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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백인덕/‘꽃날’과 ‘칼잎’으로 자른 시 : ‘사이’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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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922회 작성일 14-03-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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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날’과 ‘칼잎’으로 자른 시 : ‘사이’의 유령들
백인덕|시인
 
1.
시적 발화는 특수한 제약 아래에서만 자격과 의미를 부여받는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역으로 ‘어느 것도 실행할 수 없다’는 상황을 함축한다. 일반적 정의로 보면, 앞의 가능성은 특정되지 않았으므로 잠재태일 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에서 가능태는 될 수 없다. 따라서 뒤의 실행으로 전환될 수 없다. 시적 상황으로 이해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앞의 명제가 참으로 증명될 수 있다. 하나는 발화된 결과로서의 시가 언제나 발화자의 의도를 비껴가게 된다는 것이다. 기입과 해석의 간극이 넓은 모든 기호의 운명이 이와 같다. 다른 하나는 현대시의 특징으로서 야유나 슬로건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시적 발화가 의미의 관계망, 즉 해석의 장場안에서 단순히 하나의 기법으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두 경우 다, 시인의 본래 의미보다는 해석의 편의성, 효용성에 좌우된다는 문제가 드러난다.
 
장종권 시인의 이번 시집 호박꽃 나라는 현대 시적 사유의 특징적 경향 중 하나인 ‘알레고리’에 기반 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서는 알레고리란 다른 것을 말함이라는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게 사용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다른 것을 말함’이라고 할 때 다른 것은 가령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는 ‘꽃’이 사물로서의 꽃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것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알레고리의 이러한 일의성一意性이 교훈성, 나아가 현실비판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꽃’과 ‘칼’이 이번 시집 도처에서 알레고리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번 시집에서는 각 장마다 시인 내면에 깊게 웅크렸던 ‘유령’들이 독특한 명제적 진술을 쏟아내며 출몰한다. 비약이지만 이 유령들에 이름을 붙여보면 ‘자연-적응-분별-포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유령들은 변신에 능숙하므로 여러 형상이나 양상으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짐작케 한다. 변명 하나를 덧붙이자면, 시인의 시력과 그간의 시적 성취를 염두에 둘 때 이번 시집의 구성적 특성에 따라 각 장의 특질을 살펴보는 것이 옳은 독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유령들의 품계를 알 수 없는 필자로서는 구조적 안정감을 버리고 시인의 안내에 따라 각 장을 순차적으로 목도目睹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2.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의미의 변동 없이 새로운 형상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생전 처음인 듯싶은 경악과 전율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하다’, ‘본래 그것’이라는 축어적 의미를 갖는다. 이를 동사로 바꿔보면 ‘모든 것은 본래 그대로 돌아간다’로 의역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속성을 다시 한 번 정의해 보자. 자연은 무자비no-mercy하고, 기다려주지 않으며no-wait, 결코 후회하지 않는no-regret다. 이런 잔인성은 시인들에게 예찬만큼이나 강한 부정의 시를 쓰게 했다.
 
미래가 있거나 말거나, 꿈을 꾸거나 말거나,
바다가 놀거나 말거나, 갈매기가 지치거나 말거나,
그의 눈처럼 캐낸 생굴을 반찬 삼아 아침상을 차린다.
-「생굴밥상」부분
 
그래도 우리는 매일매일 가슴에서 밥을 꺼내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밥은 먹어도 소용이 없는 밥이었네.
참말이지 보름달은 보름도 못산다네.
-「요즘의 달」부분
 
배춧잎에 배추벌레 일일이 잡아내던 시절도,
상추잎에 벌레길 이리저리 뜯어내던 시절도,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것이 싱그러운 입맛이라.
알고 보면 아버지의 아버지 되는 가르침이었으니,
배추꽃이 다 지도록 텃밭을 버려두지는 말라는.
-「아버지의 집」부분
 
