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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의 존중에서/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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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338회 작성일 02-06-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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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은 생명의 존중에서
--절망 속에서도 참회와 신앙심으로 다시 사는 사형수들
(박삼중의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


우리는 책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한정된 세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제한된 일상적 체험만으로는 보다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읽는 행위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지적 욕구로써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다. 책을 통해 얻는 타인의 경험적 세계는 픽션의 형식을 통한 상상의 체험일 수도 있지만, 논픽션으로 보다 더 리얼하게 다가오는 특별한 세계일 수도 있어서, 그것은 간혹 우리를 놀라운 세계나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논픽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바는 새롭고 특별한 세계인 동시에 타인의 진실하고 인간적이며 감동적인 세계이다. 이 세상의 어떤 그림도 자연의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자연 그대로 그려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어떤 픽션도 한 인간의 사실 그대로의 인생을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감동 그대로 표현해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논픽션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인화에서 발간된 박삼중 스님의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논픽션에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절대적 상황에서의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물론 그동안 저자가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하여 이 사형수들의 간절하고 애절한 상황을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 책에서처럼 구성을 갖춘 이야기로서 보다 더 감동적으로 그들의 실상을 표현한 책은 없었다. 그는 수천 통에 이르는 사형수들의 간절한 편지를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그들과 함께 있었던 다른 재소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또한 교도소 주변을 떠나지 않는 그들 가족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 책을 묶었다.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죄의 대가는 무엇이고, 그보다 그들은 정말 모두가 죄를 지었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거의 30여 년간을 교도소에 드나들면서 재소자들과 고락을 같이해온 저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그는 특히 사형수들의 벗이요, 대변자로서 그들로부터는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살아있는 부처로 숭앙을 받고 있다. 그는 음지의 극한적 상황에서 죄에 대한 엄정한 반성과 생에 대한 간절한 몸부림으로 마지막 생의 순간을 버텨가는 그들에게 새로운 종교적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인간은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상황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무한한 절대자 앞에서 이 유한한 존재는 한없이 초라하다. 종교인이 교도소를 찾는 이유는 종교의 힘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특히 종교인들이 사형수들을 만나는 이유는 그들에게 두려움이 사라진 죽음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명의 재소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부분이 장기수들로서 개중에는 사형수도 포함되어 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사형수 김진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교에 몸담고 있는 저자를 간절하게 찾았다. 그것은 인간이 생과 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점에 이르면 종교의 차이조차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인물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무참하게 살해한 패륜아였지만, 이미 독실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참회를 거듭하여 속죄의 길을 걷고 있다. 죄는 밉지만 그 죄를 불러온 여건 또한 바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를 감형시키려는 구명운동이 저자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불행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 불행을 불러오는 전기는 지극히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불치병인 것으로 잘못 알고 인생을 포기해 버린 사형수가 바로 육근성이다. 그러나 그의 불치병은 오진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요리하거나 결정할 수도 없다. 하물며 타인이 어떻게 타인의 목숨을 결정지을 수가 있는가. 비록 그가 사람의 목숨을 해친 살인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도 그의 생명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저자는 오래 전부터 '교도소 폭파론'을 주장하며 사형제도의 폐지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17년의 옥살이가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최재만이라는 인물은 고문으로 인해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상고 이유서를 썼다. '의사의 오진이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듯이 법관의 오판은 한 인간을 파멸시키고 그 가족까지도 죽을 때까지 불명예 속에서 살게 만듭니다. 진정 한 번 더 살피시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의 무고함을 확신한 저자는 구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을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무고한 그가 당장이라도 석방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법이란 전체의 선량한 사람들을 위한 필요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전체이며 곧 우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서문을 통해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고 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재판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형을 선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수사기관인 경찰이나 검찰에게도 함부로 사람을 고문하지 말고 사건을 조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건을 조작하여 그들을 사형집행장으로 내몬다 하여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도 한국적 현실은 인권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탈옥수가 전국을 휘젓고 다니자 반반으로 분열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는 국민적 정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다년간 무고한 재소자들의 재심과 감형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로 이 극복할 수 없는 어렵고 한심한 현실에 부닥쳐 탄식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권력이라는 강자와 동일하다. 이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사실 너무도 초라하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이 법의 거미줄에 걸려 들지 모르는 불안하고 두려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결국 법은 사회악을 응징하기 위한 정의의 힘이 아니라 약자들을 제압하고 협박하기 위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범죄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전체가 혼탁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먼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범죄자를 줄이고 법의 그물을 함부로 던져서 백성을 모조리 그물질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집필 의도는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에 빠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합리적인 방법을 버리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면 그 순간 그는 바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 사형수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을 중시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우리 모두가 타인의 생명을 진정으로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안다면 이 사회는 분명 밝은 사회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진실한 참회와 속죄는 그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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