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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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낮
빨래가 즐비한 빌라의 옥상 한 켠에서 화분에 물을 주던 셔츠만 입은 남자가 먼 바다에 가득한 스모그를 바라본다. 아래층 베란다에 웃통 홀딱 벗은 남자는 창문을 열고 땀을 닦으며 밖을 노려본다. 그 뒤로 속옷바람인 아낙이 보일락말락하고, 옆집 베란다에는 나이 든 여자 하나가 힘겹게 세탁기통을 뒤지고 있다. 맨 아래층 출구로 시커먼 아이가 걸어 나오고, 그 뒤를 시커먼 젊은 여자 따라 나온다. 길 건너 노란버스에는 늙은 기사가 금방 졸기라도 할 듯 핸들에 엎드려있고, 앳된 유치원 선생은 다리 한 쪽 내려놓은 채로 무심하게 아직 오지 않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입구 안쪽에는 나이 든 노파 두엇 주저앉아 한참 동안 침묵 중이다. 별로 나눌만한 이야기도 없어 보인다. 어떤 것도 마주치지 않는 희멀건 시선들을 나는 맞은 편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여름이다, 햇볕은 쨍쨍하다. 모든 게 말라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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