앞 인용 작품들을 통해서 하나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생굴’이 “갯펄에서 막 캐낸” 것이면서 ‘눈(살아있는 굴)’으로, ‘반달’이 하늘의 달이면서 계량적 시간으로서 반달이 되는 것, ‘고추꽃’, ‘오이꽃’, ‘가지꽃’이 지고나면 ‘고추 열매’, ‘가지 열매’, ‘오이 열매’가 맺히는 것 등이 ‘싱그러운 입맛’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이번 시집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동음이의어를 사용해 시적 의미를 강화하려는 기법의 측면보다 더 깊은 전략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종권 시인이 폭압적으로 느끼는 자연은 말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행위로서 너무나 관습화된 그래서 자연이라고 느끼고 마는 우리의 행위들이다. ‘밥’을 먹는 행위는 생명유지라는 측면에서 지극히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하나의 의식儀式이 되었을 때 우리는 밥을 못 먹게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 나아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즉 유령과 함께 허겁지겁 밥을 쫓아다니게 된다.
자연이 아닌 것을 자연으로 믿게 되는 상황은 몸을 떠나 행위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리는 소리마다 얼굴이 달라서/다만 없는 듯이 시늉하는 것”(「꽃의 비명」)이 오늘의 현상이다. 이것은 또한 “동문서답이 아름다운 이유는/그것이 답이라고 믿는 각자의 철학”(「강아지나라․1」)만을 횡행하게 한다. 만약 이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진행됐다면, 다음의 시적 발화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으로 결코 그 울림을 갖지 못할 것이다.
 
소리도 죽을 줄을 알아야 다음 소리가 생명을 얻는다.
오래도록 살아있는 소리라야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소리가 다음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 죽어 다시 다음 소리를 만들어야
소리가 소리 되어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소리 되는 소리」 부분
 
소리가 언어의 음성적 요소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을줄 아는 소리, 자기의 죽음을 통해 ‘다음 소리가 생명을 얻’게 하는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시인은 작품 「을왕리」의 각주에서 “성한 것의 출발은 미세한 꿈틀거림으로부터이다”라는 명제를 보여준다.
 
모두에게 실존인 사춘기가 그녀에겐 아직 미지의 세계이다.
본능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를 삼키겠지만
그녀의 온몸에 불을 지르고 종내는 태워버리겠지만
그녀는 아직 양수에 잔뜩 젖어있는 습지의 싹이다.
사춘기가 신앙인 종교의 신념으로는
사춘기가 아닌 그녀를 절대로 정복하지 못한다.
사춘기가 아닌 그녀에게 사춘기인 내가 오늘
맨발로 쫓아가며 하늘을 가린다. 나를 가린다.
어둠 속에서도 너를 볼 수 있다.
어둠 속에 나를 감추고 너의 얼굴 본다. 부끄러워.
-「호박꽃 나라·6」 부분
 
시인은 기억의 기능, 역할에 대해서도 하나의 명제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일이 반성하는 일보다 많아야 한다는/사는 일도 죽은 일도 대충은 아름다워야 한다”(「기억의 기차」)고 말이다. 하지만 기억은 ‘미세한 꿈틀거림’이 되기에는 너무 강하다. 그것은 미지가 아니라 기지旣知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실존인 사춘기가 그녀에겐 미지의 세계”라는 한 행에서 ‘그녀’가 ‘종교의 신념’으로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의 다른 이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자연이 유령처럼 시인의 곁에 있는 것은 ‘사춘기가 아닌 그녀/사춘기인 나’의 대비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어둠, 즉 부자연스러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시인 자기에 대한 부끄러운 자기 인식 때문일 것이다.
 
진화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적응이 얼마나 유용한 생존전략인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모든 생명이 자기 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면, 왜 적응이 하나의 유령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
 
비가 내리면 새들은 잠을 잔다.
이런 날 사냥을 나가면 날개를 다치기 십상이다.
벌레들도 모조리 깊숙이 숨어들어 찾을 길이 없다.
비가 길어지면 어린 새끼들은 허기에 지쳐 까무러치기도 한다.
젖은 나뭇잎, 젖은 나무껍질, 십을 수만 있다면 조금은 낫다.
공치는 날의 서러움은 잠이 들어도 악몽이 된다.
비가 개어도 새들은 아픈 잠을 자야 한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벌레들은 보이지 않는다.
푸릇한 나무를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약을 쳐대고,
벌레들은 씨가 말라 사라진지 오래이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신선하고, 숲은 싱싱하다.
지친 날개 오무리고 잠이 든 새들만이 참담하다.
-「새들은 언제나 아픈 잠을 잔다」 전문
 
