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생명 에너지를 불러오는 신호가 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사리돈을 먹어야 사는 이유는 다음 시에도 나타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 874번지.
증조할아버지 지게를 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아들인 번지.
아버지 삼촌 고모 우리 자매 줄줄이 탯줄을 묻고
걸음마를 배운, 지금은 없는 번지.
문설주마다 메주 냄새 쌓여가던 묵은 기와집
그을은 구들장으로 묻힌 번지.
묵은 고추장 된장처럼 맵고 짠 세상
아버지에게 일러준 번지.
비탈밭으로 남은 뒤안길
아린 아픔으로 남아있던 지금은 사라진 번지.
아들 같은 윤씨 농협대출 보증 서주고
아버지 한밤중 문밖으로 나앉던 번지.
제삿상에 오르던 시루편처럼 칼금 그어
낯선 이름 달아준 지금은 없는 874번지.
평생 호미질로 닳아버린 어머니 지문처럼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번지.
옹이진 가슴 불 속에 태워 한 줌 가루로 남은 아버지
물 위 한 걸음 내딛다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 번지.
꿈길에도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없는 번지.
내 안에 옹이 많은 비목으로 남아있는 번지.
-「군업리 874번지」
그의 가족사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픔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정도의 시골생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시골의 농경생활은 누구에게나 힘이 들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빚보증으로 집도 땅도 잃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모내기 시절이면 다 닳아 없어진 어머니 손톱 훔쳐보며 가슴 아프지 않았던 사람이 없다. 가을이면 나락 훑느라 여기저기 갈라져 피가 흐르는 어머니 손바닥이나 손가락 사이를 훔쳐보며 애틋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게다가 그의 집은 ‘문설주마다 메주 냄새 쌓여가던 묵은 기와집’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부유한 형편임이 엿보이는 구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은 ‘없는 번지’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의 아프거나 행복했던 모든 기억들이 이 집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점이다. 농협대출 보증 서주고 집을 내어주었던 아버지도 사라지고, 평생 호미질로 지문이 사라진 어머니 역시 지금은 안 계시다는 점이다. 이 ‘사라짐’으로 하여 그에게 유년의 모든 기억들이 아프게 되살아난 것이고, 가슴 속에 묻어둔 이 아픔들이 뭉쳐서 ‘옹이’로 변해버렸다.
이 ‘옹이’ 또한 그녀에게 사리돈이 필요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선에 걸려든 모든 것에 그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보다 더 나은 삶과 인생을 추구하려는 그의 꿈과 맞물려 아픔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 아픔이 끝내는 옹이가 되고, 그가 또는 그들이 사리돈을 먹어야만 살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산 조상보다 죽은 조상 대하는 날이 더 많은’ ‘나는 지금 나를 지우고 있는 중, 서서히 얽힌 감정이 풀린다.(「얼룩」)’ 그의 시선은 사람들과 가족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보다 주변 사람들의 생을 더 챙기며 살았거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워야만 세상이 더 아름다웠으며 평화로웠다.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가장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겪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삶을 다독여왔다. 그러자 그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으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옹이가 아니고, 세상의 옹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와 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궁극적으로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며,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치료약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말들도 소화가 필요하다. 거르지 않은 자싯물들이 수챗구멍을 막듯 말들도 망으로 걸러 내보내야 하는 걸. 늘 흘려버리던 말들이 생선가시처럼 내 목을 막았다. 꼭꼭 씹어 삼킬수록 역류해 올라오는 말들. 흘려보냈다고 생각한 것들이 내 안에 고여 썩어가고 있었던 것을. 어디쯤에서 막혔을까. 막힌 곳이 어디일까. 무슨 말이 막혔을까. 웬만한 것들은 그대로 흘려버린 것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앙금으로 가라앉아 명치끝에 걸려있는지 모른다. 걸린 곳을 찾자면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흩어진 기억들을 더듬어야 할까. 닦고 기름 치면 원래대로 조립될까. 괜한 일거리만 늘어나겠지. 막힌 곳은 무엇이든 해결한다는 과장 광고. 믿기지는 않지만 한껏 벌린 입속에 트리펑을 부어본다.
-「변기」
하고 싶은 말, 그러나 할 수 없는 말, 그는 그의 고통의 진원지를 통제하면서 말을 삼킨다. 아무리 뱉어내도 다시 역류하여 올라온다. 그러나 뱉어내야 한다. 뱉어내지 않으면 어딘가에 고이고 막혀서 썩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는 항상 뱉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그의 본능에 가깝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화불량, 막힌 곳을 알 수 없는 체기, 아무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아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결국 소화불량의 말들을 토해내기 위해 그는 입 속에 서슴없이 ‘트리펑’을 부어넣는다. 일종의 사리돈이며 극약처방이다.
이것이 그의 시를 쓰는 자세이다. 그래서 시를 쓰면서도 그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옹이를 도려낸다 해도 그것은 생 살점을 도려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살점을 도려낸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시적 용기는 대단하다. 큰 시를 쓰기 위해서 작은 아픔을 감내하는 그의 시적 정신에 아직은 찬사를 보낸다.
문 닫은 이발소 앞
정류장 이정표 아래 민들레가 피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완행인지 직행인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며,
앉았다 일어섰다 서성이다가 이정표에 기대어
민들레처럼 앉았다.
민들레 속으로 노을이 지고,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땅거미 끌고 오는 어둠 속에
불이 켜지지 않은 이발소의 간판이 되어,
어두워진다.
민들레는 어두워진 이정표 아래
기다림의 한 끝을 보여주고 있다.
길의 한 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길의 저편으로 달려간 곳.
불빛 들어오지 않는 이발소 간판 아래
나를 추켜세운 민들레처럼 앉아
언제 올지 모를 막차를 기다린다.
-「정류장에서」
‘문 닫은 이발소 앞’의 ‘정류장 이정표 아래’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를 기다리며’ 피어있는 민들레. 이런 모습도 그의 것이다. ‘솔방울들 매단 늙은 소나무/생가지 부러진 자리 송진이 흐른다./상처는 겉으로 드러내면 아물지 않는다고,/긴 세월 많은 부대낌들 옹이로 굳으면/다져진 상처 관솔이 될 거라고,/앙다문 네 삶 한 번쯤은 타오를 거라고,(「탯줄」)’ 굳게 이를 악물면서 그의 관솔불 활활 타오르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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