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8-손현숙 시 휘묻이
페이지 정보

본문
손현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평사리문학상 수상.
휘묻이
휘묻이,
휘묻이로 휘어지고 싶은 밤
소용돌이 사물들은 칠흑 속에 세워두고
아슬아슬 줄타기엔 밤이 너무 깊다
보이는가,
그대 나를 보고 있나
은밀한 움직임에도 별빛은 소스라친다
애쓰면 애쓸수록
뿌리는 다음 생을 모색하고
땅에서 땅으로 휘아지는 불꽃,
누가 잘라다오, 내 허리를
부디
―손현숙 시집 손에서
감상
생명체라면 한 생을 다한 후에 번식을 위해 씨앗을 남긴다. 이 씨앗을 틔워 자기 존재의 영생을 꾀한다. 건강하고 힘있게 번성한 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나서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씨앗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명체의 존재 방식이다. 한 번의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싹이 나서 한 번 어른으로 자라고 단 한 번 꽃을 피워 씨앗을 남긴다는 생명의 존재방식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별로 저항할 생각도 없이 순응한다. 저항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다가 불을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휘묻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하나의 뿌리에 지탱하여 적당히 자라다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고 사라지면 그만인 인생이 너무 단조롭다. 단 한 번 내린 뿌리로 한 번의 꽃을 피우고 사라진다면 너무나 억울하다. 소멸되지 않고 다시 살 수는 없을까. 현재의 내 존재가 소멸되기 전에 다시 살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자연스러운 내 유전자의 유지가 문제가 아니라 분명하게 존재하며 실재하는 나 자신의 우주 문제이다. 내가 소멸되기 전에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꽃이 피기 전에 가지를 땅에 묻고 다시 한 번 뿌리를 내리고 싶다. 원치 않았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내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새로운 땅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뜨겁게 사랑해보고 싶다. 이것이 휘묻이의 흙을 향한 재생의 뜨거운 본능이며 몸부림이다. 생명체의 가장 강인한 부활을 향한 염원이다. 자연의 숙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위대한 반역이며 도전이다. 어쩔 수 없는 상실과 절망의 그늘에서 부활을 위해 쏘아올리는 강렬한 에너지의 화살이 동시에 생명체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다./장종권(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평사리문학상 수상.
휘묻이
휘묻이,
휘묻이로 휘어지고 싶은 밤
소용돌이 사물들은 칠흑 속에 세워두고
아슬아슬 줄타기엔 밤이 너무 깊다
보이는가,
그대 나를 보고 있나
은밀한 움직임에도 별빛은 소스라친다
애쓰면 애쓸수록
뿌리는 다음 생을 모색하고
땅에서 땅으로 휘아지는 불꽃,
누가 잘라다오, 내 허리를
부디
―손현숙 시집 손에서
감상
생명체라면 한 생을 다한 후에 번식을 위해 씨앗을 남긴다. 이 씨앗을 틔워 자기 존재의 영생을 꾀한다. 건강하고 힘있게 번성한 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나서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씨앗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명체의 존재 방식이다. 한 번의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싹이 나서 한 번 어른으로 자라고 단 한 번 꽃을 피워 씨앗을 남긴다는 생명의 존재방식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별로 저항할 생각도 없이 순응한다. 저항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다가 불을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휘묻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하나의 뿌리에 지탱하여 적당히 자라다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고 사라지면 그만인 인생이 너무 단조롭다. 단 한 번 내린 뿌리로 한 번의 꽃을 피우고 사라진다면 너무나 억울하다. 소멸되지 않고 다시 살 수는 없을까. 현재의 내 존재가 소멸되기 전에 다시 살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자연스러운 내 유전자의 유지가 문제가 아니라 분명하게 존재하며 실재하는 나 자신의 우주 문제이다. 내가 소멸되기 전에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꽃이 피기 전에 가지를 땅에 묻고 다시 한 번 뿌리를 내리고 싶다. 원치 않았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내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새로운 땅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뜨겁게 사랑해보고 싶다. 이것이 휘묻이의 흙을 향한 재생의 뜨거운 본능이며 몸부림이다. 생명체의 가장 강인한 부활을 향한 염원이다. 자연의 숙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위대한 반역이며 도전이다. 어쩔 수 없는 상실과 절망의 그늘에서 부활을 위해 쏘아올리는 강렬한 에너지의 화살이 동시에 생명체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다./장종권(시인)
- 이전글내가 즐겨 읽는 시(범우사)-김구용 시 10.12.28
- 다음글독서신문7-허형만 시 편지 11.03.0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