장종권 시인은 새들이 아픈 잠을 자야만 하는 이유를 두 개의 원인으로 분리해서 보여준다. 하나는 ‘비’라는 자연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약’이라는 인간적 행위다. 이러한 대비는 적응의 비정성非情性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행위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을 환기한다. 어쩌면 시인이 꿈꾸는 시간이란 “사춘기 아닌 봄은 없고 봄이 아닌 계절도 없다./누구나 사춘기이며 일년 내내 꽃 피는 봄”(「봄의 나라·1」)이고, 그의 적응이란 순간순간이 “눈에 보이지 않게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만진다.(중략)/찾으려면 없다. 만지려면 없다. 소리도 없다./없는 그가 눈을, 코를, 귀를, 자꾸 만지고 다”니는 것처럼 무의지적으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또 녹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적응은 무의지, 무의식을 자연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것 자체로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그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시인의 알레고리 수법과 정신이 잘 드러난 다음 작품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 다른 사람이 나는 다르겠지.
그 옆집에 냉면집을 또 내어본다.
마찬가지이다. 문 앞이 깨끗하다.
약이 올라 주인도 줄 끝에 붙어서 냉면을 시켜본다.
이게 웬 맛이냐. 지날 같네. 그의 생각이다.
개점 때보다 한참이나 못한 냉면 맛이지만
그 집 앞에는 오늘도 기다란 줄이 서 있다.
이 동네 입맛이 되어버린 까닭 때문이다
-「베스트 셀러」부분
 
우리는 무섭도록 한 가지 만을 기억하려 애쓴다. “이 동네의 입맛”이 되어버린 최초의 냉면집.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작품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처음의 냉면집이 성공한 이유는 그것이 최신이거나 아니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그 다음 냉면집의 실패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다만, 이러한 우리의 적응이 완전히 비자연적이며 그 어떤 본래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머니 나라의 순이가 순이가 아니었으면
아버지 나라의 철이가 철이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에는 개나리꽃도 봉숭아꽃도 진달래꽃도
씨 뿌리지 못했다. 영영 피지도 못했다.
-「봄의 나라·3」부분
 
제아무리 춘추필법이어도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역사는 歷史가 아니고 歷事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는 것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앞으로도 재미있게 계속될 것이다.
-「歷史는 歷事」 부분
 
이번 시집을 통해 확인하게 된 장종권 시인의 시어사용의 특징 하나는 시어의 본래 의미에 덧붙여 어조를 강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반어적 느낌을 생성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시인이 완강하게 긍정적인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고, 이 글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러운 적응’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3.
분별은 분리와 다르다. 전체를 부분들로 나눠 진열하는 것이 분리라면, 분별은 분리하면 그 자체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부분들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을 뜻한다. 나의 사지四肢는 나의 일부분이지만 나와 분별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종권 시인은 이번 시집의 세 번째 유령으로서 분별, 아니 끊임없이 무엇이든 갈라 세우려는 우리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등장시킨다.
 
애시당초 태생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혈통 관리에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통이 없는 것은 특별히 더 잔인해진다는 것이다. 전사가 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감을 보면 결사적으로 덤빈다는 것이다. 한 번 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이를 챙겨주는 주인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이다. 굶주림이 가장 큰 공포라는 것이다. 주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 이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란 썩은 똥 속에 묻어 둔 지 오래라는 것이다. 팔팔해야 먹이라도 얻어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언젠가는 주인을 물기도 한다는 것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보신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꼬리를 아무리 잘라도 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냥개」전문
 
분별의 조건과 기준에 대해 이 작품은 ‘사냥개’라는 상징을 통해 ‘혈통과 관리’로 요약되는 음험한 사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더불어 “굶주림이 가장 큰 공포라는 것이다. 주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사냥 이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란 썩은 똥 속에 묻어 둔지 오래라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분별된 자의 비참한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이 작품은 분별된 자를 그리고 있을 뿐, 분별하는 자에 대한 암시나 표면적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령, “철새는 언젠가는 떠나야할 입장이니 그렇다. 텃새가 되려면 천 년을 숲에서 머물러야 한다. 같은 벌레를 잡아먹고 같은 풀잎 이슬을 마시고 서로의 냄새와 색깔과 목소리가 비슷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쉽사리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텃새」)라고 ‘철새/텃새’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표지가 「사냥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사냥개’와 ‘텃새’의 생존 조건에 따른 분별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서둘러 결론에 다가서자면, 인간적 행위의 유무에 따른 질적 특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사냥을 행하되 타자의 개입에 의해 굶주려야 하는 사냥개와 사냥의 성패에 따라 굶주려야 하는 텃새의 처지가 같을 수 있는가? 나아가 자기 공간의 주인으로서의 텃새와 자기 상실의 아이콘으로서의 사냥개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무리해 보이는 비유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에서 자행되고 있다면?
 
장종권 시인은 알레고리 수법으로 덧씌운 비극적 세계 인식 아래 다음과 같은 명제를 슬며시 보여준다. “생명체의 생명력은 답 없이 위대하다”(「혼자여」)라고, 그러나 이 명제는 곧 한 편의 절절한 노래가 된다.
 
……잡초들이여, 두엄에서 피는 화려한 장미꽃도, 진흙 속에서 솟는 신성한 연꽃도, 꿈이겠느냐, 꿈이 될 수 있겠느냐. 달콤한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황홀한 꿈 대신 가위에 눌리며, 손에 쥔 것이 없는, 쥘 것도 없는, 이 가난하고 지난한 혼자여.
-「혼자여」부분
 
시인이 부르는 ‘잡초’와 ‘장미꽃’과 ‘연꽃’의 대비에 주목해야 한다. 잡초의 집단성과 장미, 연꽃의 개별성이 충돌하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무수히 일어서는’으로 수식되는 잡초와 ‘화려한’, ‘신성한’으로 수식되는 장미, 연꽃의 대비도 선명하다. ‘무수히’를 한자어 ‘중’으로 읽으면 이는 되풀이(거듭)가 된다. 시인은 “몸을 따라가는 삶의 질서가 빛나는 날에도/정직한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몸이 없다.”(「몸을 떠나는 생각·1」)고 한탄한다. 시인은 정신과 육체의 갈등을 벗어나 어느 지점쯤 몸과 생각의 포섭包攝을 내심 바라며 기획하고 있다. 이 기획은 하나의 질문, 즉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나비는 무슨 철학이 있어서 나비가 된 것이 아니다.
무슨 대단한 신앙이 있어서 훨훨 노니는 것이 아니다.
꽃이 무슨 신념이 있어서 이쁘게 피는 것이 아니다.
무슨 대단한 사유가 있어서 저렇게 향기로운 것이 아니다.
-「몸을 떠나는 생각·5」 부분
 
이번 시집에서 출몰하는 네 유령에게 ‘자연-적응-분별-포섭’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유령에게 유령이라는 이름 외에 어떤 호칭이 더 필요할 것인가? 게다가 실재하는 물과 바람도 뜻대로 가를 수 없는데, ‘시’라는 반사경에만 언뜻 비치는 유령을 구분할 수 있는가? 결국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이’일 뿐이다.
 
꽃잎은 꽃잎끼리 서로를 기억이나 할까
한 몸으로 피어 온갖 영화를 누리다가
한 몸에 매달려 평생을 팔랑팔랑대다가
시들어 지는 날 서로를 안타까워나 할까
꽃잎끼리 사이좋게 서로 묻고 묻히면서
지난날의 뜨거웠던 햇빛을 기억이나 할까.
지난날의 숱한 벌나비를 기억이나 할까.
지난날의 꿈같은 절정을 기억이나 할까.
-「꽃잎은 꽃잎끼리」 전문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수많은 ‘사이’가 존재한다. ‘-끼리’도 결국은 ‘사이’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시인과 작품 사이, 작품과 독자 사이, 작품과 해석 사이, 독자와 시인 사이, 시인과 해설 사이, 하늘과 땅 사이만큼 아니, 그 보다 적어도 더 아름답게 하나의 ‘끼리’가 될 수 있는 ‘사이’가 있다. 하늘과 땅과 결국 우주이면서 우주가 되는 것처럼 장종권 시인의 이번 시집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 기억이 오래 남아 ‘칼 같은 꽃’을 피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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